① 사량궁과 근시
사량궁은 왕도(王都) 육부의 하나인 사량부(沙梁部)에 둔 별궁입니다. 사량부는 김씨 출신이 중심이 된 조직체였을 것으로 보이고요. 급량부와 더불어 육부 중 가장 우세한 존재였습니다. 급량부(及梁部)는 신라 6부 체제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정치체였고요. 세택을 설명하다 다소 벗어났지만 여기서 근시(近侍)라는 말을 설명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근시는 두어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웃어른을 가까이 모신다는 뜻이 있고 두 번째로는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던 신하라는 뜻이 있지요. 근시 조직이라는 말을 감안하면 두 번째의 의미가 더욱 타당할 듯합니다. 같은 말로 근습(近習)이나 근신(近臣), 친신(親臣) 등을 들 수 있겠군요.
② 월지·동궁·임해전
임해전은 경복궁의 경회루처럼 풍류와 연회 장소로도 쓰였다. 서기 697년과 769년, 881년 등 대신들을 모아 잔치를 벌인 기록이 있지요. 서기 804년과 867년에 대대적으로 임해전의 낡고 헌것을 손질하며 고쳤다고 합니다. 후삼국시대인 서기 931년에는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을 초대해 잔치를 베풀기도 했지요.
월지·동궁·임해전에 대한 구분은 쉽지 않은 듯합니다. 그래도 이것에 대해 설명한 『신라의 통치제도』 책에서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는 월지·동궁·임해전에 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지요.
“월지는 궁 바깥이 아니라 궁 안에 존재한 연못이었다. 거기에는 주요 건물로서 임해전이란 부속 건물을 세워 국왕 주도의 연회나 외국 사신 접대를 거행하던 곳이었다. 따라서 월지는 본래부터 동궁의 부속 건물이 아니었다. 동궁보다 먼저 건설된 점도 그를 방증하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치 동궁에 소속한 듯이 보이기도 하고 그래서 또 동궁은 월지궁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월지가 동궁 소속 연못이었다고 섣불리 단정하기는 어렵다.” |
주 명예교수의 말대로 월지가 동궁 소속 연못이었는지, 동궁의 부속 건물이었는지는 학자에 따라 의견이 갈립니다. 다만 임해전은 왕이 신하와 사신들에게 베푼 잔치가 열린 곳이라는 주장에 대부분이 동의하고 있지요. 일단 동궁에는 임해전을 비롯해 총 27동의 건물이 있었음이 확인되었고 현재는 3채만 복원되었다고 합니다.
③ 신□동궁세택(辛□東宮洗宅) 명문(銘文)·용왕신심(龍王辛審)·신심용왕(辛審龍王)명 접시
앞에서 설명하다가 중단되었는데 서기 8세기 중엽 신라의 ‘동궁(東宮)’에서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 접시가 경주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신라문화유산연구원, 고려문화재연구원, 한울문화재연구원은 경북 경주 인왕동에 있는 국립경주박물관 남측 확장 부지 유적을 공동으로 발굴 조사한 결과를 발표했지요. 서기 2012년 6월 19일의 일입니다.
발굴단은 ‘신□동궁세택(辛□東宮洗宅)’이란 명문(銘文)이 새겨진 청동 접시 1점이 나왔다고 19일 밝혔습니다. 앞에서도 드문드문 말했지만 왕자(좀 더 정확하게는 태자)가 거처했고 외국 사신들을 위해 연회를 베풀던 곳이라고 하지요. 덧붙여서 동궁은 신라 왕궁인 월성의 별궁으로 있었습니다.
청동 접시에 새겨진 명문 중 두 번째 글자는 의도적으로 지운 흔적이 있다합니다. 남아 있는 글자와 안압지에서 출토된 ‘신심용왕(辛審龍王)’ ‘용왕신심(龍王辛審)’ ‘본궁신심(本宮辛審)’ 같은 명문에 따르면 ‘신(神)’을 의미하는 ‘심(審)’자로 추정된다고 발굴단은 설명했지요. 출처는 「한국경제」, 2012.06.19. 오후 6:32 기사입니다.
살필 심(審)자와 신 신(神) 자를 같은 글자로 보는 발굴단의 해석을 받아들여도 신심(辛審)에 대한 해석은 조금씩 다른 듯합니다. 가령 MBC에서는 ‘영험한 신(神)’으로 해석했고, 「경북일보」, 「문화일보」에서는 그저 신(神)으로 해석했지요. 어느 쪽으로 해석하든 용왕이 신적인 존재라는 결론 그 자체에는 무리가 없는 듯합니다.
④ 당시의 구조와 건축물
특이점으로 임해전의 건물 구조는 탑이 없는 것을 제외하면 전형적인 사찰 가람 양식이라 합니다. 실제로 호수 안에서 불상과 불교 관련 유물이 좀 나오기도 했지요. 신라는 왕실과 석가모니 가문을 동일시할 정도로 불교와 왕실이 밀착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실 건축도 영향을 받은 듯하고요. 동궁에는 임해전을 비롯해 건물 27동의 건물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이는 앞에서도 언급한 내용인데 임해전, 사정부, 소년감전, 예궁전, 동궁아관, 동궁아, 어룡성, 세택, 급장전, 월지전, 승방전, 포전, 월지악전, 용왕전 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는 건물 3채만 복원했고, 나머지는 울타리를 쳐놓고 주춧돌만 보존하고 있지요. 동궁과 월지에 가 보면 입장 후 호수까지 가는 길에 건물 터들을 볼 수 있습니다.
궁궐의 바닥은 경주 월지 보상화무늬 전과 같은 전돌을 보도블럭처럼 깔아서 포장했다고 합니다. 동궁의 동쪽에 있는 호수 월지(안압지)는 별궁인 동궁에 붙어 있지요. 월지는 신라 왕궁 안쪽의 친수 구역으로, 거대한 인공 연못에 조경을 해놓았습니다. 참고로 친수구역(親水區域)은 하천과 조화가 되도록 주거, 상업, 산업, 문화, 관광 등의 기능을 갖춘 구역이지요.
조경(造景)은 말 그대로 경치를 아름답게 꾸미는 것을 말합니다. 경치(景致)는 산이나 들, 강, 바다 따위의 자연이나 지역의 모습이고요. 앞에서도 약간 말씀드렸지만, 임해전(臨海殿) 전각의 이름에서 보듯 호수는 바다를 형상화해서 만들었습니다. 좁은 호수를 넓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여러 가지를 고려하였지요. 서쪽과 동쪽의 높이를 다르게 하는 노력이 그러합니다.
그런가 하면 동쪽의 해안선을 구불구불하게 만들어 어디에 서서 봐도 호수 전체가 보이지 않도록 했습니다. 아울러 연꽃을 심어서 가꾸었지요. 그렇지만 연꽃이 무제한으로 번식하여 수면을 뒤덮어 좁아 보이게 됨을 방지하려는 노력도 잊지 않았습니다. 가령 물 안쪽에 우물 정(井)자형으로 귀틀을 만들고 그 안에만 연꽃을 심었지요.
하지만 현대의 복원 과정에서 이를 고려하지 않아 호수 여기저기에 연꽃이 만발해졌다고 합니다. 동궁과 월지에 대한 내용은 이 정도로 할까 하고요. 더 진행하면 지나치게 이야기가 복잡해질 듯합니다. 다음 글에서 다른 주제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