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면은 조수가 편안히 누워 쉴 수 있다는 의미로서 "범조수지언식(凡鳥獸之偃息)"이라 했으니, 8개 야산의 산림이 우거져 많은 새들이 깃들고 학의 무리가 서식했다는 팔학(八鶴)골의 전설과 조선시대 조정의 건축용재와 조선건조용 홍송을 조달하는 봉산(國有林)으로 관리되어 온 점으로 볼 때, 지명으로도 당시 숲으로 우거진 안면도의 자연환경을 잘 나타내고 있다.
고남면에서 출토된 고남패총군으로 볼 때 안면도는 신석기시대(4500~5000년전경)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곳임을 알 수 있다. 이후 통일신라시대에는 장보고가 견승포(지금의 방포)에 해상 전진기지를 두어 바다를 지켰으며, 고려 때에는 삼별초가 주둔했었다는 설이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수군절도사의 분병(分兵)이 주둔했던 요아량수(要兒梁戍)의 설치장소로 추정되고 있는 등 국방상으로도 매우 중요한 요새지역이었다.
고려부터 조선시대까지 삼남(三南)지방의 세곡(稅穀)을 서해안의 해로를 따라 서울로 운송하던 조운(漕運)상 안면곶(安眠串)은 거점항으로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며, 조운의 편리를 위하여 조선 인조 때(1645~1647년경)에 판목(창기리와 남면 신온리 접경)을 굴착하여 운하를 만듦으로서 안면곶이 섬으로 변하여 안면도의 운명이 바뀌게 되었다.
이때부터 백사장포구에서 남면 신온리 드르니나루(지금의 신온항)와 우포나루터에서 서산 부석면 창리 창촌나루터(지금의 창리포구)간 도선에 의하여 태안 및 서산의 육지와 교통하는 불편을 겪게 되었고, 육지로부터 고립됨으로써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의 본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1968년에 국가로부터 충남도가 국유림을 양여받고 1970년에는 교량을 건설하여 연육됨으러써 울창한 송림과 서해안의 아름다운 해변, 그리고 철 따라 입맛을 돋구는 해산물을 찾는 외지인의 발길이 점차 증가하여 관광,휴양지로 각광받게 되었다.
안면도의 문화재
::: 안면읍 승언리 상여 :::
▒ 지정 구분 : 도지정 문화재 자료 제315호
▒ 지정년월일 : 1990년 5월 28일
▒ 소재지 : 안면읍 승언리 799
▒ 재 료 : 목조 상여
▒ 형 태 : 용마루와 앞뒷 부분에 용상을 그려 넣었거나 투각하고 양장틀네 귀에 봉두를 조각 배치하여 화
려하고 섬세하며 고전적이다.
▒ 규 모 : 길이 2.2m, 폭: 1m, 높이 1.5m
▒ 연 대 : 조선말엽(지금으로 부터 약 1백20여년전)
▒ 수 량 : 1틀
▒ 특 징 : 모양이 화려하고 섬세하며 고전적이고 조선조 왕실의 장례에 사용되었던 상여이다.
▒ 유 래
조선 말기의 상여로 전통적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양장틀의 앞뒤에는 용틀임조각을 하였다.
상여의 네귀에는 귀면상을 세웠다. 특히 용마루 중간에서있는 말탄 저승사자상은 형상이 특이하다.
조각이 섬세하고 채색이 화려하며 유소와 보장이 약간 훼손되었으나 부재들이 잘 갖추어져 있고 격식도 있다.
이 상여는 고종의 원자 원화군 이선(1866~1880)이 급사하여 장례를 치룬 상여를 완화군을 가르치던 김병년이 자가가 죽게 되면 이 상여로 장례를 치루어 달라는 유언에 따라 장례를 치룬 후 이곳 주민이 사용하였다고 전한다.
안면읍 승언리 799번지에 보관, 길이 2.2m, 폭: 1m, 높이 1.5m 크기의 목조 상여 1틀, 지난 90년 5월 28일 충청남도 지정문화재자료 제 315호로 지정됐다.
|
안면도 승언리 상여 | |
|
승언리 상여 보호각 | |
::: 안면도 모감주나무 군락지 :::
안면읍 승언리 젓개포구에는 모감주나무 4백여그루가 방풍림처럼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 모감주나무는 야생식물로 무환자과에 속하는 낙엽활엽교목이고 잎은 난형 또는 타원형이다.
|
안면도 모감주 나무군락지 |
7월중에 황색꽃이 피며 그 열매는 9~10월에 익는데 옛날에는 염주로 만들어 사용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황해도 초도, 경기도 덕적도, 충남도의 안흥과 안면도, 전라남도 완도와 경상남도 거제도, 경상북도 영일만 등에 자생하고 있는데 중국이 원산지 이다.
국가지정 천연기념물 제 138호로 지정된 (1962년 12월 3일)안면 모감주나무 군락을 살펴보면 밑둥둘레가 약 130cm되고 직경은 40여cm나 되며 가슴높이 둘레가 56cm에 직경이 18cm가 되는 나무도 있다.
이 모감주나무 군락은 씨의 껍질이 콜크질로 되어 있어 해류에 멀리 떠내려가 발아 할 수 있는 성질이 있다.
이 나무는 무환자과에 속하는 낙엽활엽교목으로 잎은 난형 또는 타원형이다.
꽃은 6~7월중에 황색꽃이 피며 그 열매는 모감주라 하여 9~10월에 익는데 옛날에는 염주로도 사용했다고 한다.
안면도의 모감주나무는 중국에서 해수를 타고 그 씨앗이 해안에 밀려와 자생하였다고도 전하며 또다른 설에 의하면 우리나라가 일제로 부터 해방되기 전에 중국어부들이 안면 앞바다에서 고기를 잡다가 해안에서 임시 거주하던 중 중국에서 씨앗을 가져와 심었다는 설도 구전된다.
- 지정구분: 천연기념물 138호
- 지정년월일: 1962년 12월 3일
- 형태 및 구조: 자 생
- 규 격: 수량 400여주
- 소재지: 안면읍 승언8리 1318-1번지
::: 황도 붕기풍어제 :::
▒ 내파수도
내파수도는 충남 서부해안 안며읍 소재지에서 9.7km에 떨어진 동경 126도 14' , 북위 36도 27' 에 위치한 낙도이다.
|
안면도 내파수도의 구석방파제 |
본래 보령군 삽시도리에 속한 섬이었으나, 1983년 2월 15일 대통령령 제 11027호로 안면읍 승언리 8구로 편입되었다.
이 섬은 조선시대에 중국의 상선 및 어선들이 우리나라와 왕래할 때 폭풍을 피하거나 식수공급을 위해 정박했던 곳으로 특히 길이 300m의 조약돌로 이루어진 자연방파제는 넓이 40m, 높이 3~4m의 전국 유일의 구석 방파제로 유명하며 섬주변 해안에는 기암괴석이 경관을 이루고 정상에는 동백나무가 자생하고 있다.
- 지정구분: 도지정 기념물 제 64호
- 지정년월일: 1987년 3월 8일
- 형태 및 구조: 자연구석방파제 형성도서
- 소재지: 안면읍 승언8리 3314번지
::: 안면도의 석조문화 :::
▒ 고남리 고인돌
이 고남리지석묘는 고남면 고남리 3구의 도로변에 있다. 안남중학교에서 영목행 도로를 따라 약 1km쯤 가다 보면 고남리 3구의 도로 왼쪽에 버스 승강장 표지판이 보이는데, 이 표지판 바로 옆에 큰 돌, 바로 고인돌이 놓여있다.
돌의 크기는 가로 90cm, 세로 1m, 두께 80cm로서 비교적 둥근 돌인데 도로 쪽으로 향한 부분이 단면(斷面)으로 평평하게 되어있어 인공이 가해진 듯하다.
도로 확장 공사에 참가했다는 주민의 말에 따르면 도로를 확장하기 전에 이곳에 5,6개의 큰 돌이 있었는데, 모두 제거되고 현재 하나밖에 남아있지 않으나, 본래 지석묘였다고 한다.
또한 이곳에서 약 200m쯤 떨어진 길가에 살고 있는 강씨 노인의 말에 따르면 고인돌이란 말은 들은 적이 없으나 이 돌이 장군바위란 명칭으로 불리워졌다고 한다. 그 돌은 소원을 빌면 성취하는 장군바위이기 때문에, 자신이 어렸을 때 아버지와 함께 돌앞을 지날 때 아버지는 언제나 잠깐 멈추었다가 지나가곤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돌의 생김새나 규모, 현지의 입지조건 등으로 볼 때, 길가에 덩그렇게 놓여있는 그 돌을 고인돌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 사진 스캔
▒ 애국지사 추모탑
이 애국지사 추모탑은 현재 태안군 안면읍 승언1리의 반도동산에 대한 독립단 서산지단장 이종헌지사 추모탑과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이 탑의 규모를 살펴보면 받침돌 위에 상중하의 3층으로 이루어졌는데, 대석보다 오히려 상층부분이 큰 것이 이탑의 특징이며 또한 이례적이다.
각 부분별 크기를 살펴보면 대석의 가로가 166cm, 세로 116cm, 높이 49cm, 1층 하단의 가로 121cm, 중앙부 87cm, 상단 가로 99cm, 2층 가로 106cm, 세로 54cm, 높이 67 그리고 3층의 하단이 가로 106, 상단 가로 191, 높이 125, 세로 58로 이루어졌는데, 3층의 앞뒷면에 글씨가 새겨진 곳만 오석이 박혀있을 뿐 그 외는 모두 화강석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이 탑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표면의 3층 오석 부분에 가로로 애국지사추모탑이라 크게 음각되어 있고, 그 밑에는 세로로 4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바른쪽에서부터 염성한, 김정진, 가재창, 오몽근 등이다.
::: 안면도의 절터 :::
▒ 승언리 방포사지
I.개요
안면읍 승언리 8구 방포(일명 젓개) 해안에 우뚝 솟은 산 중턱에 있는 절터인 방포사지는 옛날에 안면도의 중심사찰(본사)이었다고 한다. 바닷가에 세웠다는 점이 특징이며, 이 절에서 조금 내려오면 1년 내내 생수가 철철 흐르는 샘이 있다.
II.이름의 유래
이곳은 원래 젓개가 아니라 절이 있다 해서 절개(寺浦)라 하였는데 1917년경 일본인이 측량할 당시 절개라 하니 절개를 '젓개'로 오기하여 그 후로는 '젓개'를 한자로 '곁 방(傍)'자를 써서 지금은 '젓개' 또는 '방포(傍浦)'라 부른다.
III.절이 없어진 원인에 대한 두가지 설
1) 삼남지방에서 세곡을 싣고 서울로 올라가던 선박들이 한밤중에 폭풍우를 만나 위기에 처하였을 때에 이
절의 불빛을 보고 민가 근처인 줄 잘못 알고 들어오다가 암초에 부딪쳐 파선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이
절을 없앴다는 설.
2) 빈대가 많아서 빈대 때문에 없어졌다는 설. 지금도 그 자리에는 흰 빈대가 있다.
▒ 승언리 탑골사지
원래 이 동네에 탑이 있으므로 동리명을 '탑골'이라 불렀다. 약 70년 전에도 민가와 민가 사이에 탑신(塔身)이 있었으며 약 10년 전에 이곳에 밭을 일구다가 탑신의 큰 사각돌을 많이 발굴하였지만 그대로 없애버렸다는 것이다. 그 부근에는 좋은 샘이 여러 군데 있으며 앞산과 뒷산이 아주 화려하여 옛날의 절터로는 손색이 없었을 것이며 이 부근 전체가 대사찰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 장곡리 귀곡사지
고남면 장곡리 4구 지포 저수지 남쪽에 절골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 옛날에 절이 있었다 하여 절골이라 부른다. 이 망사지는 빈대 때문에 절이 망하고 나갔다고 하며 지금도 돌 밑에는 흰 빈대가 있다고 한다. 이곳에는 우물이 지금까지도 남아있는데 법정사라는 조그마한 절이 1979년에 이곳에 입사하여 이 물을 다시 식수로 사용하고 있다. 산이 높고 수려한 데다 주위의 경관이 매우 아름다워 그 옛날에도 절터로는 알맞은 곳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 창기리 절골사지
1) 안면읍
창기리 2구 김제부락 너머 동네에 절골이라 부르는 마을이 있다. 옛날 절터로 알려져 전해오고 있으나 지금은 전답으로 되어 있으며 민간인이 그 터에 살고 있는데, 그곳에서 기와가 출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절이 있었음을 입증해주고 있다.
▒ 중장리 절골사지
안면읍 중장리 1구 유왕마지 건너편에 절골이라 부르는 동네가 있다. 주변의 산이 높고 골이 깊으면서도 숲이 우거져 인적이 드문 곳이다. 이 부근에도 기와조각과 주춧돌이 산재되어 옛날 절터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 정당리 동부터사지
고려말 건축했다고 알려진 이 절터는 전설에 의하면 무학대사가 자주 다니던 절이라고 한다. 이곳은 넓은 지대가 탁 트여 있으며 주변은 우거진 송림과 그 앞에는 옥단할매샘이 있다. 해방 후 편무백씨가 그곳에 절을 세우기 위하여 자기 재산을 기울여 공사를 하던 중 6·25를 만나 절 건립이 중지된 곳이기도 하다. 역사 깊은 이 절의 옛 이름은 해남사이다.
첫댓글 안면도 역사를 쉽게, 이렇게 자세히 알 수 있게 해 주신 우옹님 감사드립니다. 삼한시대부터였다고 하니 역사가 오래되었네요. 고남면에 고인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