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동먹거리 ‘우동’과 ‘가락국시’에 얽힌 사연
(작성 중 : 국시 시리즈 4회)
앞쪽 파일에서 소개한 대로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도 지난 1950년대부터 ‘우동집’이 있었다. 1956년 가을쯤이었다.
지금의 입실초등학교(入室初等學校) 사거리에서 울산(蔚山) 쪽 100여 m에 위치한 버스정류소 쯤에 위치한 ‘중국집’에서 단일 메뉴로 우동을 팔고 있었다.
비포장 자갈길 2차선 변에 나지막한 기와집 한쪽 벽을 헐고, 홀과 주방(廚房)을 만든 엉성한 식당이었다. 주인과 그 가족이 6.25 때 윗녘에서 피난 나온 피난민(避難民)으로 기억하고 있다. 서울쯤에서 중국집 주방장을 했거나, 견습공 정도를 했던 것으로 짐작이 되었다.
우 동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 2학년 때인데, 누구와 함께 무슨 돈으로 사먹었는지는 몰라도 ‘우동’을 사먹은 일이 있었다. ‘우동’이라는 말도 그때 그 집에서 처음 들은 말이었다.
그때의 그 집 ‘우동’은 노란 기름이 동동 뜨는 뽀얀 닭국에 굵은 국수를 뽑아 익힌 후 커다란 사기 주발(周鉢)에 그득하게 담아 줬는데, 맛이 얼마나 좋았는지 필설(筆舌)로 형용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우동’을 마치 중국음식으로 알고 있으나, ‘우동’은 일본인(日本人)들이 ‘우돈(饂飩 ; うどん)’이라고 말하는 일본의 ‘가락국수’를 말하는 것이다.
가락국수
일본인(日本人)들의 ‘우돈’을 우리나라 사람들이나 화교(華僑)들이 경영하는 중국집에서 중국음식인양 만들어 팔면서 ‘우동’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뿐이다.
‘우동’은 현재 분식집은 물론 식당과 일상생활(日常生活)에서도 자주 통용되는 단어지만 엄연히 일본어(日本語)다. 국립국어원이 제시한 권장 표준어는 ‘가락국수’다.
그러나 ‘우동’과 ‘가락국수’는 다 같이 밀가루 반죽으로 만든다는 데서는 차이가 없다. 그렇지만 일본(日本)에서 만든 ‘우동’이 우리나라에 보급될 때는 기계로 국수를 뽑아 만들었고, 이것이 중국집에서 우리나라식 ‘우동’으로 만들 때는 수타식(手打式)으로 만들었다.
우동기계
이 경우 ‘기계우동’은 국수보다는 국물 맛이 전체의 맛을 좌우했고, 수타식 ‘우동’은 국물맛과 함께 쫄깃쫄깃한 ‘면(麵)’의 맛이 일품(逸品)이었다. 후에 중국집에도 ‘기계우동’이 등장(登場)하고부터는 중국집 ‘우동’의 인기도 점차 사라져 버렸다.
어쨌든 ‘우동’은 대표적인 일본요리(日本料理)로, 밀가루로 만든 두꺼운 ‘면(麵)’으로 된 국수이다. ‘우동’의 ‘면’은 박력분(薄力粉)이나 중력분 밀가루에 소금을 약간 친 반죽으로 만든다.
반죽에 있던 염분(鹽分)은 ‘면(麵)’을 데치는 동안 대부분 사라진다. 이 면(麵)을 보통 부드러운 맛이 나는 뜨거운 우동국물에 담아서 내는데, 이를 ‘가케우동’이라고 부른다.
가케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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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우동’얘기부터 먼저 소개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의 ‘우동’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분식집에서 흔히 먹을 수 있는 ‘냄비우동’과 일식전문점(日食專門店)이나 ‘중국집’에서 맛볼 수 있는 ‘일식우동’이 그것이다.
품목별 종류로는 보통우동, 김치우동, 김치냄비우동, 김치해물우동, 해물우동, 해물냄비우동, 그리고 야끼우동, 쇠고기야끼우동, 해물야끼우동, 카레우동, 카레야끼우동, 모둠야끼우동, 꼬치우동, 쇠고기우동, 볶음우동, 튀김우동, 유부우동, 어묵우동, 짜장우동, 사누끼우동, 카레우동, 짬뽕우동, 모찌우동, 오뎅우동, 쫄우동 등이 있다.
우동 메뉴판
‘우동집’에서 ‘우동’을 만드는 사람들이 국물을 무엇으로 만들었느냐, ‘고명’을 무엇으로 만들었느냐에 따라 자기 마음대로 새로운 ‘우동’의 이름을 만들기 때문에 ‘우동’의 종류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다음은 ‘일본 정통우동’ 중 중요한 몇 가지의 종류를 알아보기로 한다. 먼저 ‘가케우동’을 소개한다. ‘가케우동’은 ‘면(麵)’을 국물에 말아 먹는 ‘우동’을 일컫는 말로, 여기에 ‘유부’를 얹으면, ‘기쯔네우동’, 튀김을 얹으면 ‘덴뿌라우동’, 쇠고기를 얹으면 ‘니꾸우동’이 된다.
먹는 방법에 따라 ‘우동’은 ‘가케’와 ‘쯔케’로 나뉘는데, ‘가케’는 말아먹는 우동, ‘쯔케’는 ‘츠유(양념장 또는 장국)’에 찍어먹는 ‘우동’을 말한다.
쯔케 우동
‘붓가케우동’은 그릇에 ‘우동면’을 넣고 국물을 부어 그것을 한 손으로 들어 올려 먹는 ‘우동’을 ‘붓가케우동’이라 한다.
예전에 일본에 식기(食器)가 많지 않던 시절, 남성은 ‘우동’ 하나를 먹어도 모든 도구를 이용하여 제대로 차려 먹었으나, 여성들은 한 손에 ‘우동’ 그릇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젓가락을 들고 먹기 시작했던 것이, 오늘날 ‘붓가케 우동’이라는 이름으로 굳어졌다.
붓가케우동
다음은 ‘가마아게 우동’을 소개한다. 우리는 ‘가마솥’이라 하면 그 안의 누룽지부터 떠올릴 만큼 ‘가마솥’은 밥 짓는 도구(道具)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은 가마솥으로 ‘면(麵)’도 삶는다. ‘가마’로 ‘면(麵)’을 삶게 되면 그 안에서 ‘면(麵)’이 끓어오르는 물을 따라 춤을 추게 된다.
특히 ‘가마솥’은 크기가 있어서 많은 물을 붓고 국수를 삶게 되는데, 이경우 회전공간(回轉空間)이 생기게 되고, 물이 끓으면 ‘면(麵)’이 춤을 추듯 순환하게 된다.
그리고 넉넉한 물속에서 쉴 새 없이 춤을 추던 면발은 당연히 퍼지지 않는 쫄깃함이 살아나게 된다. 이를 ‘가마아게 우동’이라 한다.
가마아게우동
다음은 ‘다라이 우동’이다. ‘다라이 우동’이라 하면, 우선 커다란 ‘다라이’가 연상(聯想) 된다. 그리고 이 큰 ‘다라이’에 담아 먹는 ‘다라이 우동’은 절대 혼자서는 못 먹을 것이다.
때문에 온 가족이 모여 삥 둘러앉아 먹는 것이 ‘다라이 우동’이다. ‘다라이’에 뜨거운 물을 붓고 삶아서 찬물로 씻어낸 ‘우동’을 넣어 ‘면(麵)’이 데워지면, 장국(츠유)에 찍어먹는다.
다라이 우동
다음은 ‘기쯔네우동’이다. ‘유부우동’을 일본말로 ‘기쯔네우동’이라고 하는데, ‘기쯔네’란 일본어(日本語)로 ‘여우’를 뜻하는 말이다.
이는 ‘유부’가 달짝지근해서 여우처럼 사람을 홀린다하여, 혹은 여우가 ‘유부’를 좋아한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름에서부터 일본인(日本人)들의 ‘유부우동’에 대한 애정이 묻어난다.
기쯔네우동
다음은 ‘다누끼우동’이다. ‘다누끼우동’의 재료(材料)인 ‘튀김볼’은 튀김을 만들고 남은 부스러기를 말하는데, 이 ‘튀김볼’을 ‘우동’에 솔솔 뿌려먹으면 고소한 맛이 그만이다.
‘다누끼’는 ‘너구리’의 뜻을 지닌 일본어(日本語)인데, 주재료(主材料)를 뺐다는 ‘다네누끼’라는 말이 줄어서 ‘다누끼’라 부르게 되었다.
다누끼우동
다음은 ‘덴뿌라우동’이다. ‘덴뿌라우동’은 회원님들께서도 익히 알고 있는바와 같이 새우나 야채(野菜), 생선(生鮮), 어묵 등을 튀겨서 ‘우동’에 얹어내는 것을 말한다. 튀김을 ‘우동’ 위에 얹어서 내기도 하고, 별도의 그릇을 준비하여 ‘우동’과 따로 내기도 한다.
‘튀김’을 자작하게 국물에 적셔 고소함을 즐기거나, 갓 튀긴 ‘튀김’을 입에 넣고 바삭함을 즐기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튀김’은 주로 ‘어묵튀김’을 말하는데, 튀김의 재료(材料)를 말하자면 한이 없다.
우리가 흔히 만나는 새우에서부터 고구마, 깻잎 등은 물론이고, 생선살, 연근(蓮根)과 얄팍한 김, 어묵, 맛살 등의 가공식품(加工食品)까지 먹을 수 있는 모든 식재료(食材料)는 튀겨낼 수 있기 때문이다.
튀김은 뜨거운 기름에 재료(材料)를 단숨에 익히게 되므로 영양소(營養素)의 손실도 줄일 수 있고, 튀김으로 인해 비롯되는 풍미(風味)는 다른 조리법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 중에서 일미(一味)가 ‘어묵튀김’이다.
덴뿌라우동-어묵튀김
그리고 ‘자루우동’은 삶아서 찬물로 씻은 면발을 자루에 얹어 물기를 빼고, 장국(츠유)에 찍어먹는 ‘우동’을 말한다. 먹는 방법이 ‘소바’와 비슷하다. 면발의 맛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우동’으로 이 쫄깃함에 길들면 한겨울에도 ‘자루우동’만 찾는다고 한다.
자루우동
일본의 우동종류는 너무나 다양(多樣)하여 이를 모두 서술하면, 기사가 너무 길어진다. 때문에 이들 ‘우동’들을 도표화(圖表化)해서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종 류 |
개요 및 조리법, 특징 |
가케 우동 |
아무것도 추가하지 않은 기본우동으로 삶은 우동에 장국을 붓고 파와 고춧가루만 뿌려서 먹는 간단한 우동 |
가마아게 우동 |
금방 나온 면을 15분 이내로 삶아서 뜨거운 물 안에 넣고, 그대로 몇 가락씩 집어 츠유(つゆ)에 찍어 먹는 우동으로 밀가루 본래의 단맛을 즐길 수 있다. |
고모꾸 우동 |
어묵과 야채 등 다섯 가지 재료(버섯, 닭고기, 유부, 죽순, 어묵 등)가 어우러진 우동 |
기쯔네 우동 |
달짝지근한 유부를 곁들인 우동으로 ‘기Wm네’는 일본어로 ‘여우’라는 뜻이다. 여우가 유부를 의미하게 된 배경은 일본 옛이야기에서 여우가 유부를 좋아한데서 연유되었다고 한다. |
나베 야끼
(냄비)우동 |
우동과 닭고기, 어묵, 채소, 달걀 등을 한데 넣고 끓인 것 |
나베아게 우동 |
우동을 삶아서 장국에 찍어먹는 우동 |
다누끼 우동
(きつねうどん) |
튀김할 때 생기는 동글동글한 튀김 부스러기(아게다마)를 얹은 우동이다. ‘다누끼’는 너구리를 의미하는데 아마도 동글동글한 튀김이 너구리의 눈을 닮았기 때문에서가 아닐까 짐작된다. |
다마코 우동 |
우동에 반숙한 계란을 풀어 알을 흘려 먹는 우동으로 뜨거운 면에 부드러운 계란 노른자를 섞어서 먹는 맛이 특징이다. |
돈코츠 우동 |
돼지 등뼈로 맛을 낸 우동. 진하고 묵직한 맛의 육수가 특징 |
덴뿌라 우동 |
새우 등의 튀김을 얹은 튀김우동 |
사라다 우동 |
데친 우동을 물로 씻어 ‘사라다’를 얹어 소스나 드레싱등과 함께 먹는 우동 |
산사이 우동 |
고사리나 팽이버섯 같은 작은 버섯과 작은 대나무 순 등을 넣은 우동으로 건강에 좋다. |
싯포쿠 우동 |
토란, 인삼, 송이버섯, 표고버섯, 생선묵, 야채 등 재료를 풍부하게 넣은 우동으로 겨울철에 인기 있는 우동이다. |
안가께 우동 |
장국에 녹말을 풀어 걸쭉한 울면식의 우동 |
츠키미
(月見) 우동 |
생 계란을 우동위에 얹은 우동으로 노른자를 터뜨리지 않고 얹어 달을 표현한다. ‘쯔키미’는 달을 본다는 의미로 노른자는 달에 비유 |
치카라 우동 |
떡을 넣은 우동으로 떡을 굽거나 더운 물로 부드럽게 하여 넣는다. |
카레 우동 |
카레를 곁들인 우동 |
새우 덴뿌라를
얹은 우동 |
갓 뽑은 생우동면의 심플한 맛을 즐기기에 좋은 가마아게 우동이다. |
놉뻬우동 |
‘싯포쿠 우동’과 비슷하지만 국물이 좀 더 걸쭉한 게 특징이다. 국물이 꼭 젤라틴 풀어놓은 것처럼 탱글탱글하면서 걸쭉하다. |
케이란우동 |
‘타마고 우동’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라고 하면 이해가 빠르다. ‘타마고 우동’이 맑은 국물인 반면 ‘케이란 우동’은 국물이 우리나라 계란국처럼 걸쭉한 느낌이 나는 국물에 우동면을 넣은 것이다. |
토리난바
우동 |
맑은 국물에 닭고기와 숭덩숭덩 썰어 넣은 대파가 묘하게 잘 어우러지는 우동이다. |
오야꼬난바
우동 |
‘오야’는 일본어로 부모, ‘꼬’는 아이를 뜻하는데 닭과 반숙 달걀을 넣었다고 해서 ‘오야꼬 우동’이라고 불린다. ‘오야꼬난바 우동’도 ‘토리난바’처럼 파가 잔뜩 들어가 있다. |
나베야키우동 냄비우동 |
1인용의 작은 냄비에 우동국물을 넣고 면을 넣은 뒤 그 위에 표고버섯, ‘카마보코(일본식 어묵)’, 당근, 파 등의 야채류와 새우튀김, 생달걀, 닭고기 등을 토핑으로 얹어 끓인 우동이다. 따로 그릇에 떠먹지 않고 냄비 째로 먹는 것이 특징인 우동이다. |
카레 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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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회원님들도 잘 알고 있는 ‘가락국수’얘기를 추가한다. ‘가락국수’란 발이 굵은 밀국수, 또는 그것을 삶아서 ‘장국’에 끓인 음식을 이르는 말이다. 국립국어원(國立國語院)에서는 일본어인 ‘우동’을 ‘가락국수’로 불러야 한다고 정하고 있다.
‘우동’을 만드는 ‘면(麵)’도 가락국수이고, ‘짜장면’을 만드는 ‘면’도, ‘짬뽕’을 만드는 ‘면’도 모두 ‘가락국수’라는 얘기다.
가락국수
이뿐이 아니다. 옛적 우리들의 어머니들이 농사지은 ‘밀’이나 ‘해밀(귀리)’을 빻아 밀가루반죽을 만들어 굵직굵직하게 썰어 끓여주시던 ‘칼국시’도 모두 ‘가락국수’라 할 수 있다.
‘칼국수’, ‘짜장면’, ‘우동’, ‘짬뽕’얘기에서 그 재료(材料)가 되는 ‘가락국수’의 얘기는 모두 소개되었으므로 여기에서는 ‘가락국수’에 얽힌 추억담(追憶談) 한두 가지를 소개하는 것으로 갈음하고자 한다.
가락국수집
‘가락국수’ 추억담을 소개하기 전에 요즘의 열차 풍속도(風俗圖)부터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아침 일찍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열차는 무궁화호(無窮花號)든, 새마을호든, KTX든 플랫폼을 빠져나간 잠시 후에는 여기저기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유명 패스트푸드 상호(商號)가 인쇄된 종이봉투를 펼치는 젊은이가 있는가 하면, 그 옆자리 여인의 손에는 커다란 청량음료(淸凉飮料) 컵이 들려 있다.
뒷좌석의 아이들은 ‘햄버거’를 꺼내어 벌써 한입 베어 물었고, 다른 자리의 학생들은 은박지에 싼 ‘김밥’을 꺼내고 있다.
홍익회 아저씨
“도시락이나 김밥”하면서 홍익회(弘益會) 아저씨까지 가세한다. 뚱뚱한 여성이 통로(通路) 쪽으로 삐죽 고개를 내민다. “얼마예요?” “도시락은 5천원이고 김밥은 3천원입니다” “도시락 하나 주세요.”
요즘 열차(列車) 안의 먹을거리 풍경(風景)은 이렇게 시작된다. 옛날과 달리 출발 전에 역 주변 점포(店鋪)에서 음식물을 사서 차에 오르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이다.
진한 음식(飮食) 냄새를 풍기거나, 부스럭거리는 소음(騷音)이 남에게 폐를 끼친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옛적 홍익회(당시는 강생회) 아가씨
홍익회(弘益會) 판매원의 손수레도 내용물이 달라졌다. 오징어는 맨살의 통오징어가 아닌, 가공과정(加工過程)을 거친 오징어, 병맥주는 없고 캔맥주뿐이다. 찐 달걀도 없어지고 구운 달걀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퍽퍽한 계란에 사이다를 곁들이면 그야말로 별미(別味)였는데, 세상도 변하고, 사람도 변해버린 지금에는 모두가 흘러가버린 추억(追憶) 속의 산물(産物)일 뿐이다.
‘호텔 레스토랑급 품질과 서비스’를 표방(標榜)하며 1983년에 등장한 열차식당(列車食堂)은 한때 80량에 이르렀으나, 지금은 40량으로 줄었다. 대신 햄버거를 파는 ‘패스트푸드’ 칸이나 PC방, 바둑방이 생겼다.
앞으로 고속철도(高速鐵道)가 확장되면 이나마 모두 없어질 거란다. 두어 시간 만에 운행(運行)이 끝나는 고속철(高速鐵) 안에 식당 칸과 오락실이 필요할 리 없는 것이다.
호텔 레스토랑급의 열차식당
열차(列車)가 정차하기 무섭게 후다닥 뛰어내려 후루룩 먹어치우던 대전역(大田驛)의 '가락국수'는 이미 사라지고 없어졌다.
옛적 ‘가락국수’를 팔던 대전역(大田驛)의 상하행선 플랫폼에는 그 시절 ‘가락국수’ 매점 대신 깔끔하게 변신한 신식 국수매점이 자리하고 있기는 하다.
부리나케 '가락국수'를 퍼먹는 승객들
옛적 대전역(大田驛)에서 ‘가락국수’를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정차시간이 다른 역과 달리 10분 이상으로 길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모든 열차가 증기기관차(蒸氣機關車) 시절이라 석탄(石炭)과 물을 채워야 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대전역에서 석탄과 물을 채우는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정차(停車)하는 시간이 길어진 것이다.
그래서 지난 1960년대의 부산행 완행열차(緩行列車)의 경우 기차가 조치원을 지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조금씩 술렁이기 시작했다. 대전역(大田驛)이 가까워진 것이다. 당시의 경부선 하행선 열차는 약 10분간 대전역(大田驛)에 머물렀다.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대전역 플랫폼
그 틈을 이용하여 사람들은 우르르 기차(汽車)에서 뛰어내려 플랫폼의 가락국수매점으로 달려간다. ‘단무지’가 얹혀 있는 국수 위에는 씨까지 함께 빻은 고춧가루를 듬뿍 뿌린 후 나무젓가락 한 벌이 띄워져 있었다.
그릇을 받자마자 국물부터 후르르 마시고 나서 미처 씹을 틈도 없이 퉁퉁 불어터진 국숫발을 입에 털어 넣다시피 먹어 치운다. 국수 값은 언제나 선불(先拂)이었다.
뒷줄로 밀려 늦게 받아 든 사람들은 국수를 입에 문채 떠나는 열차(列車)에 뛰어 오르기도 했고, 어쩌다 차를 놓치면 뒤차를 타고 오느라 낭패(狼狽)를 당하기도 했었다.
그 시절 대전역 플랫폼
그 당시에는 하행선(下行線) 열차의 경우 새벽같이 나와 차표를 사고, 줄을 서느라 아침을 굶은 승객들이 주로 대전역(大田驛)에서 요기를 했고, 주로 상행선(上行線) 열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는 이들이 대전역 ‘가락국수’로 점심이나 저녁을 때웠다.
기차(汽車)가 서서히 움직이면 그제야 참았던 트림을 ‘끄윽’하고 나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제자리로 돌아가던 그때 그 추억은 노년층(老年層) 지방출신 서울사람들의 경우 잊을 수 없는 추억(追憶)이 되어 있다.
그 시절 가락국수 매점을 승계한 지금의 ‘용우동’ 매점
지금은 그 때의 ‘가락국수가게’는 없어지고, ‘용우동’이라는 국수전문점을 통해 옛적 ‘가락국수’의 맥이 이어지고 있다. 옛날에는 4-5번 승강장(昇降場)에 매점이 있었는데, 지금은 서울행 승강장인 2-3번 승강장에 위치하고 있다.
필자는 대전(大田)에 출장을 다녀 올 때면, ‘용우동’ 매점에서 가끔씩 가락국수 맛을 보고 온다. 그러나 주인도 그때의 주인이 아니고, 국수도 그 때의 ‘가락국수’가 아니었다.
‘우동기계’로 뽑은 ‘기계우동’이라 ‘면발’이 둥글고 미끈거리는 데다 국물도 기름이 둥둥 떠다니면서 느끼하기만 하다.
‘용우동’ 매점 아주머니들
옛적 대전역(大田驛)의 ‘가락국수’는 각(角)이 진 국수였다. 여기에서 잠시 용혜원의 ‘대전역 가락국수’를 소개한다. 시를 쓴 시기가 대전역에서 ‘가락국수’가 사라지던 시기의 직전이었던 같다.
대전역 가락국수
용혜원
늦은 밤 피곤한 몸 서울행 열차를 기다리다
허기에 지쳐 ‘가락국수’ 한 그릇을 시킨다.
비닐봉지에 담긴 국수 한 움큼을 끓는 국물에
금방 데쳐 한 그릇을 내 준다.
2,000원 짜리 가락국수 인지라 내용이 서민적이다.
단무지 서너 조각이 국수 그릇에 같이 담겨져 있고
쑥갓 조금 약간의 김 부스러기 고춧가루가
몇 개 둥둥 떠 있다.
시장 탓에 후루룩 젓가락에 말아 넘기면
언제 목구멍을 넘어 갔는지 간 곳이 없다.
하지만 기차를 기다리며 막간을 이용해 먹는
가락국수의 맛은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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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대전역(大田驛) ‘가락국수’는 사람에 따라서 ‘우동’이라고도 하고, ‘납작우동’이라고도 했다. ‘납작우동’은 국수의 가락이 납작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 ‘가락국수’의 면발은 지금과 같이 동그랗게 뽑지 않았고, 칼국수 면발처럼 납작했었다. ‘가락국수’의 국물은 멸치나 ‘뒤포리’로 진하게 우려낸다. 반찬도 단출했다. 그 흔한 김치나 깍두기도 없이 단무지가 유일했었다.
가락국수
고명으로는 유부·어묵·김가루·쑥갓 등이 올라간다. 그러다가 1990년대 들어와서야 ‘게맛살’이 하나 추가되었다. 그런데 이 ‘게맛살’은 ‘게살’이 아닌, ‘어육(魚肉)’으로 만든 것이다..
대부분 명태살에 전분, 계란, 정제(精製)한 소금을 같이 넣어서 만든 다음, ‘게 맛’과 향을 내기 위하여 엑기스나 향료(香料) 등을 넣는다. 진짜 ‘게살’로 ‘맛살’을 만들면 재료(材料) 값이 너무 비싸기 때문에 명태 등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뒤포리’는 ‘밴댕이’의 사투리다. ‘밴댕이’는 청어목 청어과(靑魚科)에 속하는 물고기로 ‘뒤포리’라는 사투리로 널리 알려져 있다. 주로 남해안(南海岸)에서 가을에 잡힌다.
‘뒤포리’ 육수
회와 젓갈로 쓰지 않으며, 말려서 국물 내는 데 사용하는 어류(魚類)로 전체적(全體的)으로는 은색이고 등 쪽이 푸르다. 그래서 ‘뒤포리’(뒤가 파랗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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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역(大田驛)으로 돌아간다. ‘대전역’ 하면 어떤 사람들은 ‘대전 발 0시50분’으로 유명한 가요 ‘대전블루스’를 떠올릴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가락국수’를 회상(回想)할 것이다. 그리고 대전역 ‘가락국수’는 그 자체가 추억이었다.
기차역(汽車驛)을 떠올리면 사람들은 추억을 찾는다. 교통수단이 부족했던 그 시절에는 장ㆍ단거리를 오가는 교통편하면 철도(鐵道)였고, 그리고 그 시절의 대전역(大田驛)은 ‘대전블루스’ ‘가락국수’ 그리고 ‘넓은 광장’으로 전국적으로 유명했었다.
대전역 광장에 세워진 ‘대전블루스’ 노래비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떠나가는 새벽열차 대전발 0시 50분…” 대전역(大田驛) 출구를 나오다 보면 대전사랑 추억의 노래비가 광장 한편에 서 있다. 대전블루스! 전국의 많은 사람들은 대전(大田)하면 바로 이 노래를 기억한다.
기차역(汽車驛)에서 또는 인생살이에서 헤어지고 떠나야 했던 사람들이 애절하게 불렀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선술집 식탁(食卓)을 젓가락으로 두드리며 목청을 세웠던 노래인가.
니나놋집과 젓가락 장단
애절(哀切)한 노랫말, 들을수록 가슴을 찡하게 하면서 뭔가를 확 잡아끄는 듯하는 노래가 ‘대전블루스’다. 여기에서 이 노래의 탄생배경(誕生背景)과 숨은 일화(逸話)를 잠시 뒤적여 보자.
‘대전블루스’는 1959년 6·25 전쟁의 상처가 아물어 가던 시절에 세상에 태어났다. 그 탄생(誕生)의 배경을 살펴본다.
어느 날 새벽 0시 30분경, 대전역(大田驛)에 내린 신세기(新世紀) 레코드사 직원이었던 최치수의 눈에 두 남녀가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장면이 플렛폼 모퉁이에서 목격(目擊)되었다.
어둠이 밝아오는 대전역 플렛폼
플랫폼의 희미한 가로등(街路燈) 아래서 두 남녀가 이별이 안타까워 서로들 손을 놓을 줄 몰랐다. 그러나 플랫폼으로 느릿느릿 들어온 목포(木浦)행 완행열차(緩行列車)는 떨어지기 싫어 울고 있는 두 남녀를 끝내 갈라놓고야 말았다.
그날 대전역(大田驛)에서 떠난 목포행(木浦行) 완행열차(緩行列車)가 떠나간 시간은 정확히 0시50분이었다. 여인은 떠나간 열차의 뒷그림자를 바라보며 이별(離別)이 서러워 발만 동동 굴렀다.
대전역의 이별
그 시절에는 전화도 없었고, 기차 외에 달리 타고 다닐 교통수단(交通手段)도 없었다. 그리고 기차요금(汽車料金)이 너무 비싸 함부로 기차를 탈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날 대전역(大田驛)의 커플은 그 것이 영원한 이별을 뜻하는 것으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별리(別離)의 순간이었다. 부모의 승낙여부가 남녀결합(男女結合)의 절대조건이던 시절에 그들은 부모의 동의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전블루스’ 작시 당시의 대전역
본론으로 돌아간다. 기차가 남긴 기적(汽笛)소리와 여인의 애절(哀切)함이 희미한 불빛에 더욱 슬프게 흘러내렸다. 이를 먼발치에서 지켜본 최치수는 그 애틋하고 아름다움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기 위해 플랫폼 가로등(街路燈) 전주에 기대 선 채로 작시(作詩)를 했다.
이것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짙은 향수(鄕愁)를 불러일으키게 한 ‘대전블루스’의 탄생배경(誕生背景)이다. 그리고 이때의 시가 노래로 나온 그 날부터 ‘대전블루스’는 공전의 반향(反響)을 불러일으키면서 음반(音盤)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플랫폼 '가락국수' 가게
노래를 부른 가수(歌手) 안정애는 물론, 작사자 최치수를 일약 유명인사(有名人士)로 우뚝 서게 만든 노래였다.
노래에 등장한 그날 밤 그 열차는 1959년 2월에 탄생한 제33열차로 서울역에서 밤 8시 45분에 출발하여 대전역에 0시 40분에 도착, 10분 후인 0시 50분에 목포로 출발하던 군용열차였다. 물론 민간인 칸도 있었다.
지금의 대전역
‘대전블루스’라는 가요는 1963년 개봉(開封)한 최무룡∙엄앵란∙신성일 주연의 영화 ‘대전발 0시 50분’에 삽입된 덕분에 장년층 이상이면 거의 전 국민이 기억하는 노래가 되기도 했다.
영화 줄거리, 주연배우(主演俳優)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도 가슴을 쥐어뜯는 듯한 멜로디와 구슬픈 가사, 특별한 인상을 주는 제목 때문에 ‘대전’과 ‘대전역(大田驛)’은 전국의 장년층 이상에게 깊게 각인되었다.
영화 ‘대전발 0시 50분’
이 노래는 1980년대 가수 조용필이 리바이벌해 다시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1999년 대전역(大田驛) 광장에는 ‘대전블루스’ 노래비가 세워졌다.
그러나 노래비에는 가수의 이름이 빠져있다. 최초로 이 노래를 부른 가수(歌手) 안정애의 거부로 가수의 이름이 새겨지지 않은 것이다.
후배 가수인 조용필과 함께 이름을 넣을 수 없을 바에야 차라리 자신의 이름도 넣지 말라는 안정애의 단호(斷乎)한 뜻이 있어 지금도 이름을 새겨 넣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자신이 불렀던 노래를 다시 불러 크게 히트시킨 후배가수(後輩歌手) 조용필의 공을 고스란히 지켜주고 싶은 숭고(崇高)한 마음, 남의 공에 편승하지 않으려는 떳떳한 기개(氣槪)가 돋보인다.
이것이야말로 노래비 자체보다 얼마나 인간적(人間的)이고, 가슴 뭉클하게 하는 숨은 이야기인가. 이름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남긴 가수 안정애가 있어 ‘대전블루스’와 ‘대전’은 더욱 애달프고 아름답다.
그 시절을 살았던 이들은 지금도 모임이 있을 때 술이 몇 순배 돌아가면, 누군가 좌중(座中)을 헤치고 비척비척 일어나 소주병이나 막걸리병을 입에 대고 목청껏 부르는 노래가 ‘대전블루스’다.
피서(避暑)철이면 대전역(大田驛) 광장에 몰려드는 젊은이들이 한 잔의 술과 함께 야간열차(夜間列車)를 기다리며 즐겨 부르기도 한다. 이 노래는 우리의 전통적 정서(情緖)를 잘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시절 대전역 광장
아리랑, 관동별곡, 진달래처럼 만남과 이별, 귀향과 가출, 생성과 소멸의 상반된 이미지를 내포한 역(驛)을 내세워 60년대 어려웠던 소시민(小市民)의 애환을 직접 체험했거나, 전해들은 덕분이다.
기다렸던, 혹은 오지 말아야 할 막차가 지친 몸을 이끌고 들어오는 기차역(汽車驛)의 실루엣은 그 시절 작가(作家)들의 단골 소재(素材)이기도 했었다.
그래서 80년대 들어 나온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와 임철우의 중편소설 ‘사평역’은 해방과 6.25, 조국근대화(祖國近代化)에 멍든 민중들의 아픔을 기차역의 대합실을 통해 서정적(抒情的)인 향수를 그려내고 있다. 곽재구의 ‘사평역에서’를 잠시 음미해 본다.
사평역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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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의 이 시는 당시 대전발 ‘0시50분’ 열차를 기다리는 대전역(大田驛)의 대합실(待合室) 분위기를 묘사한 듯도 하다.
1959년 2월 제33열차로 탄생한 목포행(木浦行) ‘0시 50분 기차’는 밤 8시 45분에 서울을 출발한 후 대전에 0시40분에 도착하여 다시 목포를 향해 0시50분에 출발했다. 지금은 서대전역(西大田驛)을 통해 호남선(湖南線)이 다니지만, 당시에는 대전역을 거쳐 갔다.
지금의 서대전역
이 열차를 이용한 사람들은 대전역(大田驛) 인근 시장에서 광주리 물건을 팔던 농사꾼이거나, 술에 얼큰히 취해 막차를 기다리던 지방사람들이었다. 방학 철에는 캠핑이나 귀향(歸鄕)하는 학생들로 북적대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의 그 ‘0시 50분’ 열차(列車)는 없어 진지 오래다. 1959년 ‘대전블루스’가 탄생한지 1년만인 1960년 2월 대전 발 ‘03시 05분’발 열차로 시간이 변경되면서 짧은 수명(壽命)을 다하고 말았다.
레코드사 사장에까지 올랐던 최치수씨도 이미 운명(運命)을 달리했고, 가수 안정애씨만이 과거 영광을 뒤로하고 생업에 전념하고 있다. 대전역(大田驛) 부근 허름한 선술집에선 지금도 쉰 목소리의 ‘대전블루스’가 흘러나온다.
선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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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적 증기기차를 타 본 사람치고 대전역(大田驛) ‘가락국수’ 맛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대전역에서 ‘가락국수’ 훌훌 불며 기차가 떠날 새라 급히 먹던 낭만(浪漫)은 누구라도 잊지 못하리라.
‘가락국수’를 말아주는 사람도 바쁘고, 먹는 사람은 더 바쁜 ‘대전역 가락국수!’ 그 짧은 시간에 일어난 웃지 못 할 추억(追憶)들 뒤엔 다음과 같은 배경이 깔려있다.
1959년 제33호 완행열차(緩行列車)는 전날 서울을 출발해 대전역(大田驛)에서 선 다음 새벽 0시 50분 출발해 종착역(終着驛)인 목포역까지 운행했었다.
지금의 목포역
지금은 대전역(大田驛)에서 호남선(湖南線)이나 전라선을 오가는 열차를 탈 수 없지만, 1960년대 초까지 대전역은 분기역 영업을 했기 때문에 대전역에서도 경부선(京釜線)뿐만 아니라 호남선을 운행하는 열차를 탈 수 있었다.
때문에 대전역(大田驛) 플랫폼에는 승객들이 항상 초만원이었다. 게다가 완행열차(緩行列車)는 급행열차들에게 길을 비켜주느라고 항상 10여분 이상을 이곳에서 정차해 있어야만 했다.
그 덕분에 짭짤한 재미를 본 곳이 있었으니 바로 홍익회(弘益會)에서 운영하던 ‘대전역 가락국수집’이었다. 당시 ‘가락국수’ 값은 한 그릇에 30원이었으니 지금 가격(價格)의 100분의 1인 셈이다.
그 시절 가락국수
완행열차(緩行列車)가 한번 섰다 하면 ‘가락국수’가 60그릇에서 100그릇 정도가 불티나게 팔렸다. 그 시절 ‘대전역 가락국수’는 긴 시간 완행열차를 타고 온 출출한 승객들에게 간단한 요기로는 그만이었다.
국수 맛도 맛이지만 기차를 놓칠세라 짧은 시간에 후루룩 먹어치우던 그 맛이 기가 막혔다. 역무원(驛務員)들의 숨 가쁜 재촉도 견디어 낼 수 있을 만큼 말이다.
대전역(大田驛) ‘가락국수’와 관련한 추억은 당시 대전역을 거쳐 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가지고 있음직하다. 1983년 3월 대전일보(大田日報)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부산을 떠나 서울로 향하던 기차가 잠시 대전역(大田驛)에 서게 되었다. 출출했던 여성 윤모씨는 대전역 플랫폼에서 먹는 ‘가락국수’의 쫄깃한 면발과 얼큰한 국물 맛에 반해 차마 잊어버려선 안 될 것을 깜박하고 말았다. 바로 그녀의 생후 6개월 된 아들을 기차(汽車)에 두고 내렸던 것이다
‘가락국수’의 맛에 취해 있는 사이 기차(汽車)는 아들을 태운 채 떠났고, 윤씨는 뒤늦게 따라나섰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맛있는 ‘가락국수’ 때문에 생이별하게 된 모자는 결국 역무원(驛務員)들의 도움으로 다음 기차를 타고 쫓아가서야 겨우 만날 수 있었다. 눈물 젖은 상봉이었다.
당시의 완행열차
당시의 촌극(寸劇)은 이뿐이 아니었다. 기차를 쳐다보면서 열심히 ‘가락국수’를 먹고 있는데, 기차가 출발하여 허겁지겁 쫓아갔지만, 다음 기차를 타야만 했던 일은 약과(藥果)였다.
부랴부랴 ‘가락국수’를 먹고 포만감(飽滿感)과 만족감으로 기차에 올랐는데, 엉뚱한 기차를 타서 다시 다른 차를 바꿔 타고 올라와야 했던 일은 너무나 황당하여 법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런 저런 추억(追憶)들이 덕지덕지 묻어 있기에 ‘대전역 가락국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아련한 추억이 되고 있는 것이다.
1905년 1월 1일, 일제의 식민지 자원수탈과 대륙침략(大陸侵略) 계획에 따라 개통된 대전역(大田驛)은 1919년 대구역사(大邱驛舍)를 본 따 개축하였고, 1920년엔 지하도(地下道)가 개통되었다.
당시의 대구역
해방 후에는 교통의 요충지(要衝地)로 충청, 전라, 경상도(慶尙道)의 사람들과 물자(物資)들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마당이 되기도 했었다. 서울 가는 12열차도, 그 열차가 내려오면서 바뀌는 11열차도 모두 대전역(大田驛)을 거쳐 가야 했다.
6.25전쟁 초기에 대전(大田)이 20여 일 간 임시수도(臨時首都)가 되자 수많은 피난민이 목숨을 걸고 열차(列車) 지붕에까지 매달려 대전에 모여 들었다.
임시수도 당시의 부산 정부청사
인구 10만이던 도시가 갑자기 100만이 넘는 사람들로 들끓었다. 그러다가 임시수도가 부산(釜山)으로 다시 옮겨가자 이제는 피난민(避難民)들이 갑자기 떠나는 이별의 현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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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역(大田驛) ‘가락국수’에 얽힌 또 다른 일화(逸話)도 있다. 1981년대 초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충남도청(忠南道廳)을 연두 방문했을 때였다.
점심식사 시간, 구내식당(構內食堂)에서 연회를 준비했으나, 전 전 대통령은 준비된 식사를 고사하고, 엉뚱한 부탁을 했다. 다름 아닌 ‘대전역 가락국수’를 먹고 싶다는 부탁이었다.
경남 합천(陜川)이 고향인 그가 군대시절 때 대전역(大田驛)에서 먹었던 ‘가락국수’를 기억해냈던 모양이다. 결국 전 대통령은 충남도청으로 ‘가락국수’를 배달해 먹었다는 이야기가 공무원(公務員)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
충남도청
지금은 새마을열차든, KTX열차든, 정차시간(停車時間)이 절대 부족하여 ‘가락국수’를 먹을 시간도 없고, 그래서 ‘가락국수 가게’도 없어져 버렸다.
삶은 달걀과 신문지(新聞紙)에 삼각형으로 싼 소금봉지 또한 대전역의 ‘가락국수’와 함께 기차여행(汽車旅行)을 하면 떠오르는 추억들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 그 시절의 추억(追憶)을 되살려 주기 위해 다시 ‘가락국수가게’가 생겼다고 한다. 플렛폼 승강장(昇降場)이 아니고, 역전(驛前)에 늘어선 상가에 조그맣게 차린 셀프 가락국수가게다.
가락국수
그리고 한 가지 참고할 것은 옛적 대전역(大田驛) 등 우리들의 추억 속에서 먹던 가락국수, 즉 ‘홍익회(弘益會)의 가락국수’와 일식집에서 만드는 ‘일본식(日本式) 가락국수’는 국물을 만드는 재료가 서로 다르다는 점이다.
‘일본식 가락국수’는 우선 국물을 ‘가다랭이(고등어과의 바닷물고기)’로 뽑아낸다. 이에 비해 우리가 익숙한 예전 ‘홍익회 가락국수’는 멸치 국물이었다.
일본식 가락국수
그리고 ‘일본식 가락국수’에는 칠미(七味)라고 해서 고춧가루, 깨, 산초가루 등으로 섞어놓은 양념을 뿌리는 데 반해 우리의 ‘가락국수’에는 씨까지 박박 갈은 고춧가루가 듬뿍 뿌려지고, 기름에 튀긴 유부가 더해져 씹을 것 없는 ‘가락국수’에 씹히는 맛 하나를 더 보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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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우동’얘기로 돌아간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우동’을 만들어 팔던 우리나라 안의 중국집인 ‘공화춘(共和春)’에 대한 사연을 잠시 곁들이고자 한다.
공 화 춘
회원님들도 잘 아시다시피 공화춘(共和春)은 인천광역시 중구 북성동 주민센터 옆에 소재했던 차이나타운의 중화요리(中華料理) 가게였다. 현재는 영업(營業)하지 않고, 사용되던 건물만 남아있다.
공화춘(共和春)은 1883년 인천의 개항과 더불어 형성된 청(淸)나라 조계지(租界地)로 청나라 관원, 상인, 노동자(勞動者)들이 넘쳤다. 그리고 이들을 상대로 한 숙박업과 요식업(料食業)이 급속히 발전하였다.
1905년 22세의 청나라 청년인 우희광이 인천시(仁川市) 북성동에 소재하던 청나라 조계지(租界地)에 음식점과 호텔을 겸업하는 산동회관(山東會館)의 문을 열었다.
산동회관(山東會館)
그리고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에 의해 1912년 2월 청나라 황제 선통제(宣統帝)가 폐위되고, ‘중화민국(지금의 대만정부)’이 건립되었다.
이때 우희광은 이를 기념하여 ‘산동회관’을 ‘공화춘’으로 개명했는데 ‘공화춘(共和春)’은 ‘공화국 원년(元年, 1912년)의 봄(春)’이라는 뜻이다.
공화춘(共和春)은 지난 1984년 79년 만에 문을 닫았으며, 당시 사용되던 건물은 2007년 인천광역시 중구의 지역특구 개발정책(開發政策)에 따라 자장면 박물관(博物館)으로 증개축(增改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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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에서는 ‘우동’의 종주국(宗主國)인 일본의 ‘우동소설’ 얘기를 소개한다. 회원님들께서도 읽어봤겠습니다만, ‘우동’과 관련하여 일본(日本)에는 애틋한 단편소설(短篇小說)이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많은 이들의 심금(心琴)을 울리고 있는 이 소설은 ‘구리 료헤이’가 쓴 ‘우동 한 그릇’이라는 소설이다.
일본의 북해도(北海道) ‘삿뽀로’에 있는 우동전문점 ‘북해정(北海亭)’이란 음식점에 섣달 그믐날의 마지막 손님으로 가게를 찾았던 세 모자(母子)와 주인 부부의 이야기로 엮어진 글이다.
북해정
죽은 아버지가 남기고 간 빚 때문에 고통(苦痛)을 당하고 있던 세 모자(母子)에게 ‘우동’을 정해진 양보다 한배 반이나 더 넣어서 판매했던 ‘북해정’ 주인 부부는 그들 모자(母子)들이 상처 받지 않고, 부담(負擔)을 느끼지 않도록 덤으로 주는 ‘우동사리’를 서비스로 준다고 알리지 않았다.
매년 섣달 그믐날마다 찾아오는 이 세 모자(母子)에게 주인 부부는 친절(親切)뿐 아니라, 그들 세 모자가 앉았던 테이블을 해마다 섣달 그믐날 밤 10시가 지나면 ‘예약석(豫約席)’으로 지정하여 비워두기 까지 했었다.
북해정 내부
그러나 세 모자(母子)가 그들이 지고 있던 빚더미를 모두 내려놓은 해 이후부터는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 먼 곳으로 이사(移徙)를 가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동집 주인부부는 신장개업(新裝開業)을 하면서도 그들 세 모자가 앉았던 테이블은 새것으로 갈지 않고, 해마다 섣달 그믐날 10시 이후에는 ‘예약석(豫約席)’으로 비워 두었다.
그리고 해를 거듭하면서 이 자리는 ‘행복의 테이블’이라는 이름으로 손님들에게까지 알려지게 되어 멀리에서도 손님들이 모여 들곤 했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흐른 어느 해 섣달 그믐날 밤 10시, 세 모자(母子)가 가게에 들어서면서, “14년 전에 ‘우동’ 한 그릇을 주문했던 사람들입니다”라고 자기들의 소개를 시작했다.
주인이 만들어 준 그들의 예약석
그 ‘우동’ 한 그릇에 용기를 얻어 의사(醫師)가 된 첫째 아들과 ‘우동집’ 주인이 되겠다던 은행원(銀行員), 둘째 아들이 사연을 이야기하면서, 그들에게는 최고의 사치스러운 계획인 ‘우동 세 그릇’을 주문한다.
이 책의 내용은 실화(實話)라는 이야기도 있고, TV에서 극화(劇化) 되어 방송되기도 했었다. 혹시 아직 이 글을 읽어보지 못한 회원님들은 특별히 시간을 내어서라도 말미에 첨부한 한글 원문(原文)을 한번 읽어보시기 바란다. 장작개비 같이 무뚝뚝한 필자도 눈시울을 적셨던 글이다.
일본 여인들의 화복(기모노)
글이 자꾸만 길어져 배경음악 한 곡을 올리고 파일을 덮어야겠는데, ‘우동’에 대한 노래가 없어 다른 내용의 곡 중에 가장 근접(近接)한 내용의 곡을 찾는데, 여의치가 않다.
‘가락국수’와 관련하여 ‘대전블루스’를 소개해 드린 취지를 살려 안정애의 ‘대전블루스’를 경음악(輕音樂)으로 들어본다.
대전 블루스
안정애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떠나가는 새벽열차 대전발 영시 오십분
세상은 잠이 들어 고요한 이 밤
나만이 소리치며 울 줄이야
아~ 붙잡아도 뿌리치는 목포행 완행열차
기적소리 슬피 우는 눈물의 플렛트홈
무정하게 떠나가는 대전발 영시 오십분
영원히 변치 말자 맹서했건만
눈물로 헤어지는 쓰라린 심정
아~ 보슬비에 젖어 우는 목포행 완행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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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동 한 그릇
구리 료헤이
해마다 섣달 그믐날이 되면 ‘우동집’으로서는 1년 중 가장 바쁠 때이다.
‘북해정(北海亭 ; 일본 홋가이도 삿뽀로에 있는 우동집)’도 이날만은 아침부터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보통 때는 밤 12시쯤이 되어도 거리가 번잡한데, 그날만큼은 밤이 깊어질수록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빨라지고 10시가 넘자 북해정의 손님도 뜸해졌다.
사람은 좋지만 무뚝뚝한 주인보다 오히려 단골손님으로부터 주인아줌마라고 불리고 있는 그의 아내는 분주했던 하루의 답례로 임시종업원에게 특별상여금 주머니와 선물로 국수를 들려서 막 돌려보낸 참이었다.
마지막 손님이 가게를 막 나갔을 때, 슬슬 문 앞의 옥호막(屋號幕 ; 가게이름이 써진 현수막)을 거둘까 하고 있던 참에, 출입문이 드르륵하고 힘없이 열리더니 두 명의 아이를 데리고 한 여자가 들어왔다.
6세와 10세 정도의 사내들은 새로 준비한 듯한 트레이닝 차림이었고, 여자는 계절이 지난 체크무늬 반코트를 입고 있었다.
“어서오세요!”라고 맞이하는 주인에게, 그 여자는 머뭇머뭇 말했다.
“저...... 우동...... 일인분만 주문해도 괜찮을까요......”
뒤에서는 두 아이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네...... 네. 자, 이쪽으로.”
난로 곁의 2번 테이블로 안내하면서 여주인은 주방 안을 향해 “우동, 1인분!”하고 소리친다.
주문을 받은 주인은 잠깐 일행 세 사람에게 눈길을 보내면서 “예!” 대답하고, 삶지 않은 1인분의 우동 한 덩어리와 거기에 반 덩어리를 더 넣어 삶는다.
둥근 우동 한 덩어리가 일인분의 양이다. 손님과 아내에게 눈치 채이지 않은 주인의 서비스로 수북한 분량의 우동이 삶아진다. 테이블에 나온 가득 담긴 우동을 가운데 두고, 이마를 맞대고 먹고 있는 세 사람의 이야기 소리가 카운터 있는 곳까지 희미하게 들린다.
“맛있네요.”라는 형의 목소리.
“엄마도 잡수세요.”하며 한 가닥의 국수를 집어 어머니의 입으로 가져가는 동생. 이윽고 다 먹자 150엔의 값을 지불하며, “맛있게 먹었습니다.”라고 머리를 숙이고 나가는 세 모자에게 “고맙습니다, 새해엔 복 많이 받으세요!”하고 주인 내외는 목청을 돋워 인사했다.
신년을 맞이했던 북해정은 변함없이 바쁜 나날 속에서 한 해를 보내고, 다시 12월 31일을 맞이했다.
지난해 이상으로 몹시 바쁜 하루를 끝내고, 10시를 막 넘긴 참이어서 가게를 닫으려고 할 때 드르륵, 하고 문이 열리더니 두 사람의 남자아이를 데리고 한 여자가 들어왔다.
여주인은 그 여자가 입고 있는 체크무늬의 반코트를 보고, 일년 전 섣달 그믐날의 마지막 그 손님들임을 알아보았다.
“저...... 우동...... 일인분입니다만......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어서 이쪽으로 오세요.”
여주인은 작년과 같은 2번 테이블로 안내하면서 “우동 1인분!”하고 커다랗게 소리친다.
“네엣! 우동 1인분”이라고 주인은 대답하면서 막 꺼버린 화덕에 불을 붙인다.
“저 여보, 서비스로 3인분 내줍시다.”
조용히 귀엣말을 하는 여주인에게 “안돼요. 그런 일을 하면 도리어 거북하게 여길 거요.”라고 말하면서 남편은 둥근 우동 하나 반을 삶는다.
“여보,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있어도 좋은 구석이 있구료.”
미소를 머금는 아내에 대해, 변함없이 입을 다물고 주인은 삶아진 우동을 그릇에 담았다.
테이블 위의 한 그릇의 우동을 둘러싼 세 모자의 얘기소리가 카운터 안과 바깥의 두 사람에게 들려온다.
“음...... 맛있어요......”
“올해도 ‘북해정’의 우동을 먹게 되네요?”
“내년에도 먹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다 먹고, 150엔을 지불하고 나가는 세 사람의 뒷모습에 주인 내외는 “고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날 수 십번 되풀이했던 인삿말로 전송한다.
그 다음해의 섣달 그믐날 밤은 여느 해보다 더욱 장사가 번성하는 중에 맞게 되었다.
‘북해정’의 주인과 여주인은 누가 먼저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9시 반이 지날 무렵부터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모른다.
10시를 넘긴 참이어서 종업원을 귀가시킨 주인은, 벽에 붙어 있는 메뉴표를 차례차례 뒤집었다. 금년 여름에 값을 올려 ‘우동 200엔’이라고 씌어져 있던 메뉴표가 150엔으로 둔갑하고 있었다.
2번 테이블 위에는 이미 30분 전부터 <예약석>이란 팻말이 놓여져 있다. 10시 반이 되어, 가게 안 손님의 발길이 끊어지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기나 한 것처럼, 모자 세 사람이 들어왔다.
형은 중학생 교복, 동생은 작년에 형이 입고 있던 잠바를 헐렁하게 입고 있었다. 두 사람 다 몰라볼 정도로 성장해 있었는데, 그 아이들의 엄마는 색이 바랜 체크무늬 반코트 차림 그대로였다.
“어서 오세요!”라고 웃는 얼굴로 맞이하는 여주인에게, 엄마는 조심조심 말한다.
“저...... 우동...... 2인분인데도..... 괜찮겠죠?”
“넷...... 어서 어서. 자 이쪽으로.”라며 2번 테이블로 안내하면서, 여주인은 거기 있던 <예약석>이란 팻말을 슬그머니 감추고 카운터를 향해서 소리친다.
“우동 2인분!”
그걸 받아, “우동 2인분!”이라고 답한 주인은 둥근 우동 세 덩어리를 뜨거운 국물 속에 던져 넣었다.
두 그릇의 우동을 함께 먹는 세 모자의 밝은 목소리가 들리고, 이야기도 활기가 있음이 느껴졌다.
카운터 안에서, 무심코 눈과 눈을 마주치며, 미소 짓는 여주인과, 예의 무뚝뚝한 채로 응응,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주인이다.
“형아야, 그리고 쥰아...... 오늘은 너희 둘에게 엄마가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구나.”
“......고맙다니요...... 무슨 말씀이세요?”
“실은, 돌아가신 아빠가 일으켰던 사고로, 여덟 명이나 되는 사람이 부상을 입었잖니. 보험으로도 지불할 수 없었던 만큼을, 매월 5만엔 씩 계속 지불하고 있었단다.”
“음-- 알고 있어요.”라고 형이 대답한다. 여주인과 주인은 몸도 꼼짝 않고 가만히 듣고 있다.
“지불은 내년 3월까지로 되어 있었지만, 실은 오늘 전부 지불을 끝낼 수 있었단다.”
“넷! 정말이에요? 엄마!”
“그래, 정말이지. 형아는 신문배달을 열심히 해주었고, 쥰이 장보기와 저녁준비를 매일 해준 덕분에, 엄마는 안심하고 일할 수 있었던 거란다. 그래서 정말 열심히 일을 해서 회사로부터 특별수당을 받았단다. 그것으로 지불을 모두 끝마칠 수 있었던 거야.”
“엄마! 형! 잘됐어요!
하지만, 앞으로도 저녁 식사준비는 내가 할 거예요.”
“나도 신문배달, 계속 할래요 쥰아 ! 힘을 내자!”
“고맙다. 정말로 고마워.” 형이 눈을 반짝이며 말한다.
“지금 비로소 얘긴데요, 쥰이하고 나, 엄마한테 숨기고 있는 것이 있어요.
그것은요. 11월 첫째 일요일, 학교에서 쥰이의 수업참관을 하라고 편지가 왔었어요. 그 때, 쥰은 이미 선생님으로부터 편지를 받아놓고 있었지만요.
쥰이 쓴 작문이 북해도의 대표로 뽑혀, 전국 콩쿠르에 출품되게 되어서 수업 참관일에 이 작문을 쥰이 읽게 됐대요. 선생님이 주신 편지를 엄마에게 보여드리면, 무리를 해서 회사를 쉬실 걸 알기 때문에 쥰이 그걸 감췄어요.
그걸 쥰의 친구들한테 듣고, 내가 참관일에 갔었어요.”
“그래... 그랬었구나... 그래서....”
“선생님께서, 너는 장래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라는 제목으로, 전원에게 작문을 쓰게 하셨는데, 쥰은 <우동 한그릇>이라는 제목으로 써서 냈대요. 지금부터 그 작문을 읽어 드릴께요.
사실 <우동 한 그릇>이라는 제목만 듣고, ‘북해정’에서의 일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쥰 녀석 무슨 그런 부끄러운 얘기를 썼지! 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했죠.
작문은 아빠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셔서 많은 빚을 남겼다는 것, 엄마가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하고 계시다는 것, 내가 조간과 석간신문을 배달하고 있다는 것 등 전부 씌어 있었어요.
그리고서 12월 31일 밤 셋이서 먹은 한 그릇의 우동이 그렇게 맛있었다는 것. 셋이서 다만 한 그릇밖에 시키지 않았는데도 우동집 아저씨와 아줌마는 “고맙습니다! 새해엔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큰 소리로 말해주신 일. 그 목소리는 “지지 말아라! 힘내! 살아갈 수 있어!”라고 말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요.
그래서 쥰은 어른이 되면, 손님에게 “힘내라! 행복해라!”라는 속마음을 감추고, “고맙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 제일의 우동집 주인이 되는 것이라고, 커다란 목소리로 읽었어요.
카운터 안쪽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을 주인과 여주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카운터 깊숙이 웅크린 두 사람은, 한 장의 수건 끝을 서로 잡아당길 듯이 붙잡고, 참을 수 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고 있었다.
“작문 읽기를 끝마쳤을 때 선생님이, 쥰의 형이 어머니를 대신해서 와주었으니까, 여기에서 인사를 해달라고해서...”
“그래서 형아는 어떻게 했지?”
“갑자기 요청받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말이 안 나왔지만, 여러분, 항상 쥰과 사이좋게 지내줘서 고맙습니다. 동생은 매일 저녁식사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클럽활동 도중에 돌아가니까, 폐를 끼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방금 동생이 <우동 한 그릇>이라고 읽기 시작했을 때. 나는 처음엔 부끄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가슴을 펴고 커다란 목소리로 읽고 있는 동생을 보고 있는 사이에, 한 그릇의 우동을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이 더 부끄러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한 그릇의 우동을 시켜주신 어머니의 용기를 잊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형제가 힘을 합쳐, 어머니를 보살펴 드리겠습니다. 앞으로도 쥰과 사이좋게 지내주세요. 라고 말했어요.”
차분하게 서로 손을 잡기도 하고, 웃다가 넘어질 듯이 어깨를 두드리기도 하고, 작년까지와는 아주 달라진 즐거운 그믐날 밤의 광경이었다.
우동을 다 먹고 300엔을 내며 “잘 먹었습니다”라고 깊이 머리를 숙이며 나가는 세 사람을, 주인과 여주인은 1년을 마무리하는 커다란 목소리로 “고맙습니다! 새해엔 복 많이 받으세요!”라며 전송했다.
다시 1년이 지나 ‘북해정’에서는 밤 9시가 지나서부터 <예약석>이란 팻말을 2번 테이블위에 올려놓고 기다렸지만, 그 세 모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 해에도, 또 다음 해에도, 2번 테이블을 비우고 기다렸지만, 세 사람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북해정’은 장사가 번창하여, 가게 내부수리를 하게 되자, 테이블이랑 의자도 새로이 바꾸었지만, 그 2번 테이블 만은 그대로 남겨두었다. 새 테이블이 나란히 있는 가운데에서, 단 하나 낡은 테이블이 중앙에 놓여있는 것이다.
“어째서, 이것이 여기에?” 하고 의아스러워하는 손님에게, 주인과 여주인은 <우동 한 그릇>의 일을 이야기하고, “이 테이블을 보고서 자신들의 자극제로 하고 있다, 어느 날인가 그 세 사람의 손님이 와줄지도 모른다, 그 때 이 테이블로 맞이하고 싶다”라고 설명하곤 했었다.
그 이야기는, ‘행복의 테이블’로써, 이 손님에게서 저 손님에게로 전해졌다. 일부러 멀리에서 찾아와 우동을 먹고 가는 여학생이 있는가 하면, 그 테이블이 비길 기다려 주문을 하는 젊은 커플도 있어 상당한 인기를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나서 또 수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해 섣달그믐의 일이다. ‘북해정’에는 같은 거리의 상점회 회원이며, 가족처럼 사귀고 있는 이웃들이 각자의 가게를 닫고 모여들고 있었다.
‘북해정’에서 섣달그믐의 풍습인 해 넘기기 우동을 먹은 후,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동료들과 그 가족이 모여 가까운 신사에 그 해의 첫 참배를 가는 것이 5,6년 전부터의 관례가 되어 있었다.
그날 밤도 9시 반이 지나 생선가게 부부가 생선회를 가득 담은 큰 접시를 양손에 들고 들어온 것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평상시의 동료 30여명이 술이랑 안주를 손에 들고 차례차례 모여들어 가게 안의 분위기는 들떠 있었다.
2번 테이블의 유래를 그들도 알고 있다. 입으로 말은 안 해도 아마, 금년에도 빈 채로 신년을 맞이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섣달 그믐날 10시 예약석’은 비워둔 채 비좁은 자리에 전원이 조금씩 몸을 좁혀 앉아 늦게 오는 동료를 맞이했다.
우동을 먹는 사람, 술을 마시는 사람, 서로 가져온 요리에 손을 뻗히는 사람, 카운터 안에 들어가 돕고 있는 사람, 멋대로 냉장고를 열고 뭔가 꺼내고 있는 사람 등등으로 떠들썩하다.
바겐세일 이야기, 해수욕장에서의 에피소드, 손자가 태어난 이야기 등, 번잡함이 절정에 달한 10시 반이 지났을 때, 입구의 문이 드르륵 하고 열렸다.
몇 사람인가의 시선이 입구로 향하며 동시에 그들은 이야기를 멈추었다. 오바를 손에 든 정장 슈트차림의 두 사람의 청년이 들어왔다.
다시 얘기가 이어지고 시끄러워졌다. 여주인이 죄송하다는 듯한 얼굴로 “공교롭게 만원이어서”라며 거절하려고 했을 때 화복(華服 ; 일본 전통옷의 총칭으로 ‘기모노’를 말한다 ; 우리의 경우 한복)차림의 부인이 깊이 머리를 숙이며 들어와서 두 청년 사이에 섰다.
가게 안에 있는 모두가 침을 삼키며 귀를 기울인다. 화복을 입은 부인이 조용히 말했다.
“저. 우동. 3인분입니다만. 괜찮겠죠?”
그 말을 들은 여주인의 얼굴색이 변했다. 십 수 년의 세월을 순식간에 밀어 젖히고, 그 날의 젊은 엄마와 어린 두 아들의 모습이 눈앞의 세 사람과 겹쳐진다.
카운터 안에서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고 있는 주인과 방금 들어온 세 사람을 번갈아 가리키면서 “저. 저. 여보!”하고 당황해하고 있는 여주인에게 청년 중 하나가 말했다.
“우리는 14년 전 섣달 그믐날 밤, 모자 셋이서 1인분의 우동을 주문했던 사람입니다. 그 때의 한 그릇의 우동에 용기를 얻어 세 사람이 손을 맞잡고 열심히 살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 후, 우리는 외가가 있는 시가현으로 이사했습니다. 저는 금년, 의사 국가시험에 합격하여 교토의 대학병원에 소아과의 병아리 의사로 근무하고 있습니다만, 내년 4월부터 이곳 ‘삿뽀로’의 종합병원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 병원에 인사도 하고 아버님 묘에도 들를 겸 해서 왔습니다. 그리고 우동집 주인은 되지 않았습니다만, 교토의 은행에 다니는 동생과 상의해서, 지금까지 인생 가운데에서 최고의 사치스러운 것을 계획했습니다. 그것은 섣달 그믐날 어머님과 셋이서 ‘삿뽀로’의 ‘북해정’을 찾아와 3인분의 우동을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듣고 있던 여주인과 주인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넘쳐흘렀다.
입구에 가까운 테이블에 진을 치고 있던 야채가게 주인이, 우동을 입에 머금은 채 있다가 그대로 꿀꺽하고 삼키며 일어나, “여봐요. 여주인 아줌마! 뭐하고 있어요!
십년간 이 날을 위해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기다린, 섣달 그믐날 ‘10시 예약석’이잖아요, 안내해요. 안내를!”
야채가게 주인의 말에 번뜩 정신을 차린 여주인은 “잘 오셨어요. 자 어서요. 여보! 2번 테이블 우동 3인분!”
무뚝뚝한 얼굴을 눈물로 적신 주인, “네엣! 우동 3인분!”
예기치 않은 환성과 박수가 터지는 가게 밖에서는 조금 전까지 흩날리던 눈발도 그치고, 갓 내린 눈에 반사되어 창문의 빛에 비친 <북해정>이라고 쓰인 옥호막(屋號幕)이 한 발 앞서 불어제치는 정월의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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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후........아이구.....보는 사람도 이렇게 힘이 드는데...쓰시는 분은 얼마나 힘이 들어실꼬.....ㅎ ㅎ 정말 대단하신분이라...대전 부르스 한번 실컷 들었네요...마이 불렀지요...부르스도 많이 추고...ㅎㅎㅎㅎ 대전역 가락국수 저도 마이 묵었습니다. 전태통령의 일화 처음 듣는데..저도 그러고 싶겠네요...ㅎㅎ 그게 인간적입니다. ㅎㅎ 요사이 대전은 묵집이 유명하지요...
입실 우동집 저도 기억합니다. 맞습니다. 허름했지만..있을것은 다 있었는거 같고..우동에 넣어 주던 조개살...빨간색 조개날개...그것 참 맛이 좋았거든요..오뎅 튀김도 억수로 맛이 좋았고....저는 초등학교 5학년때쯤 같은데..아버님이 입실장에 오서서...같이 가서 먹었는데..그게 처음이었고 마지막이었던거 같기도..ㅎㅎ
입실장에 얽힌 얘기도 참 재미있고 많을 듯 하지요..장날이 되면 장을 몇바쿠 돌면서 어머님을 찾아서 뭣을 하나 얻어 먹고...ㅎㅎㅎ 입실 사거리의 입실역 쪽으로 찐빵집의 추억도 생각납니다. 나마기시도 억수로 맛이 좋았고..ㅎㅎㅎ
우동 잘 먹었습니다... 어제 9/9 1830-21시 까지 삼각지 '배호의 거리'에 식당에서 식사 잘했는데 다음에는 그 옆에 있는국수집에서 만납시다... 대전부루스가 맘을 울리네요!
그 국수집은 전통적으로 술과 담배는 금지된 곳입니다. 그래서 정말 국시만 한그릇 들라카면 몰라도...막걸리라도 한잔 들려면 그 옆의 어디를 해야되는데...그럴려면 차라리 사당역 근처 순두부집 정도가 어떨지..ㅎㅎㅎ 두부 묵 같은것이 좋을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