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이여, 당신의 깃발이 펄럭이는 이곳을 당신에게 바칩니다. 저와 제 동료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뒤로 처음 이땅에 왔습니다. 사람에게 이 보다 더 힘겨웠던 일이란 없을 겁니다.
이 영관을 호콘 7세에게 올립니다 "
1911년 12월 14일, 남위 90도. 노르웨이 탐험대 로알 아문센 대장이 헌사를 마치자 인류 최초로
남극점을 밟고 선 다섯 사나이는 목이 메도록 노르웨이 국가를 합창하였다. 그해 10월 20일 기지를
출발하여 두 달이 채 되지 않은 12월 14일에 인류사상 최초로 남극점 도달에 성공했다.
이것은 국가적으로나 세계사적으로 매우 큰 사건이었다.
한달이 지난 1912년 1월 18일, 역시 남위 90도. 펄럭이는 노르웨이 국기를 본 영국 탐험대 로버트 스콧
대장의 입에서 탄식이 새어 나왔다. 두손으로 얼굴을 감싼 다섯 사나이는 털석 주저 앉은 채 한동안
일어나지 못하였다. 승자 아문센은 38일 만에 무사히 기지로 돌아왔다. 그러나 영국 탐험대는 안타깝게도
아홉달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그해 11월 12일에야 수색대는 눈 덮인 텐트에서 싸늘한 주검 셋을 찾아냈다.
남극점에 누가 먼저 갈까 ? 20세기 초반 영국과 노르웨이의 국가 간 자존심 대결로 치달았던 이 세기의 경쟁은,
그러나 승패가 갈린 뒤에도 끝나지 않았다. 2 라운드의 발단은 스콧 대장의 일기였다.
'2월 17일, 기어 가면서도 썰매를 끌던 에번스가 끝내 죽었다. 심한 동상으로 신음하면서도 죽을 때까지 썰매를
끈 에번스, 신이여 그를 보살피소서.'
'3월 17일, 남위 79도 50분. 오츠가 자기를 버리고 가라고 하소연했다. 얼마뒤 그는 곧 돌아 오겠다고 하면서
텐트를 나갔다. 그러나 누가 모르랴. 그가 동료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병든 몸을 이끌고 스스로 죽음을 찾아
하염없이 눈보라 속을 걸어 갔음을... 알면서도 모른체 한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리라. 그의 용기와
아름다운 마음이 그가 겪은 고통을 깨끝이 씻어 주기를 ...'
'3월 29일, 미리 묻어둔 식량을 찾아 떠나려 했으나 텐트 밖은 오늘도 눈보라가 휘몰아친다...우리는 끝까지
버티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죽음이 멀지 않았다. 더 쓰지 못할것 같다. 신이여, 아무쪼록 우리
가족을 돌보아 주소서..'
당시 세계 일등 국가로서 영국은 노르웨이에 패해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하지만 일기가 공개된 이후
영국은 스콧을 옹호하면서 아문센을 비난 하였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 스콧은 용기있는 신사인 반면, 짐승
털가죽을 걸치고 썰매 개를 식량으로 삼은 아문센은 야만인 이라는 것이다.
과거, 영국의 브리테니커 백과사전을 보면 이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서북 항로를 처음 개척하고, 남극점을 처음 밟고, 북극점을 거치는 북극해 횡단 비행에 처음 성공한 탐험가
아문센이 이 사전에는 얼굴 사진도 없이 단 1/6 페이지만 소개 되었다. 반면 스콧은 사진을 곁들여 아문센의 두 배
분량으로 다루어져있다. 이토록 당시 남극 탐험은 국가간의 자존심이 걸린 대결이었다.
이같은 분위기로 말미암아 당시 일부에선 야만인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던 아문센이지만, 오늘날 그가 합리적이고
꼼꼼한 탐험가 였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로알 아문센은 과학적이고 치밀한 전략으로 인류의 소망을 이루었다.
스콧 역시 용감한 탐험가라는 점에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아문센의 철저함에 비하면 조금은 감상적이었던 듯하다.
아문센은 여러 차례 실험을 거쳐 썰매를 가볍고 튼튼하게 손보았다. 돌아올때 눈보라 속에서도 식량을 묻어둔 곳인
'데포(Depo)"를 쉽게 찾게 끔 데포마다 동서로 각각 8 km까지 800m마다 깃발을 세웠다. 깃발에는 데포의 방향을
표시하고,거리를 알게끔 번호를 매겼다. 남극점 가는 길에도 일정한 간격으로 깃발을 세웠다. 썰매뒤에 바퀴를 달고
회전 수를 헤아려 이동 거리를 계산하였다. 짐 썰매는 그린랜드에서 단련된 개들이 끌고, 사람들은 스키를 탔다.
영하 6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에는 털가죽으로 만든 외투와 부츠로 대비하였다.
반면 스콧은 무거운 모직 옷을 입고, 만주산 조랑말로 짐 썰매 10대를 끌게 했다. 그 말들은 다치거나 얼어 죽었다.
남은 말들도 남위 83도 30분을 넘지 못하고 지쳐서 죽고 말았다. 말을 대신한 개들이 또 지치자, 스콧은 이 마져도
불쌍히 여겨 중간에 돌려 보냈다. 안타깝게도 스콧 탐험대는 사람이 짐 썰매를 끌고 가느라 지치고, 허탈감에 또
지치고, 데포를 못 찾는 바람에 굶주려 죽고 말았다.
반면 아문센쪽은 썰매도 가벼웠지만, 식량도 적게 실었다. 돌아올 때 모자란 식량은 지쳐서 약해진 개로 충당했다.
썰매와 스키는 거침없이 달려 남극점에 닿았고, 왔던 길을 오차없이 되짚어 무사히 돌아왔다.
남극점을 가는데 56일, 돌아오는데 38일이 걸린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아문센의 합리적 리더십은, 세클턴이 보여준 불굴의 용기나 징기스칸의 대 제국 경영 능력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또 하나의 본보기가 될 것이다. 리더란 참으로 중요하고 현명한 자의 몫이다.
대한항공 기내 지(誌) Morning Calm 에서, 이병철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