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는 20세기에서 가장 영향력을 끼친 천재 작가였다.
“흐르는 저 강물을 바라보며 당신의 이름을 목 놓아 불러 봅니다. 레너드 울프. 제 처녀 때의 이름 버지니아 스티븐이 당신과 결혼하면서 버지니아 울프가 된 것을 저는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제 나이 예순, 인생의 황혼기이긴 하지만 아직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할 생각입니다. 제 자살이 성공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 부부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었을 거라고 입방아를 찧을지도 모르겠어요. 아이도 없는 터에 남편의 이해부족, 애정 결핍 등 이런저런 얘기가 나올까 솔직히
두렵습니다. 이 유서는 당신이 엉뚱한 구설수에 휩싸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쓰는 것이랍니다.“
버지니아 울프 (Virginia Woolf 1882 - 1941)
1902년 20세 때의 버지니아 울프 ❐ 유서 “내 상처를 이해해 준 그대에게 흐르는 저 강물을 바라보며 당신의 이름을 목놓아 불러 봅니다. 레너드 울프. 제 처녀 때의 이름 버지니아 스티븐이 당신과 결혼하면서 버지니아 울프가 된 것을 저는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습니다 . 제 나이 예순, 인생의 황혼기이긴 하지만 아직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할 생각입니다. 제 자살이 성공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 부부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었을 거라고 입방아를 찧을지도 모르겠어요. 아이도 없는 터에 남편의 이해부족, 애정 결핍 등 이런저런 얘기가 나올까 솔직히 두렵습니다. 이 유서는 당신이 엉뚱한 구설수에 휩싸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쓰는 것이랍니다. 1912년 결혼한 이래 30년 동안 제가 진정으로 사랑하였고, 저를 진정으로 아껴 주었던 레너드, 그 동안 차마 얘기하지 못했던 제 생애의 비밀을 이 유서에서 당신께 말하려 합니다. 저의 아버지 레슬리 스티븐은 첫 번째 아내가 정신질환에 시달리다 죽자 변호사 허버트 덕워스의 미망인 줄리아와 재혼을 합니다. 속된 말로 홀아비와 과부의 결혼이었던 거지요. 제 어머니 줄리아는 이미 네 명의 자식이 있는 상태였고, 아버지는 전처 소생의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재혼한 두 사람 사이에서 오빠 토비와 언니 바네사, 저 그리고 동생 애드리안이 줄줄이 태어났지요. 그리 넓지도 않은 집에서 아홉 명 아이와 두 어른이 아옹다옹하며 살아 가게 된 것입니다.어머니는 봉사정신이 무척 강한 분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병구완하러 다니느라 정작 집에 있는 아이들은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셨지요. 큰애가 작은애를 알아서 잘 돌보겠지 하고 낙관적으로 생각하셨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제 생애의 불행은 여섯 살 때부터 시작됩니다. 큰 의붓오빠인 제럴드 덕워스가 어머니 없는 틈을 타 저한테 못된 짓을 하는 것이었어요. 자기와는 신체 구조가 다른 저를 세밀히 관찰하고 만지고. 그 시절부터 저는 몸에 대한 혐오감과 수치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성에 관련된 것이라면 무조건 배격하는 마음도 갖게 되었지요.불행은 설상가상으로 몰아 닥쳤죠. 어머니는 이웃사람을 간병하다 그만 전염이 되어 제가 열 세 살 되던 해에 돌아가셨습니다. 저를 잘 이해해 주던 이복언니 스텔라도 2년 뒤에 죽었는데 바로 그때 아버지마저 암에 걸려 몸져눕고 말았습니다. 저와 언니 바네사가 신경질이 나날이 심해지시는 아버지의 병간호를 맡아서 하는 것이야 뭐 그래도 힘든 일이라 생각하지 않고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춘기를 막 넘긴 작은 의붓오빠 조지 덕워스가 저한테 갖은 못된 짓을 하는 것이었어요. 그렇지 않아도 의지할 데 없어 심리적으로 불안했던 저는 무방비 상태에서 그런 일을 수시로 당하고는 거의 미칠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집에 책이 없었더라면 전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버지의 전처처럼 죽지 않았을까요? 아버지는 총 65권에 달하는 대영전기사전의 책임 집필자여서 집에 책이 엄청나게 많았고, 저는 현실의 불행에서 도피하기 위해 책에 파묻혀 지냈습니다. 저는 당신과 결혼하기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너무나 무서워했고, 사춘기 시절부터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당신이 청혼했을 때 저는 두 가지를 요구했습니다. 보통 사람 같은 부부생활을 하지 않겠다는 것과 작가의 길을 가려는 나를 위해 공무원 생활을 포기해 달라는 것. 세상에 이런 요구를 하 는 여자에게 자신의 성적 욕망을 버리고 사회적 지위를 팽개치고 오겠다는 사람은 레너드, 당신 이외엔 없을 거예요. 고통스런 과거를 끊임없이 반추하며 제가 작품을 쓰는 동안 당신은 출판사를 차려 묵묵히 제 후원자 노릇을 해 주셨지요. 저는 지난 30년 동안 남성 중심의 이 사회와 부단히 싸웠습니다. 오로지 글로써. 유럽이 세계 대전의 회오리바람 속으로 빨려들 때 모든 남성이 전쟁을 옹호하였고, 당신마저도 참전론자가 되었죠. 저는 생명을 잉태해 본 적은 없지만 모성적 부드러움으로 이 전쟁에 반대했습니다. 지금 온 세계가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제 작가로서의 역할은 여기서 중단되어야 할 것입니다. 추행과 폭력이 없는 세상, 성차별이 없는 세상에 대한 꿈을 간직한 채 저는 지금 저 강물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버지니아가 자살하기 얼마 전의 사진 인생
❐ '세인트 에이브스’의 별장에서 보낸 어릴 때의 여름철 경험이 그녀와 바다를 밀접하게 만들었다. ❐ 부모가 죽은 뒤로는 남동생 에이드리언을 중심으로 케임브리지 출신의 학자 ·문인 ·비평가들이
그녀의 집에 모여‘Bloomsbury Group'이라고 하는 지적(知的) 집단을 만들었다.
❐ 작품 못지않게 독특했던 버지니아 울프의 개인사는 시대를 앞서 살았던 여성들의 고단함을 보여준다. 그의 개인적인 체험들은 그의 작품과 활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는데, 극심한 신경쇠약에 시달렸던 생애가 작품의 ''예민함''으로 반영된다면 그가 여성으로서 느꼈던 문제들은 페미니스트로서의 버 지니아 울프로 나타난다.
버지니아 울프가 겪었던 ''길들여지기를 강요했던 교육''과 ''이복오빠에게서 느꼈던 육체적 모욕'' 은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자각하는데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개인적인 경험은 더 나아가 "왜 사람들은 여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가",
"왜 여성들은 남자들이 그들에게 나누어 준 일만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낳는다.
스스로도 몸소 겪었던, 재능을 가진 여성들이 자신의 영역을 개척할 수 없는 부조리에 대해 그는 발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페미니즘의 선구자로서의 그의 위치는 작가로서의 그의 위치만큼이나 중요하다.
❐ 버지니아 울프가 살던 시대는 제1차 세계대전과 함께 낡은 유럽이 해체되고, 영원할 것 같았던 사회형태가 붕괴되는 혼란의 시기였다.
우리는 이 시대를 버지니아가 ''섬세한 시선''으로 어떻게 잡아내고 있는지를 그의 작품에서, 강연에서 만나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작가로서는 새로운 모더니즘 실험의 선구자로, 페미니스트 사상에 있어서는 탁월한 예견자로 나타나고 있다.
❐ 문학사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제임스 조이스와 함께 이른바 '의식의 흐름'이라는 새로운 서술 기법을 발전시킨 20세기 초의 실험적인
작가로 손꼽힌다. 또, 1960년대 말부터는 페미니즘 비평의 선구자로 재발견되면서 새로운 해석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이름은 그러한 문학적 업적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전설적인 여운을 불러일으킨다. 생전에 이미 블룸즈베리 그룹의 중심인물로서 숱한 화제를 뿌렸던 데다가, 비범한 성격과 용모, 만성적인 정신분열증, 결국 자살로 마감한 생애는 그녀를 하나의 전설로 만드는 것이다.
버지니아와 남편 레너드 울프 -1914년 생애
1882년 1월 빅토리아 시대의 문필가이자 역사가인 아버지 레슬리 스티븐과 어머니 줄리아 사이에서 태어나다.
1895년 버지니아가 열세 살 때 어머니 줄리아 스테픈이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몹시 상심했고 그 때문에 그녀는 신경쇠약에 결렸으며 이후 그녀가 죽을 때 까지 서너 번 재발했다.
1904년 아버지가 죽는다. 그로 인해 그녀는 신경쇠약이 재발하여 자살을 기도했다.
버지니아는 건강을 회복하자 동생들을 데리고 보헤미아 블룸즈베리에 있는 집으로 갔다.1905년 《타임스》지 (紙) 등에 문예비평을 쓰기 시작한다.
1906년 사남매의 그리스 여행은 불행하게 끝났다. 여행에서 얻은 티푸스로 토비가 세상을 떠 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바네사는 클라이브 벨과 결혼했고, 블룸즈 버리 그룹은 계속 번창했지만 버지니아는 어느새 스물아홉 살에 아직 결혼도 안 하 고, 청혼도 거부하고, 아이도 없고 게다가 정신병이 있었다.
1907년 ''블룸즈베리 그룹''으로 불리는 화가 던칸 그란트, 소설가 포스터, 경제학자 케인즈 등 과 모임을 가지다.
1912년 레너드 울프와 결혼한다. 레너드는 토비의 친구들 중 한 사람이었는데, 버지니아에게 둘도 없는 반려가 되어 주었다. 병원에서는 악화시킬 뿐인 정신병을 가진 아내를 위 해 규칙적이고 안정된 생활 습관을 만들어주었고, 창작 을 격려해주었다. 그녀의 거부로 인해 처음부터 성생활이 배제된 백지 결혼이었지만, 결혼이 반드시 성 관계 위에 기초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이상적인 결혼이었다. 1915년 소설 『출항』을 시작으로 집필 활동을 시작하다.
1917년 레너드는 버지니아가 작가적 역량을 발휘하도록 함께 ‘호가스 출판사’를 세운다.
1929년 『자신만의 방 A Room of One''s Own』을 출간하다.1938년 『3기니 Three Guineas』를 출간하다.
1940년 마지막 소설 『막간』을 집필하다.
1941년 3월 28일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울프 부부의 삶에는 점차 암운이 덮이기 시 작했다. 독일군의 침공은 유태인인 레너드에게 잠재적인 위협이었으며, 시골집으로 대 피했지만 갈수록 심각해지는 전시의 불편과 고통은 버지 니아의 신경을 극도로 자극했다.
다시금 자신이 미쳐가고 있음을 감지한 그녀는 남편에게 마지막 편지를 썼다. "나는 당신의 인생을 더 이상 망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이슬이 아직도 촉촉한 초원을 씩씩한 걸음걸이로 가로질러 강으로 나가서 주머니에 돌멩이들을
가득 집어넣고 강물로 들어갔다. 시체는 2주 후에야 발견되었다
버지니아의 필적 -'델러웨이 부인' 집필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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