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소새끼가 젖을 모두 먹을까봐 배고픈 사람이 먹어야 되니까 젖을 헝겊으로 싸맨다는 것입니다
나는 한참이나 심각해졌다가 그만 서글퍼졌습니다 내가 먹는 밥과 반찬이 부끄러워졌습니다
병/ 공광규
고산지대에서 짐을 나르는 야크는 삼천 미터 이하로 내려가면 오히려 시름시름 아프다고 한다
세속에 물들지 않는 동물
내 주변에도 시름시름 아픈 사람들이 많다 이런 저런 이유로 아파서 죽음까지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최근에는 세 모녀가 생활고에 자살을 했다
그런데 나는 하나도 아프지 않다
직장도 잘 다니고 아부도 잘 하고 시를 써서 시집도 내고 문학상도 받았고 돈벌이도 아직 무난하다
내가 병든 것이다
별 닦는 나무/공광규
은행나무를 별 닦는 나무라고 부르면 안되나 비와 바람과 햇빛을 쥐고 열심히 별을 닦는 나무
가을이 되면 별가루가 묻어 순금빛 나무
나도 별 닦는 나무가 되고 싶은데 당신이라는 별을 열심히 닦다가 당신에게 순금 물이 들어 아름답게 지고 싶은데
이런 나를 별 닦는 나무라고 불러주면 안되나 당신이라는 별에 아름답게 지고 싶은 나를
아름다운 책 /공광규
어느해 나는 아름다운 책 한 권을 읽었다
도서관이 아니라 거리에서 책상이 아니라 식당에서, 등산로에서 영화관에서 노래방에서 찻집에서
잡지 같은 사람들 소설 같은 사람들 시집 같은 사람들
한장 한장 맛있게 넘겼다 아름다운 표지와 내용을 가진 책이었다
체온이 묻어나는 책장을 눈으로 읽고 혀로 넘기고 두발로 밑줄을 그었다
책은 서점이나 도서관에만 있는 게 아닐 것이다 최고의 독서는 경전이나 명작이 아닐 것이다
사람, 참 아름다운 책 한 권
속 빈 것들 /공광규(1960~ )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것들은 다 속이 비어 있다
줄기에서 슬픈 숨소리가 흘러나와 피리를 만들어 불게 되었다는 갈대도 그렇고 시골집 뒤란에 총총히 서 있는 대나무도 그렇고 가수 김태곤이 힐링 프로그램에 들고 나와 켜는 해금과 대금도 그렇고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회의 마치고 나오다가 정동 길거리 에서 산 오카리나도 그렇고
나도 속 빈 놈이 되어야겠다 속 빈 것들과 놀아야겠다
담장을 허물다/ 공광규
고향에 돌아와 오래된 담장을 허물었다 기울어진 담을 무너뜨리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떼어냈다 담장 없는 집이 되었다 눈이 시원해졌다
우선 텃밭 육백평이 정원으로 들어오고 텃밭 아래 살던 백살 된 느티나무가 아래둥치째 들어왔다 느티나무가 느티나무 그늘 수십평과 까치집 세채를 가지고 들어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벌레와 새소리가 들어오고 잎사귀들이 사귀는 소리가 어머니 무릎 위 마른 귀지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하루 낮에는 노루가 이틀 저녁은 연이어 멧돼지가 마당을 가로질러갔다
겨울에는 토끼가 먹이를 구하러 내려와 밤콩 같은 똥을 싸고 갈 것이다 풍년초꽃이 하얗게 덮은 언덕의 과수원과 연못도 들어왔는데 연못에 담긴 연꽃과 구름과 해와 별들이 내 소유라는 생각에 뿌듯하였다
미루나무 수십그루가 줄지어 서 있는 금강으로 흘러가는 냇물과 냇물이 좌우로 거느린 논 수십만마지기와 들판을 가로지르는 외산면 무량사로 가는 국도와 국도를 기어다니는 하루 수백대의 자동차가 들어왔다 사방 푸른빛이 흘러내리는 월산과 성태산까지 나의 소유가 되었다
마루에 올라서면 보령 땅에서 솟아오른 오서산 봉우리가 가물가물 보이는데 나중에 보령의 영주와 막걸리 마시며 소유권을 다투어볼 참이다 오서산을 내놓기 싫으면 딸이라도 내놓으라고 협박할 생각이다 그것도 안 들어주면 하늘에 울타리를 쳐서 보령 쪽으로 흘러가는 구름과 해와 달과 별과 은하수를 멈추게 할 것이다
공시가격 구백만원짜리 기울어가는 시골 흙집 담장을 허물고 나서 나는 큰 고을의 영주가 되었다
- 공광규 시집《담장을 허물다》 창비(2013)
소주병 /공광규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주면서 속을 비워간다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 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2004년/ 실천문학사
소주가 서민의 술이기 때문일까. 시 속에 소주가 등장하면 우선 편하고 친근하다. 오랜 가난 탓인지도 모르겠다. 이십년 동안 청계천 건너 빌딩 숲을 오가며 밥을 구하러 다녔다는 시인은 주름과 뱃살과 흰 머리에 겹치어 딸과 대화를 ‘자화상’으로 그려 놓은 시도 썼다. 아빠 사무실 가까이 와서 저녁을 먹고 간 딸이 아빠 얼굴이 가엽다고 했다한다. 시인은 청계천을 내려다보는데 얼굴이 뭉개진 그림자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고 했다. 소주병처럼 쪼그려 앉은 돌아가신 아버지, 그리고 이제 그 나이가 되어가는 시인과 그 시인 아버지를 걱정하는 딸, 애잔한 가족 3대가 두 편 시속에서 혈연의 끈끈한 밧줄을 이어가고 있는 모습이 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