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가. 정신과 의사이자 신학자. 베스트셀러 작가. 강연가. 하버드 대학과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에서 수학한 후, 10여 년간 육군 군의관(정신과)으로 일했다. 1978년, 마흔 두 살에 쓴 첫 책<아직도 가야할 길>은 ‘사랑, 전통적 가치, 영적 성장에 대한 새로운 심리학’이라는 부제가 보여주듯 ‘심리학과 영성을 매우 성ㄱ오적으로 결합시킨 중요한 책으로 평가되며 이후 뉴욕타임스의 최장기 베스트셀러 목록을 차지할 정도로 독자의 사랑을 받았다. 」
-1부-
혼돈에서 명료함으로-의학적. 정신질환적 관점들
01 플러그를 뽑다
나의 할머니 줄리엣은 자그마한 몸집에 무척 깐깐한 분이셨다. ~~~“아마 이번 크리스마스가 나한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도대체 왜 여든네 살의 불쌍한 노인네에게 주사 바늘을 꽂으려고 법석을 떨어야 하는 거지? 치매기도 있는 데다 어쩌면 깨어나지 못 할 수도 있는데 말이야. 행여 기적적으로 살아난다 하더라도 꼭 좋은 일이라고만 할 수도 없잖아?
그런데 정말 기적이 일어났다. 할머니가 의식을 회복한 것이다.
1주일이 지나고 2주, 3주가 지나도록 할머니는 여전히 24시간 내내 헛소리를 했다. 의사들은 할머니의 경우 만성이어서 어쩌면 회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부모님은 시설이 좋다는 요양원을 여기저기 서둘러 알아보기 시작했다.
요양원으로 옮기기 이틀 전에 병실로 들어가자 할머니는 침대에서 일어나 똑바로 앉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 집으로 가야겠다.”
이후 5년 동안 할머니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으며, 투정을 부리거나 불평하는 일도 없었다. 할머니는 언제나 행복해 보였고 재치나 유머 감각도 그 어느 때보다 좋았다. ~~~아흔한 살의 나이에 집에서 편히 눈을 감았다.
할머니가 맑은 정신으로 행복한 날들을 보내시던 5년 사이에 나는 릴리와 약혼했다. 내 신부가 될 사람이 중국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부모님은 이만저만 반대를 하신 게 아니다.
1959년 추수감사절 때, 결혼을 한 달 앞둔 우리 두 사람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뵈러 갔다. ~~~너희 결혼에 찬성한다고는 말하지 못하겠구나, 왜냐하면 찬성하지 않으니까.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건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내가 이러쿵저러쿵 떠들 일은 없을 게다.
토니와 나는 1965년 초여름에 만났다. 당시 나는 샌프란시스코 프레시디오의 꽤 규모가 큰 군병원인 레터먼 종합병원에서 정신과 레지던트로 근무한 지 거의 일 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토니는 서른 두 살의 공군 중사였다.
예상 했던 대로 토니의 전두엽에는 거대한 종양이 있었다.
토니가 내 인생에 다시 끼어든 것은 바로 이때였다. 내가 맡은 임무는 기껏해야 정맥 주사액이 잘 들어가는지, 그리고 전해질 균형이 잘 맞는지 살펴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의 가족에게 내가 책임감을 느낄 필요는 전혀 없었다.
토니를 맡은 지 나흘 뒤, 토니의 혈압이 위험할 정도로 급격히 떨어졌다. 일종의 쇼크 상태였다.
[삶의 질]
당시 스무 살이던 나는 할머니를 살리기 위해 의사들이 취했던 의료 조치가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할머니의 삶의 질이 너무 참담해 보였기 때문에 할머니를 포기한 것이었다.
다른 사람의 삶의 질을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에 대해서는 뒤에서 깊이 있게 살펴볼 것이다.
상당히 많은 노인들이 실제로는 치료가 가능한 우울증을 앓고 있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불치병인 치매에 걸린 것으로 오진을 받는다.
[과도한 조치란 무엇인가]
우리는 보통,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자신을 위해 결정을 내릴 정도의 의식과 능력이 있는 환자를 다루게 된다.
정신이 멀쩡한 암환자의 경우라면 방사선 치료나 화학치료를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생명선을 끊을 수도 있다.
의료 치료에 있어서 일반적인 경우, 과도한 경우, 지나치게 과도한 경우가 언제인지 결정하기에 애매모호한 거대한 중간 지대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 모호함의 중간 지대에서 나는 대체로 환자가 자기 의사를 밝힌 경우 이것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환자가 죽음을 결정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것]
맬컴은 2년 전인 65세때, 폐에 수술이 불가능한 종양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움푹 꺼진 그의 눈은 보는 사람조차 고통스러웠고 목소리는 너무 희미하여 알아듣기도 어려웠다. 그런데도 그의 정신은 꽤 맑았다.
[안락사 논쟁의 핵심]
02. 육체적 고통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가장 큰 두려움은 생명 유지 장치에 연결된 채로 죽는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도 바로 오랫동안 육체적 고통을 겪다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축복은 잠재적 저주]
오늘날 나병은 완치가 가능하지만 역사 전반을 통틀어 의학적 질병 가운데 가장 두려운 대상이었다. 사실 나병에 걸린다고 금방 생명을 잃게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나병은 전혀 치명적인 병이 아니다. 나병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이 병이 가차 없이 끔찍하고 만성적인 외형의 손상과 추한 기형을 유발시켰기 때문이었다.
나병의 원인인 나병균은 박테리아의 일종이다. 이 박테리아는 사람의 몸에 침입하면 사람의 신경 섬유를 따라 서식하면서 특별히 통각을 전달하는 아주 미세한 신경 섬유들을 파괴한다. 나병 환자는 자신의 발목이 부러져도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계속해서 걸을 수 있다. 발목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나병으로 인한 무서운 기형이 감염의 직접적인 결과라고 생각했다. 나병 환자의 눈에서 고름이 나오기 시작하다 결국 실명하게 되는 경우에도 환자의 눈에 그저 재가 들어갔을 뿐인데 그것을 느끼지 못해 발생한 일인지도 모른다는 걸 깨달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인도에서 의료 선교를 하던 미국인 폴 브랜드가 나병 환자의 신체 손상 대부분이 거의 국부적인 고통을 못 느끼는데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도 고작 수십 년 전의 일이다.
내 경험에 의하면 삶에 있어서 대부분의 축복은 잠재적인 저주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축복은 육체적 고통을 수반한다.
급성적인 육체적 고통은 그것이 가볍든 심각하든 사실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분명히 몸 어딘가에 문제가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신호가 없으면 우리 육체는 아주 빠르게 파괴되어갈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고통, 즉 통증을 줄일 수 있는 약이 있다. 이런 약은 주로 양귀비라는 식물에서 얻는데, 모르핀 같은 강력한 진통제들은 모두 아편이나 그와 매우 유사한 합성물에서 만들어 진다.
육체의 통증은 약함, 보통, 강함, 극심함 등 4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약한 통증은 참고 지낸다든가 아스피린이나 타이레놀, 이브프로펜 같은 일반 의약품으로 적절히 완화시킬 수 있다. ~~~코테인 같은 중독성 있는 진정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통증은 또한 급성과 만성으로 분류할 수 있다. 급성의 단기적 통증은 보통 그 원인이 밝혀지고 적절한 치료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통증 완화 약물을 투여하지 말아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
[가장 널리 행해지는 의료 범죄]
통증에 대해 적절한 처치를 하지 않는 것이 오늘날 가장 널리 자행 되는 의료 범죄다.
[중독에 대한 오해]
진정제들은 하나같이 중독성이 있다. 현대 약리학은 아직까지 중독성이 없는 강한 진통제 개발에 성공하지 못했다.
가장 강력한 것은 헤로인이다. 진정제는 육체적 고통을 완화시켜 줄 뿐만 아니라 그 약을 복용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희열을 느끼게 된다. 그 희열 때문에 사람들은 모든 정서적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03. 정서적 고통
육체적 고통과 마찬가지로 정서적 고통 또한 무언가 잘못됐다는 신호다.
그러나 실상 정신병의 특징은 종종 고통스러운 것에 비해 고통의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고통 없는 정신병은 나병과 정서적으로 유사한 점이 많다.
슬픔 또는 비탄에 빠지거나 우울하거나 화가 나고 걱정스럽거나 두렵거나 고통스러운 정서적 신호가 올 때 우리는 보통 그것을 줄이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막연하다.
정서적 고통에 대한 정신의학적 진단은 육체적 고통에 대한 진단과는 달리 좀처럼 명확하지가 않다.
진단은 적어도 두 가지 수준에서 내려져야 한다. 단지 병명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이 질환이 순전히 생물학적인 것인지 또는 순전히 심리학적인 것인지 아니면 두 개의 혼합인지를 검사해야 한다.
정신적으로 앓고 있으면서도 실제로 고통을 느끼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정신과 의사를 찾아오는 경우는 대부분 친척이나 경찰에 의해 끌려오는 경우다.
[정신분열증과 우울증]
미국에서는 약 500만 명이 정신분열증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어떤 고통의 감정, 예를 들어 비칸, 슬픔, 우울, 분노 등을 경험할 때마다 우리는 디스포릭(기분 나쁜)상태가 된다. 그 원인을 찾아보면 대부분 가까운 곳에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사업 파트너의 배신, 실직 등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비록 물질적인 검사로 진단할 수 없다 하더라도 정신분열증은 주로 생리적인 질병이라고 주장해왔다.
정신분열증은 대체로 유전되기 때문에 유전 질환의 하나다.
[심신증적 정신질환]
우리 뇌의 중심 부위에는 신경세포더미, 즉 신경 중추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이 자극을 받으면 우울증이라는 고통스러운 정서를 유발한다. 또한 그곳에는 분노나 행복감 같은 다른 특정한 감정을 일으키는 중추들도 있다.
삶에서 무언가가 우리를 화나게 할 때 우리는 그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행동을 보인다. 예를 들어 가해자를 꾸짖거나 분노의 편지를 쓰는 일 등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대체로 우울한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화가 수그러들지 않고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는 속수무책의 상황일 때라면 계속 우울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빠져나올 수 없는 환경이나 덧에 걸렸다고 생각할 때 우울한 감정을 느낀다. 그러나 흔히 그 환경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빗장의 일부는 적어도 그들 스스로가 만든 것이다.
우울증은 그 고통이 무언가를 포기할 필요가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라는 점에서는 유용하다고 할 수 있다. 우울증은 우리에게 사람 또는 임무를 포기하는 심리적 노력을 하게끔 동기를 부여한다.
우울증은 흔히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심리적. 영적 성장과 삶의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켜보려는 마음을 불어넣어준다.
가끔 우울한 감정은 아주 오래 지속되거나 더욱 심각해지기도 한다. 또는 그 두 가지 양상이 동시에 나타날 때도 있다. 이런 경우 정신과적 치료가 필요하다. 한편으로는 단순히 우울 중추의 과잉활동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럴 때는 환자가 자신의 중요한 생활을 바꾸려고 하기 전에 일단 약물로 우울 중추를 진정시키는 방법을 쓰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어린 시절 겪었던 사건에서 비롯된 병적인 죄책감이라든가 수치심처럼 깊이 자리 잡은 심리학적 요소가 환자의 변화를 막고 잇을 수도 있다. 이런 요소들은 심리 치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때때로 명확한 이유 없이 우울 중추가 활성화되기도 한다. 이런 사람은 눈에 띄는 사건이나 상황이 전혀 없을 때에도 우울증이 심각해진다. 이런 경우는 보통 심신증이 아닌 순수한 생물학적 현상으로, 종종 유전과 관련된 화학적 불균형에 기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경증과 성격장애]
심리적 고통의 대부분은 절대 질병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이 지녀야 할 조건으로서 고유한 부분일 뿐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조건은 무엇인가? ~~~인간의 조건이란 종종 우리의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는 세상에서 우리가 의지를 지닌 존재로서 살아가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 의지가 외부 세계의 현실과 충돌할 때마다 우리는 심리적 고통을 겪음으로써 그 싸움을 경험한다.
만약 낮선 사람이 우리 집 정원에 들어와 우리 의지에 반해 꽃들을 꺽기 시작 한다면 우리는 우선 분노라는 고통을 겪음으로써 싸움을 경험할 것이다.
비통한 느낌에는 슬픔, 우울증, 분노가 섞여 있게 마련이다.
고통스러운 감정은 정상적이며 얼마간 필요하기도 하다. 흔히 현실과 의지가 싸우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지닌 고유한 특성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싸움을 고통스럽다는 이유로 문제라고 표현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는 한 삶은 만성적인 질병, 노화, 죽음의 문제를 포함해 수많은 문제로 가득 차 있는 셈이다.
에리히 프롬은 사회화를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좋아서 하도록 학습하는 과정이라고 정의했다. 2세 아이가 느끼는 고통의 본질은 심리적 고통의 또 다른 형태인 굴욕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그것을 겪도록 만드셨다.
고통을 회피하는 가장 일반적인 수단은 각성제나 헤로인 같은 불법적인 약물을 복용하거나 그 고통을 줄이기 위해, 말하자면 그 문제를 잊어버리기 위해 술 같은 합법적인 것들을 사용하는 것이다.
문제로 인한 생존적 고통을 피하는 가장 흔한 방법은 노이로제라고 불리는 일부 자기기만의 상태로 가는 것이다. 이것의 효과 또한 전혀 오래 지속되지는 않지만 우리에게는 자기기만을 반복적으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칼 융은 한마디로 요약하기를 노이로제는 마땅히 겪어야 할 고통을 회피한 결과라고 했다.
노이로제의 역동성을 설명하기 위해 신경증적 공포의 범주를 시작해 보자. 프로이트는 많은 공헌을 했지만 특히 이런 공포의 중심 동력을 처음으로 알아낸 사람이다. 그는 이것을 감정전이라고 일컬었다.
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생존적 두려움을 자기가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은 객체 혹은 물체로 대체시킨다. 의사 초년병 시절 나는 이 같은 경우를, 머리에 총을 쏘아 자살한 매부의 일로 사흘간을 공황상태에 빠져 있다가 나를 찾아온 한 남자를 통해 경험했다.
이 남자는 두려움 때문에 심지어 혼자서 진료실에 들어오지도 못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아내의 손을 잡고 들어와서는 자리에 앉더니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실직이나 주가 폭락이 두려운가? 그것은 결국 자신과 가족이 굶주리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에서 생기는 두려움이 아닌가? 공포증의 대부분은 이런 기본적인 생존적 두려움에 기인한다.
두려움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는 선택의 문제다.
뱀을 두려워하는 것은 정상이라는 것을 알기 바란다. 실제로 이런 두려움이 우리 유전자 안에 각인되어 있다는 몇몇 증거가 있다. 그러나 두려움을 실제 공포증으로 만드는 것은 당사자가 얼마나 강하게 두려움을 느끼느냐에 달려 있으며,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요인은 두려움이 얼마나 그를 무기력하게 만드는가이다.
세상과의 갈등에 마주할 때마다 신경증이 있는 사람은 자동적으로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한편 성격장애가 있는 사람은 그럴 때마다 즉시 그것은 세상의 잘못이라고 여긴다.
일생을 살면서 겪는 생존적 고통에는 우리 책임인 것과 우리 책임이 아닌 것을 늘 정확히 구별해야 하는 데서 오는 고통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신경증과 성격장애 둘 다 이런 생존적 고통을 피하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성격장애가 있는 다수의 사람들은 앞서 언급했던 심리적 나병환자나 다름없다.
2부. 인간의 영혼은 존재하는가
05. 세속주의
세속적 인식을 가진 사람은 본질적으로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은 꽤 지적인 경향이 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소우주 가운데 하나인 은하계, 그 은하계 중에서도 아주 작은 태양계, 그중에서도 중간 크기의 지구라는 행성에 존재하는 60억 인류중 하나라는 것을, 그리고 다른 모든 이들도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아주 잘 안다. 따라서 지적일지는 모르지만 이런 사람은 이 거대한 현실 속에서 쉽사리 상실감을 느끼며 스스로를 중심이라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무의미하거나 무가치 하다는 느낌을 자주 경험 하곤 한다.
반면 신성한 인식을 지닌 사람은 자신을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 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에게 중심은 다른 어느 곳 특히 하나님 안, 신성 안에 있다. 자신을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지 않기에 이런 사람은 자신을 무가치하거나 무의미하다고 느끼는 세속주의자들보다는 그런 감정을 덜 느낀다. 스스로를 그 신성한 자와의 관계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또 그 관계에서 자신의 의미와 중요성을 찾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인식 유형은 순수한 형식으로 존재하기도 하고 혼합된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사람들은 대개 한 발은 신성한 인식에, 다른 한 발은 세속적 인식에 걸쳐 둔다. 게다가 세속주의와 종교성에도 다양한 유형이 존재한다. 더구나 우리는 종교적. 영적 성장단계에 내재한 세속주의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 4개의 단계를 논한 적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1단계 : 무질서한 반사회적 단계. 가장 원시적 단계로서 사람들은 종교적으로도 세속적으로도 보이지만 어느 모습이든 그들의 신념 체계는 아주 피상적이다. 이 단계는 무법 상태로 여겨지기도 한다.
2단계: 형식적이고 제도화된 단계. 율법을 엄격하게 해석하는 단계로 종교적 근본주의자(가장 종교적인 사람)들이 이에 속한다.
3단계 : 회의적이고 개인적인 단계. 대다수의 세속주의자가 여기 속한다. 이 단계의 사람들은 보통 과학적인 태도, 합리적, 도덕적, 인도적인 특징을 띤다. 또한 대체로 유물론적이다. 영적인 것에 회의적일 뿐만 아니라 증명될 수 없는 것에는 흥미를 갖지 않는 경향이 있다.
4단계: 신비주의적이고 종교적인 단계. 종교적으로 가장 성숙한 단계로, 법칙에 대한 영적 단계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 단계의 여성과 남성은 합리적이지만 합리주의를 맹목적으로 숭배하지는 않는다. 이들은 자신들 내부에 존재하는 회의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한다. 또한 확실히 정의할 수는 없지만 보이지 않는 질서에 깊이 연결되어 있는 것을 느낀다. 그들은 성스러운 신비로 편안함을 느낀다.
여론조사에 의하면 미국인 대다수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한다. 또한 영혼의 개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어휘로 구체화된다. 그러나 하나님이나 영혼이란 단어는 의료전문가들의 회의에서 거론되지 못하며, 학자들은 흔히 우리 사회를 세속적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사회가 왜 세속적이라고 불리는가?
많은 사람들은 상업적 활동에 종교적 윤리를 적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교회나 회당에 전혀 나가지 않는 사람들만큼 돈에 집착하고 재산을 축적한다.
06. 인간이라는 존재
영혼은 하나님이 창조하고 기르시는, 고유하며 발전적인 영원한 인간 정신이다.
이 정의가 철저한 세속주의자들에게는 횡설수설처럼 들릴 거라고 생각한다.
[신이 창조하다]
도대체 좋은 부모가 어떻게 해서 나쁜 아이를 가지며, 무관심하고 부주의한 부모가 어떻게 해서 좋은 아이를 갖는단 말인가?
나는 유전과 양육, 문화가 나를 만드는데 있어서 끼친 강력한 영향을 조금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그림에는 분명히 빠진 조각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큰 조각이 말이다. 나는 그 거대한 조각이 하나님이라고 믿는다.
이 하나님 이론에 직접적으로 함축되어 있는 의미는 세 가지다. 하나는 우리가 우리의 유전자보다, 우리의 어린 시절 양육 보다, 우리의 문화 보다, 심지어 우리 자신보다 더 우위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모든 것과 함께 우리에게는 특별히 영혼이 있다. 아니, 단지 함께 있는 것에 더하여, 존재의 가장 핵심을 이룬다.
두 번째는 우리는 단순히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 인생에 우연이 전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 각자는 가장 중요한 방식으로 설계되었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 함축된 의미는 우리가 어떤 목적 때문에 창조, 설계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목적이 무엇인지 모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장대한 드라마의 배우다. 우리는 일생동안 그 드라마가 어떤 내용인지, 거기에서 우리가 어떻게 우리 역할을 가장 잘 수행할지 조금이라도 알게 되기를 갈망한다. 그리고 우리는 알 수 있다.
나는 자살 대부분을 죄로 간주하며, 특히 교만의 죄로 여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창조자가 아니다. ~~~ 나는 나 자신을 양육하고 관리 할 수 있지만 꽃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하나님은 내 존재와 이해관계가 있다.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대로 우리를 창조했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는 뜻이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영혼은 모두 고유하다]
훌륭한 소설을 쓰기 위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인물 전개다. 위대한 소설가들은 소설 속 인물에 생기를 불어넣는 데 천재적 능력이 있기 때문에 독자들은 소설을 읽으며 등장인물들에게서 생생한 현실감을 느낄 뿐 아니라 실재로 그 인물에게 감정 이입을 하게 된다.
[영혼은 필연적으로 발전한다]
우리가 발전 가능한 존재가 아니라면, 하나님이 우리의 성장과 배움을 열망하지 않는다면, 왜 우리를 창조했을 뿐 아니라 계속해서 우리를 양육하겠는가?
실재로 인생을 끊임없이 배우는 기회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보다 유연한 자세로 삶을 대한다.
[영혼의 불멸성]
만약 사후 세계가 없다면 준비할 것도 없을 것이다. 또한 우리의 영혼이 불멸하는 것이 아니라면, 정말 그냥 그렇게 소멸하는 것이라면 죽음을 서두르지 않을 이유가 뭔가.
육체적으로 죽는 순간이 오기 전까지 영혼을 양육하고 성장 시키는 데에 쏟아 붓는 하나님의 노력을 생각할 때 그 영혼을 내버리거나 파괴한다는 건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아니,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뭔가 더한 것을 준비해놓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를 위한 사후 세계인 것이다.
[온 세상은 의식과 영혼을 지녔다]
나는 다른 피조물과 대화할 수 없기에 그것들에도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우리는 의식에 관해서도 비슷한 문제를 갖고 있다. 인간은 우월감에 빠져 대체로 인간들만이 유일한 의식의 소유자라고 추정한다. 하지만 이것은 가장 불확실한 추정이다. 실질적으로 차이는 있지만 다른 피조물, 식물에게조차 일종의 의식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많은 사례가 있다.
[정신 그리고 영혼]
1세기 전만 해도 물리학자들은 원자를 정확히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날 아원자 수준까지 연구를 진행하면서 그보다 더 깊은 수준은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질은 에너지로 변하고 에너지는 물질 안에 존재한다. 이때 에너지의 속도, 방향, 위치는 예측이 불가능하다. 물질의 기본 구성 요소는 현재 통계학적 확률의 복합적 장으로 설명되고 있다. 원자도 정신과 매우 비슷한 것처럼 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원자에 영혼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또는 원자에 개성이 있거나 물리학의 법칙이 신학의 법칙과 언제나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일단 아원자 수준 이상으로 파고 들어가면 물질은 언제나 더 예측 가능해지고 그 안에서 영혼의 특징이 되는 고유함은 거의 또는 아예 보이지 않는다.
물질은 물질일 뿐 영혼이 아닌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보다 이 사실을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 노년기에 들어서면 우리는 몸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볼 수 있다. 육체적 죽음이 점진적이라면, 죽음의 순간에 이를 때 몸이 더 빨리 쇠약해져가는 걸 알 수 잇을 것이다. 그러나 인격은 쇠퇴하지 않는다. 때때로 그것은 오히려 그 반대다. 실제 자신이 죽어가고 있음을 알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통해 우리는 육체적 쇠퇴가 진행될 때 정신(그의 인간 됨됨이, 그의 영혼까지)은 더 활기를 띠고 생동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한다.
그러다 순간적으로 즉시 정신은 사라지고 오직 시신, 곧 육체만이 남아서 쇠퇴의 과정을 계속 이어가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온전한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지만 몸의 부활에 대한 교리는 믿지 않는다. 내게는 육체와 영혼을 혼동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의 육체는 물질이며, 물질적이다. 우리의 영혼은 정신으로서 완전히 다른 법칙을 따른다. 우리가 육체에 너무 익숙해 있기 때문에 물질주의자들은 육체가 없는 어떤 존재를 상상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하나님의 상상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07. 죽음의 과정에서 배우는 것
바로 앞 장에서 나는 안락사를 비판하는 두 가지 이유를 서술했다. 하나는 명백히 신학적이며 보통 모든 자살과 관련된 것이다.
[죽음과 임종의 단계]
의학박사인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는 임종에 이른 사람들을 만나 감히 그들이 죽음을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를 계속해서 물었던 최초의 학자였다.
부정Denial → 분노Anger →타협Bargaining→우울Depression→수용Acceptance
정신과 의사로서 나는 수용 단계의 환자를 여러 명 만나는 행운을 누렸다.
당사자들은 자신의 병을 간결하고 사실적으로 설명하면서 죽음이 임박한 사실도 자진해서 얘기해 주었다.
[퀴블러-로스의 단계와 배움]
만약 상황이 계속해서 나빠진다면 정신과 의사 일을 점차 포기 하는게 옳을 것이 아닌지를 생각해보았다. 오리무중이었다. 그러나 전문가로서의 자부심 일체를 환자 한 명에 두고, 그 환자가 나를 실망시켰다고 해서 울화가 치밀고, 심지어 어떤 환자의 행동 하나하나에 낙담하는 건 적절치 않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것은 비앙카에게 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공정한 일이 아니었다. 다시는 그런 식으로 함정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했다. 좋든 싫든 나는 적어도 자존심을 어느 정도 포기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었을 때 나는 더 이상 우울하지 않았다.
나는 그 다음 치료를 시작하면서 앞 주에서 보였던 내 우울증에 대해 그 그룹 일원들에게 사과했다.
우울증은 일종의 심리적 영적 작용이고 그것을 겪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대부분 우울증에서 도망침으로써 그것을 피하려고 애쓸 것이다. 하지만 그럴 경우 아무것도 배울 수 없으며 치료 또한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우울증을 완전히 다룰 수 잇을 만큼 충분히 오랜 시간을 견뎌낸다면 그 우울증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고 마침내 그 해결의 끝에서 어느 때보다 더 행복하고 지혜로워져 있을 것이다.
첫 번째 단계는 자신이 우울증에 걸려 있음을 알고 그 사실에서 도망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자신이 명백히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심각한 우울증에 빠졌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있다. 정신과 의사를 찾아오는 심각한 우울증 환자의 절반은 다른 증상, 즉 불면증, 막연한 통증, 불안감, 걱정, 부부 문제 등의 증상과 더불어 우울증을 부정한다.
실제 우울증에 빠졌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우울증 작업의 첫 단계가 끝나고 두 번째 단계가 시작된다. 두 번째 단계는 자신에게 왜라고 묻는 것이다. 내가 왜 우울증에 빠졌지?
우울증의 느낌은 흔히 부수적인 바이러스 질병과 유사하다. 유행성 인플루엔자와 단핵증(말초 혈액 가운데 백혈구의 하나인 단핵구가 보통 이상으로 증가하는 병증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 비슷한 것으로 악명 높지만 이와 유사한 증상은 더욱 경미한 질병에서도 종종 발생한다.
가벼운 우울증이 느껴지고 그런 다음엔 미열이 오르고 관절이 쑤시는 증상이 나타나는 것 때문에 몇 시간을 고심한 경험이 수십 차례가 넘는다. 그리고 나선 결국 이런 깨달음에 이른다. 나는 진짜 우울증에 빠진 게 아니야. 단지 사소한 감기였다고.
진짜 우울증에 빠져서 매일매일 자신에게 왜라고 묻는데도 대답을 찾을 수 없는 경우다.
감당할 수 없는 화, 감당할 수 없는 분노의 감정은 거의 예외 없이 우울증의 원인이 된다는 말을 기억하라. 그리고 간단히 자신에게 물어보라. 내가 무엇 때문에 화가 났지?
이때 주의할 점은 우울증은 종종 다윈 결정 성향, 다시 말해서 한 가지 원인이 아니라 그 이상의 원인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흔히 화를 일으킨 어떤 무언가가 이유가 아니라 여러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내가 경험한 가벼운 우울증의 대다수는 그랬다. 나는 오후 2시쯤 우울함을 느낀다. 이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그날 아침에 다섯 가지나 잘못된 일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 자체로 보아 각각의 일은 다소 언짢은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마지막 것은 속담처럼 낙타의 등을 부러뜨리는 마지막 한 가닥 지푸라기가 돼 인내의 한계를 무너뜨리는 기폭제가 되고 만다.
세 번째 단계는 자신에게 이렇게 질문하면서 시작된다. 이런 감당 못할 화를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때때로 이 단계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필요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내 우울증이 사소한 욕구 불만이 싸여 비롯된 결과 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면 내가 할 일이란 편안하게 푹 자는 것이고 그러고 나면 다음날 상쾌한 아침을 맞을 것이다. 스칼렛 오하라의 불후의 명언을 빌자면 “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
그러나 심각한 우울증이라면 잠은 그에 대한 해답이 되지 못한다. 사실 이제 우울증 작업은 더 어려워지고 더 힘들어진다. 이 감당할 수 없는 화를 없애려면 뭘 해야하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뭔가를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내 안에 있는 무언가를 말이다. 내 자신의 일부를 포기해야만 한다. 예를 들어 실패한 체스 게임을 통해 나는 내 과도한 승부욕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와 비슷하게 상대방(환자)에 대한 부적절한 분노는 내 자존심을 환자의 회복 여부에 두지 말아야 함을 가르쳐주었다.
우울증 작업에서 이 단계가 너무 힘들게 느껴지는 이유는 자신의 한 부분을 포기하는 것에 본능적인 저항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많은 의사들은 이 시점에서 환자들이 중도 포기하고 의사의 도움을 마다하는 것을 경험한다. 그들은 아무리 자신에게 파괴적이고 불필요한 부분일지라도 그 부분을 포기하느니 차라리 우울증과 함께 있는 것을 선호하는 것이다.
내가 버려야 한다는 대상은 과도한 승부욕이나 지나친 자존심처럼 에고에 속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 교만, 비현실적인 환상, 빈정대는 버릇 등등 끝이 없다. 더 이상 자신에게 유익하지 않은 것은 어떤 것이라도 해당된다.
4단계이자 마지막 단계는 바로 그것을 실행하는 것이다. 그것을 포기해 버리는 것이다. 부딪쳐 떨쳐버리는 것이다. 죽이는 것이다. 잘라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말처럼 쉬운게 아니다. 어쩌면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들지도 모른다. 분명 이것은 자신(또는 에고)을 수술하는 과정이며 보통 자괴감에 의해서만 유발되는 일이다.
여기서 퀴블러-로스가 우울의 다음 단계로 명명한 수용은 우울증 작업을 끝마쳤을 때 이르게 되는 영적으로 평온한 상태다. 그녀는 죽음 그 자체에 대한 수용과 자괴감에 그 초점을 두고 있다. 즉, 죽음은 해답도 없고 우리가 싸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자괴감 말이다.
자괴감, 말하자면 자신의 지배권을 포기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에 보다 초점을 맞출 것이다.
에고를 패배시키는 것은 고통스럽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 그러나 그 과정을 극복하면 새로운 삶이라는 열매를 수확하게 된다. 이처럼 우울증에 대한 작업은 영혼의 학습이며 그 결과는 거의 부활에 버금가는 새로운 삶이다.
기존의 생각을 버리고 새로운 학습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이런 죽음의 단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가장 작은 집단인 부부에 관해 말하자면, 나는 오랫동안 성공적으로 지내온 결혼 생활도 퀴블러-로스가 말했던 죽음과 죽어가는 과정과 같은 단계를 거친다고 생각한다.
결혼하고 처음 5년 동안 우리는 서로가 더 이상 낭만적인 사랑에 빠져 있지 않다는 고통스러운 사실을 부정하는 데에 급급했다. 이 부정이 무너지자 우리는 서로가 기대하는 영혼의 반려자가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후 거의 10년 가까이 싸움을 일삼았다. 말하자면 비난의 시간이었다. 끝없이 상대의 결점을 늘어놓으며 그것들을 고치려고 노력했다. 나는 몇 번이고 내 생각대로 릴리를 바꾸려 했고 그녀 또한 자신의 방식대로 나를 변화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뀌지 않았던 우리는 이후 서로 부딪치지 않고 평화롭게 지낼 수 있도록 경계와 규칙을 협의했다. 이 행동은 타협과 같은 것이었다. “당신이 그것을 하면 내가 이것을 할게.” 우리는 둘 다 이렇게 말했지만 이런 방법이 즐거움을 주지는 못했다. 결혼 한지 20년이 될 때쯤 우리는 결혼 생활에 심각한 우울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전혀 의도한 것은 아니었어도 차츰 릴리의 몇몇 결점들이 좋아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결점 하나하나가 내가 매우 존경하고 신뢰했던 그녀의 장점들의 이면이었음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25년 이상 살아온 부부들을 보면 대개 20년 쯤 됐을 때 서로를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우기 시작한다. 비꼬는 말 같지만 우리 인간이 얼마나 빨리 배우는지 놀랍지 않은가?
과거 15년이 넘도록 릴리와 나 그리고 공동체격려재단foundation for community encouragement의 여러 지도자들은 전 세계에 적게는 10명에서 많게는 400명으로 구성된 약 1천개의 단체를 대상으로 공동체에 대해 가르쳐왔다. 우리는 2~4일간의 공동체 건설 워크숍을 통해 교육을 진행했다. 이런 워크숍의 중요한 목적은 각 집단에게 우울증 작업을 가르치는 것이다. 집단이 이 작업을 가장 심도 깊게 진행하는 과정을 우리는 ‘마음비우기’라고 부른다.
마틴은 완고하고 우울해 보이는 60세 노인이었다.
무서워요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마음을 비운다는 게 이런 건가요? 나는 그것이 뭘 의미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꼭 죽을 것만 같아요. 두렵습니다.
진실한 공동체가 되기 위해 집단의 구성원들 각자가 버려야만 하는 것들은 대부분의 인간에게 내재된 보편적인 특성이다.
고정시키려는 욕구, 경청을 방해하는 언쟁의 태도, 무엇이든 공식화 하려는 욕심, 한편으로는 수동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지배하고 싶어 하는 성향, 통제의 욕구등이 그것이다.
이런 우울증 작업에서 어떤 것을 포기하거나 버리는 행위를 중요한 신학적 용어로 케노시스kenosis(예수의 신성 포기)라고 하는데 스스로 자기를 비우는 과정을 가리킨다. 케노시스는 위대한 힘을 지닌다.
케노시스 또는 자기 비움의 목적은 정신과 영혼을 완전히 비우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새롭고 더욱 활력이 넘치는 것들이 들어오도록 여지를 만든다는데 있다. 기독교에서 자신을 온전히 비운 개인은 빈 그릇과 다름없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에고를 충분히 유지시켜 그릇의 내벽 역할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 그릇은 어떤 종류든 상관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이상으로 충분히 에고를 비움으로써 진정한 성령 충만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그 목적은 영혼의 소멸이 아니라 영혼의 확장이다.
우울증 작업을 마친 단계에서 죽어가는 사람은 수용의 단계에 도달한다.
[케노시스의 길을 간다는 것]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음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늙어가는 것 또한 부정한다. 보통 60대, 심지어 70대 초반의 사람들 상당수가 여전히 스스로를 중년으로 생각한다.
우리가 몇 살이든 간에 한계 없이 살 수 있다는 생각은 어리석다. 오히려 나이가 들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점점 늘어만 가는 우리의 한계를 수용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나이를 먹는 것과 죽어가는 것을 환영하지 않는 것처럼 한계와 상실도 환영하지 않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이처럼 한계와 상실에 맞닥뜨리게 되면 몹시 서글퍼진다.
인생은 첫 출발부터 우리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차츰 줄어드는 과정이다.
그러나 노년에 이르면 그 깍아 내기의 속도는 더욱 빨라진다. 너무 빨라서 마치 폭력처럼 느껴지고, 더 이상 깍아 내는 정도가 아니라 강제로 옷을 벗겨내는 것 같아진다.
힘에 집착하고 안전에 대한 환상을 끝없이 추구하며, 상실을 부정하고 한계를 받아들이길 거부하는 것이 에고의 본성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도대체 이런 것들에 대해서 어떻게 스스로를 비울 것인가? 그리고 왜 그래야 하는가? 우리는 왜, 어떻게 가끔 자발적으로 힘을 포기하고 소중한 환상을 버리는 선택을 하며 부정을 극복하고 수용에 도달하는가?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에고가 가끔은 현명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우리는 돌 벽에 대고 이마를 들이받는 일에 싫증을 낼 수도 있다. 또 우리의 환상이 우리를 죽이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그 환상을 버리는 것이 치유를 향한 길임을 깨달을 만큼 충분히 똑똑해질 수도 있다. 에고가 우리 길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우리 자신의 최대의 적은 에고라는 부처와 예수의 깨달음에 도달하게 될지도 모른다.
케노시스는 결코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거의 확신하지만, 만약 내게 영적 신앙체계가 없었다면 나 자신도 죽음과 죽어가는 과정이 요구하는 환상과 권능을 내버리고 모든 것을 수용하면서 케노시스 행로를 갈 수 없었을 것이다. 내 에고를 덮고 있는 어떤 위선의 옷도 남김없이 완전히 발가벗기를 바라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면, 내가 하나님과 개인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어서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의 분노와 소유욕에 대해 불평할 수 없다면, 내가 가진 영혼의 고귀한 운명이 철저하게,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것임을 확신하지 않았다면, 나의 진정한 힘은 나의 영혼에 거주하고 내가 행한 모든 효과적인 치료는 내 진실 된 존재, 나의 영혼으로부터 방출된 하나님의 역사이며 이 모든 것이 그의 창조라는 것을 확실히 믿지 않았다면, 내가 저질렀던 어리석고 사악한 일들은 내 에고와 에고의 자기 보호적인 구조에서 발생했다는 것을 확신하지 않았다면, 내 에고는 일시적으로 필요했을 뿐, 이제 그 에고가 최선을 다해 하나님과의 협력하기로 선택함으로써 내가 태어난 날부터 저지른 모든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면, 나는 아마도 케노시스의 길을 갈 수 없었을 것이다.
08 안락사를 선택한 사람들
검토해본 것 중에 가장 설득력 있고 간결하면서도 유익한 것은 1995년 5월22일자<뉴요커>에 실린 ‘자신의 죽음 A Death of One's Own'이라는 제목의 긴 기사였다.
처음에 난소암 진단을 받자마자 솔로몬의 어머니는 만약 말기가 되면 안락사를 시켜달라는 말을 공개적으로 더 자주했다.
이성적인 자살은 우울증 때문이거나 어떤 다른 심리적 장애 때문에 흐려진 정신 상태에서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자살이 본질적으로 비이성적이고 교란된 심적 상태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는 대조적으로 솔로몬은 일부 자살은 이성적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은 몇 가지 현명한 r여고를 덪붙인다. 그는 우울증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는데 모두 다 치료 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우울증인지, 아니면 어떤 고난에 대한 이성적인 반응인지를 구별하는 것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4장에서 소개했던, 고의로 굶어죽은 빅토리아가 바로 그런 경우다. 그녀는 당시 우울증에 빠져 있었다. 또한 연로했고 신체적인 장애가 있었으며 만족스럽지 않은 결혼으로 외로워했다. 항우울증 약들도 효과가 없었다. 심리치료에 성실하게 임했더라면 더 나아졌겠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비록 우울증을 앓았지만 결코 정신병자가 아니었고 사실 꽤 이성적이었다.
솔로몬은 또한 키보이언 박사와 마찬가지로 좀 더 강경한 안락사 옹호자들의 경우 ‘이성적인’이라는 말을 ‘곧바로 시행하는’의 의미로 생각하는 것 같다는 점도 지적한다.
그는 이성적인 의사결정을 ‘서서히 진행되며 복합적이고 특유한 과정으로서, 그것의 복합적인 요인들은.... 대단히 개인적이라고 정확히 설명한다.
그는 분명히 말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자살은 자살일 뿐이다.” 그는 분명히 말한다. “자살은 그에 연관된 모든 사람들에게 어찌해볼 도리 없는 결정적인 느낌. 슬픔, 일종의 독이다.”
그럼에도 기사의 막바지에 그는 자신도 말기의 병을 앓거나 외롭고 심신이 약화된 노년이 된다면 스스로 안락사를 선택할 것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양면성ambivalance을 얼마나 잘 다루는가의 문제는 우리 인간들이 인생의 전반에 걸쳐 당면하게 되는 가장 큰 심리적 영적 도전 중 하나다.
원자가valance라는 말은 보통 원자 또는 아원자 입자의 전하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는 단어다. 예를 들어 양자는 양전하를 지니고 전자는 음전하를 지닌다. 미립자의 경우는 전하라는 것이 문제될 게 없다. 예를 들어 자석은 반대의 것이 서로 끌어당기고 입자 내의 다른 전하들은 그들을 함께 붙어 있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인간의 심리는 그렇지 않다. 왼손과 오른손 둘 다 똑같이 능숙하게 사용하는 사람의 양손잡이라ambidextrous라는 단어에서 보듯 접두어인 ambi는 둘 다를 의미한다. 그러나 심리학에서 영면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감정을 말하는 것으로, 개인의 삶에서 어떤 문제에 대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 둘 다의 감정을 지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에 양면성은 분열된 느낌을 뜻한다.
매일같이 어떤 상황에서 양면성을 지니는 것은 극히 정상적이다.
부모나 배우자가 자살을 도와달라고 할 때 가슴이 찢어지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게있겠는가?
양면성은 자연스러운 특성이지만 그것을 다루는 방식은 건강한 경우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 대부분의 양면성은 인생의 생존적 고통 중의 하나로 간주될 수 있다. 고통스럽기 때문에, 즉 계속해서 분열된 느낌을 갖는 것 자체가 아픔이기에 가능한 빨리 그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울러 인간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 달려라“라고 배웠기 때문에 종종 너무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한 편은 억누르고 다른 한편은 부각시키는 것을 의미하므로, 결과적으로는 양면성에 대한 건강한 해결이 아니라 아주 단순하고 때로는 파괴적인 일종의 흑백 논리가 되어버린다.
병적으로 한 쪽만 선택함으로써 사람들이 얼마나 양면성에서 벗어나려고 하는지에 관한 사례만으로도 책 한 권을 펴낼 수 있을 것이다. 양면성에 가장 건강하게 대응하는 것은 양면성을 받아들이고 불확실성과 대립의 감정을 감내하며 생존적 고통을 수용하는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본질적으로 모호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결정이 정당한지를 두고 계속해서 의문을 품어야 한다.
내 인생의 지배자는 바로 나인가? 아니면 나의 주치의인가? 또는 국가란 말인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이들의 균형을 정교하게 협의하는 것일까? 그는 하나님이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 같다. 하나님이 잠재적인 이해 관계자의 목록에서 빠져 있는 것이다.
3부 미래로 - 우리 사회가 이렇게 바뀔 수 있다면
09. 조력자살
안락사를 원하는 환자의 요청을 의사가 반드시 허락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예를 들어 의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다. “환자분은 지금 너무 우울한 상태라 그런 결정을 내릴 만한 상황이 아닙니다. 감정이 좀 나아지면 다시 고려해봅시다.
지금까지도 의대생들은 죽음과 죽어가는 것, 혹은 선진적인 통증 관리 기술에 대해서는 거의 또는 전혀 훈련을 받지 않는다.
호스피스 간호를 손쉽게 이용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나는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안락사의 권리도 열렬히 지지할 것이다. 하지만 호스피스 간호의 기능을 고려할 때 조력 자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안락사의 확대가 아니라 호스피스의 확대임이 분명해진다. 사실 일의 순서상 죽음을 앞 둔 환자에게 만족스런 호스피스 간호를 받을 헌법적 권리가 있음을 정립하는 것이 우선이다.
호스피스 간호는 의학적으로 판정해 6개월 이상 살지 못할 환자에게만 제공될 수 있다는 규정이 있다. 이런 판정은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호스피스 간호를 제공하는 사람들은 이 규정에 의문을 품고 있으며 때로는 그것을 왜곡하기도 한다.
집안에서만 지내야 하는 사람, 집이 없는 사람, 배우자가 사망했거나 가족들이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 끔찍하게 외로운 사람들도 생각해 본다.
만성적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이 안락사를 원할 때에도 귀를 기울여야만 할 것이다. 실제 우선순위를 따져보더라도, 상태의 부침이 심해서 고통을 겪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호스피스 간호를 받아야 할 말기의 환자들보다도 그들이 오히려 권리를 주장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과연 어떤 판결을 내릴 것인가? 나는 의사 조력 자살이 불법이라는 현재의 판단이 유효하다고 판결할 것이다.
●만약 조력 자살을 완전히 합법화함으로써 그것이 하나의 권리로 받아들여지게 되면 사회 전체에 심각한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우리의 삶이니 우리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식의, 영혼을 부정하는 또 다른 메시지가 될지도 모른다.
● 합의점을 찾아 특정한 상황에서만 조력 자살을 합법화하기로 결정 한다 해도 이 또한 우리를 합법적인 수렁으로 빠뜨리는 일이 될 것이다.
● 우리 사회는 아직 의미 있는 방법으로 안락사 문제를 해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육체적 고통 완화에 대한 권리, 호스피스 간호에 대한 권리, 완전한 세속교육이 아닌 공교육에 대한 권리, 영혼과 인간의 의미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 할 권리, 만성적 환자들이 유사 안락사를 행할 권리 등이 그것이다.
나는 안락사가 사회 전체의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는 이야기로 이 장을 시작했다. ~~대중이 한 발 물러나 있게 하려는 게 아니라 교육받은 참가자로서 이 논쟁에 참여하도록 독려하기 위해서이다.
퀼 박사의 의사 조력 자살에 대한 잠정적 임상 기준 7가지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환자가 반드시, 자유의지와 자기 결정에 따라, 고통을 지속하기보다는 죽고 싶다는 의사를 명확히 반복적으로 요청해야 한다.
2. 환자의 판단이 왜곡되어서는 안 된다.
3. 환자는 치료가 불가능하며 심각하고 참을 수 없는, 지속적인 고통을 겪는 상태여야만 한다.
4. 환자의 고통과 조력 자살 요청이 부적절한 통증 완화 치료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의사가 확신해야 한다.
5. 의사 조력 자살은 의사와 환자 사이에 반드시 의미 있는 관계가 형성된 상황에서 시행되어야 한다.
6. 경험이 있는 다른 의사의 상담도 필요하다.
7. 위의 각 조건을 입증하는 명확한 문서가 있어야 한다.
10. 안락사 논쟁에 대한 희망
영혼이론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 수십 가지의 방법이 잇을 수 있다. 나는 대학과 대학원, 의료계와 사업 등 모든 분야의 교육자에게 가능성 있는 가장 창조적인 것을 구체화해보라고 권유한다.
사회는 젊은 구성원들에게, 또는 누구에게든 죽음과 죽어가는 것에 대해 가르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것 같다.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 바로 영혼의 개념이다. 내게는 안락사 대부분이 세속적 현상으로 보였으며 그 속에 위험적인 요소가 있다고 판단된다.
영혼은 안락사보다 더 큰 주제다. 진정으로 큰 문제는 우리 사회가 안락사 문제에 어떻게 대응해갈 것인가가 아니라 우리가 영혼과 영혼의 성장을 독려하는 사회를 원하는가의 여부다. 거의 모든 안락사 논쟁의 복합성은 결국 간단한 질문 하나로 해결 될 수 있다. “우리는 영혼과 영혼의 성장을 독려하는 사회를 원하는가?”
[Review]
모든 것은 급격히 찾아온다. 불행도 그렇고 행복도 마찬가지다. 자연의 이치는 시소와 같아서 평형을 이룰 때에만 안전하다. 그러나 평형이 깨지는 순간 실로 짧은 시간에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는 오르내림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노화도 그와 같다. 어느 시기를 지나면 상상하지 못하게 급하게 진행되고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어느 신문 기사에서 본 것으로 대략 75세까지는 큰 병이 없는 사람이라면 노후의 징조는 크게 나타나지 않지만 그 시기를 지나면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고 했다. 꼭 75세라는 시점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노화에는 급격한 시점이 있다는 뜻이다.
얼마 전 티비를 보다가 CBS 방송에서 말기 암 환자가 젊은 나이에 가족을 두고 마지막 작별을 하는 눈물겨운 장면을 보게 되었다. 세 자녀를 두었는데 큰 딸이 열 두 살이고 막내가 다섯 살이 채 안된 것 같아 보였다. 오랫동안 병 치료로 인해 지칠 대로 지친 얼굴로 자녀 하나하나에게 천국의 소망과 함께 마지막 부탁을 하는 모습에서 죽음을 이기는 위대한 승리감의 표정을 보았다. 그녀는 그 후 일주일 정도 후에 운명하셨다고 했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맞이하게 될 마지막으로 생을 마감하는 모습을 대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스스로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하지 못한다. 이 책은 논란이 되고 있는 안락사의 옳고 그름보다는 죽음에 대비하는 바른 태도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하버드 대학과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에서 수학하였고, 사상가. 정신과 의사이자 신학자. 베스트셀러 작가. 강연가로서 명성을 얻은 그의 글은 특히 심리학과 영성을 성공적으로 결합시켰다는 점에서 유명해졌다.
죽음은 생에 있어서 변화의 종점이라는 점에서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크게 다를 것이다. 육체는 소멸하지만 영혼은 영원하다고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저자는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또, 인간의 세속적 감정을 탐구하는 정신과 의사로서 죽음에 대하는 인간 심리에 대한 과정을 묘사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특히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의 죽음에 이르는 단계인 “부정Denial → 분노Anger →타협Bargaining→우울Depression→수용Acceptance”에 대한 과정을 심리학적으로 자세하게 다루었다.
우리나라는 법적으로 환자의 죽음을 인위적으로 앞당기는 안락사는 허용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임종이 임박한 환자에게서 본인 또는 가족의 동의로 인공호흡기 등 연명의료를 중단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한다. 2000년대 이후 말기 암 환자들을 위한 보건복지부 산하 호스피스센터를 운영하며 존엄한 삶을 위한 돌봄 병동과 호스피스 교육 훈련을 병행하고 있다. 평온한 노후와 죽음, 가족들과 아름다운 이별은 누구나 꿈꾸는 일이다. 그러나 정작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런 행복한 죽음을 맞지 못한다. 최근의 조사에 의하면 국민 80% 이상이 안락사에 대한 필요성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는 보도가 있다. 고통스런 죽음을 맞는 당사자는 물론이고 가족들의 어려움도 크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증가추세는 분명 우리사회가 옳지 않은 길로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미래에 닥칠 자신의 죽음뿐 아니라 타인의 죽음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회 각 분야에서 보다 원천적으로 죽음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주장이 설득력 있다.
<본문>
“인생은 첫 출발부터 우리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차츰 줄어드는 과정이다.”
“그러나 노년에 이르면 그 깍아 내기의 속도는 더욱 빨라진다. 너무 빨라서 마치 폭력처럼 느껴지고, 더 이상 깍아내는 정도가 아니라 강제로 옷을 벗겨내는 것 같아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음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늙어가는 것 또한 부정한다. 보통 60대, 심지어 70대 초반의 사람들 상당수가 여전히 스스로를 중년으로 생각한다.”
“우리가 몇 살이든 간에 한계 없이 살 수 있다는 생각은 어리석다. 오히려 나이가 들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점점 늘어만 가는 우리의 한계를 수용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성적인 자살은 우울증 때문이거나 어떤 다른 심리적 장애 때문에 흐려진 정신 상태에서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자살이 본질적으로 비이성적이고 교란된 심적 상태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는 대조적으로 솔로몬은 일부 자살은 이성적일 수 있다고 믿는다.”
“도대체 왜 여든네 살의 불쌍한 노인네에게 주사 바늘을 꽂으려고 법석을 떨어야 하는 거지? 치매기도 있는 데다 어쩌면 깨어나지 못 할 수도 있는데 말이야. 행여 기적적으로 살아난다 하더라도 꼭 좋은 일이라고만 할 수도 없잖아?”
“상당히 많은 노인들이 실제로는 치료가 가능한 우울증을 앓고 있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불치병인 치매에 걸린 것으로 오진을 받는다.”
“의료 치료에 있어서 일반적인 경우, 과도한 경우, 지나치게 과도한 경우가 언제인지 결정하기에 애매모호한 거대한 중간 지대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 모호함의 중간 지대에서 나는 대체로 환자가 자기 의사를 밝힌 경우 이것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육체적 고통과 마찬가지로 정서적 고통 또한 무언가 잘못됐다는 신호다. ”
“정서적 고통에 대한 정신의학적 진단은 육체적 고통에 대한 진단과는 달리 좀처럼 명확하지가 않다.”
“우울증은 그 고통이 무언가를 포기할 필요가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라는 점에서는 유용하다고 할 수 있다. 우울증은 우리에게 사람 또는 임무를 포기하는 심리적 노력을 하게끔 동기를 부여한다. ”
“만약 사후 세계가 없다면 준비할 것도 없을 것이다. 또한 우리의 영혼이 불멸하는 것이 아니라면, 정말 그냥 그렇게 소멸하는 것이라면 죽음을 서두르지 않을 이유가 뭔가”.
“육체적으로 죽는 순간이 오기 전까지 영혼을 양육하고 성장 시키는 데에 쏟아 붓는 하나님의 노력을 생각할 때 그 영혼을 내버리거나 파괴한다는 건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아니,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뭔가 더한 것을 준비해놓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를 위한 사후 세계인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화, 감당할 수 없는 분노의 감정은 거의 예외 없이 우울증의 원인이 된다는 말을 기억하라. 그리고 간단히 자신에게 물어보라. 내가 무엇 때문에 화가 났지?”
“우리가 몇 살이든 간에 한계 없이 살 수 있다는 생각은 어리석다. 오히려 나이가 들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점점 늘어만 가는 우리의 한계를 수용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나이를 먹는 것과 죽어가는 것을 환영하지 않는 것처럼 한계와 상실도 환영하지 않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이처럼 한계와 상실에 맞닥뜨리게 되면 몹시 서글퍼진다.”
“영혼이론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 수십 가지의 방법이 있을 수 있다. 나는 대학과 대학원, 의료계와 사업 등 모든 분야의 교육자에게 가능성 있는 가장 창조적인 것을 구체화해보라고 권유한다.”
“사회는 젊은 구성원들에게, 또는 누구에게든 죽음과 죽어가는 것에 대해 가르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것 같다.”
“영혼은 안락사보다 더 큰 주제다. 진정으로 큰 문제는 우리 사회가 안락사 문제에 어떻게 대응해갈 것인가가 아니라 우리가 영혼과 영혼의 성장을 독려하는 사회를 원하는가의 여부다. 거의 모든 안락사 논쟁의 복합성은 결국 간단한 질문 하나로 해결 될 수 있다. “우리는 영혼과 영혼의 성장을 독려하는 사회를 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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