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 이루고져 한 ’나의 꿈‘
그러고 보니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 노크를 한지도 만 4십 년이 넘은거 같다. 서울시 영등포구청에 있을 때 행정학과를 입학하여 이제 8십이 다 되도록 책을 못 놓고 있으니, 평생교육기관으로 우리 사회의 전문지식인을 양성하고 국가와 사회발전에 기여하는 대학으로 1972년 3월에 서울대학교 부설 방송통신초급대학으로 전국에서 지식의 갈등을 느끼고 사회의 각 분야에 열심히 일하며 그 분야에 전문인으로 성장하여 이 사회를 선도하는 유능한 젊은이를 양성 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나주의 농촌에서 고등학교를 졸업을 하고 서울로 상경을 하여 더 넓은 사회에 대학을 다니고 더 큰 꿈을 이루고져 상경하여 대학을 노크를 하였으나 농경사회의 경제적인 여건,그리고 노부모님을 부양하여야 할 위치에서 대학교 2학년을 다니다. 다닐수가 없어 갖은 노력 끝에 ‘서울시 공직’으로 근무를 할 수가 있었다.직장에서 동료가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행정학과를 다닌 걸 보고 나도 행정학과에 편입을 하여 다니게 되었다.
그때에는 학교의 여건이 않좋아 새벽 5시에 기상하여 라디오 리시버를 사용하여 방송을 듣고 공부를 하여야 하고 그 시간을 놓치면 그만 그 분야를 공부를 못하게 되어 새벽의 강의 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하여 노심초사 하면서 학교공부를 하였던 추억이 아스라이 생각이 난다. 숙제로 리포트 작성을 하기 위하여 도서관에서 다른 책들을 참고로 작성을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실력이 늘은 거 같고,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출석 수업으로 ‘정책형성론’을 듣고 공부를 할 때에는 내가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학생으로 착각을 하기도 하였다. 하기사 직장에서 상사분의 ‘사례보고서’로 정책형성론을 초안을 잡고 써드려서 근무평정을 잘 받아 승진을 할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그리고 직장의 승진시험에 행정학을 평상시에 하여서 시험에 합격을 하여 행정학자 ‘마슬로’의 이론에 의한‘자아형성’을 하는 기회를 갖기도 하였다.
그때의 가정의 형편상 일반대학을 다니기에는 도저히 경제적인 형편이 않되고 하여 방송통신대학에서 주경야독을 하여 자기를 개발하고 서울시민들을 위한 봉사행정을 위하여 항상 공부를 하는 공직자로 자세를 가다듬었다. 특히 서울시 행정은 도시행정으로 복잡한 민원과 이해관계가 큰 업무들이 많아 항상 법 집행을 위하여 어려움을 느끼고 판례,사례를 찾아 열심히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않되는 어려운 일들이 많은 서울시 행정이기도 하다. 법 집행을 잘하기 위하여 법학과도 다녔다. 이렇게 하여 3 십 여년의 공직에서 잘 근무를 하고 2004년 6월에 정들었던 서울시 무대에서 내려오고야 말았다. 더 열심히 연기를 하고 져 하나 이제 무대가 없는 배우처럼 힘이 없이 초라한 나그네가 되고 말았다. 그 마나 다행히 젊어서 하고 싶었던 서해안의 어느 섬마을의 총각 선생의 꿈을 가졌던 추억이 있어 인천교육대에서 확보한 초등학교 교사자격증이 어디가 있는지도 모르는 자격증을 분실 재 작성 신청하여 전라남도의 임용고사와 계약제 교사로 나의 허전한 마음을 달레며 남은 시간을 학교에서 보냈다.
그러니 서울시 공무원으로 재직시에는 서울시 시민을 위하여 행정학과 법학을 하여 서울 시민들에게 질 좋은 행정서비스를 하기 위하여 노력을 하였으며 그 결과는 서울시민들에게 돌아 갔으리라고 사료가 된다. 얼마만큼의 시민들을 위한 질적 가치와 양적가치로 논할 수는 없으나, 부단히 공부를 하여 노력한 성실한 공무원이었음은 틀림이 없다. 주로 근무는 영등포구청의 변두리와 노원구로 와서도 중계3동 상계1동등의 생활이 어려운 주민들을 위하여 나의 행정의 좌표로 삼고 노력하는 것이 가치 있는 공직의 자리라고 판단되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수해와 가난한 시민들과 동거동락을 하여 ‘자랑스러운 공무원’을 수상 한 바도 있었다.
지방행정이라는게 항상 그 지역의 주민들과 함께 하기 마련이다. 나는 나의 행정의 역할을 잘 나가는 부유층보다, 가난하고 생활이 어려운 이웃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을 하여 그 분야로 나의 행정의 방향으로 삼았다. 어려운 이웃을 도와 주고 함게 하는 시간은 나에게 즐거운 시간이다. 영등포구 시흥2동의 수재민 촌의 첫 발령과 함께 ‘77년도의 안양천의 범람과 일시의 폭우로 서울시 시민의 경기도 시흥군의 ‘집단이주’의 허름한 산비탈에 정착한 시흥2동 주민들의 산사태로 골짝이 계곡으로 죽어가는 서울시 시민들의 시체가 떠내려가고 집들은 다 무너져 버리고 가구.살림살이 도구들은 말 할 것도 없이 풍지박산이 되어 산사태에 밀려 나가게 되고 말았다. 그때 당시 구자춘 시장님이 직접 나오시고 청와대의 영부인자격으로 박근혜씨가 이 수해현장을 방문하는등 전국적으로 수해의 현장이 이 곳으로 집중을 하게 되었다. 동사무소 안이 수해 구호 물품으로 다 쌓이고 모든 행정이 수해복구의 일이 되고 말았다. 영등포구청장은 매일 이곳으로 출근을 하였다.
그 다음으로는 ‘노원구청’으로 근무지를 바꾸어 근무를 하였으나, 노원구도 역시 불암산과 수락산 사이의 ‘상계동’ 주민들은 서울시 상습 수해지역의 집단이주 그리고 고지대 주민들의 철거민들의 집단으로 이주를 시켜 놓은 지역이다.
이 지역도 상계동에서 유일한 운수회사를 지정하여 서울로 출.퇴근을 하거나동사무소의 ‘새마을 사업’이나 아니면 공공근로 사업으로 근근히 하루하루 살아가는 어려운 이웃이다. 행정기관에서 지원을 하여 주지 않으면 살아가기가 어려운 주민들이 많은 삶이다. 노원구 자체[가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지역이며 40% 이상이 사회복지비로 예산이 나가는 구청이다. 노태우 대통령의 ‘아파트 2십만호 건설의 선거 공약’으로 집단적으로 아파트가 세워진 지역이기도 하다. 지하철 7호선의 개통과 수락산과 도봉산, 불암산, 북한산 등의 등산객으로 주말이면 지하철역이 붐비고, 이웃 상가들이 손님맞이에 바쁘다. 서울의 동북부 신흥도시로 발전하는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있다.
2004년의 내 인생의 천직인 서울시 공직의 마지막 은퇴지도 일명 ‘노원마을’이 있는 상계1동 이다 의정부하고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중량천변의 저지대에 이주를 시켜서 툭하면 노원마을이 물바다가 되어 항상 걱정이 되는 마을이다. 그 이웃에는 ‘철도마을’이란 곳이 있어 이 지역도 어려운 이웃의 집단지역이다, 어느 해 인가 경기도 북부의 집중호우로 중량천이 범람을 하여 주변 저지대의 집중호우로 피해 주민들의 수재민들의 가전 제품을 무상으로 수리를 하여 주고, 물론 본사의 협조로 이루어졌고, 방안의 침수된 온수 보일러의 무상수리를 전 피해를 본 가구를 수리를 하여준 일들은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보람이 있는 일이다. 독거로 살고 있는 어르신들의 장례를 치루어준 일 등이 나의 공직의 가치관중에 잘 한 일이라고 자부심을 같고 싶다.
끝으로 젊었을 때 하고 싶었던 ‘섬마을의 선생님’을 못하고 서울시 공직으로 평생을 보냈으나, 정년퇴직 후에 계액제로 초등학교 교사로 약4~5년은 보낸 것 같고, 그 안에 무한히 공부를 하다가 ‘한국방송통신대학 국어국문학과’를 졸업을 하여 ‘화순문학회 이사’‘서울시문학회 이사’ ‘나주향토문화문화연구회‘활동으로 호남의 향토문학에 활동을 하고 있으며 지역신문에 나의 행정에서 못 하였던 분야를 글로 제시하며, 지방의 지역발전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고 자부심을 가져 보기도 한다.
글쓴이/ 김 용 상
서울시청근무.서울시우 문학회,
화순문학회 이사
2023년 국어국문학과 졸업
첫댓글 참으로 성공적인 삶을 사셨습니다. 박수에 박수를 보냅니다. 언제나 청춘의 마음으로 늘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들의 덕분에 그리고 격려와 항상 희망을 주시는 그 힘은 자못큼니다
그 어려운 공부를 하여나갔나 봅니다.
특히 국어국문학과에서는 고전시가강독.시가론 무진장 어려움을 가졌읍니다.
고전문학을 공부하는데 교수님의 도움이 컸습니다.
선배님의 무한책임 인생에 경의를 표합니다.
감사합니다 뒤늦게 인사를 드림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좋게 뵈주시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