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초(芭蕉)
김동명
조국을 언제 떠났노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
남국을 향한 불타는 향수(鄕愁)
너의 넋은 수녀보다도 더욱 외롭구나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의 여인
나는 샘물을 길어 네 발등에 붓는다.
이제 밤이 차다
나는 또 너를 내 머리맡에 있게 하마
나는 즐겨 너를 위해 종이 되리니,
너의 그 드리운 치맛자락으로 우리의 겨울을 가리우자.
(『조광』, 1936.1)
[어휘풀이]
-파초 : 파초과의 여러해살이 풀, 높이는 2미터 정도이며, 잎은 모여 나고 긴
타원형이다. 여름에 노란색을 띤 흰색의 단성화(單性花)가 피고 열매는
육질의 원기둥 모양이다. 약재로 쓰고 관상용으로 재배한다. 중국이
원산지로 따뜻한 지방에서 자란다.
[작품해설]
이 시는 원산지를 떠나와 이국(異國) 땅에서 자라나는 파초를 통해 망국(亡國)의 한을 노래한 작품이다. 파초는 따뜻한 지방에서 자라나는 관상용 다년생 식물로, 이 시에서는 화자의 감정이 이입된 대상물로 쓰이고 있다. 시인은 따스한 남국을 떠나와 추운 이 곳에서 가련하게 살아가는 파초의 운명을, 자유를 잃고 조국을 떠나 살면서 항상 조국을 그리워하는 화자의 처지와 동일하게 제시하고 있다.
먼저 1연에서는 조국을 떠나 파초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따스한 남국을 떠나와 살아야 하는 파오의 ‘가련한’ 처지에서 화자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함으로써 파초와 동질감을 느낀다. 2연에서는 이국따에서 남국을 향해 향수를 불태우는 파초를 ‘너’라고 이인화시켜 그의 외로움을 표출하고 있으며, 3연에서는 파초의 모습을 ‘소나기를 그리는 정열의 여인’에 비유한다. 화자는 그런 파초의 꿈을 실현시켜 주기 위해 샘물을 길어 그의 발등에 붓는다. 그리고 4연에서는 밤이 깊어 날씨가 차가워질 것을 걱정한 화자가 파오를 자신의 방에 들여놓겠다고 한다. 마지막 5연에서는 화자가 즐거이 파초의 ‘종’이 되어 그를 헌신적으로 돌보겠다고 다짐한다. 이것은 파옹하 화자의 처지가 동일하다는 일체감에서 기인한 것이다.
한편 4연의 ‘밤’과 5연의 ‘겨울’은 모두 화자와 파오가 겪는 시련을 의미한다. 이러한 시련을 함께 나누며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일체감이 된 그들은 결국 ‘너’와 ‘나’의 개별적 존재가 아닌, ‘우리’라는 공동 운명체임을 확인하게 됨으로써, ‘치맛자락’으로 서로를 ‘가리워’주고, 암담한 현실의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다시말해, 파초에게서 느꼈던 동정심이 상호 교감(相互交感)의 과정을 거쳐 애정으로 심화됨으로써 그들은 마침내 일체화된 것이다. 여기서 ‘치맛자락’이란 파초의 넓은 잎사귀를 뜻할 뿐 아니라, 성숙한 여인의 애적을 표상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일제의 모진 탄압을 상징하는 우리의 ‘겨울’을 막아 주는 보호막이자 도피처가 될 수 있 있으며, 나아가 조국 광복들 위한 하나의 수단이나 방법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작가소개]
김동명(金東鳴)
1910년 강원도 강릉 출생
1921년 함흥 영생학교 졸업, 일본 청산학원 신학과 졸업
흥남 동진소학교, 평남 강서소학교 교원
1923년 『개벽』에서 시 「당신이 만약 내게 문을 열어 주시면」 등을 발표하여 등단
1945년 함흥 서호중학교 교장 역임
1947년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역임
1960년 초대 참의원 의원
1966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