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아직 움직일 수 있어!
오종락
한평생 동안 인생열차가 달리는 길에는 수많은 역(驛)들이 있다. 큰 역, 작은 역이 있는가 하면 곳곳마다 간이역도 자리잡고 있다. 또 독특한 이름의 역들이 온갖 인간사를 노래하기도 한다. 인생 후반 실버역을 통과한 곳곳에선 애잔한 사연들도 종종 들려온다.
생애 주기별로 큰 역을 분류하면 탄생역-학교역-직장역-은퇴역-실버역-요양병원역-운명역 등 크게 7단계로 나눌 수 있다. 살아오면서 직장을 옮겨 다니고 주거지를 먼 곳으로 이동 하는 등 큰 역을 통과하는 구간이 있는가 하면, 일상에서 간이역처럼 자주 이용하는 백화점, 쇼핑센터, 마트, 도서관, 커피숍, 병원 등 일정시간 머무는 역들도 있다. 이들 역들 가운데 최근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일반병원 역과 요양병원 역의 이용이 활발하다는 점이다.
험난한 인생길 오랜 세월 쉼 없이 달리다 보면 인생열차는 육신에 병이 들기 마련이다. 이때 손짓을 보내는 곳이 가까운 요양병원이다.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 덜커덩하는 열차 소리에 놀라 눈을 떠보면 자식들의 손에 이끌려 부모는 요양병원 문턱을 넘게 된다. 자식들은 이곳에서 이제 편히 쉬시라고 말한다. 하지만 늙은 부모는 아직 이런 곳에 오기 싫으며 환경도 낯설다. 집을 나서기 전 한 번쯤은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난 아직 움직일 수 있어!”“집이 더 좋아”라고. 그런 후 떨어지지 않은 발길을 옮겼을 것이다.
힘들고 바쁜 세상 자식들도 효도 아닌 효도라는 명목으로 자연스레 요양병원 역의 문을 두드리게 된다. 또 이 역은 자식들에겐 하나의 생활의 돌파구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노부모를 이곳에 내려놓은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을 보면 말이다. 우선 이곳 시설에선 웬만큼의 의료 서비스와 의식주 등 제반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급한 용무가 있을 경우 전화 연락이 오면 가보면 되니까 자식들은 일단 안심하게 된다.
최근 지인 문병차 병원을 종종 방문하다 보니 병원이란 존재에 대하여 새로운 사실을 느끼게 되었다. 현대인들은 병원을 마치 쇼핑하듯이 자주 이용하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요양병원이란 역이 노년의 필수 코스처럼 눈에 들어왔다. 요양병원은 장수시대의 산물로 몇 해 사이에 새로 부쩍 많이 늘어났다. 요즘 세태에 있어서 생애의 마지막 종착역 역할을 하며 승객들을 불러 모우기 위해 여기저기서 서로 손짓하고 있는 것만 같다.
얼마 전 요양병원을 방문했을 때 일이다. 복도를 지나가고 있는데 병실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고려장이 따로 없다. 이게 바로 고려장이다. 어서 집에 데려다줘”라고 소리쳤다. 궁금해서 유심히 살펴봤더니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이 요양병원 생활이 지루하고 불편한 탓인지 고향집에 보내달라고 면회 온 아들을 다그친다. 아들은 “시골집에 가시면 돌봐 드릴 사람도 없고 또 넘어져서 다치시면 큰일 아닙니까?” 한다. 어르신 왈, “이제 절대 넘어지지 않고 잘 걸을 수 있어. 아무 걱정마라.” 영 대화가 되지 않는다. 눈치 빠른 아들, 간병사에게 좀 설득해 달라고 눈짓을 보낸다. 간병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어르신 제가 더 잘 해드릴 테니 저와 함께 있어요.”하니 어르신은 분노가 조금 가라앉더니 이윽고 풀이 죽는다. 더 이상 소리칠 기력도 없어 보인다.
지금 시대는 인생 노년의 상당기간을 병원이란 역에서 머무르고 있다. 그 기간도 점점 길어지고 있다. 장수시대의 어두운 단면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 놓은 병원 역에서 인생열차가 오래 멈추고 또 종착지 역할을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안타까운 현실이고 바람직하지는 않다.
요즘 시대 인생이란 탄생 순간부터 의사 가운을 보며 병원에서 태어나고 산후조리 후 연령별 예방접종을 하고 성인이 되어서도 정기검진이나 질병으로 병원 신세를 종종 지다 보니 병원문을 아주 친근하게 여긴다. 일부 어르신들 중에는 병원을 마치 경로당이나 동네 마트 드나들 듯한다. 그래서 병원 쇼핑이란 말도 유행하는 것 같다. 이것도 어느 정도 근력이 있을 때의 이야기다. 몸이 더 부실해지고 거동이 불편해저 요양이 필요한 시점이 되면 자식들은 부모를 내려놓을 요양병원을 물색하며 고민하게 된다.
주위에 어르신들을 보면 대다수가 사후에 갈 유택부터 먼저 마련하는 분들이 많다. 그러나 그것보다 우선순위인 자신이 안락하게 머무를 수 있는 요양병원 역도 미리 한 번쯤 파악해 보는 것도 중요한 과제가 아닌가 한다. 그래야만 노년의 마지막 남은 작은 행복이라도 챙길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누구나 늙음은 피할 수 없고 병원 신세를 전혀 지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한 가지 희망적인 소식이 들리기에 우울하지만은 않다. 그건 바로 ‘9988 열차’가 승객을 기다리며 평소에 승차권을 예매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 승차권을 손에 넣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건강을 다진다면 달갑잖은 요양병원 역은 거치지 않고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들의 품 안에서 ‘234 운명역’에 도달하는 코스가 가장 이상적이다. 천수를 누리다 운명역에서 웃으면서 이 세상 소풍을 끝내는 사람은 최고로 행복한 사람이다.
인류가 지금처럼 장수 시대를 맛본 경험은 없다. 처음으로 겪는 일이다. 이런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아직 특별한 대안은 찾기 힘들다. 이럴 때는 노년으로 갈수록 건강관리를 잘 하는 일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요양병원 역에서 오래 머무는 것은 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며칠 전 고려장은 싫다며 “어서 집에 데려다줘”하며 소리치던 어르신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게 들려오는 것만 같다. 그 어른은 지금 병원 침대에 누워 시골 고향집 텃밭을 열심히 일구고 있는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난 아직 얼마든지 움직일 수 있어!”하면서.
- 9988 열차 : 99세까지 팔팔한 건강을 상징.
- 234 운명역 : 2-3일 앓다 4일째 별세.
첫댓글 사람의 일생을 달려가는 열차에 비유하여 치나칠 수 밖에 없는 수 많은 운명의 역들을 생각해 봅니다. 영원히 머물수 있는 역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인생 열차는 고장도 없나 봅니다.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가사가 생각납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 힘 있을 때 여행 많이 다니세요. 마음에 와닿는 글 잘 읽었습니다.
우리의 일생은 병원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양병원이라는 말은 좀 바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마지막 삶을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그런 곳으로 부르고 생활할 수 있는 이름으로 ....... 그리고 누구나 가야하는 곳이라면 모두가 즐겁게 갈 수 있는 곳으로 만드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은퇴역 이후의 역은 철저히 자기중심으로 관리하여 요양병원으로 가는속도를 늦춰야 할것 같습니다. 현실적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글 입니다. 요즘 92세 연세에 시장도 다니시고 아직도 총기가 있으시고 우리와 같이 카페에도 다니시는 시어머니를 보면 자식 고생 안시켜 감사 하기도하고 한편으론 나도 저 나이에 카페에 다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부럽기도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사람들이 늙어서 요양원에 가면 다시 집에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렇게 고생을 하면서 말년을 보내는 생을 사는 사람들이 허다합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평소에 건강고나리를 잘하고 검진을 받아서 죽음에 이르러서 약간의 고통만 받고 편하게 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잘 읽었습니다.
은퇴 이 후의 삶을 사는 세대를 위한 문화 생활 공간이 너무 부족하거나 허술합니다. 평균적인 '노인 세대'라는 어감 자체에서 우울감이나 서글픔이 묻어나지 않도록 좀 더 밝고 활기찬 무엇인가가 있으면 좋겠는데.....국가 예산의 문제도 있고 하니 쉬운 일이 아니겠지요. 상록에 오시는 분들은 그나마 그런 어려움에서는 조금 빗겨 계시는 분들이니 건강한 생각과 신체 관리 잘 하셔서 9988열차로 234역을 이용할 수 있도록 기원합니다. 공감하며 잘 읽었습니다.
경로우대의 시책이 너무나 미흡합니다. 요양병원의 관리도 아직은 갈곳이 못되는 곳입니다. 이제 노후를 자기집 같이 편안하고 사람이 살수있는 시설이 되어야 하는데 요원하니 걱정이 많습니다. 항상 발상의 전환을 잘 하신 참신한 글 공감하며 잘 읽었습니다.
자식들에의해 요양병원역에 가기 전에 움직일 수 있을 때 자기 손으로 요양병원 역 티켓을 예매 해 두는게 참 좋을거 갔습니다..좋은 글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집에서 충분히 살 수 있는데 다리를 다쳐 퇴원 후 바로 요양병원으로 옮겨버린 며느리 아들이 어머니를 붙들고 울지만 역부족인 요즈음 남편, 우리가 면회가면 나 걸어다니고 집에가서 손자들과 있어도 되는데 남편이 국가 유공자라 적잖은 연금을 타는데(월 145만원) 며느리 손에 넘어간 통장은 형님에겐 아무 쓸모없는 통장이더랍니다. 다른 자식이 없는 형님은 80이 훌쩍넘어셨지만 요양병원에서 자식에게 생활비를 대어주더랍니다.
1년 전에 요양병원을 방문할 일이 있었는데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간병사가 있는데도 매일 환자식을 장만해서 시어머니를 보러가는 그 친구가 존경스러웠습니다.
234운명역에 가기위해 열심히 움직이기라도 해야겠습니다.
생의 주기별로 나눠지는 큰 역과 간이역 표현이 매우 신선하게 여겨집니다. 구비구비 인생역을 지나 마지막 역에 이르는 과정이 큰 문제입니다. 이를 해결하는 길이 9988234. 명답입니다. 9988234를 맞이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겠습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탄생역-학교역-직장역-은퇴역-실버역-요양병원역-운명역 등 크게 7단계의 인생역. 마지막 두역을 남겨두고 있는데 저는 요양병원역을 거치지 않고 실버역에서 바로 운명역으로 가면 좋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