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표로 본 오늘의 역사 10-02 노인의 날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1) 2) 3) 1) 2008 - 제13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 (2~10일)- 1998 부산국제영화제 기념 [부산국제영화제]물꽃 축포 속 화려한 개막... 9일간 축제 제13회 부산영화제가 2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요트 경기장에서 화려하게 개막했다. 불꽃 축포 속에 개막식을 갖고 10일까지 9일간의 일정에 돌입했다. 큰 사고 없이 차분한 진행 속에 영화의 축제를 만끽했다. 박은혜, 이한위, 김혜리, 홍석천 등등 국내 유명 배우들은 물론 곽경택, 곽재용, 윤종찬 감독과 일본의 우에노 주리, 미국의 아론 유, 한국계배우 문 블러드 굿 등 해외 스타들도 레드카펫을 밟으며 입장해 개막식을 후끈 달아오르게 했다. 부산영화제 조직위원장인 허남식 부산시장의 개막 선언과 소포라노 신영옥의 축가가 이어지며 개막식 자리를 가득 메운 관객들을 들뜨게 했다. 폐막작은 현빈·이보영 주연의 '나는 행복합니다'(감독 윤종찬)가 선정됐다. 10일까지 역대 최다 규모를 자랑하는 60개국 315편의 초청작이 부산 해운대와 남포동 일대 37개 상영관에서 상영된다. 초반 진행의 미숙함을 보여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부산=노컷뉴스 방송연예팀 한상미 기자 2008-10-02 22:32:15 http://www.cbs.co.kr/nocut/show.asp?idx=949490
2) 2008 - 탤런트 최진실(崔眞實) 자살- 공중전화 카드 최진실 [崔眞實, 1968.12.24~2008.10.2] 최진실씨 숨진채 발견…“세상에 섭섭…아이 부탁한다” 인기 탤런트 최진실(40)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2일 전국이 충격에 휩싸였다. 청춘 스타에서 정상급 여배우를 거쳐 성숙한 ‘싱글맘’ 연기자로 변신을 거듭했던 최씨의 파란만장했던 삶 때문인지, 국민들은 세대를 뛰어넘어 절절한 안타까움을 토해냈다. 인터넷에선 그를 애도하는 글이 폭주했고, 시민들은 그를 죽음으로까지 몰고간 상황을 아쉬워하며 종일 최씨의 죽음을 화제삼아 대화를 나눴다. 화면 속 그를 보며 웃고 울었던 이들은, 그가 떠난 뒤에야 비로소 ‘타인의 시선을 항상 의식해야 했던’ 삶의 힘겨움을 느끼는 듯했다. 최씨는 2일 아침 6시15분께 서초구 잠원동 자택 욕실 샤워실에서 목을 매 숨진 채로 어머니 정아무개(60)씨에게 발견됐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이날 밤 최씨의 주검을 부검한 결과 “타살 혐의점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1차 소견을 밝혔다. 경찰은 최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잠정 결론 짓고, 구체적인 동기와 경위 등을 수사하고 있다. 서울 서초경찰서는 “최씨가 2일 0시께 술에 취해 집에 들어와 어머니에게 ‘사채니 뭐니 나하고는 상관없는데, 나를 왜 이렇게 괴롭히는지 모르겠다. 세상 사람들에게 섭섭하다’고 말했고,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잠근 뒤 아침 6시께 목을 매 숨진 상태로 발견됐다”고 밝혔다. 경찰은 최씨가 이날 0시42분과 0시45분에 친하게 지내던 메이크업 담당 이아무개씨에게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아이들을 부(탁한다). 미안해’라는 내용의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보낸 사실을 확인했다. 경찰은 “최씨가 유서를 남기진 않았지만, 최씨 침실에서 고통을 호소하는 메모를 발견했다”며 “메모에는 ‘사채설’과 관련된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다”고 말했다. 최씨의 빈소는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 마련됐다. 노현웅 김성환 기자 goloke@hani.co.kr 한겨레 2008-10-02 오후 07:31:09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13698.html
3) 1907 - 볼리비아의 대통령 파스 에스텐소로(Paz Estenssoro, Victor) 출생 파스 에스텐소로 [Paz Estenssoro, Victor, 1907.10.2~2001.6.7] 볼리비아의 정치가. 볼리비아의 좌파 정당인 민족혁명운동(Movimiento Nacionalista Revolucionario/MNR)의 발기인이며 당수로서 3차례 볼리비아 대통령(1952~56, 1960~64, 1985~89)을 역임했다. 처음에는 라파스에 있는 산안드레스대학교에서 경제학교수로 재직하다가 1937~39년 헤르만 부츠 대통령의 경제고문을 지냈다. 1939년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고, 1941년에는 동료들과 함께 MNR을 창당했다. 1952년 MNR이 권력을 장악하자 볼리비아의 대통령이 되었다. 그의 행정부는 인디언에게 투표권을 인정했고, 볼리비아의 3대 주석 회사를 몰수했으며,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중앙고원의 경작지를 인디언에게 이전시켰다. 1950~60년 영국 대사를 지내다가 1960년의 선거에서 다시 MNR 대통령후보로 출마하여 압승을 거두었다. 자신의 2번째 대통령 재임기간중에 그는 미국 정부와 범아메리카개발은행, 서독의 기업들과 협정을 체결했는데, 특히 서독 기업은 볼리비아의 주석산업을 재육성하기로 합의했다. 1964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파스 에스텐소로는 유권자의 70%를 득표했다. 그러나 1964년 11월초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여 그의 정부는 무너지고 그는 페루로 망명했다. 이후 리마에 있는 대학교에서 경제학교수로 재직했으나, 1971년 8월 볼리비아로 돌아와 우파인 우고 반세르 수아레스 대통령 정부에서 고문으로 활동했다. 그는 1979년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했다. 1985년 대통령 선거에 MNR 후보로 출마한 파스 에스텐소로는 반세르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후보자 중 아무도 과반수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대통령 선출권은 의회로 이양되었다. 1985년 8월 5일 의회는 파스 에스텐소로를 대통령으로 선출했고,다음날 그의 취임식이 거행되었다. 3번째 재임기간 동안 그는 경제 내핍 정책을 제도화하여 볼리비아의 경제를 위협하던 극도의 물가상승을 감소시켰다. 1) 2) 3)
1) 1994 - 제12회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개막 30억 아시아인의 화합과 평화를 기원하는 제12회 아시안게임이 1994년 10월 2일 히로시마(廣島) 빅아치 스타디움에서 개막됐다. 히로시마에서는 10월 16일까지 총34개 종목 3백37개의 금메달을 놓고 15일간의 열전을 펼쳤다. 이번 대회는 카자흐스탄 등 구소련 5개 공화국이 처음 출전, 북한을 제외한 42개 전 회원국이 참가하는 사상 최대규모로 치러졌다. 9일에는 일본 히로시마 광역공원 주경기장을 출발, 평화공원에 이르는 42.195㎞ 코스에서 벌어진 제12회 아시안게임 남자마라톤서 황영조 선수가 2시간11분13초로 1위로 골인,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대회 최종일 한국은 육상 남자 1천6백m 계주서 금메달을 추가, 금63 은53 동 63개로 중국(금1백37 은92 동60)에 이어 2위에 올랐으며 홈팀 일본은 한국과 금 4개차로 3위를 차지했다.
2) 1991 - 한국의 여자 쇼트트랙 선수 이은별 출생 이은별 [Lee Eun-Byul, 1991.10.2~ ] 이은별(1991년 10월 2일 ~ )은 대한민국의 여자 쇼트트랙 선수이다. 학력 * 연수여자고등학교 * 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
3) 1871 - 미국의 정치가 헐(Hull, Cordell) 출생 헐 [Hull, Cordell, 1871.10.2~1955.7.23] 미국의 정치가. 1933~44년에 국무장관을 역임했다. 낮은 관세 책정을 골자로 하는 그의 상호무역 프로그램은 20세기의 팽창된 세계무역구조의 형성을 가능하게 했다. 1945년 국제연합(UN)을 조직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받았다. 테네시 출신의 젊은 변호사로서 일찍이 민주당에 가입했다. 1907~21, 1923~31년의 22년 동안 하원의원을 지냈고 1931~33년에는 상원의원을 지냈다. 뉴딜 정책이 시작될 무렵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에 의해 국무장관으로 임명된 그는 19세기 이래 미국의 해외무역에 장애로 작용해온 높은 관세장벽을 해소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처음에는 대통령의 지지를 얻어냈고 1933년 12월에는 미주 몬테비데오 회의에서 열광적인 지원을 얻어냈다. 이어 그는 의회에서 1934년 3월 상호무역협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에 의해 최혜국에 대한 관세삭감방식이 고착되었고, 이것은 이후 1948년에 조인된 '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GATT)의 전주곡이 되었다. 1930년대에 그는 이른바 선린외교정책을 통해 미국과 라틴아메리카의 관계를 대폭 개선했다. 몬테비데오 회의에서 그가 보여준 겸손함과 외국에 대한 내정불간섭주의는 라틴아메리카 국가에 대한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으로 라틴아메리카에 각인되어 있던 미국에 대한 불신을 없애기 시작했다. 그는 또한 1936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개최된 범아메리카 회의에 참석했고, 1940년 아바나에서 개최된 외무장관 특별회담에도 참석했다. 그의 뛰어난 여론조성 능력 덕택에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아메리카 국가들을 통일된 단일전선으로 묶을 수 있었다.
동아시아 정책에서 그는 1934년에 일본이 제안한 '일본의 먼로주의'를 거부했는데, 일본의 먼로주의란 일본에게 중국에서의 자유재량권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34년말 일본이 1936년에 만료되는 해군군축조약을 갱신하지 않을 것이라고 통보하자 헐은 태평양에서의 미국 이해보존 정책과 계속적인 중국과의 우호관계 유지 및 군비추진 정책을 발표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헐과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이 중립정책을 고수하는 것이 오히려 추축국들의 공격을 고무시키고 있다고 생각하고 연합국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1941년 가을에 진행된 일본과의 결정적인 교섭에서 헐은 중국의 권리를 강하게 주장했으며, 일본에게 중국 본토 점령을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미국이 전쟁에 참전한 후 그와 국무부 동료들은 국제적인 전후 평화유지 기구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1943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외무장관 회의에서 헐은 약화된 건강과 노령에도 불구하고 전시의 협력체제가 전후에도 평화와 안전을 추구하는 세계기구 속에서 계속되어야 한다는 서약을 4개국 외무장관으로부터 받아냈다. 이러한 업적 때문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헐을 'UN의 아버지'라고 칭했으며, 그에게 노벨 평화상이 주어졌다. 1944년에 실시된 대통령선거 후 사임했으며, 저서로는 〈회고록 Memoirs of Cordell Hull〉(1950)이 있다. 1) 2) 3)
1) 1883 - 오스트리아/미국의 토목공학자 테르자기(Terzaghi, Karl von) 출생 테르자기 [Terzaghi, Karl (Anton) von, 1883.10.2~1963.10.23] 미국의 토목공학자. 토목공학의 한 분야이며 응력(應力)과 유수(流水)의 작용하에 있는 토양의 특성을 연구하는 학문인 토질역학(土質力學)의 기초를 세웠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그라츠공과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다. 1904년 졸업하여 7년간 기술자로 일했고, 그라츠공과대학에서 토목공학박사학위를 받았다(1911). 그는 미국 방문 후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오스트리아 공군에서 근무했고, 1916년 이스탄불에 있는 임피리얼공과대학에서 일하게 되었다. 또한 종전 후 이스탄불 불에 있는 미국 대학인 로버트 칼리지에서 일했다. 과거에도 이미 기초·토압(土壓)·경사안정도에 대한 많은 연구가 행해진 상태이지만, 그는 그 연구결과를 체계화시키고 연구를 통해 통합된 개념을 만들었다. 그의 연구성과는 그의 가장 유명한 책인 〈토질역학개론 Erdbaunmechanik〉(1925)에 나타나 있다. 1925년 미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에 있는 매사추세츠공과대학에서 학부교수단의 일원으로 자신의 이론을 승인받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했다. 또한 여러 건축계획의 고문기사로도 일했다. 1929년 빈공과대학의 새로 생긴 토양역학교수직을 맡게 되었다. 1938년 미국으로 되돌아와 1946년부터 1956년 은퇴할 때까지 하버드대학교의 토목공학교수직에 있었다. 1959년까지 이집트에 있는 아스완 댐 건설계획의 고문위원회 위원장직을 비롯해 고문기사로서의 그의 여러 업적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떨쳤다.
2) 1950 - 만화 <피너츠(Peanuts)> 연재 시작 찰스 슐츠(Schulz, Charles Monroe, 1922~2000)의 만화 '피너츠(Peanuts)'가 1950년 10월 2일부터 미국 7개 신문에서 연재를 시작했다. '스누피' '찰리 브라운' 등 피너츠에 등장한 많은 캐릭터들은 2000년 2월 12일 슐츠가 암투병 끝에 타계할 때까지 50여년에 걸쳐 세계 팬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50편의 TV 만화 영화로도 제작됐다. 1천4백여 종에 이르는 피너츠 만화도 매년 3억부 가량 판매됐다. 1965년에는 '찰리 브라운의 크리스마스'라는 CBS 특집으로 에미상을 수상했고 '좋은 사람 찰리 브라운'이라는 뮤지컬이 히트하기도 했다. 99년 결장암에 걸린 슐츠의 은퇴 선언으로 ‘피너츠’는 종료됐지만, 다양한 캐릭터 상품으로 판매되면서 여전히 인기를 누리고 있다. 프랑스 정부는 연재 40주년인 1990년 그에게 예술훈장을 수여했고, 2000년 그의 사후 미국도 미 의회 최고의 영예인 황금메달을 수여했다.
3) 1985- 미국의 영화배우 록 허드슨, 에이즈로 사망 이때 집중적으로 수집한 것이 동성애 편력이었다. 그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은 이미 헐리우드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2년간의 결혼생활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기간을 동성애자로 보냈기 때문이다. 그가 죽은뒤 한 동성애인이 “허드슨이 에이즈 감염사실을 숨겼다”며 죽은 자를 상대로 보상소송을 내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1) 2) 3)
1) 1882 - 최초의 태극기 그림이 일본 '시사신보' 신문에 게재 박영효 제작 「최초의 태극기」그림 찾았다 - 태극기 사용 100주년 기념우표, 1982 1882년 제작된 최초의 태극기 모양을 게재한 일본 일간지 「시사신보(時事新報·1936년 폐간)」가 처음으로 발견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태극의 도(圖)」를 적청색으로 그렸다고 적었다. 찾아낸 것.태극기 연구의 권위자인 金源模(김원모·단국대 사학과)교수는 『과거 신문의 주요기사를 발췌해 만든 명치편년사(明治編年史)나 朴泳孝(박영효)의 수기인 사화기략(使和記略)에서 태극기의 모양을 언급한 일이 있지만 그동안 이처럼 구체적으로 그려놓은 자료가 발견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삼각형 청색 바탕에 용을 그려 쓰도록 했다. 본국은 황색을 사용하지만 조선은 동방에 해당하는 속방이요 청색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청색바탕을 사용할 것을 지도했으나 국왕(고종)은 이를 크게 분개하여 결단코 청국 용기(龍旗)를 모방할 수 없다고 거절하면서 사각형 옥색 바탕에 태극의 도를 적청색으로 그리고 기의 네 귀퉁이에 동서남북의 역괘를 붙여서 이제부터 조선의 국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양효(陽爻) 2개를 그린 뒤 음효(陰爻)를 배치했고 우측 상단에는 양효를 먼저, 음효 2개를 나중에 그렸다. 사용할 국기의 제정을 건의해 허락을 받아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http://news.donga.com/fbin/output?sfrm=2&f=total&&n=199708140132
2) 1997 - 제1회 노인의 날 기념 - 노인의 날 경로효친 사상을 앙양하고,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켜온 노인들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제정한 법정기념일. 경로효친 사상의 미풍양속을 확산시키고,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켜온 노인들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각종 기념일등에 관한 규정'에 의거, 1997년 제정한 법정기념일이다. 1999년까지는 보건복지부에서 주관하였으나, 정부 행사의 민간 이양 방침에 따라 2000년부터는 노인 관련 단체의 자율행사로 개최된다. 컨벤션센터에서 기념식을 가진 뒤, 연예인 위문공연 및 위안잔치를 겸한 '전국노인가족체육대회'를 개최하는 등 순수 노인축제로 치러졌다. 훈장·포장 및 대통령·국무총리·보건복지부장관 표창을 수여한다. 뿐만 아니라 그해 100세가 되는 노인들에게 명아주로 만든 전통 지팡이인 청려장(靑藜杖)을 증정, 통일신라시대 이후 80세가 넘은 노인들을 대상으로 왕이 하사하던 전통을 이어 국민들에게 경로효친 사상을 불어넣는다. 그밖의 행사로, 노인 문화공연, 미니마라톤 대회, 어르신 모델 선발대회, 효도 큰잔치 등이 열린다.
[독자칼럼] 존엄을 생각해 보는 노인의 날/전희식 오늘은 노인의 날이다. 이곳저곳에서 노인의 날을 기념하는 행사를 열 것이다.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 그의 장인이 노인회 회장으로 있을 때 ‘정의사회구현’이라는 문구를 넣어 만든 노인강령과 노인헌장이 읽혀지고 흥겨운 놀이마당이 푸짐한 음식과 함께 차려진 날이다. 치매가 있으신 여든여섯의 어머님과 함께 살면서 새로이 보게 되는 사실들이 많다. 우리 사회가 초고령사회로 가고 있다는 걱정 어린 경고 속에서 장사꾼들만 판을 치고 정작 노인들이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분위기와 제도는 멀어 보인다. 복지센터의 노인 돌보미가 골목에 들어서면서부터 고함을 지른다. “할매! 할매! 자요? 일나아!” 주무시던 어머니가 꿈과 현실의 틈새에 끼여 한참을 허우적거리신다. 오줌 쌌으니 빨아주겠다고 아랫도리를 와락 벗긴다. 면사무소 직원도 간호사도 의사도 반은 반말이다. 몸 불편하고 기력이 떨어진 노인들을 온전한 인간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노골적으로 애 취급한다. 전문가들은 온갖 병명을 만들어 붙인다. 무슨 무슨 노인성 병과 증상들이 모두 치료의 대상이고 격리 이유가 된다. 시설에 요양하러 온 정상적인 노인들마저 모두 환자복을 입혀서 환자로 만들어 놓고야 만다. 책방마다 차고 넘치는 것이 어린이책이지만 노인들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책과 음반과 영화가 따로 있지 않다. 동화가 있으나 ‘노화’가 없고, 동시가 있으나 ‘노시’가 없다는 사실을 이제야 발견한다. 부모 모시기는 자식 키우기의 반의 반도 안 된다는 사실을 드러내 주는 증거들이다. 몸이나 정신이 수명을 다하여 제 기능을 하나씩 잃어가는 것은 노년기의 마땅한 현상이다. 의사들은 그런다. ‘이건 노화가 아니라 병이다’라고 강조한다. 정상적인 노화와 병을 꼭 구별하려고 한다. 무모한 짓이다. 그 누구도 공격하지 않는 노인들을 자꾸 병자로 만들 것이 아니라, 정말 치료가 필요한 사람은 사회악을 만드는 일부 ‘정상인’들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치매 걸린 부모의 반상식적인 언행들이 제 정신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식구들은 그제야 안도하고 감정을 눅인다. 대신 그때부터 더는 부모가 아니라 환자다. 부모의 말과 행동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모두가 헛소리고 웃음거리의 소재로 전락된다. 그동안 노인 관련 전문서적을 많이 봤지만 손을 꼭 잡아주고, 노인과 같은 방에서 자며 얼굴이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라는 글은 읽지 못했다. ‘헛소리’일망정 틀렸다고 하지 말고 끝까지 들어주고 추임새를 넣어주라는 말은 없다. 사랑과 정성은 한마디도 언급되지 않고 오로지 약과 병원과 음식이 한결같은 처방들이다. 사랑은 죽은 세포도 되살리며 정성은 통증을 경감시킨다는 것이 내 체험의 결과들이지만 인정되지 않는다. 큰 행사나 공공기관에 갈 때 아이들을 데리고 갈 수 있도록 시설이 마련되고 전문인이 배치되지만 어디에도 불편한 부모 모시고 갈 수 있는 행사나 공공기관은 없다. 신경정신과 의사와 정신심리학 연구자들이 많지만 ‘트라우마’라는 유행어를 만들며 잠재의식과 꿈의 해석에 골몰하면서도 알츠하이머 증세의 노인들이 하는 이야기가 얼마나 심오한 무의식과 초차원적 세계를 반영하고 있는지 관심 갖는 것을 보지 못했다. 모두 건강과 젊음과 이성의 이름으로 저지르는 노인 학대행위들이다. 오늘은 노인의 날이다. 노인의 존엄을 생각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한다. 정부의 노인정책도 노인의 존엄을 생각하는 데 집중해야 할 것이다. 전희식/농부·전국귀농운동본부 이사 -한겨레 2007-10-01 오후 06:41:03
3) 1958 - 기니, 프랑스로부터 독립 기니는 15세기에 포르투갈인(人)이 가장 먼저 해안에 도달하고, 그뒤 17세기에는 프랑스와 영국의 쟁탈대상이 되었다. 1725년 풀라니족(族)이 푸타잘롱 산지에 진출하여 해안지대의 유럽인 세력에 항거하였다. 해안지대는 1814년에 프랑스 세력권으로 인정되어 1849년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으나, 프랑스의 침략에 대한 무력저항은 말린케족의 지도자 사모리 투레 등에 의해 20세기 초반까지 지속되었다. 또 1911년에 라이베리아와의 국경을 결정하여 보호령의 영역을 확보하였다. 당시 프랑스는 식민지 행정면에서 기니를 세네갈에 속하게 하여, 리비에르 뒤 쉬드(Rivires du Sud:남쪽의 강이란 뜻)라고 하였으나, 1891년에 하나의 단위식민지로 하여 1893년에 프랑스령 기니라고 명명하였다. 실시한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에 대한 국민투표에서, 그 헌법을 거부하고 다음달(10월)에 프랑스 공동체로부터 이탈하여 독립하였고 투레가 초대대통령에 취임하였다.
2007 - 노무현 대통령 방북, 남북 정상회담 (2~4일) 다시 만난 남북정상 '한반도 평화' 손잡았다 “반갑습니다!”(김정일 국방위원장) “반갑습니다!”(노무현 대통령) 2007년 10월2일 낮 12시2분, 7년 만에 다시 손을 맞잡은 남북 두 정상의 인사말은 길지 않았다. 그렇지만 두 정상의 만남이 갖는 무게는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이번 만남은 남북 관계 진전을 이끄는 새로운 추동력이 되기에 충분하다. 남북은 지난 2000년 정상회담이 열어 놓은 화해·협력에서 평화와 번영으로 가는 길에 들어섰다. 노무현 대통령은 청와대를 떠나기 전 발표한 대국민 인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2000년 정상회담이 남북 관계의 새 길을 열었다면, 이번 회담은 그 길에 가로놓여 있는 장애물을 치우고 지체되고 있는 발걸음을 재촉하는 회담이 될 것입니다.” 노 대통령이 인사말에서 밝힌 것처럼 “이번 정상회담은 좀더 차분하고 실용적인 회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두 정상의 만남은 첫 정상회담에 비해 절제된 모습이었다. 노 대통령 공식 환영행사가 열린 4·25 문화회관 광장에 오전 11시55분쯤 나와 기다린 김 위원장은 환영행사 내내 담담한 모습으로 일관했다. 앞서 노 대통령은 국가원수이자 군통수권자로는 처음으로 오전 9시5분 군사분계선(MDL)을 걸어서 넘는 역사적 순간을 연출했다. 노 대통령은 분계선을 넘기 전 대국민 메시지를 통해 “장벽은 무너질 것”이라며 “제가 다녀오면 또 더 많은 사람들이 다녀오게 될 것”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이는 7년 전 순안공항에서 남북 두 정상이 보여준 뜨거운 악수와 함께 남북 통일 역사의 상징적인 한 장면으로 남을 것으로 보인다. 군사분계선을 넘은 노 대통령은 평양∼개성간 고속도로를 달려 11시40분께 평양 시내 인민문화궁전 앞에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영접을 받았다. 두 사람은 미리 대기하고 있던 무개차에 나란히 타고, 평양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공식 환영행사가 열리는 4·25 문화회관 쪽으로 퍼레이드를 벌였다. 노 대통령은 저녁에는 목란관에서 김 상임위원장이 마련한 환영만찬에 참석했다. 이날 오후로 예정됐던 평양 시내 3대혁명전시관의 중공업관 참관은 3일로 연기됐다.노 대통령은 방북 이틀째인 3일 김 위원장과 오전·오후 두 차례 공식 정상회담을 열 예정이다. 정상회담은 소수 배석자가 참석하는 단독회담 형식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회담에서 노 대통령은 김 위원장과 △남북 공동번영 △한반도 평화 △화해와 통일이란 큰 틀에서 주요 현안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나눌 방침이다. 회담을 마무리한 뒤 ‘평화 선언’ 형태의 합의문을 채택할 것으로 전망된다. 평양공동취재단, 강태호 남북관계전문기자 kankan1@hani.co.kr 한겨레 2007-10-02 오후 07:13:27
1988 - 제24회 서울올림픽 폐막 1988년 9월 17일부터 16일간 서울에서 개최된 서울올림픽이 1988년 10월 2일 폐막식과 함께 막을 내렸다. 160개 IOC회원국에서 1만 3,303명의 선수단이 참가, 237개의 금메달을 놓고 각축을 벌인 결과 소련이 금메달 55개로 메달순위 1위를 차지했고, 동독이 37개로 2위, 미국이 36개로 3위를 차지했으며 개최국 한국은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로 4위를 기록했다.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이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권 국가들의 참가거부로, 1984년 LA올림픽이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참가거부로 반쪽짜리 올림픽이 됐던 데 반해 서울올림픽은 12년 만에 동서가 모두 참가한 지구촌의 대결장이었던만큼 세계신기록 33개, 올림픽신기록 225개가 쏟아져나오는 등 풍성한 기록을 남겼다.
1973 - 핀란드의 육상선수 누르미(Nurmi, Paavo) 사망 누르미 [Nurmi, Paavo (Johannes), 1897.6.13~1973.10.2] 핀란드의 육상선수. 1920년대 장거리 육상 종목을 석권했다. 3차례의 올림픽 대회(1920, 1924, 1928)에서 6개의 금메달을 땄으며 그가 기록한 1마일(1.6㎞) 경기의 세계기록 4분 10초 40은 8년 동안(1923~31) 깨지지 않았다. 1920년 이래로 올림픽의 영광을 차지했던 다른 수많은 핀란드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누르미도 1912년 올림픽에서 장거리 경기 3종목을 석권한 핀란드의 한네스 콜레마이넨에게 감명을 받았다. 누르미는 훈련 때나 경기 때나 자신의 보폭을 정확하게 조절할 수 있도록 스톱워치를 가지고 다녔다. 1920년 벨기에 앤트워프 올림픽 대회에서 1만m 달리기와 1만m 크로스컨트리에서 금메달을 땄으며 192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올림픽 대회에서 1만m 달리기에서 또 하나의 금메달을 추가했다. 1924년 파리 올림픽 대회에서 그의 기록은 대단했다. 굉장히 더웠던 7월 10일 1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1,500m와 5,000m에서 올림픽 신기록을 세웠다. 이틀 후 역시 숨막히는 더위 속에서 1920년에 우승한 1만m 크로스컨트리에서 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이 경기는 1924년 이후 올림픽 종목에서 제외되었다. 그 다음날 비공식 3,000m 릴레이에서 첫번째로 들어와 핀란드 팀이 승리했으나 메달은 없었다. 1923년 8월 23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1마일 신기록을 세울 때에 자신의 스톱워치를 들여다보며 뛰어 처음 3쿼터는 각각 정확히 63초에 달렸고, 마지막 쿼터는 61.4초에 달렸다. 그가 각 쿼터를 거의 같은 시간대로 달려 기록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선수들은 그 방법을 따르지는 않았다. 1928년 1시간 경기에서 1만 9,210m를 달려 세계신기록을 세웠다. 규정 이외의 금품을 받았다 하여 1932년 올림픽 직전에 국제 아마추어 선수자격을 박탈당했다.
1968 - 프랑스의 미술가 뒤샹(Duchamp, Marcel) 사망 뒤샹 [Duchamp, Marcel, 1887.7.28~1968.10.2] 프랑스의 미술가. 1887년 7월 28 프랑스 블랭빌에서 출생하였다. 입체파 조각가 R.D.비용, 화가 J.비용의 아우이다. 파리의 아카데미 쥘리앙에서 공부하면서 P.세잔의 영향을 받았고, 뒤이어 1911년에 입체파의 일파인 섹시옹 도르에 참가했다. 독립미술협회를 결성하여 반예술운동을 일으켰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파리에 돌아와 초현실주의(쉬르리얼리즘)에 협력, 1941년 A.브르통과 함께 뉴욕에서 초현실주의전을 열었다.
1927 - 스웨덴의 물리화학자 아레니우스(Arrhenius, Svante) 사망 아레니우스 [Arrhenius, Svante (August), 1859.2.19~1927.10.2] 스웨덴의 물리화학자. 웁살라 근처의 비크 출생. 1876년 웁살라대학에 입학, 물리학을 전공하는 한편, 화학과 수학을 배워 1881년에 졸업하였다. E.에들룬드의 실험실에서 전해질희석수용액의 전기전도도에 관하여 연구, 1884년 과학아카데미에 논문으로 발표하여 이온화설의 기초를 이루었다. 이 논문으로 1884년 웁살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나 크게 인정받지는 못하였다. W.오스트발트의 추천으로 웁살라대학 강사가 되었으나, 곧 사임, 과학아카데미의 해외연구생으로 5년간 여러 나라에 유학하였다. 1891년 독일의 기센대학에 물리화학강좌가 신설되어 아레니우스를 조교수로 초청하기에 이르러서야 스톡홀름대학에서 물리학강사의 지위를 얻어 스웨덴에 머물기로 하였다. 1896년 이온화설의 업적으로 독일의 전기화학학회 명예회원으로 추천되었고, 이듬해 스톡홀름대학 학장에 임명, 1901년에는 스웨덴 과학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1902년 영국의 왕립학회로부터 데이비상을 받고, 1903년에는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1905년 스웨덴 정부는 노벨물리화학연구소를 설립, 아레니우스를 소장에 임명하였다. 1927년까지 그 지위에 있으면서 여러 방면에 걸친 연구를 하였다. 주요 업적은 이온화설, 화학반응속도 및 면역화학의 이론, 우주물리학에서는 오로라의 기원에 관한 가설, 지학에서는 화산 활동의 원인에 대한 가설 등이 있다. 또한 많은 저서가 있는데, 《사적으로 본 우주관의 변천》 등이 유명하다.
1904 - 인도의 정치가, 총리 샤스트리(Shastri, Lal Bahadur) 출생 샤스트리 [Shastri, Lal Bahadur, 1904.10.2~1966.1.11] 인도의 정치가, 총리. 1964~66년 자와할랄 네루를 뒤이어 총리를 지냈다. 1921년 식민정부에 반대하여 마하트마 간디의 비협조운동에 가담한 이유로 1921년 잠시 투옥되었다. 풀려난 뒤 민족대학의 하나였던 카시 비디아피타에서 수학하고, 샤스트리('성전에 정통하다'는 뜻)가 되어 졸업했다. 그뒤 간디의 추종자로 다시 정계로 복귀하여 7차례에 걸쳐 투옥되면서도 연합주 (지금의 우타르프라데시 주)의 국민회의당 조직을 이끌었다.1937년과 1946년 샤스트리는 연합주 의회에 진출했으며, 인도 독립 후에는 우타르프라데시 주의 내무장관·운송장관으로 경력을 쌓은 후 1952년 연방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었고, 연방 철도·운송장관으로 활동했다. 1961년 내무장관에 취임한 뒤에는 능숙한 중재자로서 명성을 떨쳤으며 3년 뒤 자와할랄 네루의 와병중에 무임소장관에 임명되었다가 네루가 죽은 뒤 1964년 6월 총리가 되었다. 샤스트리는 경제문제에 효율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1965년 잠무와 캬슈미르의 귀속을 둘러싸고 파키스탄과 적대관계로 치달았을 때 단호한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인기를 얻었다. 파키스탄의 아유브 칸 대통령과 소련령 중앙 아시아에서의 부전조약에 서명한 뒤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네루의 딸 안디라 간디가 샤스트리를 이어 총리가 되었다.
1869 - 인도 건국의 아버지 간디(Gandhi, Mohandas Karamchand) 출생
1847 - 독일군 원수와 대통령을 지낸 힌덴부르크(Hindenburg, Paul von) 출생
1535 - 프랑스 탐험가 자크 카르티에가 세인트로렌스 강을 거슬러올라가 지금의 몬트리올에 도착하다 1452 - 영국의 왕 리처드 3세(Richard III) 출생 1434 - 해시계 앙부일구 제작 BC 322 -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사망 노인의 날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1) 2) 3)
1) 2008 - 제13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 (2~10일)- 1998 부산국제영화제 기념 [부산국제영화제]물꽃 축포 속 화려한 개막... 9일간 축제 제13회 부산영화제가 2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요트 경기장에서 화려하게 개막했다. 불꽃 축포 속에 개막식을 갖고 10일까지 9일간의 일정에 돌입했다. 큰 사고 없이 차분한 진행 속에 영화의 축제를 만끽했다. 박은혜, 이한위, 김혜리, 홍석천 등등 국내 유명 배우들은 물론 곽경택, 곽재용, 윤종찬 감독과 일본의 우에노 주리, 미국의 아론 유, 한국계배우 문 블러드 굿 등 해외 스타들도 레드카펫을 밟으며 입장해 개막식을 후끈 달아오르게 했다. 부산영화제 조직위원장인 허남식 부산시장의 개막 선언과 소포라노 신영옥의 축가가 이어지며 개막식 자리를 가득 메운 관객들을 들뜨게 했다. 폐막작은 현빈·이보영 주연의 '나는 행복합니다'(감독 윤종찬)가 선정됐다. 10일까지 역대 최다 규모를 자랑하는 60개국 315편의 초청작이 부산 해운대와 남포동 일대 37개 상영관에서 상영된다. 초반 진행의 미숙함을 보여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부산=노컷뉴스 방송연예팀 한상미 기자 2008-10-02 22:32:15 http://www.cbs.co.kr/nocut/show.asp?idx=949490
2) 2008 - 탤런트 최진실(崔眞實) 자살- 공중전화 카드 최진실 [崔眞實, 1968.12.24~2008.10.2] 최진실씨 숨진채 발견…“세상에 섭섭…아이 부탁한다” 인기 탤런트 최진실(40)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2일 전국이 충격에 휩싸였다. 청춘 스타에서 정상급 여배우를 거쳐 성숙한 ‘싱글맘’ 연기자로 변신을 거듭했던 최씨의 파란만장했던 삶 때문인지, 국민들은 세대를 뛰어넘어 절절한 안타까움을 토해냈다. 인터넷에선 그를 애도하는 글이 폭주했고, 시민들은 그를 죽음으로까지 몰고간 상황을 아쉬워하며 종일 최씨의 죽음을 화제삼아 대화를 나눴다. 화면 속 그를 보며 웃고 울었던 이들은, 그가 떠난 뒤에야 비로소 ‘타인의 시선을 항상 의식해야 했던’ 삶의 힘겨움을 느끼는 듯했다. 최씨는 2일 아침 6시15분께 서초구 잠원동 자택 욕실 샤워실에서 목을 매 숨진 채로 어머니 정아무개(60)씨에게 발견됐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이날 밤 최씨의 주검을 부검한 결과 “타살 혐의점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1차 소견을 밝혔다. 경찰은 최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잠정 결론 짓고, 구체적인 동기와 경위 등을 수사하고 있다. 서울 서초경찰서는 “최씨가 2일 0시께 술에 취해 집에 들어와 어머니에게 ‘사채니 뭐니 나하고는 상관없는데, 나를 왜 이렇게 괴롭히는지 모르겠다. 세상 사람들에게 섭섭하다’고 말했고,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잠근 뒤 아침 6시께 목을 매 숨진 상태로 발견됐다”고 밝혔다. 경찰은 최씨가 이날 0시42분과 0시45분에 친하게 지내던 메이크업 담당 이아무개씨에게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아이들을 부(탁한다). 미안해’라는 내용의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보낸 사실을 확인했다. 경찰은 “최씨가 유서를 남기진 않았지만, 최씨 침실에서 고통을 호소하는 메모를 발견했다”며 “메모에는 ‘사채설’과 관련된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다”고 말했다. 최씨의 빈소는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 마련됐다. 노현웅 김성환 기자 goloke@hani.co.kr 한겨레 2008-10-02 오후 07:31:09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13698.html
3) 1907 - 볼리비아의 대통령 파스 에스텐소로(Paz Estenssoro, Victor) 출생 파스 에스텐소로 [Paz Estenssoro, Victor, 1907.10.2~2001.6.7] 볼리비아의 정치가. 볼리비아의 좌파 정당인 민족혁명운동(Movimiento Nacionalista Revolucionario/MNR)의 발기인이며 당수로서 3차례 볼리비아 대통령(1952~56, 1960~64, 1985~89)을 역임했다. 처음에는 라파스에 있는 산안드레스대학교에서 경제학교수로 재직하다가 1937~39년 헤르만 부츠 대통령의 경제고문을 지냈다. 1939년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고, 1941년에는 동료들과 함께 MNR을 창당했다. 1952년 MNR이 권력을 장악하자 볼리비아의 대통령이 되었다. 그의 행정부는 인디언에게 투표권을 인정했고, 볼리비아의 3대 주석 회사를 몰수했으며,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중앙고원의 경작지를 인디언에게 이전시켰다. 1950~60년 영국 대사를 지내다가 1960년의 선거에서 다시 MNR 대통령후보로 출마하여 압승을 거두었다. 자신의 2번째 대통령 재임기간중에 그는 미국 정부와 범아메리카개발은행, 서독의 기업들과 협정을 체결했는데, 특히 서독 기업은 볼리비아의 주석산업을 재육성하기로 합의했다. 1964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파스 에스텐소로는 유권자의 70%를 득표했다. 그러나 1964년 11월초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여 그의 정부는 무너지고 그는 페루로 망명했다. 이후 리마에 있는 대학교에서 경제학교수로 재직했으나, 1971년 8월 볼리비아로 돌아와 우파인 우고 반세르 수아레스 대통령 정부에서 고문으로 활동했다. 그는 1979년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했다. 1985년 대통령 선거에 MNR 후보로 출마한 파스 에스텐소로는 반세르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후보자 중 아무도 과반수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대통령 선출권은 의회로 이양되었다. 1985년 8월 5일 의회는 파스 에스텐소로를 대통령으로 선출했고,다음날 그의 취임식이 거행되었다. 3번째 재임기간 동안 그는 경제 내핍 정책을 제도화하여 볼리비아의 경제를 위협하던 극도의 물가상승을 감소시켰다. 1) 2) 3)
1) 1994 - 제12회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개막 30억 아시아인의 화합과 평화를 기원하는 제12회 아시안게임이 1994년 10월 2일 히로시마(廣島) 빅아치 스타디움에서 개막됐다. 히로시마에서는 10월 16일까지 총34개 종목 3백37개의 금메달을 놓고 15일간의 열전을 펼쳤다. 이번 대회는 카자흐스탄 등 구소련 5개 공화국이 처음 출전, 북한을 제외한 42개 전 회원국이 참가하는 사상 최대규모로 치러졌다. 9일에는 일본 히로시마 광역공원 주경기장을 출발, 평화공원에 이르는 42.195㎞ 코스에서 벌어진 제12회 아시안게임 남자마라톤서 황영조 선수가 2시간11분13초로 1위로 골인,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대회 최종일 한국은 육상 남자 1천6백m 계주서 금메달을 추가, 금63 은53 동 63개로 중국(금1백37 은92 동60)에 이어 2위에 올랐으며 홈팀 일본은 한국과 금 4개차로 3위를 차지했다.
2) 1991 - 한국의 여자 쇼트트랙 선수 이은별 출생 이은별 [Lee Eun-Byul, 1991.10.2~ ] 이은별(1991년 10월 2일 ~ )은 대한민국의 여자 쇼트트랙 선수이다. 학력 * 연수여자고등학교 * 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
3) 1871 - 미국의 정치가 헐(Hull, Cordell) 출생 헐 [Hull, Cordell, 1871.10.2~1955.7.23] 미국의 정치가. 1933~44년에 국무장관을 역임했다. 낮은 관세 책정을 골자로 하는 그의 상호무역 프로그램은 20세기의 팽창된 세계무역구조의 형성을 가능하게 했다. 1945년 국제연합(UN)을 조직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받았다. 테네시 출신의 젊은 변호사로서 일찍이 민주당에 가입했다. 1907~21, 1923~31년의 22년 동안 하원의원을 지냈고 1931~33년에는 상원의원을 지냈다. 뉴딜 정책이 시작될 무렵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에 의해 국무장관으로 임명된 그는 19세기 이래 미국의 해외무역에 장애로 작용해온 높은 관세장벽을 해소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처음에는 대통령의 지지를 얻어냈고 1933년 12월에는 미주 몬테비데오 회의에서 열광적인 지원을 얻어냈다. 이어 그는 의회에서 1934년 3월 상호무역협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에 의해 최혜국에 대한 관세삭감방식이 고착되었고, 이것은 이후 1948년에 조인된 '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GATT)의 전주곡이 되었다. 1930년대에 그는 이른바 선린외교정책을 통해 미국과 라틴아메리카의 관계를 대폭 개선했다. 몬테비데오 회의에서 그가 보여준 겸손함과 외국에 대한 내정불간섭주의는 라틴아메리카 국가에 대한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으로 라틴아메리카에 각인되어 있던 미국에 대한 불신을 없애기 시작했다. 그는 또한 1936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개최된 범아메리카 회의에 참석했고, 1940년 아바나에서 개최된 외무장관 특별회담에도 참석했다. 그의 뛰어난 여론조성 능력 덕택에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아메리카 국가들을 통일된 단일전선으로 묶을 수 있었다.
동아시아 정책에서 그는 1934년에 일본이 제안한 '일본의 먼로주의'를 거부했는데, 일본의 먼로주의란 일본에게 중국에서의 자유재량권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34년말 일본이 1936년에 만료되는 해군군축조약을 갱신하지 않을 것이라고 통보하자 헐은 태평양에서의 미국 이해보존 정책과 계속적인 중국과의 우호관계 유지 및 군비추진 정책을 발표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헐과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이 중립정책을 고수하는 것이 오히려 추축국들의 공격을 고무시키고 있다고 생각하고 연합국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1941년 가을에 진행된 일본과의 결정적인 교섭에서 헐은 중국의 권리를 강하게 주장했으며, 일본에게 중국 본토 점령을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미국이 전쟁에 참전한 후 그와 국무부 동료들은 국제적인 전후 평화유지 기구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1943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외무장관 회의에서 헐은 약화된 건강과 노령에도 불구하고 전시의 협력체제가 전후에도 평화와 안전을 추구하는 세계기구 속에서 계속되어야 한다는 서약을 4개국 외무장관으로부터 받아냈다. 이러한 업적 때문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헐을 'UN의 아버지'라고 칭했으며, 그에게 노벨 평화상이 주어졌다. 1944년에 실시된 대통령선거 후 사임했으며, 저서로는 〈회고록 Memoirs of Cordell Hull〉(1950)이 있다. 1) 2) 3)
1) 1883 - 오스트리아/미국의 토목공학자 테르자기(Terzaghi, Karl von) 출생 테르자기 [Terzaghi, Karl (Anton) von, 1883.10.2~1963.10.23] 미국의 토목공학자. 토목공학의 한 분야이며 응력(應力)과 유수(流水)의 작용하에 있는 토양의 특성을 연구하는 학문인 토질역학(土質力學)의 기초를 세웠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그라츠공과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다. 1904년 졸업하여 7년간 기술자로 일했고, 그라츠공과대학에서 토목공학박사학위를 받았다(1911). 그는 미국 방문 후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오스트리아 공군에서 근무했고, 1916년 이스탄불에 있는 임피리얼공과대학에서 일하게 되었다. 또한 종전 후 이스탄불 불에 있는 미국 대학인 로버트 칼리지에서 일했다. 과거에도 이미 기초·토압(土壓)·경사안정도에 대한 많은 연구가 행해진 상태이지만, 그는 그 연구결과를 체계화시키고 연구를 통해 통합된 개념을 만들었다. 그의 연구성과는 그의 가장 유명한 책인 〈토질역학개론 Erdbaunmechanik〉(1925)에 나타나 있다. 1925년 미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에 있는 매사추세츠공과대학에서 학부교수단의 일원으로 자신의 이론을 승인받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했다. 또한 여러 건축계획의 고문기사로도 일했다. 1929년 빈공과대학의 새로 생긴 토양역학교수직을 맡게 되었다. 1938년 미국으로 되돌아와 1946년부터 1956년 은퇴할 때까지 하버드대학교의 토목공학교수직에 있었다. 1959년까지 이집트에 있는 아스완 댐 건설계획의 고문위원회 위원장직을 비롯해 고문기사로서의 그의 여러 업적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떨쳤다.
2) 1950 - 만화 <피너츠(Peanuts)> 연재 시작 찰스 슐츠(Schulz, Charles Monroe, 1922~2000)의 만화 '피너츠(Peanuts)'가 1950년 10월 2일부터 미국 7개 신문에서 연재를 시작했다. '스누피' '찰리 브라운' 등 피너츠에 등장한 많은 캐릭터들은 2000년 2월 12일 슐츠가 암투병 끝에 타계할 때까지 50여년에 걸쳐 세계 팬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50편의 TV 만화 영화로도 제작됐다. 1천4백여 종에 이르는 피너츠 만화도 매년 3억부 가량 판매됐다. 1965년에는 '찰리 브라운의 크리스마스'라는 CBS 특집으로 에미상을 수상했고 '좋은 사람 찰리 브라운'이라는 뮤지컬이 히트하기도 했다. 99년 결장암에 걸린 슐츠의 은퇴 선언으로 ‘피너츠’는 종료됐지만, 다양한 캐릭터 상품으로 판매되면서 여전히 인기를 누리고 있다. 프랑스 정부는 연재 40주년인 1990년 그에게 예술훈장을 수여했고, 2000년 그의 사후 미국도 미 의회 최고의 영예인 황금메달을 수여했다.
3) 1985- 미국의 영화배우 록 허드슨, 에이즈로 사망 이때 집중적으로 수집한 것이 동성애 편력이었다. 그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은 이미 헐리우드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2년간의 결혼생활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기간을 동성애자로 보냈기 때문이다. 그가 죽은뒤 한 동성애인이 “허드슨이 에이즈 감염사실을 숨겼다”며 죽은 자를 상대로 보상소송을 내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1) 2) 3)
1) 1882 - 최초의 태극기 그림이 일본 '시사신보' 신문에 게재 박영효 제작 「최초의 태극기」그림 찾았다 - 태극기 사용 100주년 기념우표, 1982 1882년 제작된 최초의 태극기 모양을 게재한 일본 일간지 「시사신보(時事新報·1936년 폐간)」가 처음으로 발견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태극의 도(圖)」를 적청색으로 그렸다고 적었다. 찾아낸 것.태극기 연구의 권위자인 金源模(김원모·단국대 사학과)교수는 『과거 신문의 주요기사를 발췌해 만든 명치편년사(明治編年史)나 朴泳孝(박영효)의 수기인 사화기략(使和記略)에서 태극기의 모양을 언급한 일이 있지만 그동안 이처럼 구체적으로 그려놓은 자료가 발견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삼각형 청색 바탕에 용을 그려 쓰도록 했다. 본국은 황색을 사용하지만 조선은 동방에 해당하는 속방이요 청색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청색바탕을 사용할 것을 지도했으나 국왕(고종)은 이를 크게 분개하여 결단코 청국 용기(龍旗)를 모방할 수 없다고 거절하면서 사각형 옥색 바탕에 태극의 도를 적청색으로 그리고 기의 네 귀퉁이에 동서남북의 역괘를 붙여서 이제부터 조선의 국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양효(陽爻) 2개를 그린 뒤 음효(陰爻)를 배치했고 우측 상단에는 양효를 먼저, 음효 2개를 나중에 그렸다. 사용할 국기의 제정을 건의해 허락을 받아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http://news.donga.com/fbin/output?sfrm=2&f=total&&n=199708140132
2) 1997 - 제1회 노인의 날 기념 - 노인의 날 경로효친 사상을 앙양하고,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켜온 노인들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제정한 법정기념일. 경로효친 사상의 미풍양속을 확산시키고,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켜온 노인들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각종 기념일등에 관한 규정'에 의거, 1997년 제정한 법정기념일이다. 1999년까지는 보건복지부에서 주관하였으나, 정부 행사의 민간 이양 방침에 따라 2000년부터는 노인 관련 단체의 자율행사로 개최된다. 컨벤션센터에서 기념식을 가진 뒤, 연예인 위문공연 및 위안잔치를 겸한 '전국노인가족체육대회'를 개최하는 등 순수 노인축제로 치러졌다. 훈장·포장 및 대통령·국무총리·보건복지부장관 표창을 수여한다. 뿐만 아니라 그해 100세가 되는 노인들에게 명아주로 만든 전통 지팡이인 청려장(靑藜杖)을 증정, 통일신라시대 이후 80세가 넘은 노인들을 대상으로 왕이 하사하던 전통을 이어 국민들에게 경로효친 사상을 불어넣는다. 그밖의 행사로, 노인 문화공연, 미니마라톤 대회, 어르신 모델 선발대회, 효도 큰잔치 등이 열린다.
[독자칼럼] 존엄을 생각해 보는 노인의 날/전희식 오늘은 노인의 날이다. 이곳저곳에서 노인의 날을 기념하는 행사를 열 것이다.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 그의 장인이 노인회 회장으로 있을 때 ‘정의사회구현’이라는 문구를 넣어 만든 노인강령과 노인헌장이 읽혀지고 흥겨운 놀이마당이 푸짐한 음식과 함께 차려진 날이다. 치매가 있으신 여든여섯의 어머님과 함께 살면서 새로이 보게 되는 사실들이 많다. 우리 사회가 초고령사회로 가고 있다는 걱정 어린 경고 속에서 장사꾼들만 판을 치고 정작 노인들이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분위기와 제도는 멀어 보인다. 복지센터의 노인 돌보미가 골목에 들어서면서부터 고함을 지른다. “할매! 할매! 자요? 일나아!” 주무시던 어머니가 꿈과 현실의 틈새에 끼여 한참을 허우적거리신다. 오줌 쌌으니 빨아주겠다고 아랫도리를 와락 벗긴다. 면사무소 직원도 간호사도 의사도 반은 반말이다. 몸 불편하고 기력이 떨어진 노인들을 온전한 인간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노골적으로 애 취급한다. 전문가들은 온갖 병명을 만들어 붙인다. 무슨 무슨 노인성 병과 증상들이 모두 치료의 대상이고 격리 이유가 된다. 시설에 요양하러 온 정상적인 노인들마저 모두 환자복을 입혀서 환자로 만들어 놓고야 만다. 책방마다 차고 넘치는 것이 어린이책이지만 노인들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책과 음반과 영화가 따로 있지 않다. 동화가 있으나 ‘노화’가 없고, 동시가 있으나 ‘노시’가 없다는 사실을 이제야 발견한다. 부모 모시기는 자식 키우기의 반의 반도 안 된다는 사실을 드러내 주는 증거들이다. 몸이나 정신이 수명을 다하여 제 기능을 하나씩 잃어가는 것은 노년기의 마땅한 현상이다. 의사들은 그런다. ‘이건 노화가 아니라 병이다’라고 강조한다. 정상적인 노화와 병을 꼭 구별하려고 한다. 무모한 짓이다. 그 누구도 공격하지 않는 노인들을 자꾸 병자로 만들 것이 아니라, 정말 치료가 필요한 사람은 사회악을 만드는 일부 ‘정상인’들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치매 걸린 부모의 반상식적인 언행들이 제 정신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식구들은 그제야 안도하고 감정을 눅인다. 대신 그때부터 더는 부모가 아니라 환자다. 부모의 말과 행동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모두가 헛소리고 웃음거리의 소재로 전락된다. 그동안 노인 관련 전문서적을 많이 봤지만 손을 꼭 잡아주고, 노인과 같은 방에서 자며 얼굴이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라는 글은 읽지 못했다. ‘헛소리’일망정 틀렸다고 하지 말고 끝까지 들어주고 추임새를 넣어주라는 말은 없다. 사랑과 정성은 한마디도 언급되지 않고 오로지 약과 병원과 음식이 한결같은 처방들이다. 사랑은 죽은 세포도 되살리며 정성은 통증을 경감시킨다는 것이 내 체험의 결과들이지만 인정되지 않는다. 큰 행사나 공공기관에 갈 때 아이들을 데리고 갈 수 있도록 시설이 마련되고 전문인이 배치되지만 어디에도 불편한 부모 모시고 갈 수 있는 행사나 공공기관은 없다. 신경정신과 의사와 정신심리학 연구자들이 많지만 ‘트라우마’라는 유행어를 만들며 잠재의식과 꿈의 해석에 골몰하면서도 알츠하이머 증세의 노인들이 하는 이야기가 얼마나 심오한 무의식과 초차원적 세계를 반영하고 있는지 관심 갖는 것을 보지 못했다. 모두 건강과 젊음과 이성의 이름으로 저지르는 노인 학대행위들이다. 오늘은 노인의 날이다. 노인의 존엄을 생각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한다. 정부의 노인정책도 노인의 존엄을 생각하는 데 집중해야 할 것이다. 전희식/농부·전국귀농운동본부 이사 -한겨레 2007-10-01 오후 06:41:03
3) 1958 - 기니, 프랑스로부터 독립 기니는 15세기에 포르투갈인(人)이 가장 먼저 해안에 도달하고, 그뒤 17세기에는 프랑스와 영국의 쟁탈대상이 되었다. 1725년 풀라니족(族)이 푸타잘롱 산지에 진출하여 해안지대의 유럽인 세력에 항거하였다. 해안지대는 1814년에 프랑스 세력권으로 인정되어 1849년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으나, 프랑스의 침략에 대한 무력저항은 말린케족의 지도자 사모리 투레 등에 의해 20세기 초반까지 지속되었다. 또 1911년에 라이베리아와의 국경을 결정하여 보호령의 영역을 확보하였다. 당시 프랑스는 식민지 행정면에서 기니를 세네갈에 속하게 하여, 리비에르 뒤 쉬드(Rivires du Sud:남쪽의 강이란 뜻)라고 하였으나, 1891년에 하나의 단위식민지로 하여 1893년에 프랑스령 기니라고 명명하였다. 실시한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에 대한 국민투표에서, 그 헌법을 거부하고 다음달(10월)에 프랑스 공동체로부터 이탈하여 독립하였고 투레가 초대대통령에 취임하였다.
2007 - 노무현 대통령 방북, 남북 정상회담 (2~4일) 다시 만난 남북정상 '한반도 평화' 손잡았다 “반갑습니다!”(김정일 국방위원장) “반갑습니다!”(노무현 대통령) 2007년 10월2일 낮 12시2분, 7년 만에 다시 손을 맞잡은 남북 두 정상의 인사말은 길지 않았다. 그렇지만 두 정상의 만남이 갖는 무게는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이번 만남은 남북 관계 진전을 이끄는 새로운 추동력이 되기에 충분하다. 남북은 지난 2000년 정상회담이 열어 놓은 화해·협력에서 평화와 번영으로 가는 길에 들어섰다. 노무현 대통령은 청와대를 떠나기 전 발표한 대국민 인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2000년 정상회담이 남북 관계의 새 길을 열었다면, 이번 회담은 그 길에 가로놓여 있는 장애물을 치우고 지체되고 있는 발걸음을 재촉하는 회담이 될 것입니다.” 노 대통령이 인사말에서 밝힌 것처럼 “이번 정상회담은 좀더 차분하고 실용적인 회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두 정상의 만남은 첫 정상회담에 비해 절제된 모습이었다. 노 대통령 공식 환영행사가 열린 4·25 문화회관 광장에 오전 11시55분쯤 나와 기다린 김 위원장은 환영행사 내내 담담한 모습으로 일관했다. 앞서 노 대통령은 국가원수이자 군통수권자로는 처음으로 오전 9시5분 군사분계선(MDL)을 걸어서 넘는 역사적 순간을 연출했다. 노 대통령은 분계선을 넘기 전 대국민 메시지를 통해 “장벽은 무너질 것”이라며 “제가 다녀오면 또 더 많은 사람들이 다녀오게 될 것”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이는 7년 전 순안공항에서 남북 두 정상이 보여준 뜨거운 악수와 함께 남북 통일 역사의 상징적인 한 장면으로 남을 것으로 보인다. 군사분계선을 넘은 노 대통령은 평양∼개성간 고속도로를 달려 11시40분께 평양 시내 인민문화궁전 앞에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영접을 받았다. 두 사람은 미리 대기하고 있던 무개차에 나란히 타고, 평양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공식 환영행사가 열리는 4·25 문화회관 쪽으로 퍼레이드를 벌였다. 노 대통령은 저녁에는 목란관에서 김 상임위원장이 마련한 환영만찬에 참석했다. 이날 오후로 예정됐던 평양 시내 3대혁명전시관의 중공업관 참관은 3일로 연기됐다.노 대통령은 방북 이틀째인 3일 김 위원장과 오전·오후 두 차례 공식 정상회담을 열 예정이다. 정상회담은 소수 배석자가 참석하는 단독회담 형식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회담에서 노 대통령은 김 위원장과 △남북 공동번영 △한반도 평화 △화해와 통일이란 큰 틀에서 주요 현안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나눌 방침이다. 회담을 마무리한 뒤 ‘평화 선언’ 형태의 합의문을 채택할 것으로 전망된다. 평양공동취재단, 강태호 남북관계전문기자 kankan1@hani.co.kr 한겨레 2007-10-02 오후 07:13:27
1988 - 제24회 서울올림픽 폐막 1988년 9월 17일부터 16일간 서울에서 개최된 서울올림픽이 1988년 10월 2일 폐막식과 함께 막을 내렸다. 160개 IOC회원국에서 1만 3,303명의 선수단이 참가, 237개의 금메달을 놓고 각축을 벌인 결과 소련이 금메달 55개로 메달순위 1위를 차지했고, 동독이 37개로 2위, 미국이 36개로 3위를 차지했으며 개최국 한국은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로 4위를 기록했다.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이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권 국가들의 참가거부로, 1984년 LA올림픽이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참가거부로 반쪽짜리 올림픽이 됐던 데 반해 서울올림픽은 12년 만에 동서가 모두 참가한 지구촌의 대결장이었던만큼 세계신기록 33개, 올림픽신기록 225개가 쏟아져나오는 등 풍성한 기록을 남겼다.
1973 - 핀란드의 육상선수 누르미(Nurmi, Paavo) 사망 누르미 [Nurmi, Paavo (Johannes), 1897.6.13~1973.10.2] 핀란드의 육상선수. 1920년대 장거리 육상 종목을 석권했다. 3차례의 올림픽 대회(1920, 1924, 1928)에서 6개의 금메달을 땄으며 그가 기록한 1마일(1.6㎞) 경기의 세계기록 4분 10초 40은 8년 동안(1923~31) 깨지지 않았다. 1920년 이래로 올림픽의 영광을 차지했던 다른 수많은 핀란드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누르미도 1912년 올림픽에서 장거리 경기 3종목을 석권한 핀란드의 한네스 콜레마이넨에게 감명을 받았다. 누르미는 훈련 때나 경기 때나 자신의 보폭을 정확하게 조절할 수 있도록 스톱워치를 가지고 다녔다. 1920년 벨기에 앤트워프 올림픽 대회에서 1만m 달리기와 1만m 크로스컨트리에서 금메달을 땄으며 192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올림픽 대회에서 1만m 달리기에서 또 하나의 금메달을 추가했다. 1924년 파리 올림픽 대회에서 그의 기록은 대단했다. 굉장히 더웠던 7월 10일 1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1,500m와 5,000m에서 올림픽 신기록을 세웠다. 이틀 후 역시 숨막히는 더위 속에서 1920년에 우승한 1만m 크로스컨트리에서 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이 경기는 1924년 이후 올림픽 종목에서 제외되었다. 그 다음날 비공식 3,000m 릴레이에서 첫번째로 들어와 핀란드 팀이 승리했으나 메달은 없었다. 1923년 8월 23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1마일 신기록을 세울 때에 자신의 스톱워치를 들여다보며 뛰어 처음 3쿼터는 각각 정확히 63초에 달렸고, 마지막 쿼터는 61.4초에 달렸다. 그가 각 쿼터를 거의 같은 시간대로 달려 기록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선수들은 그 방법을 따르지는 않았다. 1928년 1시간 경기에서 1만 9,210m를 달려 세계신기록을 세웠다. 규정 이외의 금품을 받았다 하여 1932년 올림픽 직전에 국제 아마추어 선수자격을 박탈당했다.
1968 - 프랑스의 미술가 뒤샹(Duchamp, Marcel) 사망 뒤샹 [Duchamp, Marcel, 1887.7.28~1968.10.2] 프랑스의 미술가. 1887년 7월 28 프랑스 블랭빌에서 출생하였다. 입체파 조각가 R.D.비용, 화가 J.비용의 아우이다. 파리의 아카데미 쥘리앙에서 공부하면서 P.세잔의 영향을 받았고, 뒤이어 1911년에 입체파의 일파인 섹시옹 도르에 참가했다. 독립미술협회를 결성하여 반예술운동을 일으켰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파리에 돌아와 초현실주의(쉬르리얼리즘)에 협력, 1941년 A.브르통과 함께 뉴욕에서 초현실주의전을 열었다.
1927 - 스웨덴의 물리화학자 아레니우스(Arrhenius, Svante) 사망 아레니우스 [Arrhenius, Svante (August), 1859.2.19~1927.10.2] 스웨덴의 물리화학자. 웁살라 근처의 비크 출생. 1876년 웁살라대학에 입학, 물리학을 전공하는 한편, 화학과 수학을 배워 1881년에 졸업하였다. E.에들룬드의 실험실에서 전해질희석수용액의 전기전도도에 관하여 연구, 1884년 과학아카데미에 논문으로 발표하여 이온화설의 기초를 이루었다. 이 논문으로 1884년 웁살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나 크게 인정받지는 못하였다. W.오스트발트의 추천으로 웁살라대학 강사가 되었으나, 곧 사임, 과학아카데미의 해외연구생으로 5년간 여러 나라에 유학하였다. 1891년 독일의 기센대학에 물리화학강좌가 신설되어 아레니우스를 조교수로 초청하기에 이르러서야 스톡홀름대학에서 물리학강사의 지위를 얻어 스웨덴에 머물기로 하였다. 1896년 이온화설의 업적으로 독일의 전기화학학회 명예회원으로 추천되었고, 이듬해 스톡홀름대학 학장에 임명, 1901년에는 스웨덴 과학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1902년 영국의 왕립학회로부터 데이비상을 받고, 1903년에는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1905년 스웨덴 정부는 노벨물리화학연구소를 설립, 아레니우스를 소장에 임명하였다. 1927년까지 그 지위에 있으면서 여러 방면에 걸친 연구를 하였다. 주요 업적은 이온화설, 화학반응속도 및 면역화학의 이론, 우주물리학에서는 오로라의 기원에 관한 가설, 지학에서는 화산 활동의 원인에 대한 가설 등이 있다. 또한 많은 저서가 있는데, 《사적으로 본 우주관의 변천》 등이 유명하다.
1904 - 인도의 정치가, 총리 샤스트리(Shastri, Lal Bahadur) 출생 샤스트리 [Shastri, Lal Bahadur, 1904.10.2~1966.1.11] 인도의 정치가, 총리. 1964~66년 자와할랄 네루를 뒤이어 총리를 지냈다. 1921년 식민정부에 반대하여 마하트마 간디의 비협조운동에 가담한 이유로 1921년 잠시 투옥되었다. 풀려난 뒤 민족대학의 하나였던 카시 비디아피타에서 수학하고, 샤스트리('성전에 정통하다'는 뜻)가 되어 졸업했다. 그뒤 간디의 추종자로 다시 정계로 복귀하여 7차례에 걸쳐 투옥되면서도 연합주 (지금의 우타르프라데시 주)의 국민회의당 조직을 이끌었다.1937년과 1946년 샤스트리는 연합주 의회에 진출했으며, 인도 독립 후에는 우타르프라데시 주의 내무장관·운송장관으로 경력을 쌓은 후 1952년 연방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었고, 연방 철도·운송장관으로 활동했다. 1961년 내무장관에 취임한 뒤에는 능숙한 중재자로서 명성을 떨쳤으며 3년 뒤 자와할랄 네루의 와병중에 무임소장관에 임명되었다가 네루가 죽은 뒤 1964년 6월 총리가 되었다. 샤스트리는 경제문제에 효율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1965년 잠무와 캬슈미르의 귀속을 둘러싸고 파키스탄과 적대관계로 치달았을 때 단호한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인기를 얻었다. 파키스탄의 아유브 칸 대통령과 소련령 중앙 아시아에서의 부전조약에 서명한 뒤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네루의 딸 안디라 간디가 샤스트리를 이어 총리가 되었다.
1869 - 인도 건국의 아버지 간디(Gandhi, Mohandas Karamchand) 출생
1847 - 독일군 원수와 대통령을 지낸 힌덴부르크(Hindenburg, Paul von) 출생
1535 - 프랑스 탐험가 자크 카르티에가 세인트로렌스 강을 거슬러올라가 지금의 몬트리올에 도착하다 1452 - 영국의 왕 리처드 3세(Richard III) 출생 1434 - 해시계 앙부일구 제작
BC 322 -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사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