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이모우 감독. | |
홍콩 영화감독 천커신(陳可辛)은 5년 전 워너 브라더스로부터 흥미로운 제안을 받았다.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아시아판으로 리메이크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워너 브라더스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역할에는 저우룬파(周潤發)를, 메릴 스트립의 역할에는 궁리(鞏悧)를 염두에 뒀다. 천은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지만 다른 프로젝트로 바빴기 때문에 리메이크 작업은 이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요즘은 사정이 달라졌다. 아시아 각국(특히 중국)의 영화 흥행 수입이 꾸준한 증가세를 보이자 할리우드의 히트작을 아시아 관객용으로 리메이크하는 사례가 늘어난다. 지난해에는 킴 베이싱어 주연의 납치 스릴러 ‘셀룰러’(2004)가 중국에서 리메이크됐다. 중국 최초의 할리우드 영화 리메이크 작품이다.
올 베를린 영화제에서는 중국의 베테랑 영화 감독 장이모우(張藝謀)가 코언 형제의 네오-누아르 스릴러 ‘분노의 저격자’(1984)를 리메이크한 ‘여자, 총, 그리고 국수 가게(A Woman, a Gun and a Noodle Shop)’를 선보였다. 무대가 미국 소도시에서 중국 북서부의 사막으로 바뀌었다.
또 지난 6월에는 로맨틱 코미디 ‘왓 위민 원트’(2000)의 리메이크 작품이 제작에 들어갔다. 멜 깁슨의 역할은 홍콩 스타 류더화(劉德華)가, 헬렌 헌트의 역할은 궁리가 맡았다. 위 작품들은 아시아 현지 영화사가 제작했지만 할리우드의 영화사들도 이 리메이크 대열에 합류하는 추세다.
일부 미국 영화사는 지난 20년 동안 여러 편의 아시아 영화를 미국 관객용으로 리메이크했다. 일본 원작을 리메이크 한 ‘링’과 홍콩 영화 ‘무간도(無間道)’를 리메이크한 ‘디파티드’, 한국 영화 ‘시월애’를 리메이크한 ‘레이크 하우스’가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이 영화사들이 최근에는 미국 영화를 동양 관객의 입맛에 맞게 리메이크하는 작업에 나서기 시작했다. 올여름 디즈니는 중국의 두 영화사와 합작으로 ‘하이 스쿨 뮤지컬’의 중국어판을 내놓는다. 또 파라마운트 픽처스와 일본의 쇼치쿠(松竹) 영화사는 최근 ‘사랑과 영혼’(1990)의 리메이크 작업을 시작했다.
일본 여배우 마츠시마 나나코(松嶋奈奈子)와 한국 배우 송승헌이 각각 데미 무어와 패트릭 스웨이지의 역할을 맡는다. ‘왓 위민 원트’의 공동 제작자 디디 니커슨은 이렇게 말했다. “세계 어디서나 보편적으로 공감을 얻는 주제들이 있다. 리메이크가 성공하는 이유다. 또 영화사들은 기존의 지적재산을 최대한 활용하려 한다.”
할리우드는 해외 관객의 구미에 맞게 영화를 맞춤제작하는 데 늘 적극적이었다. 1930년대 초 할리우드 영화사들은 자사 작품의 세트와 의상을 그대로 이용해 외국어판을 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더빙 기술이 나오기 이전 로렐과 하디(1920년대 말~1940년대 중반 인기를 모았던 미국 코미디언 팀)는 카메라 뒤쪽 칠판에 소리나는 대로 적힌 대사를 읽는 방식으로 프랑스어와 스페인어, 독일어, 이탈리어로도 촬영을 했다. 또 1930년작 ‘드라큘라’의 세트장에서는 두 팀의 스태프가 별도로 작업을 했다.
낮에는 토드 브라우닝 감독이 벨라 루고시 주연의 영어판을, 밤에는 조지 멜포드 감독이 카를로스 빌라리아스 주연의 스페인어판을 촬영했다. 하지만 막강한 힘을 지닌 할리우드도 최근 들어 각국의 국산 영화에 시장 점유율을 빼앗긴다. 관객들이 자국의 문화적 가치관을 반영하며, 쉽게 공감할 만한 배우들이 나오는 영화를 찾는 경향이 갈수록 짙어진다.
지난 2002년만 해도 일본 극장가는 외화의 지배를 받았다. 외화의 흥행수입이 전체의 73%를 차지했다. 하지만 지난해엔 그 비율이 43%로 떨어졌다. 파라마운트 일본지사의 홍보담당 이사 기노모토 히사미치는 “요즘 일본 젊은이들은 예전만큼 서양 문화에 열광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현지 관객의 구미에 맞게 리메이크한 외화가 원작보다 흥행에 더 성공하는 경우도 있다. 지난해 일본의 후지 TV는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사이드웨이’(2004)를 리메이크했다. 두 친구가 캘리포니아주의 와인 산지를 여행하는 내용이다. 박스오피스모조닷컴에 따르면 원작이 일본에서 96만 달러의 흥행수입을 올리는 데 그친 반면, 리메이크 작품(두 일본인 친구가 나파 밸리를 여행한다)의 흥행 수입은 150만 달러에 이르렀다.
해외 현지의 시장점유율 증가를 꾀하는 많은 영화사가 현지 영화사들과의 합작을 원한다. 지난 5년 동안 영화 흥행 수입이 연간 25%의 성장세를 보인데다 스크린 쿼터제가 엄격하게 시행되는 중국에서는 특히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다(중국에서는 현재 연간 상영 가능한 외화 편수가 20편으로 제한돼 있다).
게다가 현지 영화사와 합작으로 작품을 제작할 경우에는 흥행 수입의 43%가 제작사에 돌아가지만 외화의 경우 제작사에 돌아가는 몫은 그보다 훨씬 적다. 흥행에 성공한 기존 영화의 리메이크 작업 논의는 현지 영화사와 대화를 시작하는 쉬운 방법이다. 하지만 리메이크에 드는 비용을 고려할 때 현지 시장에 알맞은 새로운 창작 영화를 개발하는 편이 더 유리하다.
폭스 인터내셔널 프로덕션의 샌포드 패니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시장점유율 면에서나 자연스러운 스토리텔링의 측면에서 현지 영화의 가치를 새삼 깨달아 간다.
인도의 경우 국산 영화가 시장의 90%를 차지한다. 그 시장에 뛰어들고 싶다. 할리우드의 기존 영화 리메이크도 한 방법이지만 우리는 새로운 창작 영화 개발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 현지화된 창작 작품은 흥행에도 성공하는 듯하다. 지난해 일본의 10대 흥행 영화 중 할리우드 영화는 4편뿐이었으며 리메이크 작품은 한 편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