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도 청해진유적(莞島 淸海鎭遺蹟)
전라남도 완도군 완도읍 장도(將島)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군진(軍鎭) 관련 성곽터.
1984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991∼2001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 조사하였다.
청해진은 신라 흥덕왕 3년(828) 장보고가 설치한 해군기지이자 무역기지로, 전라남도 완도 앞바다의 작은 섬인 장도(將島)에 위치하고 있다.
당시 청해진은 신라와 당, 일본을 잇는 해상무역의 중요한 길목이었다. 장보고(?∼846)는 평민 출신으로 당나라에 건너가 장군이 되었으나, 해적들이 신라인을 노예로 삼는 것에 분개하여 신라에 돌아와 왕의 허락을 받고 828년 청해진을 설치하였다. 청해진은 국제무역의 중심지로 동아시아 무역을 독점하여 번영을 누리며 큰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장보고는 이후 왕위계승과 관련된 권력다툼에 휘말려 자객 염장에 의해 846년 암살당하였고, 문성왕 13년(851)에 청해진은 폐쇄되었으며, 장도는 섬 전체가 계단식 성의 흔적만 남게 되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의해 연차적인 발굴을 진행한 결과, 청해진유적 성(城)의 총 길이는 890m로 축성방법이 고대 판축기법에 의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섬 입구 방어용 목책으로 추정되는 원목렬은 총 길이 331m로 대부분 참나무 기둥을 사용한 것이 확인되었다. 또한 건물지 내에 지하 매납(埋納) 원형 구덩이 속에서 출토된 토기편병, 철제솥, 청동병 등은 인위적으로 매장한 것으로 대부분 제사용기로 판단되는 귀중한 유물이다. 이것들은 『삼국사기』의 “청해진 조음도에서 중사(中祀)주 01)를 거행하였다.”는 기록을 뒷받침하는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된다. 한편, 출토유물인 연화문 암·숫막새기와, 토기편병, 해무리굽청자편 등과 섬 입구 원목렬 시료를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에 의한 분석 결과, 9세기 중반경으로 확인되었다. 이로써 이 유적이 통일신라시대 장보고 대사가 활동한 9세기경에 축성·사용된 것이 과학적인 근거에 의해 밝혀지게 되었다. 또한 이 성곽이 종래 내외 이중성으로 알려졌던 것과는 달리, 단일 성곽으로 축조되었음이 새로이 밝혀졌다. 다만 섬 입구쪽인 서남부부분에만 이중의 성벽을 둘러서 출입구를 보강하고 있다. 성벽은 1단 또는 2단의 돌을 폭 5∼6m 간격을 두고 평행으로 배열한 뒤, 그 안쪽을 주변의 흙으로 겹겹히 다져 단단하게 쌓아 올린 판축(版築)성벽이었다. 지금까지 최고 2.5m의 성벽이 최다 18겹의 판축으로 형성되었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성벽 축조시 석렬(石列)과 나무기둥으로 작업구간을 나누었던 흔적이 14∼16m 간격으로 남아 있어 고대 성벽 축조기법을 밝혀내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성곽 관련시설로는 당집 1개소, 내성문 및 외성문 각 1개소, 관측시설인 치(雉) 4개소, 고대(高臺)시설 1개소, ㄷ자형판축유구 및 우물 등이 발견되었다. 이상과 같이 지금까지의 발굴조사를 통해 청해진성 및 해변 원목렬의 규모와 구조를 밝혀냈고, 성 내부의 부속시설들을 찾아내 향후 청해진 유적의 복원에 필요한 자료를 획득하였다.또한 『삼국사기』 등의 문헌기록을 직접적으로 반증하는 귀중한 성과를 올렸다. 특히, 성곽이나 매납유구, 해누리굽청자편과 독특한 양상을 띠는 토기들은 앞으로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청해진유적은 신라시대 후기 장보고가 서남해안의 해적을 소탕하고, 중국의 산동지방과 일본을 연결한 해상 교역로의 본거지로서 중요한 역사적 유적이다. 현재 섬 전체가 계단식 성의 형태로 흔적이 남아있으며, 앞바다를 제외한 주변바다는 수심이 얕아 방어용 목책을 박아 외부접근을 막도록 만들었다. 성터 안에는 토기와 기와조각이 발견되고 있고, 인근에 장보고가 지었다는 법화사터가 남아있다.
장보고(張保皐)
출생 미상
사망 846(문성왕 8)
본명 궁복, 궁파
국적 신라, 한국
종교 불교
신라 흥덕왕 때 완도에 청해진을 건설하고 서남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한 신라의 장군. 본명은 궁복, 궁파로 무예에 자질이 있어 당나라로 가 유학하다가 신라인이 당의 해적들에게 노략당하는 것을 보고 귀국해 왕에게 바다를 수호할 것을 청했다. 허락이 떨어진 후 군사 1만 명을 모아 지금의 완도인 청해진을 건설했다. 해적을 소탕해 서남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했고, 당과 신라, 일본을 잇는 해상무역로를 통해 무역활동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이후 경제력과 무력을 바탕으로 권력쟁탈전에도 개입하기 시작해 흥덕왕 11년 경주에 침입해 민애왕을 살해하고 김우징을 신무왕으로 즉위시켰다. 이로 인해 중앙정부의 시기를 샀고, 부하였던 염장에 의해 살해당했다.
본명은 궁복(弓福)·궁파(弓巴). 일본 승려 엔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 入唐求法巡禮行記〉에는 장보고(長寶高)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생애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지만 서남해안 지방의 토호 출신일 가능성이 크며, 장씨 성은 당나라에 있을 때 칭한 것으로 추정된다. 무예에 자질이 있어 당나라로 건너가 서주(徐州)의 무령군(武寧軍) 소장(小將)이 되었다. 당에서 귀국한 뒤 828년(흥덕왕 3) 왕에게 청해(淸海)를 진수(鎭守)할 것을 청했다. 당시 서남해안에서는 당의 해적들이 신라인을 노략질하여 노비로 팔거나 무역선을 약탈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그는 왕의 허락을 받아 군사 1만 명을 모아 청해진(淸海鎭 : 지금의 완도)을 건설했다. 청해진은 7세기말에서 8세기초에 걸쳐 설치된 군진(軍鎭)의 하나이지만 건설 당초부터 독자적인 성격이 강했다. 그에게 내려진 대사(大使)라는 직명도 다른 군진의 진두(鎭頭)·두상(頭上) 등 신라의 정규 관직과는 다른 것이었다는 점도 이러한 사실을 말해준다.
청해진이 건설된 뒤 그는 해적을 소탕하여 서남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했고, 당·신라·일본을 잇는 해상무역로를 통한 무역활동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신라 지배체제의 외곽적 존재로서 해상무역을 통해 일종의 해상왕국을 형성한 그는 당나라에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와 함께 교관선(交關船)이라는 무역선을 보내 교역활동을 했다. 840년(문성왕 2)에는 일본에 회역사(廻易使)를 파견하여 서신과 물건을 보냈다. 일본측은 이를 사교(私交)라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무역은 허용했고, 그 사자와 이충(李忠)·양원(楊圓) 등에게 식량을 지급하기도 했다.
그의 세력은 국제적으로 극히 번성하여 중국에 유학한 일본 승려 엔닌은 그에게 정중한 편지를 써서 귀국할 때의 뱃길을 부탁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무역활동을 통해 확보한 경제력을 배경으로 중국의 산둥 성[山東省] 원덩 현[文登縣] 츠산춘[赤山村]에 법화원(法華院)이라는 절을 세웠다. 이곳에는 500석을 수확하는 장전(莊田)이 속해 있었는데, 많은 승려가 머물며 정기적으로 법회를 열었고, 청해진과의 연락기관 구실도 했다.
그는 경제력과 무력을 배경으로 중앙의 권력쟁탈전에도 개입하게 되었다.
836년(흥덕왕 11) 왕위계승분쟁에서 패한 김우징(金祐徵)이 청해진으로 와 그에게 의탁했다. 838년(희강왕 3) 희강왕이 피살되고 민애왕이 즉위하자 김양(金陽)은 군사를 모집하여 청해진으로 와서 먼저 와 있던 김우징을 만나 장보고에게 도움을 청했다. 장보고는 정년(鄭年)으로 하여금 군사 5,000명을 이끌고 김양과 함께 경주로 진격하게 했다. 이들은 중앙군을 물리치고 경주에 침입하여 민애왕을 살해하고 김우징을 신무왕으로 즉위시켰다.
신무왕은 장보고를 감의군사(感義軍使)로 삼고 식읍(食邑) 2,000호를 봉해주었다. 신무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문성왕은 즉위와 함께 그를 진해장군(鎭海將軍)으로 삼고 장복(章腹)을 내렸다. 그러나 진골귀족들은 그가 중앙정부에서까지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845년(문성왕 7)에 왕이 장보고의 딸을 차비(次妃)로 들이려 했으나 진골귀족들은 그가 '해도인'(海島人)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여 성사되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이듬해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중앙정부는 무력으로 그를 토벌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한때 장보고의 부하였던 염장(閻長)을 자객으로 보내 그를 살해하게 했다. 청해진의 세력은 그 뒤에도 얼마 간 유지되었으며, 851년에야 청해진을 없애고 주민을 벽골군(碧骨郡 : 지금의 김제)으로 옮길 수 있었다.
장도 청해진유적(莞島 淸海鎭遺蹟)
위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