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방송 에세이](6)
지역방송, 도시를 노래하다 / 김잠출
눈보라 비껴 나는
全- 郡- 街- 道-
시 속에 그림이 있으니 詩中有畵다. 시를 읽는데 그림이 그려진다. 오래전 교과서에 실린 ‘고무신’이란 시다. 시는 한겨울 눈보라가 휘날리는 전군가도를 보여주면서 시작된다. 이어서 소박한 시골 풍경에 차창 밖으로는 외딴집의 섬돌에 고무신 세 켤레가 놓여 있다.
퍼뜩 차창으로
스쳐가는 인정아
외딴 집 섬돌에 놓인
하나
둘
세 켤레
‘전군가도'… 1908년 우리나라 최초로 건설된 시멘트 포장도로, 신작로 이름이다. 대학생이 되어서야 비로소 전군가도의 정체를 알았다. 전주와 군산이란 도시의 이미지는 나에게 그렇게 다가왔고 벚꽃 길을 보기 위해 일부러 전군가도를 차를 타고 달려 본 적이 있다.
책이 귀하던 시절, 중고등학교 국어책에는 다양한 문학작품이 실렸다. 교과서를 통해 비로소 수필과 시를 처음 접했다. 신록예찬과 청춘예찬, 페이터의 산문과 인연, 낙엽을 태우면서, 백설부, 산정무한,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대부분 관념적인 예찬류의 글이고 교양과 지식을 과시하는 글이었지만 그때는 색다른 이국의 풍물에 막연한 동경을 품기도 했다. 교과서는 그렇게 학생들을 가르쳤다. 선생님도 가난과 행복에 대한 소박하고 감상적인 이해를 강요하며 '교과서적‘인 해석을 아주 교조적이고 경직되게 주입했던 것 같다.
고등학생이 되니 교과서는 공부에 물꼬를 트는 정도로 그 분야의 문을 여는 열쇠의 역할만 할 뿐이었다. 교과서는 이탈을 허용하지 않았고 유연성이 존재하지 않았다. 교과서에는 미래가 없었고 자유 대신 엄격한 기준만 제시했지만 나의 청춘은 스스로 생각하고 부딪쳐 해결하는 시기였으니 교과서의 가르침에만 머물기를 거부했다.
1990년대까지 ‘3분의 미학’이라는 가요를 방송에서 마음대로 내보낼 수가 없었다. 사전검열과 금지곡 리스트를 거쳐야했고 저속이니 왜색이니 외래어 범람이라는 각종 교과서적 틀을 벗어나야만 했다. 그런 와중에도 팝송이나 대중가요는 방송에서 빠지지 않는 레시피였는데 나는 늘 가사를 먼저 파악하고 프로그램이 의도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다. 그런 메신저 중에 정태춘이 있었다. ‘시인의 마을’은 그를 음유시인으로 여기게 했고 양희은이나 김민기는 숨 막히는 시대를 찢고픈 청춘의 저항을 대신해 줬다. 그런 류의 정서를 대변한 가객은 노찾사나 밥 딜런, 신중현과 장사익, 산울림과 한결, 안치환도 있었다.
노래로 보는 도시 이미지
‘여수 밤바다’를 들으면 절로 여수의 낭만에 젖어든다. ‘안동역에서’를 부르면 눈 내리는 역광장에 내가 서 있는 것 같다. 한 때 스콧 맥킨지 때문에 샌프란시스코를 가고 싶어 몸살을 앓았던 적이 있다. 한참 뒤 미국 투어를 하면서 금문교를 건널 때 “If you’re going to San Francisco, Be sure to wear some flowers in your hair”라는 가사가 절로 나왔다.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을 본 뒤에는 맥 라이언을 만나기 위해 현지에 갔다. 맥 라이언 대신 CNN과 MS를 방문하는 것으로 끝났지만 운명적인 사랑, 사랑에 빠지는 마법 같은 순간을 확인하고 싶은 환상이 따라다녔다.
대중가요는 가장 쉽게 보편적으로 접할 수 있는 음악이다. 클래식이나 재즈 등 마니아층을 위한 음악과 달리 많은 대중의 사랑을 받는다. 가사와 곡이 주는 강한 공감능력 때문이다. 대중가요는 누구나 겪었을 사랑과 이별, 아픔과 삶의 기쁨, 고통을 이야기해 준다. 노랫말을 통해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과 교감을 하고 정서적으로 하나로 묶일 때가 많다. 1980년대 방송은 국민 계몽과 새마을 정신 함양, 반공 이데올로그 역할을 충실히 해야 했다. 직원들은 예외 없이 매달 반상회 참석 보고서를 내야 했고 주간 단위의 반공 프로를 의무적으로 편성했다. 매달 새마을 프로그램 방송도 거스를 수가 없었다. SB시간에는 새마을 노래나 울산시가(市歌)를 틀고 ‘울산 큰애기’나 ‘울산 아가씨’를 방송해야만 했다. 울산시가를 통해 “약진하는 조국의 기약을 상징한 번영의 도시”를 우렁차게 찬양했고 “기름 부어 축복된 도시”를 찬미하며 국민의식을 드높이는 일을 반복하고 또 반박했다. ‘울산 큰애기’를 통해 “상냥하고 복스런 울산 큰애기”와 “다정하고 순직한 울산 큰애기”를 떠올리도록 세뇌하고 “경치도 좋고 인심도 좋은 동해라 울산”을 널리 알리며 국민총화라는 단일대오에 한 사람도 이탈하지 않도록 계몽 방송을 열심히 했다.
‘목포의 눈물’이나 ‘부산 갈매기’, ‘대전 블루스’ 만큼 전 국민이 애정하고 해당 도시를 상징하는 노래는 드물다. 울산을 상징하면서 유명해진 노래도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울산 노래’는 신라 향가에 연원이 닿아 있을 정도로 역사가 오래됐다. 울산에서 시작된 울산이 진원인 향가 '처용가‘는 노래로 세상을 바꾼 노래 중에 으뜸이다.
역병에 고통받던 신라인들은 처용가를 불렀다. 신라인들은 향가의 힘, 노래의 힘을 믿었다. 강강수월래를 부르던 여인들이나 쾌지나 칭칭 나네를 외치던 경상도 사내들도 노래의 힘에 의존했다. 코로나에 맞서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노래의 힘이 아닐지 생각해 본다. 지역방송이 지역을 노래하고 지역 이미지 제고를 위한 노력을 더 많이 했으면 한다.
노래는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1985년 팝스타들이 아프리카 난민을 위해 불렀던 'We Are The World'나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이끌었던 보위의 'Heroes'는 세계인들의 사랑을 널리 받았다. 세상을 변화시킬 노래를 만드는 일, 지역방송이 한번 시도해 볼 만한 과업이지 않을까?
울산이란 도시
도시의 정체성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어렵다. 도시의 이미지를 한 가지로 단순화하는 것도 쉽지 않다. ‘울산蔚山’이란 도시가 그렇다. 지명을 보면 사방이 산으로 둘러 싸여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울산은 드라마틱하고 역동적인 도시다. 지금은 침체돼 있지만 우리나라 최고의 산업수도이고 7천 년 전 신석기 사람들이 고래를 잡던 곳이다. 고래잡이 바위그림은 세계 최초의 포경 기록으로 평가받는다. 처용을 비롯한 시대별 이방인을 과감히 받아들인 울산은 관용과 포용, 개방의 정신이 흘러넘쳤다. 현재 120만 시민의 삶의 터전이면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땅이다. 한국 미술의 시원인 반구대 암각화와 왕실의 비밀연애가 숨겨진 천전리 각석이 있으니 말이다.
임진왜란 7년 전쟁을 종식시킨 학성 전투가 있었던 호국의 고장이고 일제강점기 조국독립을 위해 목숨 바쳤던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의 고향이다. 부북 일기와 심원권 일기를 낳은 일기 문학의 고장이면서 춘향전의 오리지널인 ‘자란전’의 주인공 심자란이 나고 자라 묻힌 곳이다. 울산은 여류시인 이호경과 봄 편지의 서덕출 선생, 오영수와 정인섭, 최현배 선생을 낳고 기른 문학의 땅이었고 고려조의 이순신 장군이라는 박달재의 주인공 김취려 장군의 고장이기도 하다. 대일 외교의 선구자 이예 선생과 신라 충신 박제상과 그의 부인의 넋이 서린 망부석의 정신이 살아 있는 곳이 울산이란 도시다.
또한 울산의 음식은 경상남북도의 맛이 혼재되어 있고 산과 바다, 들판의 식재료를 고루 맛볼 수 있는 특징이 있다. 치전 장어, 농소 참외, 강동 돌미역과 유지렁, 언양 한우는 전국에 이름을 널리 알렸다. 다산 선생은 “울산에서 온 감복(甘鰒)은 환하게 글자 비추네”라는 시를 남겼다. 임금이 눈 내리는 밤 내각에 음식을 내린 데 대한 고마운 마음을 담은 시의 일부다. 울산 전복의 유명세는 다산 이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얼마나 유명했으면 저 멀리 북한 땅에서도 ‘동해나 울산’이란 민요를 부르게 됐을까.
“동해나 울산은 잣나무 그늘 경치도 좋지만 인심도 좋구요
큰애기 마음은 열두 폭 치마 실백자 얹어서 전복쌈일세”
뿐만 아니라 울산은 ‘한반도 첫 일출의 고장’으로도 이름을 알렸다. 울주군 서생면 간절곶竿絶串은 새해 한반도 육지에서 가장 먼저 해가 떠오르는 명소다. 울산이란 도시의 정체성은 아무래도 철과 불에서 찾아야 한다. 울산은 철의 도시요 불의 도시다. 삼한시대부터 철을 생산해 나라의 부흥에 이바지했고 조선시대 국방에 기여했다. 달천광산을 세상에 알린 구충당 이의립은 조선의 철강왕이었다. 울산은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도시다. 300여 개 공장의 불빛은 공단을 밝히며 나라 경제를 뒷받침하고 있다.
울산의 상징은 두 개의 ‘공업탑’에서도 찾을 수 있다. 공업탑은 1962년 2월 3일 박정희가 납도(개구리 섬)에서 공업센터를 선포하면서 발파한 것을 기념해 현장에서 읽은 치사문과 다짐을 새겨 1967년에 세운 탑을 이른다. 울산 경제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말이 여기서 비롯됐다. 본래 이름은 울산공업센터 건립 기념탑이지만 보통 공업탑이라 부른다. 하얀색의 탑신과 주변의 동상, 화단과 분수대로 구성돼 있는데 톱니바퀴 모양의 기반 위에 철근 콘크리트로 만든 다섯 개의 기둥이 서 있고, 상단부에는 톱니바퀴와 월계수 잎으로 둘러싼 지구본이 있다. 탑의 앞뒤에 청동 남성 군상과 대리석 여성상이 있었으나, 현재는 모두 황동 재질로 바꿔 놓았다. 콘크리트로 된 다섯 기둥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인구 50만을 상징한다. 경제개발이 화두였던 당시의 모습과 함께 10만 명이 채 안되던 울산의 인구가 50년 안에 50만 명이 되리라는 염원을 담았다. 또한 탑 상부의 지구본은 세계 평화를, 월계수 잎은 승리를, 톱니바퀴는 공업도시를 상징하며, 울산이 세계로 뻗어나가 공업 한국의 승리를 맞이하자는 뜻을 담았다. 그리고 망치를 든 남성 군상은 근면과 인내로 울산을 건설하자는 취지를, 두 팔을 들어 올린 여성상은 동쪽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는 모습으로 힘차게 시작하는 모습을 상징한다.
(1998년 울산의 정체성을 알리기 위한 특집 프로그램을 하면서 취재해 밝혔던 지역방송 내용을 요약했다.)
지금은 ‘목민관’의 시대가 아니오
대선에 이어 지방선거가 끝났다. 선거 기간 동안 민주화를 위해 청춘을 바쳤다는 어떤 후보의 사무실에 걸린 액자를 보았다. 여민동락與民同樂! 네 글자였다.
같은 기간, 지역방송에서 “이번 지방선거는 올바른 목민관을 뽑는 선거”라고 강조하는 말을 들었다. 목민牧民은 왕이나 고을의 원이나 수령 등 지방관리가 백성을 다스린다는 말이다. 여민與民도 그렇고 위민爲民도 그렇다.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무심코 사용해서는 안 되는 전근대적 용어다. 시민을 걱정해 주고 함께 하거나, 위해 주고 심지어 달래 준다고? 모두 왕정시대, 유교 사회에 어울리는 말이다.
지역 언론의 임무는 지역의 살아 있는 권력, 지자체와 공공기관을 비판하고 감시하는 것이다. 현실은 정반대로 가는 경우가 많다. 시장・군수 등 자치단체장을 시민을 다스리는 높은 분(목민관)이라 하는 정도의 의식 수준으로는 권력 감시니 비판은 언감생심이다. ‘목민관’이라 떠받드는 지역 언론은 필시 그의 치적을 홍보하고 선전해 주는 충견忠犬으로 전락할 것이고 협찬 명목의 ‘돈’을 받아 생명을 부지하게 될 것이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 감시와 견제가 없는 지방자치는 올바른 성장은커녕 부패의 늪으로 빠지게 돼 있다.
적자행진을 계속하고 있는 지역 언론이 ‘예산지원’을 거부하기는 힘들다. 물리치기 어려운 달콤한 당근이다. 그러나 회유당하는 순간 지자체의 무능과 비효율 그리고 부패는 켜켜이 쌓이고 지역민은 결국 지방언론을 외면한다. 지역 언론은 점차 고립무원 상태가 되고 자멸의 길로 간다. 독자 없는 신문이 어떻게 살아남을 것이며 시청자 없는 방송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제발 지역 언론에 바라노니, 자기가 있는 곳의 정체성을 밝히고 드높이는 일을 많이 하시라. 그 지역을 노래하고 도시 이미지를 높이는데 일조하시라. 도시를 찬양하는 노래가 없으면 지역방송이 직접 만들면 된다. 지역방송 구성원이라면 서울찬가나 부산 갈매기, 목포는 항구다 같은 지역 노래 하나쯤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다 보면 지역민의 애착과 사랑은 절로 얻어질 것이다. 정부도 지역 언론을 새롭게 보고 행정과 제정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했으니 기대해 보자.)
첫댓글 울산 사나이 김잠출
멋지다요.
이제 걸음마 단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