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동백꽃
최종수
제단 아래 차례상을 차리고 설 명절 미사를 드린다. 동이족 후손들이 향을 피우며 깊은 목례를 올린다. 제의를 입은 채 제단에서 신자들에게 세배를 올리는 사제는 새해 첫 장엄강복을 드린다.
꽃비처럼 눈송이 내리는 한옥 성당 느티나무 들머리, 긴 탁자에 둘러서서 따스한 김이 피어오르는 생강대추차를 마신다. 곶감과 유과 전煎으로 음복을 나눈다. 건배사에 어깨춤이 들썩인다
'지금 같이 좋은 날! 너무 좋아! 너무 좋아! 너무 좋아!'
미사를 마친 사제는 전과 과일, 시루떡을 종이가방에 담는다. 소고기 두 팩과 전기그릴을 챙겨 산골짜기를 달린다. 빨간 대문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함박꽃 미소로 맞이하는 할아버지, 사제는 아무 말 없이 꼭 안아드린다. 맞닿은 가슴으로 전해오는 맥박 소리에 사제를 더욱 힘껏 끌어안는 할아버지.
젓가락 한 쌍처럼 나란히 둘러앉은 노부부, 동그란 밥상에 사제가 구운 소고기가 오른다. 참기름소금장을 찍은 꽃등심 한 점을 상추쌈해 할아버지 입에 넣어드린다. 뇌수막염으로 돌 지난 아이 지능인 할머니를 서른여덟 해째 병수발하신 할아버지는 배꽃미소다.
―어떻게 삼십팔 년을 병수발하냐고 물어요. 장모님도 요양원에 보내라고 했지만 내가 받은 밥상인데 어쩌겠어요, 하며 웃지요. 막둥이가 유치원을 다닐 때였지요. 모내기를 하고 돌아와 쓰러진 아내를 보며 다 죽는다고 했어요. 뇌수막염 초기에는 무엇이든 입으로 들어갔어요. 대변을 보다가 아프다며 소리를 지른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에요. 변기를 보고 깜짝 놀라죠. 한눈파는 사이에 주사기나 붉은 벽돌을 씹어 먹는 거지요. 이가 모두 상해 틀니를 해야 했어요.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니 어쩌겠어요. 아내를 방에 자물쇠로 가두고 일을 나갈 수밖에요. 점심에 맞춰 들어오면 난라도 그런 난리가 없지요. 똥 싸서 뭉갠 바지 벗겨 물수건으로 닦아주고 밥 먹이고, 일터에서 돌아와 늦은 밤까지 밥하고 빨래하고 씻기고 챙기고, 죽을 것처럼 숨을 몰아쉬는 아내를 앰뷸런스에 싣고 대전 병원으로.…. 그 세월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어요. 오직 하늘만이 아시겠지요. 매일 밤 아내를 세 번 깨워 소변을 보게 하니 이렇게 눈이 빨갛게 짓물렀네요. 잠을 한번 실컷 자보고 싶네요. 수의를 입혀줄 수 있게 집사람보다 사흘만 더 살게 해 달라고 잠자리 들 때마다 빌어요.
서른여덟 해를 병수발한 할아버지에게 강복과 안수를 드리고 안아드린다. 내 하소연을 다 들어주셔서 감사하다며 가슴이 조여올 듯 끌어안은 할아버지의 두 눈에 붉은 동백꽃이 피어오른다.
― 계간 《시와문화》 (2022/가을호)
최종수
1996년 천주교 천주교구 사제 서품. 수류성당, 캐나다 피터보르한인성당, 팔복동성당, 농촌환경사목, 만나생태마을, 조촌동성당을 거쳐 지금은 무주성당에서 사목하고 있다. 시집 『지독한 갈증』『사랑해도 모자란 동행』. 산문집 『첫눈 같은 당신』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