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김씨 삼현파 유래(극일,일손,대유)
김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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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직 김용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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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섬 (1250.5.5~1348.2)김관(판도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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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국(대제학) 김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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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경 김목경(경파) 김익경(감무공-사군파) 김항(판관) 김저(성균관대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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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금녕부원군) 김저 김수 김란(평장사) 김서(의홍현감) 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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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문(삼사부사) 김달문 김현문 김창문 김극일(절효공) 김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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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호조총랑) 김건(군수) 김맹(사헌부집의) 김용(이조판서) 김순(진사) 김인(녹사)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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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원(병조참의) 김효분(서흥도호부사) 김준손(駿孫-제학공) 김기손(驥孫) 무오사화- 김일손(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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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손(호조판서) 김진서 김대유(호조좌랑) 김대장(出) 김대축 김대아 김대장(용궁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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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견(이조참판) 김영서(횡성현감) 김영정(전라도관찰사) 김영순(석성현감) 김갱 김장 김굉 김용 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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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홍 김세경 김세위 김세균(예조참판) 김세권 김세준 김세응
김해김씨 삼현파(三賢派)란 김해김씨 판도판서공 휘관파(版圖判書公 諱管派)의 별칭이며, 판도판서공파란 중조(中祖) 관(管)할아버지께서 조려말에 판도판서(版圖判書)라는 벼슬을 하셨기 때문에 그 이하 자손들을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 또는 판도판서공 휘관파(版圖判書公 諱管派)라고 합니다.
조선 정종조에 김해김씨를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 하였고 절효공 휘극일(節孝公 諱克一), 탁영공 휘일손(濯纓公 諱馹孫), 삼족당 휘대유(三足堂 諱大有) 등 三人을 가리켜 청도삼현(淸道三賢)이라 칭하였으며 한집안에서 4대(四代)에 걸쳐 3賢人이 났다는 것은 고래(古來)로 매우 드문 일이라 하여 후세 사람들이 그 후손(後孫)들을 삼현파(三賢派)라 불렀던 것입니다.
판도판서공 휘관파(삼현파)는 5세(世;차례) 절효공(節孝공 휘극일(諱克一)의 6형제로부터 군수공휘건파(諱 建), 집의공휘맹파(諱 孟), 한림공휘용파(諱 勇), 진사공휘순파(諱 順), 녹사공휘인파(諱 靭), 진의공휘현파(諱 鉉)등 6개 지파(支派)로 크게 나뉘어져 있으며, 그 외 군수공 휘익파(郡守公諱益派), 통덕랑공 휘무파(通德郞公諱武派) 가 있습니다.
김해김씨 [삼현파 의 유래]
조선 20대 정종(正宗)대왕(서기 1777~1800)께서 金海金씨를 가리켜 삼한갑족( 三韓甲族)이라 칭하시며 절효(節孝) 김극일(金克一), 문민공(文愍公) 김일손(金馹孫),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 세 현인(賢人)을 가리켜 삼현(三賢)이라 하였다. 한 집안에서 사대간(四代間)에 삼현(三賢)이 났다는 일은 과거나 앞으로(古來)도 드문일인고로 이로 인하여 삼현파(三賢派)로 定한 것이다.
현종(顯宗) 원년(1660년)에 송준길(宋浚吉)선생 등 유림의 상소(上疎)에 의해 나라로부터 자계서원(紫溪書院)이라 사액(賜額)을 받았고,
절효(節孝) 김극일(金克一), 문민공(文愍公) 김일손(金馹孫),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 선생의 위폐를 서원존덕사(書院尊德祠)에 봉안(奉安)하고 유림(儒林)에서 누세춘추(累世春秋) 매년 2월 8일中 정일(丁日)로 봉향하고 있고 이 자계서원 건물이 유형문화재 제 83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자계서원 : 경북 청도군 이서면 서원리 85번지)
삼현파(三賢派 : 판도판서공파)의 일세조(一世祖)인 관(管)은 고려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고 학교(學校)를 건설하여 유학(儒學)을 진흥시키는 등 나라에 많은 공(功)을 세웠으며,
① 그의 현손(玄孫) 극일(克一)은 효행(孝行)으로 이름을 떨쳤다.
② 1486년(중종 1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일손(馹孫)은
일찍이 당대의 거유(巨儒)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과 친교를 맺었으며 춘추관(春秋館)의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전라 감사(全羅監司) 이극돈(李克墩)의 비행을 사초(史草)에 썼다가 그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연산군(燕山君)이 등극하여 [성종실록(成宗實錄)] 을 편찬할 때 공교롭게도 이극돈(李克墩)이 당상관(堂上官)으로 참여하여 사초(史草)를 살피게 되니 일손의 스승인 김종직 (金宗直)이 쓴 조의제문(弔意帝文 :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글)을 실은 것이 발견되어, 이극돈이 노사신(盧思愼)·윤필상(尹弼商)·한치형(韓致亨) 등과 함께 연산군에게 알려 무오사화가 일어나 일손은 중종실록을 편찬할 때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은 것이 화가 되어 이른바 무오사화의 수괴로, 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이목(李穆) 등과 함께 참수(斬首) 당하였다, 김종직(金宗直)은 부관참시(剖棺斬屍 : 죽은 뒤에 큰 죄가 드러나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어 시체를 베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거는 일)되었다.
일손(馹孫)의 강직한 기개와 재능은 후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고, 중종조(中宗朝) 영의정(領議政) 남 곤(南 袞)은 말하기를 '세상에 다시 탁영(濯纓 : 김일손의 호)같은 이가 또 나올 수 있을까. 그의 문장(文章)을 물에다 비하면 탁영은 강하(江河)와 같고 나는 개천에 지나지 못하다'라고 일손의 짧은 생애를 애석하게 여겼다.
중종반정 이후 신원되어 도승지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③ 삼현(三賢)의 한 사람인 대유(大有)는
일손(馹孫)의 조카이며 준손(駿孫)의 아들이다.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숙부(叔父) 일손이 참수당하자 부자(父子)가 함께 호남(湖南)에 유배되었다가 중종(中宗) 때 풀려나와 평생을 강개한 지절(志節)로 살았으며, 3개월 간의 칠원 현감(漆原縣監)을 마지막 벼슬로 사직하고 청도(淸道)의 운문산(雲門山) 속 삼족당(三足堂)에서 73세로 일생(一生)을 마쳤다.
<일손(馹孫)의 증손(曾孫) 언유(彦諭)는 고양(高陽)에 살면서 지극한 효행(孝行)으로 명망이 높았고, 시(詩)와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송설체(松雪體)에 능하여 공사(公私)의 비(碑)와 병풍·족자의 글씨를 많이 썼다. 언유(彦諭)의 아들 현성(玄成)은 광해군(光海君) 때 폐모론(廢母論)에 불참하여 면직되자 청빈하게 여생을 마쳤으며, 시·서·화에 모두 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