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그 무엇으로도 진실한 사랑을 어지럽힐 수 없으라니, 진실한 사랑은 평온한 것. 그대는 헛되이 내 양 어깨와 가슴을 조심조심 모피로 감싼다.
그리고는 헛되이 첫사랑에 관해 조용히 말한다. 내가 왜 모르리. 이렇듯 완강하고 채워지지 않는 그대 눈빛을! 안나 (진실한 사랑) 1 눈이 내렸다. 어스름이 밀려드는 하늘로부터 눈송이가 흩어졌고, 오렌지 빛 나트륨 가로등이 막 불을 밝힐 즈음이었다. 세 준은 학교 앞 허름한 목조 건물 2층에 있었다. 밟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 소리, 낡은 풍금의 페달을 힘 주어 누르는 것 같은 쓸쓸하 고도 적막한 소리를 들으며 술을 마셨다. 본과 3학년 2학기 마지막 임상 실습을 마친 것이 정오가 조금 넘었을 때니까 꽤 오랫동안 술을 마신 셈이었다. 그럴 생각은 없었다. 저희를 만날 그 시간까지, 오랫동안 그녀를 생각해볼 작정이 었다. 뜨거운 카 푸치 노를 마시며 창 밖의 풍경을 무심히 바라보며. 그러나 함께 대학병원을 나선 민 혁이 차나 한잔 하자며 동행했고, 민 혁은 차 대신 술을 주문 했다. 한잔 하고 그칠 줄 알았던 것이 몇 시간째 계속되었다. 어쩌면 그 자신도 오랜만에 술이 주 는 방만함과 안락함, 위안 따위 같은 것에 젖어 들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돌이켜보면 괴롭고 고단했던 시간이었다. 본과 3학년 가을 학기부터 시작된 임상 실습은 많은 생각을 바꿔놓았다. 의사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실감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내과, 일반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등의 의국을 돌며 참관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 4개월 동안 그는 10여 명의 죽음과 맞닥뜨려야 했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주검도, 안타까운 주검도, 김은 잠속으로 빠져 드는 듯한 고요한 죽음도 있었다. 그러나 어떠한 주검에도 그는 담담할 수 없었다. 학생일 뿐이었다. 의사가 아니었다. 따라서 아무런 능력도, 권리도, 책임 져야 할 이유도 없었 다. 의 학도에겐 죽음도 익히고 뛰어넘어야 할 과정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 죽음들을 목격하면서 두려웠다. 참담했다. 후회가 됐다. 의사라는 직업이 죽음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가를 뼈져리게 실감했다. 의사가 되기 위해 어렵고 고단한 수업을 받아야 하는 것이, 과연 의미 있는 일인지 회의가 앞섰다. 실습 마지막 날인 오늘까지 그랬다. 뇌종양으로 투병중인 초등학교 5학년 여자 아이였다. 뇌종양을 앓고 있는 아이는 한결같이 예쁘다고 하는데, 그 아이도 예외가 아니었다, 방사선 치 료로 머리카락이 다 빠져버린 아니는 핏기 한 점 없이 창백했다. 하지만 참으로 예쁜 얼굴이었다, 아이는 자신을 빙 둘러싼 실습생들을 반짝이는 눈동자로 바라보면서 고통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 했다. 중환자실을 나선 뒤 실습생들을 모아놓고 주치의는 말했다. “말기는 아니지만 오래 견디지 못할 거다.” 주치의는 진료 카드를 담담히 읽어내렸다, 하지만 머리카락 한 올 남지 않은 아이의 자그마한 머리통, 창백한 얼굴, 감은 눈동자가 오랫동안 그의 머릿속에 가득했다. 어둠이 짙어가고, 눈발이 굵어졌다. 학교 정문에서부터 시작되는 4차선 도로에는 불을 매단 차들이 꼬리를 이은 채 늘어서 있고, 술 취한 사람들이 어깨동무를 한 채 비틀거리며 차도를 가로질러 갔다. 한동안 창 밖으로 시선을 묶어두고 있던 세준은 흠짓 놀라며 시계를 보았다. 5시 30분. 아직은 시간이 충분하다. 그러나 서둘러야 한다. 그는 탁자에 고개를 묻고 잠들어 있는 민혁을 깨웠다. "얼마나 잤어?“ “한 시간.” “이런 데서 고개를 처박고 한 시간씩이나 자다니... 이 장민혁의 무신경도 알려줘야겠군.” 민혁은 가볍게 웃었고, 불현듯 생각이 난 듯 물어왔다. “언제 떠날 거냐?” “내일.” “꼭 가야 하니?” 그는 웃는 것으로 대답했다.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 내가 다른 일을 알아봐줄까?” 방학이 시작돼 일자리를 찾아 떠날 때마다 민혁은 말하곤 했다. 더 편하고 더 많은 보수가 보 장된 일을 알아보겠노라고. 그때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민혁에게 신세지고 싶지 않았다. 이미 오래전 다짐한 일이었다. 자신의 힘으로만 이루어 나가리라고. “하여간 이세준의 고집은 알아줘야 해.” 민혁이 일어서며 덧붙였다. “어디 가서 저녁이나 먹자.” 그는 앉은 채 손을 내밀었다. “먼저 가.” “한동안 못 볼 텐데 저녁은 먹고 헤어져야지.” “약속이 있어.” “약속?” 민혁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별일이네. 이세준이 약속이 다 있고... 누구야?” “...아는 사람.” "여자냐?“ 그는 방긋 웃었고, 민혁이 놀란 눈을 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어떤 여자야?” “그냥 좀 아는 여자야 ... 방학 잘 보내.” 그는 다시 손을 내밀었다. 악수 따윈 아무래도 좋다는 듯 민혁은 건성으로 손을 잡았다. “솔직히 말해봐. 어떤 여잔지.” “동생이다.” “아는 사람이 졸지에 동생으로 바뀌네. 네가 동생이 어딨어. 그것도 여동생이? 내가 이세준을 하루 이틀 알아 왔냐? 자그만치 오 년이다, 오 년.” 민혁은 갈 생각일랑 아예 걷어치워 버린 듯 의자 깊숙이 등을 기댔다. 5년. 긴 세월이었다. 의대에 입학한 후 그는 민혁과 가깝게 지냈다. 번잡스럽게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 하지 않는 성격 탓도 있지만, 달리 사람 사귀는 데 시간을 할애할 만큼 여유 있는 생활도 아니었 다. 5년 동안 줄곧 그랬다. 공부하고, 돈 벌고... 그리고 한 사람을 그리워하기에도 분주한 세월이었다. 물론 그 사람이 민 혁은 아니었다. 민혁은 2백 명의 동급생 중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가까 운 친구였다. 민혁이 팔짱을 끼고는 말했다. “하여튼 좋다. 누군지 직접 만나봐야겠어. 불만 없지?” 그는 웃고 말았다. 안색을 바꿔 친구의 등을 강제로 떠밀 순 없는 일이었다. 그의 마음을 알았을까, 민혁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걱정마, 얼굴만 보고 갈 테니까. 몇 시야, 약속 시간이?” “여섯시.” 민혁은 시계를 들여다보고는 고개를 흔들었고, 잠시 망설이는 기색이더니 일어섰다. 겨우 30분이 남았을 뿐이었다. 민혁에게 너무 긴 시간이었다면 차라리 다행스런 일이었다. “가야겠다. 내일 일찍 떠날 거냐?” 그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손을 내밀진 않았다. “잘 다녀와.” 대답 대신 그는 빙긋 웃었고, 민혁이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민혁이 막 돌아설 순간이었다. 돌아서 나가면 그만이었는데, 밟을 적마다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 소리가 들려왔다. 삐걱삐걱. 긴 울림이 세준의 가슴을 불안하게 흔들고 지났다. 그는 고개를 빼고 출입구를 바라보았다. 댕강 댕강. 한 번 두 번. 문 위에 매달아놓은 작은 종이 흔들렸다. 문을 미는 손이 먼저 보였고, 누구인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서희였다. 바람에 가볍게 울리는 깊은 산사의 풍경 소리처럼 그녀가 들어섰다. 소슬바람이라도 그녀처럼 부드럽게 들어설 수는 없을 것이었다. 민혁아, 이제 그냥 가. 세준은 그렇게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를 향해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고, 그는 까닭 모를 불안에 빠져들었다. 손을 들어 보이진 않았다. 어색한 일이었다. 적어도 그녀에겐. 아주 가까운 사람 사이에 나누는 악수의 어색함처럼. 그녀가 어깨에 멘 가방을 한 차례 추스르더니 다가왔다. 천천히, 사뿐사뿐. "춥지?" 첫인사인 양 그가 물었고,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민혁이 돌아보았다. "아!" 민혁의 탄성이었다. 그녀의 내부 어디선가 그녀 자신을 아름답게 만드는 샘이 깃들어 있었다. 너무 눈부시지 않게, 너무 수선스럽지 않게, 너무 가볍지 않게 샘물은 흘러넘쳐 그녀를 아름답게 감싸고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고요하고, 부드럽고, 그윽했으므로 민혁의 탄성은 당연하다고 그는 생각했 다. "일찍 왔구나." "언제 왔어요? 오늘도 오빠보다 늦었네요." 그녀를 만나는 것이 기쁨이라면 기다리는 것은 설렘이었다. 따라서 그녀보다 먼저 약속 장소에 나오는 것이 당연했다. 같은 대학에 다니고 있었고, 걸어서 10분이면 족히 닿을 수 있는 곳에 있는 그녀였다. 하지만 자주 만날 수 없었다. 그녀 탓이 아니었다. 그의 일상이라는 것이 분주하기 짝이 없었다. 정해진 일과표에 따라 쳇바퀴돌듯 지나가버리는 하루하루였다.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 얼굴을 맞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려고 애써 왔다. 그 하루를 위해 엿새를 살아가는 사람처 럼... 언젠가 그녀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서울에 오면 오빠를 자주 볼 줄 알았어요.” 그 자신인들 매일 보고 싶지 않겠는가. 어쩔 수 없었다. 엿새를 기를 쓰고 살아온 까닭에 그녀 곁에 있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단 하루라도 그에겐 벅찬 감사였다. “안녕하세요?” 민혁의 말에 그녀가 목례로 대신했다. 그는 여전히 까닭 모를 불안에 적은 채 막 그녀에게 민혁을 소개할 참이었다. 민혁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우리 전에 만난 적이 있죠? 기억해요?” 그녀가 당황한 기색으로 민혁이 아닌 그를 바라보았고,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연신 눈을 깜 빡거렸다. 그는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정작 영문을 알고 싶은 것은 그 자신이었으므로. “서희, 한서희씨 맞죠?”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민혁이 환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언젠가 꼭 다시 만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전 누군지 모르겠어요. 어쩌죠?” 그녀는 말을 하면서도 민혁보다 그를 더 자주 바라보았다. 그는 짐짓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 라보았다. 폭설이었다. 거친 눈발 사이로 앞 불 밝힌 시계탑이 가물 가물 멀어져 있었다. "섭섭한데요, 날 기억 못하다니. 하긴 이 장민혁의 기억력이 워낙 비상한 거죠.“ 민혁은 의자를 빼 그녀에게 권하고 자신도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얼굴만 보고 가겠다더니, 민혁 은 아예 다리를 꼬고 앉았다. “정말 모르겠어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민혁은 손바닥으로 자신의 머리를 가볍게 쳤다. 기억하지 못함을 탓하 는 것인지, 억울하다는 뜻인지 얼른 분간 할 수 없는 몸짓이었다. “지난 봄 도서관에서, 서희씨 수첩을 찾아준 적이 있었죠. 서희씬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달아나버렸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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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즐감 하고 갑니다
수고하셨습니다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