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바라기 노리코 * 시집》을 읽고
한글의 매력에 빠져 죽을 때까지 윤동주와 한국을 사랑한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 별이 된 시인 윤동주를 사랑한 여인, 나는 그녀를 사랑하기로 하였다.
일본 여류시인 이바라기 노리코는 1926년생이다. 그녀의 작품 중 ‘내가 가장 예뻤을 때’라는 게 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전쟁으로 사람들이 죽었다, 거리는 파괴되고 쓰레기로 뒤덮였다, 나는 멋쟁이가 될 기회를 잃어버렸다-고 노래한다. 피해자 의식에 사로잡힌 한탄의 노래가 아니다. 군국주의의 멍에에서 해방돼 자립하려는 여성의 광휘로 차 있다.
그 뒤 세상은 바뀌어 무기력한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이 긍정 쪽으로 돌아선 상황에서도 그녀는 변함없었다. 1975년 10월 31일 쇼와 ‘천황’이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전쟁책임’에 대한 질문을 받자, 그는 “언어의 기교에 대해서…, 문학 방면에 관해서는 제대로 연구한 바가 없어서 대답하기 어렵습니다”라고 말했다.
제국의 절대 권력자, 전쟁의 최고 책임자 천황이 자국은 물론 다른 나라의 국민까지 죽음으로 몰아간 전쟁 책임에 놀랍게도 ‘언어의 기교’ 운운하며 책임을 얼버무렸다. 더욱 놀라운 것은 모든 일본 지식인들, 언론까지도 이 말을 문제 삼지 않았다. 여류시인 이바라기 노리코 빼고는….
“전쟁책임에 대해 묻자/ 그 사람은 말했다/ 그런 언어의 기교에 대해/ 문학적 방면은 별로 연구하지 않아서/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나와/ 거무칙칙한 웃음 피를 토하듯/ 뻗쳐올랐다가, 멈추고, 다시 뻗쳐오른다”
-‘사해파정四海波靜’에서-
이바라기 노리꼬, 패전 일본국에서 아무도 말 못하던 때 강단 있게 천황을 비웃은 여자!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어도 윤동주를 그리워한 여인…. 당시 한국인보다 더 한글을 사랑했던 시인, 한글을 일러 시치미 딱 떼고 엉뚱한 소리를 해대는 속담의 보고이며, 해학의 숲이라고…, 그리고 자신의 시에서 이미 별이 되어버린 윤동주를 끌어들여 “자네 너무 늦었어”라며 늦게 서야 한글을 사랑한 일, 윤동주가 살아 있을 때 알지 못했던 것을 후회했던 시인이다.
편견에 사로잡힌 필자가 일본인이라서 애써 외면했던 시, 스토리텔링 작업을 하면서 우연하게 만났다. 그리고 몇 편의 시를 읽고 단번에 그에게 다가가기로 결정하였다.
이바라기 노리꼬 시집 두 권을 샀다. 시집 《처음 가는 마을》과 지금 소개하는 말 그대로 《이바라기 노리코 * 시집》이다. 시를 읽다가 문득 그가 그리워졌다. 궁금증이 과하면 그리운 법, 짧아서 처삼촌 벌초한 듯한 머리에 맑은 눈동자가 이처럼 어울릴 수도 있다는…, 냉소 뒤에 어딘지 따뜻함이 숨어 있을 법한 지혜가 엿보이는 눈매, 코끝에 흐르는 의지, 흡입력이 충만한 단정한 입술이 매력적이다. 흑백사진에서 어딘지 모를 고집 속에 슬픔도 느낀다.
<이바라기 노리꼬 * 시집> 윤수연 옮김, 스타북스, 2029. 6. 10. - 본문 중에서-
한글과의 만남은 쉰 살(1956년) 때 남편과 사별한 후 이바라기 노리코는 자기 치유의 한 방법으로 한국어 공부를 시작하였다. 한국 도자기 매력에 푹 빠진 할머니의 영향을 받아 “한국어에 대한 관심은 사실 열다섯 시절부터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김소운(수필가) 씨가 이와나미문고에서 펴낸 『조선민요선』을 읽은 후 그 속에 실린 한국어 단어들의 소박함과 기지에 끌렸다는 것이다.
한글 공부는 10년 동안 계속 이어졌다. 그녀가 배운 한글은 ‘한국인들이 쓰는 언어’ 이상이었다. 한글은 “마치 뜨개질 기호 같은 문자”였고 “그 울림이 낭랑하고 아름다운 언어”였다. ‘바람둥이’ ‘공부 벌레’ ‘치맛바람’ ‘땅꾼’ 같은 기발한 명사에 놀라는 한편, ‘과부 사정 은 과부가 안다’ ‘구관이 명관이다’ ‘밤새도록 울다가 누가 죽었느냐 고 묻는다’는 식의 한국 속담의 표현력에도 감탄하였다. 《한국어로의 여행》 《이웃나라 말의 숲》 등 한글에 관한 책을 쓸 만큼 한국어를 사랑하였다.
한국인들이 지닌 독특한 ‘멋’도 그에게는 흥미진진한 탐구 대상이었다. 한국인이 행동에 나타나는 ‘멋’을 장난기와 우스꽝스러움, 박력과 세련미가 미묘하게 혼합된, 복합적인 양식으로 풀이하기도 하였다. 그가 한국어를 공부하면서 쓴 시를 소개한다.
어딘가 멀리서 /재잘거리며 떠드는 소리 /노래 /시치미 딱 떼고 /엉뚱한 소리를 해댄다 /속담의 보고이며 /해학의 숲이기도 하고 /대사전을 베개 삼아 선잠을 청하면 /“자네 들어오는 것이 너무 늦었어"라고 /윤동주가 다정하게 나무란다 /정말 늦었다 /하지만 어떤 일이든 /너무 늦었다고 생각지 않기로 했지요 /젊은 시인 윤동주 /1945년 2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 /그것이 당신들에겐 광복절 /우리들에게 항복절인 /8월15일을 거슬러 올라가면 겨우 반년 전이었을 줄이야 /아직 교복을 입은 채 /순결만을 동경하는 듯한 당신의 눈동자가 눈부시게 빛난다.
-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
〈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를 읽고 그녀의 노력으로 윤동주의 시가 일본 현대문국정교과서에 무려 11쪽이나 실리게 한 시인이다. 그리고 윤동주 의문의 주검을 파헤치려 애쓴 사람이었다. 매일 밤 감옥으로 찾아와 윤동주에게 정체를 알 수 없는 약물을 투입한 일제, 당시 간수는 이바라기 노리꼬에게 윤동주 시인의 마지막을 이렇게 증언하였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조선말로 절규한 뒤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고 말해주었다. 시인은 윤동주의 죽음이 일본 검찰의 손에 살해당한 것이나 다름없다며, 그 통한의 감정을 갖추지 않고서는 윤동주 시인을 만날 수 없다고 해설에 썼다.
윤동주 시인이 마지막으로 외친 말이 무엇이었을까? 이를 상상하는 것조차 죄스러울 뿐이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일본에서 번역되어 출간된 1984년 가을에 윤동주 친동생 윤일주 씨를 만난다. 그는 건축을 전공한 성균관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마침 도쿄대학교 생산기술연구소 객원 교수로 일본에 와 있었다. 윤동주 시집에 ‘아우의 인상화’라는 시가 있다.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시의 실제 주인공인 동생을 만난다는 것에 너무나도 감정적이고 기뻤다고 표현하였다.
일본의 한국 식민지 통치의 상흔을 묘사한 또 다른 시도 있다.
한국의 노인은 /지금도 변소에 갈 때 /조용히 허리를 일으키며 /“총독부에 다녀올게”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는데 /조선총독부에서 호출장이 오면 /가지 않고는 못 배겼던 시대 /어쩔 수 없는 사정 /그것을 배설에 빗댄 해학과 신랄함 /서울에서 버스를 탔을 때 /시골에서 상경한 듯한 할아버지가 앉아있었다 /한복을 입고 /까만모자를 쓰고 /소년이 그대로 할아버지가 된 것 같은 /순수함 그 자체의 인상이었다 /일본인 여러 명이 선 채로 일본어를 조금 지껄였을 때 /노인의 얼굴에 두려움과 혐오의 표정 /획 달려가는 것을 봤다 /천만 마디의 말을 쓰는 것보다 강렬하게 일본이 해온 짓을 /거기에서 봤다.
-이바라기 노리코 총독부에 다녀오다 전문-
그녀 다움이랄까? 죽음을 목전에 앞두고 그녀답게 스스로 부고를 써서 준비해두었다.
이번에 저(이바라기 노리코)는 (2006)년 (2)월 (17)일 (지주막하출혈)로, 이 세상을 하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생전에 써둔 것입니다. 내 의지로, 장례·영결식은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앞으로 이 집에는 제가 살지 않으니 조위품이나 꽃 같은 것들을 보내지 말아주세요. 반송 못하는 무례를 더하게 됩니다. “그 사람이 떠났구나” 하고 한순간, 단지 한순간 생각해 주셨으면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오랫동안 당신께서 베풀어 주신 따뜻한 교제는 보이지 않는 보석처럼, 나의 가슴속을 채워서 빛을 발하고, 나의 인생을 얼마만큼 풍부하게 해 주셨는지.…. 깊은 감사와 함께 이별의 인사말을 드립니다. 고마웠습니다. 2006년 3월 길일.
-이바라기 노리코의 유서 중에서-
무릇 인생의 끝에서 이처럼 정직해야 한다. 세상에 자신의 흔적을 은빛 그리움으로 코팅해버리고 떠난 여인, 그녀가 죽음을 대하는 자세가 부럽다. 그야말로 진정하게 삶을 보듬어가며 살았던 한 여인의 내면 풍경이다.
한국인이라면 시인 윤동주와 이상화, 이육사를 모르는 이가 있을까. 그러나 이들 민족시인 보다 우리에게 더 친근한(?) 시인이 있다. 친일시를 당당하게 써서 일본 천황에게 바쳤던 시인 서정주가 이들보다 훨씬, 천 배나 편하게 살았으며, 만 배쯤 행복한 삶을 살다가 85세에 죽었다. 더구나 생전에는 부와 명성까지 누리며 그가 길러낸 제자들만도 우리 문학계에 널리 퍼져 그의 영광에 빛을 더하고 있다. 혓바닥이 장구채 놀 듯 현란한 것처럼, 문장으로 감탄을 이끌어낸 뛰어난 시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무작정 본받아야 할 인물은 아닌 듯하다.
그가 쓴 열편 친일시를 가지고 따지는 것이 아니다. 그는 생전에 친일행각을 단 한 번도 사죄나 반성한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낸 적이 없다. 더구나 군사독제시절 친일시보다 훨씬 추한 ‘전두환헌시’까지 써서 헌납했다. “내가 광대냐?”며 당당하게 거절하던 동생 서정태 선생이 더 그리운 까닭이다.
시선詩仙의 머릿속에 티끌만큼이라도 갈등이 있었더라면 참 좋겠다.
스스로 실수나 실패를 자인하는 이를 ‘결백한 실패자(Good Loser)'라고 한다. 실패나 실수를 찬하는 게 아니다. 실수를 숨기거나 타인에게 떠넘기는 모습보다, 문제를 찾아내고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는 것 또한 용기요 지혜라는 뜻이다.
인생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고, 숙성해 지는 것이라는 문장을 곱씹으며 누군가 역사를 향해 질타하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걸쭉한 핏덩이를 가득 문 반성의 울음소리를 듣고 싶어서다.
뒤늦게 역사를 공부하면서 인류는 폭력과 살육의 연속이었단 사실을 확연하게 깨달았다. 무지한 인간이 신념을 지니면 더욱 무서운 법, 만약에 신이 있다면 인간이 얼마나 광폭한지, 얼마만큼 폭력적이고 악해질 수 있는지, 자신의 이익에 얼마나 이기적일 수 있는지를 실험 중일 것이다.
검찰총장 출신 제왕적 대통령이 일본 방문기간 중 행보에 개탄하면서 시인을 떠올렸다. 언론에 비친 비굴한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궁금하지도 않다. 일본인 마음을 열겠다며 민족의 자존감마저 폭탄주와 함께 말아 먹었나보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찾아가 우리 친구하자며, 내가 가진 것 다 줄 터이니 나 좀 잘 봐달라는 것과 다를 바 있을까? 밤잠을 설친다. 뉴스를 펼치기가 겁나는 작금의 시간이다. 또 무슨 일이 터져 있을지, 고작 일본 수상에게 “일본에서 당신이 술이 가장 세냐?” 따위의 질문이라니? 우리 민족의 자존 독도가 일본 영토란 말에 입을 다물었다는 일본 기사가 사실이라면 이완용과 다를 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청와대는 입을 다물고 있다. 외교부는 항의조차 하지 않고 있다. 조선의 폭군 연산군조차도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역사 뿐”이라고 하였건만, 무지가 신념에 찬 언행에 뒷감당은 국민과 후손들 몫이란 뜻이다.
시와 수필이란, 고고한 학이나 단아한 난초만이 아니라 현실세계를 외면하면서 존재할 수 없다. 상시분속(傷時憤俗), 즉 “시대를 상심하고, 시속을 안타까워하지 않는 시는 시가 아니다.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요, 시대를 슬퍼하고 세속을 개탄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며, 높은 덕을 찬미하고 나쁜 행실을 풍자하여 선을 권하고 악을 징계한 것이 아니면 시가 아니다”고 하였던 다산 선생의 말을 떠올린다.
마지막으로 시인의 시를 소개하면서 맺는다.
*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거리는 꽈르릉하고 무너지고
생각도 못한 곳에서
파란 하늘 같은 것이 보이곤 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주위의 사람이 많이 죽었다
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도 없는 섬에서
나는 멋 부릴 기회를 잃어버렸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아무도 내게 다정한 선물을 주지 않았다
남자들은 거수경례밖에 몰랐고
순수한 눈짓만을 남기고 다들 떠나버렸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 머리는 텅텅 비었고
내 마음은 무디어졌으며 손발만이 밤색으로 빛났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 나라는 전쟁에서 졌다
이런 엉터리없는 일이 있느냐고
블라우스의 소매를 걷어 올리고 비굴한 거리를 쏘다녔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라디오에서는 재즈가 넘쳤다
담배연기를 처음 마셨을 때처럼 어질어질하면서
나는 이국의 달콤한 음악을 마구 즐겼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아주 불행했다
나는 무척 덤벙거렸고
나는 너무도 쓸쓸했다
그래서 결심했다 될수록 오래 살기로
나이 들어서 굉장히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프랑스의 루오 할아버지처럼
그렇게…
* 참조 : 이바라기 노리코, 윤수연 옮김<이바리가 노리코 * 시집>, 스타북스, 2019년 6월 10일.
첫댓글 저도 읽어 보겠습니다.
소개해 주셔서 감시합니다.
더부룩한 머리도 감추지 못한, 멋진 내면을 가진 분이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