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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행인 : 카페 회장(유섭) / 편집인 : 카페 운영위원장(유보근) | |
[표지소개] ○ 좌측 : 지수재공 초상화 - 휘자(諱字) : 척기 - 시호(諡號) : 문익공 - 관(官) : 영의정 - 소장:일본천리대도서관 ○ 우측 : 광국지경록 - 충북유형문화재 제164호 - 조선 선조때 종계변무를 완결하여 광국1등공신이 된 충목공(휘 홍)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목판본을 우리 문중에서 발행했다. |
▣ 인터넷 카페 소개
○ 인터넷주소 및 명칭 : cafe.daum.net/kigeyoo(기계유씨네)
○ 설립년도 : 2002. 1. 26(설립자 유섭광 : 법무부 공무원)
○ 회 원 수 : 1,400명(2005.11.1 현재)
○ 임원(6명 : 회장, 부회장, 운영위원장 등) 및 대의원(34명)
▣ 설립 목적 및 추진 사업 개요
○ 대종회 계간지(부운보) 연구 및 학습
○ 인터넷 자료중 기계유문에 대한 잘못된 정보 수정
○ 선조유적지 및 시조묘소 정기적 탐방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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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유씨네 카페 회장 인사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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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에 계신 우리 기계유씨(杞溪兪氏) 일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무덥고 길었던 장마와 태풍 나비도 잘 이겨내시고 결실의 계절을 맞이하신 일가님들께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우리 <기계유씨네 카페>가 명실상부하게 종친카페로 이름을 바꾸어 출발한지도 어언 만 1년이 경과 되었습니다. | |
<유섭 카페 회장> |
2004년 9월 15일 정식으로 카페 규약(規約)을 제정(制定)하고 고고의 성을 지르며 공식 출범한 것이 지요. 길지 않은 기간이었습니다만, 일가분들께서『기계유씨네 카페에 바쳐주신 열과 성으로 인하여 중간 중간 전국의 인터넷 다음카페의 종친카페순위 1위를 하는 등의 결과를 낳게 해주심으로써 오늘의 우리 카페가 있게 해주신데 대하여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제가 여러분들의 성원으로 본 카페의 대의원회 회장으로 취임한지 불과 1년이 되었지만 그간에 여러 일가님들의 성원으로 1,400여명의 일가분들이 가입하여 양적 성장을 거두었을 뿐 아니라 대외적 질적성과를 거두기도 하였습니다.
본 카페 <기계유씨네>가 시대의 추세에 발맞추어 인터넷을 활용하여 문중 카페의 역할 자임 기계유씨대종회에 카페를 헌납한다는 발표를 2004년 11월 11일 기계재실에서 한바 있으며, 이에 발맞추어 대종회에서도 대종회 사업의 전산화를 위하여 노력함은 물론, 신임 유대식 회장님께서는 기계유씨대종회 홈페이지를 만들기로 결정하심과 동시 추진위원회(위원장 유재은 대종회 부회장)를 지난 2005년 7월 24일에 출범한 바 있습니다. 우리카페에서는 추진위원 5명중 3명이라는 과반수의 위원이 되면서 우리들의 꿈을 하나하나 펼쳐 나가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본 카페는 “문중의 공유자산”으로서의 소임과 책임을 다 하려 노력하고 있는 것이며 대종회에서도 신임 대종회장님이 카페에 가입하시고, 전산화추진위원회를 우리에게 맡기심으로서 사실상으로 종중카페임을 인정하신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특히 반가운 것은 우리 카페 회원의 대다수가 20~30대로서 향후 우리 문중을 이끌어 나갈 후예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보다 친숙한 사이버 공간을 마련해 줌으로서, 장차 그들로 하여금 우리문중의 빛나는 전통을 훌륭히 이어나갈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해 보고자 하는 것이 본 카페의 일차적인 목표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젊은이들에게 우리 조상님들의 숨결을 심어주고자 종친카페 설립원년부터 시조묘소는 물론이고 중시조(15개파 시조)이상의 조상님들의 묘소를 참배하면서 그 내력과 묘소의 현실을 직접 보면서 사진으로 담아 회원님들께 알리는 일을 시작한 바 있으며, 지난 9월24일에는 평택?안성에 계신 판도판서공(휘 선), 판도판서공(휘 승계), 판사재감사(휘 성복) 할아버지를 비롯하여 통덕랑공(휘 숙) 묘소를 참배하였습니다. 이제 15개파조 중시조 어른 중 2004년도에 충목공, 단성공, 진사공 및 신계공 묘소를, 2005년도에 자산공, 월성군 및 통덕랑공을 참배하여 당초 목표의 50%를 달성하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춘추로 각 지방에서 열리는 시제에도 참석하여 위선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계속 넓혀 나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기계유씨네 카페 활동에 적극적인 참여와 격려를 바라며 인사말을 가름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2005 년 11월 1일
기계유씨네 카페 회장 兪 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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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유씨(杞溪兪氏) 시조(始祖) 아찬공 묘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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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故 유치웅 문장 해설 -
경주 기계현 북쪽 10여리 되는 당동(현 포항시 기계면 현내동)은 비학산으로 주봉이 되고 치술령으로 안(案)이 된 임좌 병향의 언덕은 우리 시조 신라 아찬 유삼재 부군이 묻히신 곳이다. 신라 관제에 아찬은 정승자리이니 지금의 의정(議政)과 같다. 이래서 뒷사람이 삼재라 일컫기도 하고 혹은 삼재가 부군의 휘(諱)요 직명이 아니라 한다. 그 후 의신이라는 분이 있어 신라가 망하게 되매 전조 세신으로 고려조에 불복함에 끄릴새 고려 태조가 미워하여 기계호장을 삼으니 그 자손이 기계인이 되었다. | |
<시조 아찬공 묘비문> |
부군의 분영(墳塋)은 실전(失傳)되어 본토박이 사람의 점령한 바 되었더니 숙종기사 후손 하겸이 이곳 부윤이 되어 비로소 산소를 찾아 봉분을 다시 싸 올리고 표석을 세웠고 경인년 후손 명홍이 감사로 와 분암을 처음 마련하고 중으로 하여금 지키며 금양 하도록 하고 제전위토를 두어 한해 한번 제향을 받들게 하되 그 후손의 가까이 사는 이로 하여금 그일을 맡게 하였다. 석물은 아직 겨를을 못하였더니 금상병오(금상 즉 영조병년)년에 후손 척기가 감사로 재임하여 묘비를 비로소 새겨 산소좌측에 세웠다. - 중 략 - <부운보 "제2호(84.10.20)"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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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아찬공 묘소 찾은 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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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페 운영위원장 유보근 요약-
▣ 아찬공(휘 삼재) 시조묘소 약력 ○ 명종 11년(1556년) : 숙민공(휘 강: 당시 경상감사)께서 서좌수의 기만으로 유백천 묘소를 시조묘로 알고 순찰 ○ 선조 11년(1577년) : 충목공(휘 홍: 당시 경상감사)께서 유백천의 묘소를 시조묘로 알고 순찰 ○ 숙종 15년(1689년) : 휘 하겸(당시 경주부윤)공은 아찬공 시조묘소를 찾아 봉분을 쌓고 표석을 세움 ○ 숙종 27년(1701년) : 장헌공(휘 명홍, 당시 경상감사) 부운암 창건 ○ 영조 2년(1726년) : 문익공(휘 척기, 당시 경상감사)께서 아찬공 시조묘소에 비석을 세움. | |
<시조 아찬공 묘소와 묘표> |
▣ 아찬공(휘 삼재) 시조묘소를 휘 하겸(당시 경주부윤)공이 찾은 내력
○ 명종 11년(1556년) 숙민공(휘 강, 경상감사)께서 아찬공 시조묘 순찰할 무렵
- 서후준의 조부(서좌수)가 아찬공 시조묘 부근 우측으로 10여보에 선조묘 장사를 지내고 경상감사 숙민공(휘 강) 순찰시 유백천의 묘를 시조묘라 기만함.
○ 숙종 1년(1675년) 무렵
- 정세추가 아찬공 시조묘에 근처에 장사를 지내자 서후준이 자기의 선산이라고 우기자 정세추가 이곳은 원래 유씨 선산이라고 말하자 그러면 이 고을에서 가장 오래 산 이신(李信) 이라는 팔십노인에게 찾아가 물어보자 하여 이신에게 물으니 "우리 아버지가 구십이 넘어 돌아가셨는데 일찍이 풍수지리에 능하여 이 무덤에 찾아와 찬탄하기를 이것이 유삼재의 무덤이라고 하였다"
- 이런 쟁힐사건을 들은 유찬, 유여공, 유여신 등이 경주부윤(임규)에게 아찬공 시조묘소에 대한 진상규명 진정서를 올렸으나 기각됨
○ 숙종 4년(1677년)
- 휘 명뢰 공이 유여공과 함께 시조묘를 탐문조사후 대구 유하승(하겸 아우), 영천 유환, 경산 유영발 등과 진정서를 준비하였으나 명뢰 공 형님의 상을 당하여 뜻을 이루지 못함.
○ 숙종 15년(1689년)
- 휘 하겸 공(경주부윤)이 명뢰 공의 진정서를 확인하여 관련자를 문책하고 아찬공 시조묘소를 찾아 봉분을 쌓고 표석을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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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유씨(杞溪兪氏) 시조(始祖) 유허비(遺墟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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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 한모(漢謨)가 경주부윤이 되었을 때 고로(故老)들에게 물어 시조 사시던 터와 우물(井)을 기계면에서 찾아 단비를 세우고, 신라 아찬 유공(兪公) 유허비(遺墟碑)라 표하면서, 그 비 세운 전말을 부운재에 두었다. 그 글을 을병기사라 한다. 을묘중추(정조 19년) 불초가 이 지방 부윤이 되었는데 마침 10월 상순은 곧 기계 답계리(현 미현동) 시조산소에 해마다 지내는 시향의 날이라 하루 전에 약간의 제수를 갖추어 산하에 나가 부운암에서 자게 되었다. | |
<시조 아찬공 유허비> |
족제(族弟) 한인(漢人)이 자인 수령으로 왔으며 근읍에 사는 유성(兪姓) 가진 일가가 상하 모신분이 38명이나 되었다. 족질(族姪) 영주(永柱)가 연전 산하로 들어와 일을 살며 접대를 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에 산소에 올라와 봉심하고 행사한 후 재실에 들어와 여러 사람들과 즐거움을 나누며 음복한 다음 다시 도동(현 계전동)으로 가서 선조묘소에 전작 참배하였다.
이 산소는 곧 족(族) 대부(大父) 주기(胄基)가 좌병사로 와서 찾은바 마을 사람들이 표석 각자를 깎아버려 어느 분의 산소인지 알지 못하고 다만 유씨 선산이라고만 전해지고 있으니 혹은 고려공진사 진경묘라고 말한다.
날이 저물어 창사에 와 자게 되었다. 이 창은 기계고현으로 답계(현 미현동)와의 거리는 10리쯤 되는데 읍내 한 들판이 예로부터 신라대 유씨 세거지라고 하며 또 유씨 우물이 있다 한다. 읍내 이씨가 10여대 이 땅에서 대대로 사는 바 그 선조의 저술 가운데 또한 유씨 우물이 있다는 고치지 못할 문자가 있는 것을 보면 전설이 진실로 불상(不爽)하나 우물은 이미 인폐하였으니 듣기에 새롭고 그리울 뿐이다. 다시 고로(故老)에게 캐물으니 한 농부가 있어 말하기를 왕년에 우연히 경작하던 밭에서 옛날 우물의 흔적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봄이 되어 밭을 갈려하니 큰 돌이 튀어나와 그 돌 밑에 과연 우물이 있어 물이 출렁거렸다. 물맛은 달고 상쾌하였다.
이럴 즈음 홀연히 개인하늘에 비가 쏟아져 모여 구경하던 사람들이 미쳐 피신할 겨를도 없었다 한다. 이런 일이 우연한 일이라 하더라도 매우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드디어 우물 옆에 단비(短碑)를 세워 유허비(遺墟碑)를 표하였다. 끝에 아우 한돈(漢敦)이 마침 서울에서 내려 왔기에 글씨를 쓰게 하고 각자(刻字)가 끝나 4월 1일 묘시에 입석(立石)하니 아우와 자인원이 함께 와서 밭주인 이생과 경계를 정하여 사기로 계약하고 창해로 돌아와 동족(同族)들이며 이웃 노소와 함께 즐거움을 나누며 놀았다. 이에 비(碑) 세운 내력을 기록해 둔다. 후손 한모(漢謨)
<부운보 "제3호(85.10.10)" 인용>
<自作詩>
느낌으로 오는 가을 |
- 글/유재분(대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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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주했던 일상에서 벗어나 살며시 눈을 감고 마음을 집어 볼 때…….
똑딱거리는 시계소리에 모아진 마음 흐트러지면 빈 공간으로 파고드는 정다운 소리에
나도 모르게 과거 속으로 여행한다. 마음한켠을 파고드는 귀뚜라미소리가
현실로 이어주면 예전에 느낌과 오늘에 느낌이 다르니
가을이 깊어감에 몸과 마음이 함께 이끌려가나 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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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 남양주 차산리 선영을 찾아
<남양주 차산리 선영 참배> |
<차산리 참배후 양효재에서> |
영동지역의 폭설이 몇 일째 계속하여 내리면서 서울 경기지방에도 내린다는 일기예보로 인하여 늦추어 졌던 숙민공(휘 강)을 위시하여 자산공파의 파조이신 자산공(휘 泳) 이하 목(木)자항 충간공(휘 榥), 대사헌공(휘 철)까지의 12분의 선조들이 모셔져 있는 남양주시 차산리 선영을 오늘에야 방문하여 참배하게 되였다.
오늘의 원행은 철원 병수형님의 차를 이용하였다.
철원의 병수형님 내외분과 우리 내외가 오랜만에 나들이를 한 것이다.
사전에 우리가 방문한다는 기별을 받으신 부운장학회 차산분실을 겸한 억준 남양주종친회장님과 병억 총무님 그리고 진복대부님들의 성대한 환영을 받으며 차산리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오삼불고기(오징어, 돈육, 수삼)로 점심식사를 마치고 재실에 도착하여 숙민공(휘 강. 예조판서) 묘소를 시점으로 하여 그 앞에 위치한 자산공의 장남(휘 대형. 가산군수)의 묘소를 시작으로 자산공(휘 영. 군수), 선무랑공(휘 대의. 증 이조참판), 마전공(휘 희증. 군수), 관찰사공(휘 성증. 증 좌찬성), 충간공(휘 幌. 증 좌찬성), 대사헌공(휘 철. 증 좌찬성)과 마전공의 둘째 아드님이신 송정공(휘 櫶. 도승지)등의 묘소를 참배하고 내려오는 길에 삼부자 신도비(휘 省曾, 榥, 철)와 묻힌 충간공의 구신도비를 관람하고 남양주회장님과 총무님의 기념사진을 찍은 후 숙민공 신도비각을 참배하면서 어리석고 나약한 자손 兪燮 이를 건강하게 하도록 도와주십사 하고 축원한 바 있다.
이곳에서 자산공묘소와 충간공(휘 榥)의 글씨로 새겨진 자산공의 묘비, 그리고 16인의 귀한 시와 글씨를 원전 그대로 비석에 옮겨 새겨놓은 시비등 귀한 사진을 몇 장 찍어 오긴 하였는데 카메라가 후져서 잘 나오려나 모르겠다. 잘 나왔으면 하는 바램은 욕심일까? 숲 가꾸기 사업으로 산림청에서 잡목과 없어도 될 나무들을 모두 베어내어 자산공묘소에만 올라서도 선영에 모셔져 있는 모든 조상님들의 묘소가 한눈에 들어오므로 주위 설명을 하기가 아주 편하고 다니기에도 훨씬 좋았다. | |
[삼부자 신도비] : 우측부터 관찰사공(휘 성증), 충간공(휘 황), 대사헌공(휘 철), 제일 좌측은 마전공(휘 희증) 묘갈임. |
오늘 이 참배과정을 마치고 산을 내려오는 길에 1992.9.3일부터 차산리 선영 전례위원회 위원장으로 부운장학회와 대종회로부터 위촉받아 지금까지 선산과 재실 수호를 위하여 노력을 아끼지 않으신 진해대부님을 방문하면서 인생의 무상함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 날렵하고 박식한 몸으로 산을 오르내리시던 대부님은 이제 83세의 고령으로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셨기 때문이다. 환영해주시고 같이 행동하시면서 안내하여 주신 그곳 일행들과 아쉬운 작별을 드리고 귀가하니 오후 6시가 되어 있었다. 앞으로 사진이 나오는 대로 그림과 함께 설명을 별도로 드릴 것을 약속하면서 참배후기를 마친다.
2005. 3. 6.
기계유씨네 카페 회장 유섭
▣ 포천 충목단 및 월성군 묘소 참배기
카페에 충목단 참배 일정과 가는 길이 여러 번 올려지더군요.
유섭 카페회장님의 애틋한 마음 씀이 여러 종친 일가들의 마음을 잡았나봅니다
병수 조카분이 따르릉…….
31일 08 : 30 분에 수원 종친일가분 여러분이 우리 사무실로 오신답니다.
충목단 참배와 월성군 중시조 참배 그리곤 수도권 카페모임을 한다고요
아직 하루가 남았는데도 기다려지는 마음은 아마도 온라인에서만 만났든 일가분들을 오프라인에서 만난다는 기대감과 말로만 듣던 사육신 충목공(휘 응부) 조상님을 만나 뵐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작용했나 봅니다.
카페 대문을 열고 혹시 누가 왔다 갔나 확인하곤 사무실로 향했지요.
옆지기가 조상묘소에 가면서 정장도 안하고 가느냐고 하는 말을 뒤로 하고요
아홉 분이 성준 아저씨 차와 수원에서 큰 건설 회사를 경영하는 문근 아우 차에 나뉘어 타곤 출발을 했습니다.
수원서 포천은 꽤나 먼데도 서울외각도로를 일가분들과 함께 타고 달리는 기분은 무척 상쾌했습니다. 아마도 조상님들이 기특하게 생각하시어 도로를 활짝 열어 주시고. 날씨 또한 아주 덥지도 않게 배려하여 주셨나 봅니다.
유섭 카페회장님이 입구까지 마중을 해주셔서 도착지까지 무사히 안착했지요.
월성군 문중 어른 분들과 먼저오신 보근 아우, 재성씨 등 분주하게 제상을 만들고 유섭회장님의 충목단의 전해 내려오는 내력을 듣곤 헌관 세분이 분향하고 다함께 예를 올렸읍니다.
<사육신 충목공 유허비와 충목단> |
<포천 사육신 충목공 제단 충목단 참배 후> |
우리 조상님의 올곧은 의지와 일편단심 충성심을 마음에 담으며 어려웠던 고초와 힘들어했을 후손들의 행보가 무척이나 안타까웠겠다는 생각이 되드라구요
연 일곱 대의 차에 나뉘어 타고 월성군 묘소로 향했지요. 길가주위엔 맑은 시냇물과 농익은 푸르름이 펼쳐지고요.
산허리를 펴서 만든 골프장 영내길로 약간 지나오니 먼발치에 묘지가 보였지요
월성군 문중의 총무님이 얼음에 꽉채운 요구르트를 들고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가지런히 조상님의 무덤이 정열되어 있어 의아했지만 곧 알게 되었지요. 문중분들과 이북에서 월남하신 일가분들이 여기저기 분산된 무덤을 이장해왔더군요그중엔 허묘도 있드라구요 통일되면 어쩌고 한데요. 문중어른들의 얼굴이 무척 밝았지요. 아마도 근래에 보기 드물게 참배객이 많아서였나 봐요. 천녕유가가 사육신 충목공(휘 응부)을 자기의 선조라고 하나 봐요. 역사만이 진실을 알겠죠. | |
[월성군 묘소 참배 후] |
다만 생각할 수 있는 건 모두 시조 어르신네의 자손임은 부정할 수 없겠지요. 대종회에서 깊이 있게 관여해서 해결 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예를 올리고 아직 미완성인 월성군문중 사당에 들려 30여만 평이나 된다는 주위에 산을 보니 역시 분명 오리지널 양반네는 틀림없구나 생각 됐습니다
월성군 문중에서 삼계탕으로 점심을 주셔서 아주 잘 먹었습니다.
돌아갈 시간은 되었는데 헤어지기 섭섭한 유섭회장께서 한탄강으로 가자는 겁니다
불편한 몸으로 헌신적으로 문중일을 발 벗고 뛰시는 회장님께 감사의 박수 보냅니다. 아쉬웠지만 헤어 졌습니다. 수원으로 내려와 병수님과 천근회장님이 2~3차 쏘시는 바람에 현재시간 취권 3단입니다. 고생하신 성준 아저씨 잘 가셨으리라 믿고 오늘 애써 주신 월성군 일가분들 그리고 임원진 여러분 감사했습니다.
2005. 8. 5
기계유씨 아찬공 후손 유형근(수원)
▣ 제2의 본향을 찾아-평택 ?안성 선조 묘소 탐방기
평택 땅 그윽한 후사리 숲길에는 어느새 상수리 열매가 알알이 영글었다. 가파른 길이 끝나는 지점으로 잔디가 깔리고, 한길 남짓한 장대한 봉분은 널찍한 터에 자리 잡았다. 잘 자란 소나무에 에워싸인 800년 선조의 유택은 안도감을 주기에 넉넉하다.
이끼를 덮어쓴 묘표의 글자마다 은은히 훈기가 묻어난다. 아득한 세대를 넘어 찾아든 못난 후손에게 문득 할아버지께서는 무슨 말씀이라도 하시려는 걸까? 가문의 오랜 역사를 뒤돌아보면 아직은 풀리지 않는 부분이 있다. 신라이래로 기계 고현에서 터 잡았던 조상들은 신라 조정에 출사하여 누대에 걸쳐 고관을 지낸 유력한 가문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 개국 초에는 전조에 대한 의리를 지키며 불복하다 기계에 강속 당하였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후손들은 그곳에 대대로 살았음직하다.
그런데 기계에는 지금까지 전해지는 집성촌이 없다. 대체 어느 때 무슨 연유로 경기지방으로 이주하신 것일까? 고려 개국 300여년 후에 한양부윤을 지내신 할아버지의 유택은 그래서 더욱 절실한 모습으로 다가선다.
[평택 후사리 판도판서겸 한양부윤공(휘 선) 묘소] |
[안성 배어리 판사재감사공(휘 성복) 묘소 참배 후] |
안성은 평택과 멀리 떨어진 거리는 아니다. 이곳 대문리는 골 깊은 산록이 길게 이어지다 문득 윤씨 집성촌이 바라보이는 곳에 판도판서공(휘 승계)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이웃한 배어리는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판사재감사공(휘 성복)의 묘소가 모셔져 있다. 그리고 한길을 돌아앉은 사곡리 숲 속에 자리한 승지공(휘 집)과 통덕랑공(휘 숙)의 묘소도 이곳에 있다.
이처럼 4대의 선조 묘소가 일대에 이웃하며 산재하고 있다. 려말선초 격동기, 안성 땅에 누대에 걸쳐 3품이상 고관을 지낸 명문세가가 과연 몇이나 되었을까? 선대 4위의 묘소가 모셔져 있는 안성 땅, 이곳은 조상들이 터 잡았고 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가문의 성세를 일구어내었던 선조들의 쾌거를 웅변으로 전해주고 있다.
조망이 확 트인 응봉산 높은 언덕, 참판공(휘 대록)의 묘소가 모셔져 있다. 그 아래로는 4세대의 후손들도 함께 자리하였다. 선대이래로 안성을 떠난 지 170여년 후에 참판공께서 옥장리를 다시 찾아 들었던 참된 이유는 무엇일까? 슬하의 세 자제를 학자로 감사로 승지로 길러낸 것을 보면, 아마 가문의 성세를 또다시 일구려 하신 듯하다.
건지리 대로가 내려다보이는 구릉에는 의정대신(휘 언호)의 묘소가 모셔져 있다. 이제 막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저녁놀마냥 순정한 색채로 살다간 분이다. 세도정치에 함몰하려는 조선조의 마지막 숨결을 잡고 놓지 않았던 시대의 양심이었다. 그러나 기어이 조선왕조는 세도 정치로 망하였다.
수백 년을 지켜 내려온 선조의 유택을 참례하는 일정이 자못 숨 가빴다. 땅거미 지는 도심으로 불빛들이 하나 둘 밝혀지기 시작할 즈음에 비로소 마치게 되었다.
2005. 9. 25.
인당 유 동 재 (카페 대의원회 부회장)
<편 집 후 기> 현재 본 카페에 올려져 있는 훌륭한 글을 제대로 골고루 수록하자면, 넉넉히 책 한권을 만들고도 남을 정도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면 제약으로 인하여 부득이 몇 편의 선조묘소 답사기로 편집하였습니다. 더 자세한 사항은 『기계유씨네』 본 카페(cafe.daum.net/kigeyoo)를 방문하시어 열람하시기 바랍니다. 종친여러분께 널리 양해를 구합니다. 끝. |
<참고>
기계유씨네 카페 가입 및 정회원 신청 요령 |
◆ 다음 홈페이지 회원이 아닌 경우
① www.daum.net(다음 홈페이지)에 접속한다.
② 좌측 회원가입 버튼을 클릭하여 회원가입을 신청한다.
③ 회원가입이 완료되었으면 www.daum.net(다음 홈페이지)에 접속한다.
◆ 다음 홈페이지 회원인 경우
① www.daum.net(다음 홈페이지)에 접속한다.
②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로그인을 한다.
③ 통합검색에 “기계유씨네”를 입력하고 검색버튼을 누른다.
④ 검색된 화면에서 “카페이름-기계유씨네(杞溪兪氏)(cafe.daum.net/kigeyoo)”를 클릭한다.
⑤ 카페가입 버튼을 누른다.
⑥ 퀴즈에 답을 입력한다.
<질문> 가입하고자 하는 분의 본관은 어디세요?
<답> 기계
⑦ “기본정보 - 닉네임”에서 예시처럼 닉네임을 수정 입력한다.
<예시> 유보근(根,1971,副提,안양)
<풀이> 이름(항렬자,생년,파약자,사는곳)
⑧ 주관식 추가정보를 입력한다.
<예시: 이름/ㅇㅇㅇㅇ파/사는곳>
<해설: 유보근/부제학공파/안양>
⑨ 객관식 추가정보 중에서 선택한다.
<문제> 기계유씨네 카페 가입이유는?
㉠뿌리를 찾아서, ㉡가족종친회의 권유, ㉢인터넷검색을 통해, ㉣학교과제물 수행, ㉤기타사유
⑩ 보안문자를 입력한다.
⑪ 가입버튼을 클릭한다.
⑫ “공개방-가입인사&등업요청” 게시판에 인사말을 남기면 운영자가 정회원으로 등업해 줍니다.
◆ 다음 홈페이지 회원이며 카페 준회원이 정회원으로 되고자 하는 경우
① www.daum.net(다음 홈페이지)에 접속한다.
②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로그인을 한다.
③ 통합검색에 “기계유씨네”를 입력하고 검색버튼을 누른다.
④ 검색된 화면에서 “카페이름-기계유씨네(杞溪兪氏)(cafe.daum.net/kigeyoo)”를 클릭한다.
⑤ 좌측 메뉴의 아래쪽에 “내정보수정”에서 “기본정보 - 닉네임”에서 아래의 예시처럼 닉네임을 수정 입력한다.
<예시> 유보근(根,1971,副提,안양)
<풀이> 이름(항렬자,생년,파약자,사는곳)
⑥ “공개방-가입인사&등업요청” 게시판에 인사말을 남기면 운영자가 정회원으로 등업해 줍니다.
※ 이글은 11월1일 기계재실에서 화수회회의시에 카페 홍보물로 배부할 인쇄물입니다. 작년에 처음으로 홍보자료를 배포하였는데 많은 종인들의 격려와 질책이 있었습니다.
※ 편집은 한글2002(첨부화일 참조)로 하였으나 여기로 옮기는 과정에서 그림이 안나오거나 글자가 밀리는 부분이 발생하였습니다.
양해를 바랍니다...
첨부된 한글화일을 보시고
내용중에 잘못된 부분이나 수정을 가할 부분은 리플이나 메일을 바랍니다.
첫댓글 자료가 방대해서 읽기가 좀 그런 것 같아요,,! 우리카페소개나 가입요령,,,그리고 우리가 참배했던때 들의 자료들의 요약,시조 산소의 유래등은 괜찮아 보이구요,,! 여행기나 시의 게재는 웹진도 아니고 시조묘소를 참배하는분이 연세가 대부분 많아서 간략하게 만드는게 좋을 듯합니다. 운영위원장이 얼마나 힘이 들까요,?
11월1일 재실시 카페 홍보글에 저자의 허락없이(대구의 유재분씨, 수원의 유형근 형님) 글을 사용했음을 양해 바랍니다.
○ 좌측 : 지수재 초상화 -> 지수재공 초상화 /- 관(冠) : 영의정 -> 官 영의정,/ 싸 올리고 ->쌓아 올리고//카페 내적, 외적으로도 많은 일을 실시한 바 있습니다. ->대내외적으로 질적 성과를 거두기도 했습니다.///역할을 자임하며 -> 역활을 자임
'회장님의 인사말씀'은 제가 올린 수정문구로 굳이 바꾸지 않아도 무방합니다. 다만 이 글이 대외적으로 카페를 대표하는 글이기때문에 의견을 올린 것입니다.
대종회에서도 신임 대종회장님이 카페에 가입하시고-> 신임 유대식 회장께서 본 카페에 가입하시는 등 지대한 관심을 보이시며
전산화추진위원회를 우리에게 맡기심으로서 사실상으로 종중카페임을 인정하신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 대종회 '전산화 추진위원회'에 본 카페 임원들을 대거 참여하도록 배려하신 뜻은, [기계유씨네]가 종중카페로서의 역할에 일정부분 담당했음을 인정하신 것으로 사료됩니다.
특히 반가운 것은 우리 카페 회원의 대다수가 20~30대로서 향후 우리 문중을 이끌어 나갈 후예들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반갑고 주목되는 일은 우리 카페 회원의 대다수가 20~30대로서 장차 우리 문중을 이끌어 나갈 동량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위선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계속 넓혀 나가고 있습니다. ->위선사업에 참여하는 활동의 폭을 더욱 넓혀 나가 도록 하겠습니다. ///전조 세신으로 고려조에 불복함에 끄릴새->전조 세신으로 고려조에 복종함을 꺼릴새// 금양 하도록 -> 나무하고 소치는 일을 금하도록
시조 아찬공 묘소 찾은 내역->시조 아찬공 묘소 되찾은 내력(來歷)/▣ 아찬공(휘 삼재) 시조묘소 약력 ->약사(略史)//유백천 묘소를 시조묘로 알고 순찰 ->이른바 '유백천의 묘'를 시조묘소로 잘못 알고 참례(參禮)하다.('순찰'이란 단어가 적절치 못함. 이하 '순찰'이라는 단어를 '참례'로 고치는 것이 타당
문익공(휘 척기, 당시 경상감사)께서 아찬공 시조묘소에 비석을 세움. -> 아찬공 묘소의 형역을 넓히고 봉분을 다시 쌓아서 새로이 비석을 세우다
이런 쟁힐사건을 -> 이 같은 타성들의 부당한 산송사건(山訟事件)을//명뢰 공 형님의 상을 당하여-> 가형(휘 명기)의 친상을 당하여 상경하는 바람에
휘 하겸 공(경주부윤)이 명뢰 공의 진정서를 확인하여 관련자를 문책하고 아찬공 시조묘소를 찾아 봉분을 쌓고 표석을 세움. -> 경주부윤공(휘 하겸)이 자교당(휘 명뢰)의 진정서를 근거로 관련자를 색출하여 사건의 진상을 명백히 밝히게 되었다.
부윤공은 이러한 경위를 종중원로들께 고하여 승인을 얻은 후, 시조묘소의 봉분을 다시 쌓고 표석을 세우게 되었다.//(이러한 부윤공의 업적에 객관적인 합당성을 부여하는 문구가 반드시 들어가는 것이 바람직함)
여러회원님들의 지적중 반드시 수정해야할 부분은 수정하도록 하겠으나, 동재부회장님의 글중 다섯번째 글부터 마지막까지의 글은 유치웅 문장대부님과 유한모공의 글을 부운보에 실린 원전 그대로 이기한 것이기에 후손된 도리로 임의로 수정할 수 없는것으로 사료되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고쳐서 않되는 것은 "한문 원전"입니다. 다섯번째부터 마지막 부분은 '부묘지추심사(附墓地推尋事)'의 해석본을 운영위원장이 요약한 것입니다. 해석한 당사자로서 내용이 다소 소략한 듯하여 보완요청한 것입니다.그리고 문장어른의 글은 존중되어야하지만, 번역 요약본에 문제가 있다면 역시 수정하는것이 옳겠죠
부운보에서 인용한 글들은 오탈자만 수정하고 이해가 필요가 부분은 각주로써 설명하겠습니다...회장님과 부회장님 의견에 감사를 드립니다..
연로하신 종친께서는 '인터넷'이라는 용어도 익숙치 않으실 텐데 '까페'라는용어에 대하여 의문이 있다는 분이 지난 노량진 충목공육신제 때 계셨읍니다. '카페'에 대하여 예를들어 [ ]로 묶어서 "온 라인상에서 종친들이 모여 친목을 도모하는 장소"등 간결하게 소개, 설명하는것이 어떻런지요?
의견에 감사를 드립니다..10월27일(목)까지 자료수정을 완성하려고 합니다.그래서 150부(22,000매) 인쇄물을 준비하려합니다..작년과 유사한 수준인데 레이져 프린터로 인쇄시간만 3시간은 족히 걸렸던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