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에 가져오는 고민은 의외로 일상의 불편도 많다. 최근에 만난 고등학생은 급식을 함께 먹을 친구가 없다는 것이 가장 괴로웠다. 다른 아이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먹는데, 같이 먹을 친구가 한 명도 없어서 식판을 받아 들고 앉을 때까지가 매일 고역이다. 한 대학생은 MT를 갈 때 버스에 앉아 있는데 아무도 옆자리에 앉지 않고 혼자 앉아 갈까 봐 불안해한다. 친하다고 생각했던 친구가 올라와 눈이 마주쳤지만 그냥 지나가 버린다. 이때 긴장감은 자이로드롭이 따로 없다고 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먼저 같이 먹자, 같이 앉자라고 제안했다 거절당한 기억도 있다. 그래서 포기하고 아예 굶든지, MT를 가지 않는다. 이렇게 매일 관계에 예민해져 있으니 사는 게 외롭고 우울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두 이런 상태로 머무르지 않는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인지라, 일부는 ‘혼자 놀기’를 연마한다. 인터넷에는 수많은 혼자 놀기 방법이 있다. 노래 틀어놓고 거울 보며 립싱크, 숨 안 쉬기, 조리퐁 개수 세어보기 등등. 더 찾아보면 수련 매뉴얼도 있다. 1단계가 혼자 밥 먹고 영화 보기다. 식당을 고를 때 붐비지 않고, 읽을 거리가 비치되어 있고, 창가에 혼자 앉을 자리가 있는 곳을 고르라는 것이다. 더 좋은 곳은 혼자 먹는 사람이 이미 한 명이라도 있는 식당이다. 이렇게 혼자 놀기는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같이 밥 먹을 사람이 없어서, 옆자리에 앉을 친구가 없을까 불안해하느니 차라리 혼자 노는 법을 터득하는 게 낫다고 여기는 세상이다.
이렇게 하면 정말 외롭지 않은 걸까? 인터넷에는 혼자 놀기의 결과물을 인증샷으로 올려놓은 것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나도 해봤어요”라는 댓글은 동병상련의 목소리로 들린다. 혼자 놀기를 하고 인터넷에 올려 다른 이들의 인증을 받는 과정이 들어가면서 혼자 놀기는 ‘혼자 놀되 같이 놀고 있는 것’으로 변환된다. 물리적 현실은 혼자지만, 인터넷 세상에서 다른 이의 시선 아래 놓이면서 같이 있는 느낌을 공유하게 된다. 훨씬 나은 기분이다. 아이의 놀이 발달 과정에 ‘평행놀이’라는 것이 있다. 같은 방에서 두 아이가 서로 다른 장난감을 갖고 놀고 서로에게 관심이 없다. 그런데도 둘은 서로 잘 놀았다고 한다. 혼자 놀기는 인터넷을 매개로 아이의 평행놀이가 된다.
특히 서로 남기는 댓글은 큰 위안이 된다.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감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절대고독에서 벗어나게 된다. 다른 사람의 인증샷에도 댓글을 달아 기발함을 즐긴다. 나는 이를 ‘감정의 품앗이’라 부른다. 이를 통해 외로움은 잦아들고, 전보다 안정된 상태로 혼자 노는 것에 열중할 수 있다.
나는 ‘놀이’로 풀어간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전에는 혼자 있다고 해서 외롭거나 쓸쓸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혼자놀이의 세상에서는 혼자 있어 심심할 따름이니, 이제 놀 거리를 찾으면 된다. 외로운 게 아니라 심심한 것이고, 해결책도 노는 것이다. 인간은 호모 루덴스다. 그런 면에서 최근의 혼자 놀기 문화는 현대인의 고립감과 관계의 미숙함으로 인한 아픔을 줄여줄 대안의 하나다.
하지현 건국대 의대 교수·
무당의 꿈 묵직한 남 저음의 목청이 춤을 마중 나갔다. 울대를 흔들어 공급하는 음의 두께, 춤꾼이 사뿐히 즈려밟으니 깊게 파인 발자국에 흥이 흥건히 고였다. 객석의 관객도 안달을 했는지 “가만히 앉아 있질 못하겠어요”라며 남자의 목소리를 캐물었다.
요사이 춤판을 벌이는데, 판을 휘어잡는 게 정영만(鄭英晩, 1956년생)의 구음(口音)이다. “나르디 나니낫…” 특정한 가사 없이 춤 반주에 얹는 소리, 장단이 춤꾼의 발걸음에 놓는 징검다리라면 구음은 몸의 곡선을 종용하는 각본이다. “군데군데 슬픔이 박혀 있어서 더 좋다”는 춤꾼의 말에 붉은 살결에 퍼진 흰 선처럼, 누선을 빠져나가지 못한 슬픔이 희게 번져 마블링된 음의 육질을 생각했다.
태어나자 무당이었으니 슬픔을 점지 받은 거였다. 어릴 적에는 ‘새끼 무당’으로 불렸고, 커서는 ‘무당 새끼’로 불렸다. “무당 밥은 이빨이 아파서 못 씹는다”는 어머니의 당부로 무당을 피하려 온갖 직업을 전전했다. 그러나 심연에서 울리는 소리를 잊을 수 없어 슬하의 삼남매를 끼고 굿판으로 유턴했다. 깊이 숨은 선생들을 찾아 다시 굿을 익혔다. 그래도 못 배운 음악은 조상들이 꿈속에 와 가르쳐 주었다. 그렇게 목젖에 굳은살 박이는 노력으로 춤을 부추기는 입김 서린 구음을 얻은 것이다.
춤꾼들이 녹음을 청했고 음반사에서도 찾아왔다. 그러나 응하지 않았다. ‘제비 난상’을 찾지 못한 때문이었다. 춤출 때 쓰였다는데, 이름만 남았을 뿐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소리였다. 그저 제비가 날 듯 매끈한 선율이지 않을까 하는 추정만 했다. 단서 하나만 있어도 제목을 붙여 CD를 만들어내는데, 이내 미루고 10년 넘게 꿈속까지 두리번거리면서 ‘제비 난상’을 찾아 헤맨 것이다.
그런데, 한 달 전 춤판의 음악감독으로 섭외할 때 그가 들떠 말했다. “혹시 ‘제비 난상’이 아니라 ‘잽이 난상’일지 몰라!” ‘잽이(악사)’들의 ‘난상(亂相)’, 곧 악사들이 현란한 선율로 연주하면서도 서로간의 조화를 도모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피리, 대금, 아쟁 등의 악기가 따로 또 같이 선율을 내는 것을 ‘시나위’라 한다. 연주자들이 즉흥적으로 제멋을 내는데, 제멋대로는 안 된다. 그 속에 질서와 절묘한 어울림이 있어야 한다. 이 소리가 춤을 부르는 최고의 소리인데, 거기에 구음을 얹어 극치의 순간을 조성하는 것을 ‘잽이 난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귀가 번쩍해 “그러면 이제 CD 녹음할 겁니까” 하고 물었다. “다시 시작이다. 하지만 멀지 않을 거다”고 했다. 분명한 것은 춤판이 달라지는 게 느껴지는 거다. 지난해의 춤판보다 더 부드럽고 유연하게 판이 달구어진다. 시나위란 선율을 자아 허공에 직조한 그물이다. 그래서 털 하나 안 빠지게 꽉 찬 소리를 내는 것이 시나위의 이상이다. 그런데 거기에 ‘잽이 난상’이란 유토피아를 내건 것이다. “음악가의 꿈이 아니야, 무당의 꿈이야!” 11대를 내려온 무업을 잇는 그의 자존심이었다. 순간 그의 목젖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웅숭깊은 음이 징소리처럼 둥근 동심원을 그리며 ‘지잉!’ 울렸다.
진옥섭 KOUS 예술감독
착한 고수는 없다
세상은 승부가 나는 것과 승부가 나지 않는 것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예를 들어 축구나 바둑, 전쟁은 승부가 나고 4대 강이나 세종시는 승부가 나지 않는다. 4대 강이나 세종시도 언젠가는 누가 옳은지 밝혀질 것이다. 소위 역사의 판결이라는 것인데 사실은 그때쯤 되면 다 흘러간 옛날얘기가 되기 십상이다. 가끔은 뒤집어야 맞는 것이 역사이고 보면 선악은 영영 가려지지 않을 수도 있다.
승부가 난다는 건 참 명쾌하다. 재미도 있다. 전에 어떤 성악가가 “우리도 바둑처럼 승부를 한번 볼 수 있으면 원이 없겠다”고 한탄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실력보다 인정을 못 받는다는 하소연일 텐데 그게 어디 노래뿐이랴. 하지만 모든 분야에서 승부가 명명백백하게 가려진다면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 비로소 신의 정의가 실현될까. 아니면 훨씬 무섭고 독해질까.
축구나 바둑처럼 20대와 30대가 세상을 싹쓸이해서 50대쯤 되면 죽지 못해 사는 처지가 될지 모른다. 피겨의 김연아도, 수영의 박태환도, 축구의 박지성도, 바둑의 이세돌도 이 시대 최고의 승부사들은 다 10대 끝자락 아니면 20대다. 30대가 되니 박찬호 같은 야구의 강자도 조금씩 밀린다. 다른 분야라고 다를까.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 집어치우고 주식 투자 배워 밤낮으로 훈련한다면 돈도 20, 30대 고수들이 다 움켜쥐는 것 아닐까. 권력도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넘어가는 것 아닐까.
어처구니 없는 상상을 잠시 해 봤지만 사랑이나 결혼, 춤이나 음악, 교육 같은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것들은 (조금 억울하더라도) 승부가 나지 않는 쪽에 그냥 머물렀으면 좋겠다. 좌파, 우파로 편을 갈라 허구한 날 싸우는데 그쪽은 꼭 한번 승부를 내 봤으면 좋겠다. 누가 진짜 애국자이고 누가 뻥을 치는 것인지도 한번 대명천지에 속 시원히 가려졌으면 좋겠다. 한데 세상은 반대로 가는 것 같다. 편 가르는 소리는 갈수록 요란하고 공부나 결혼까지 한판의 승부로 치닫고 있다. 세 살 어린이부터 여든 할아버지까지 한번 붙어보자고 한다. 승부 위에 ‘탐욕’이 얹혀 폭주기관차처럼 달리다 보면 어떤 괴물이 탄생할지 모른다.
승부는 속성이 비정하다. 쓰러지는 적수를 잔인하게 밟아야 한다. 최고의 축구 선수에겐 ‘킬러’란 말이 따라붙는다. 칼을 내리치는 순간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사람은 살아남지 못한다. 세상에 착한 고수는 없다고 봐야 한다. 그 같은 ‘선수’들의 비정 스토리를 생존방식으로 채택하려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 승부를 찬양하며 그걸 권하는 책자들이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뼈를 깎고 심장을 태우다 보면 순한 양도 늑대가 된다. 한번 늑대가 되면 다시는 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세상엔 고수와 하수 두 종류의 인종만 남을지 모른다.
인생이라는 종목이 아직은 ‘승부가 나지 않는 쪽’으로 분류되는 건 큰 위안이다. 투쟁 속에서 살던 수경 스님이 바랑 하나를 메고 떠나면서 “어느 따뜻한 겨울날 바위 옆에서 졸다가 죽고 싶다”는 글을 남겼다. 평생 온갖 승부를 즐기며 살아온 주제에 이런 말 하려니 쑥스럽지만 가슴에 메이는 한마디였다.
박치문 바둑전문기자
인간과 짐승 사이
싫다는 아이의 손을 비틀어 가며 내 볼에 악착같이 뽀뽀를 시키는 젊은 엄마. 핑크 리본을 단 아이가 귀여워서 인형 같다는 말 한마디 던졌을 뿐인데. 어른이 칭찬을 하시는데 예의를 갖춰야 한다며 ‘고맙습니다’라는 말도 함께 건네 왔다. 예의 바르다는 생각에 앞서 걱정이 된다. 처음 보는 아이였다. 이제부터 그 아이는 낯선 어른이 사탕 하나 쥐여주며 예쁘다고 하면 오늘 교육 받은 그대로 ‘예의 바르게’ 어른을 따라갈 것이 분명하다.
20년 전 미국에서다. 한 유학생의 나이든 어머님 한 분이 놀이터에서 놀던 여자애에게 “너 참 인형같이 생겼구나” 하며 덥석 안았다가 경찰서에 불려가 며칠 동안 조사받고 곤욕을 치른 일이 있었다. 그때는 미국이 참 냉혹하고 정이 없는 나라라고만 생각했었다. 이제 우리나라도 닮아가고 있다. 지금부터는 아이들에게 웃으면서 접근하는 어른을 경계해야 한다. 백주 대낮에 학교 운동장까지 와서 아이를 데려가 성폭행을 하질 않나, 집에 가서 같이 놀자면서 죽일 짓을 하질 않나…. 어른 말씀은 잘 들어야 된다고 배우며 자란 아이들. 착실하게 배운 그대로 행동했던 아이들이 더 쉬운 범죄 대상이 되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더 아프다.
끔찍한 성폭행으로 병아리 같은 아이들이 희생될 때마다 신문과 인터넷은 며칠 동안 난리가 난다. 하지만 그 분노도 한때뿐이다. 어린 딸을 가진 부모들 이외에는 다들 강 건너 불구경하는 것 같다. 불쌍하기는 해도 자기 일 같지는 않은 모양이다. 아이를 택한 이유가 소아기호증이란 이유보다 아이라서 힘이 없기에 대상이 된 이유가 더 크다는데. 신고율도 7% 정도라니 여자아이로 시작해서 들키지 않으면 힘을 받아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할지도 모른다.
앞으로 특정 성범죄자들에게 화학적 거세를 할 모양이다. 가석방 이후 보호관찰 기간 동안에 약물 투여를 해서 일시적으로 성욕을 조절하겠단다. 보호관찰 이후 사회로 복귀한 다음엔? 약물 투여를 중단하면 호르몬이 증가하는 부작용이 있다던데 그건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해보자고? 수술을 통한 외과적 거세라면 모를까 약물 투여는 당장 대중의 분노만 가라앉히는 꼴이다. 형량을 대폭 늘리는 양형 기준안도 확정되었다. 그래 보았자 3~4년 높아지는 거다. 짐승 같은 패륜범에게 관용을 베푸는 것 자체가 사치 아닐까. 아동 대상 범죄에 대해 중국은 사형, 영국은 무기징역, 스위스는 평생 사회로부터 격리시킨단다. 하루라도 빨리, 우리도 이 정도의 강력한 아동성폭력법을 만들어 ‘이 세상 그 어떤 문제보다 아동 보호가 최우선’이라는 사회적 인식을 갖게 하자. 어린 피해자들이 상처받지 않고 신고를 할 수 있는 최첨단의 시스템 구축도 필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예방교육. 날마다 영어·수학 공부하듯이 낯선 사람을 대하는 법이나 태도, 위급할 때의 대처요령 등을 철저히 준비시켜야 한다.
인간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아까운 악질적이고도 더러운 성범죄자. 인간도 아닌 그들. 그들에게 인권은 사치다. 병아리 같은 아이의 고사리 손을 잡고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그 아이에게 인공항문이 있어야 하는가. 채 여물지도 않은 아기의 성기 파손은 또 뭔가.
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