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에 3만6,792개의 마을이 있다.
어디나 고향 같은 수많은 마을들 중에서 지난 4개월 동안 공동체가 잘 살아 있는 16개의 마을을 골라 찾아갔다.
어쩌다가 국민방송KTV의 다큐멘터리 ‘다정다감 마을의 귀환’ 진행자가 되어 16부작 방송을 잘 마쳤다.
몸에 안 맞는 옷을 입은 듯 참 어색하기도 했지만 매주 1박2일씩 머무르며 마을 어르신들과 잘 놀았다.
이 천박하고 각박한 시대에 스스로 행복지수를 드높이는 마을들이었다.
버리고 또 떠나던 마을이 돌아오고 또 살고 싶은 마을로 되살아나고 있었다.
충남 부여의 송정그림책마을을 시작으로 천안 솟대마을, 부산 철탑마을, 강원도 인제 가리산마을, 경기도 가평 소돌마을, 전남 화순 야사마을, 나주 장평마을, 광양 망덕포구 신월마을, 전남 신안군 비금도, 경남 하동군 법대마을,
남해 갈산마을, 광주시 양3동 청춘발산마을, 전북 완주 고산 창포마을, 충북 보은 신개울마을, 경북 칠곡 어로1리 보람할매연극단, 경남 합천 양떡메마을 등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16개 마을을 찾아가 1박2일 동안 머물며 어설픈 시와 방송 멘트를 남겼다.
말 그대로 ‘시원 섭섭’하다. 처음 시작할 때는 30분짜리 16부작이라 눈앞이 캄캄했는데 돌이켜보니 한달음에 달려왔다.
마을 어르신들의 환한 모습들이 벌써 그립다.
경북 칠곡군 북삼면 어로1리는 예전의 어부마을과 갈대밭蘆田마을이 합쳐져 어로리가 된 곳이다.
평생 농사만 짓던 할머니들이 뒤늦게 인생 2막을 힘차게 열어젖힌 그 유명한 ‘보람할매연극단’의 근거지다.
전국 안 가본 곳이 없는 보람할매연극단은 어느새 1기 할머니들이 명예롭게 물러나고 2기 할머니들이 맹활약 중이다.
요즘 <거울 속에 누구?> 등 벌써 네 작품을 선보였다.
다른 지역의 연극 팀들을 초청해 두 번의 ‘어로마을 연극제’를 열기도 했다.
이미 6년 전에 경북 칠곡군은 대구인문사회연구소(신동호 소장)가 손을 잡고 ‘인문학도시’를 선포했다.
칠곡 출신인 후배 신동호 소장이 지난 6년 동안 심혈을 기울이는 바람에 마을마다 색다르게 활발한 모습으로 거듭났다.
보람할매연극단뿐만 아니라 할머니들이 이미 두 권의 시집을 펴내 눈길을 끌었다.
![별나무 사진 시리즈의 한 작품. 겨울 감나무의 홍시들 사이로 별들이 내려와 반짝인다.](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san.chosun.com%2Fsite%2Fdata%2Fimg_dir%2F2018%2F02%2F02%2F2018020201798_1.jpg)
그리고 마지막 촬영지인 경남 합천군 초계면 양떡메마을도 아주 인상 깊었다.
마을회관에서 하룻밤 묵었는데, 이곳에는 마을사람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샤워장과 60℃의 원적외선 찜질방까지 있다.
논밭에서 일하다 찜질방에서 노곤한 몸을 풀고 가는 것이다.
원래 이름은 하남마을인데 양파즙과 떡가래, 메주로 마을기업을 운영하면서 새롭게 붙여진 이름이다.
한때 양파값이 폭락하는 바람에 마을주민들이 모여 대책을 강구하다가 양파즙을 내기로 한 것이 발단이 되어 마을기업까지 운영하게 됐다.
마을주민들이 출퇴근하며 양파즙뿐만 아니라 이 마을의 햅쌀로 떡가래를 만들고 메주를 가공하는 공장까지 지었다.
이 마을의 가장 인기 있는 특산품의 앞 글자를 따서 ‘양떡메 마을’이라는 별칭을 달게 됐다.
이 마을은 날마다 점심을 함께 먹는다.
생일을 맞은 어르신이 있으면 마을 식당에서 모두 축하하며 식사 겸 잔칫상을 차려주는 아주 멋진 마을이다.
농촌 마을단위로는 최초로 집집마다 기름보일러가 아니라 마을공용 가스를 사용한다.
마을 수익금과 지원을 받아 시골 중소도시에서도 해결하기 힘든 연료문제를 해결했다.
난방비가 절반 이하로 줄었다고 한다.
마을 중심에 큰샘과 마샘이라는 아주 오래된 샘이 있다.
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 큰샘은 식수와 세수, 빨래뿐만이 아니라 드넓은 논의 넉넉한 생명수 역할을 해왔으며, 마샘은 이 마을을 지나가는 길손과 고갯길을 넘어가야 하는 지친 말들의 식수였다고 한다.
그 마샘 바로 앞에 젊은 느티나무가 서 있었다.
![눈밭에 변산바람꽃이 피었다. 남도에서 설중 변산아씨를 만나는 것은 천운이나 다름없다.](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san.chosun.com%2Fsite%2Fdata%2Fimg_dir%2F2018%2F02%2F02%2F2018020201798_2.jpg)
세상만물 똑 같은 것 하나도 없어
마을회관에서 그냥 잠들 수는 없었다.
한밤중에 일어나 바로 이곳에서 느티나무와 마을 위로 쏟아지는 별밭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마을 가로등 불빛이 강했지만 그래도 쪽빛 하늘엔 별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3시간 동안 450여 장을 찍어 단 16초짜리 방송 동영상으로 줄였다.
그러니까 1초당 30장 정도의 사진들이 별 궤적을 그리며 마을을 휘감고 있었다.
때로 무료한 우리들의 삶도 이렇게 압축하면 멋진 궤적을 그리게 될까 궁금해졌다.
세상만물 똑 같은 것은 단 하나도 없다. 별빛도 저마다의 색깔로 반짝인다.
동쪽의 별들은 솟구치고, 서쪽의 별들은 내리꽂힌다. 북쪽의 별들은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고, 남쪽의 별들은 수평으로 흐른다.
때를 기다렸다가 겨울 모과나무 위로 쏟아지는 별 궤적을 담았다.
세 시간 동안 사선으로 내리는 별들의 발자국이 저마다의 빛으로 선명했다.
쌍둥이도 자세히 보면 얼굴이 조금 다르고, 그 누구의 얼굴도 왼쪽과 오른쪽이 같지 않다.
그리하여 왼쪽 얼굴이 진실면이라는 말도 들었다.
어찌됐든 따로 또 같이和而不同의 미학이다.
서로 다르지 않다면 지구는 또 얼마나 지겹겠는가.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키고 과일 망신은 모과가 시킨다고?
단 한 번이라도 꼴뚜기 회나 젓갈을 맛 본 사람이나 모과 향기를 맡아본 이들에겐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사람 또한 보이는 그대로가 다가 아니며 ‘보이는 그대로’에 대한 미적 기준마저 사실 왜곡되거나 수상할 때가 더 많다.
내 나름대로 추구하는 미학 또한 그럴 것이다.
지난 4년 동안의 ‘별나무’ 시리즈 마무리를 위해 겨울 모과나무와 유자나무를 찾아다녔다.
잎이 다 진 뒤의 나뭇가지에 매달린 노란 모과와 유자를 찾아오는 별들이 궁금했다.
우리나라 토종나무의 꽃이며 열매를 찍어왔지만 은행나무를 제외하고는 검푸른 밤하늘과 노란빛의 극적인 대조 대비가 부족했다.
제주도의 감귤나무는 일정상 잠시 포기하고 유자를 찾아 남해와 고흥 등을 어슬렁거렸지만 딱히 멋진 모델을 찾지 못하고 때도 좀 늦어버렸다.
그리하여 오지마을의 야생 모과나무를 찾아 바이크를 타고 지리산을 몇 바퀴나 돌았다.
‘마을의 귀환’ 방송을 핑계로 경북 칠곡이나 경남 합천에 갈 때도 그 주변 오지마을 곳곳을 뒤졌지만 헛수고였다.
마을의 모과나무는 거의 다 수확을 해버렸거나 멋진 나무를 찾아도 주변 빛 공해가 너무 심했다.
올해도 포기해야 하나보다 마음 추스르는데 ‘꼭 포기해야 할 때쯤에 오는 것’들이 있다.
미리 포기해 버리면 끝끝내 오지 않지만 포기할 때쯤 문득 거짓말처럼 오는 것도 있는 법.
![섬진강 첫 매화 설중매가 봄을 부른다.](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san.chosun.com%2Fsite%2Fdata%2Fimg_dir%2F2018%2F02%2F02%2F2018020201798_3.jpg)
왕따나무가 아닌 나홀로나무가 어울릴 듯
영하의 날씨에 오프로드 바이크를 타고 동네 뒷산인 백운산 농로를 타고 오르다보니 아직 감나무엔 홍시들이 언 채로 매달려 있었다.
골짜기를 넘어 몇 개의 산마을을 돌고 돌아 겨우 방향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눈길을 사로잡는 나무가 있었다.
화전민이 살았을 법한 능선 가까이 작은 계곡 옆에 떡하니 모과나무 한 그루가 서있었다.
어림잡아 내 나이 정도 된 나무였다.
그것도 한겨울에 노란 모과를 주렁주렁 매단 채 홀로 서 있는 ‘왕따나무’였다.
그 먼 곳을 돌고 돌아도 찾지 못하던 모과나무를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마주친 것이다.
그것도 한겨울에 몇 개의 모과만 떨구고는 당당하게, 노랗게 서있었다.
사실 풍경사진가들이 좋아하는 용어인 ‘왕따나무’라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꼴뚜기와 모과를 함부로 대하는 듯 비하의 뜻이 담긴 ‘따돌림 받는 나무’가 아니라 ‘스스로 당당하게 홀로 선 나무’가 아닌가. 왕따나무보다는 차라리 ‘저 홀로 나무’가 더 멋진 말인 것 같다.
눈길 마음길 사로잡은 모과나무를 찾았으니 이제 별빛이 찾아오는 밤을 기다릴 일만 남았다.
기상청 예보와 레이더 영상을 체크하고 수시로 아시아 전체의 위성영상을 보며 기류와 구름의 이동을 예측해 보는 것이다.
하지만 예보도 틀릴 확률이 높고 레이더나 위성영상도 정밀한 것은 아니니 마당에 나가 밤하늘을 올려다보다 나무 아래로 달려가 기다려보는 수밖에 없다.
덕분에 모과나무를 스쳐가는 구름을 보았다.
20초 동안 흘러가는 하얀 구름의 길과 노란 모과 위의 푸른 하늘에 빛나는 별들을 찍었다.
카메라 배터리와 렌즈에 핫팩을 붙인 채 밤의 산골짜기에서 23장의 사진을 찍으며 구름이 지나가고 또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때로는 구름 한 점 없는 순간도 없지 않았으나 오히려 모과나무를 스쳐 지나는 구름이 별빛들을 더 선명하게 보여 주었다. 문제는 빛 공해였지만 오히려 도움이 되기도 했다.
백운산 섬진강 너머 하동 읍내와 화개면의 불빛들이 밤의 구름을 더 희게 보여 주고 검푸른 하늘빛을 좀더 밝고 푸르게 보여 주었다.
꼴뚜기와 모과처럼 못났다고 다 못난 것은 아니다.
잘났다고 계속 잘난 것도 아니고, 나쁜 놈이라고 계속 나쁜 놈도 아니고, 빛 공해라고 다 탓할 것만은 아니다.
새옹지마의 날들은 ‘못난 나무가 선산을 지키게 하는 법’이다.
모과나무 한 그루가 지구의 한 골짜기를 그 향기로 다 물들이고도 남았다.
제아무리 추워도 흰 구름과 별들에게서 솔솔 모과향기가 풍겨오는 겨울밤이었다.
![산수유 붉은 열매들 위로 함박눈이 내렸다. 마치 다른 세상을 보는 듯하다.](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san.chosun.com%2Fsite%2Fdata%2Fimg_dir%2F2018%2F02%2F02%2F2018020201798_4.jpg)
지난 1년을 돌이켜보니 이전과 이후가 엄청나게 달라졌다.
무얼 먹어도 체하지 않고, 잠을 자도 가위 눌리지 않았다.
전국의 거리거리에서 빛나던 지상 최고의 별빛들을 본 뒤부터 저 하늘의 별들, 너무 멀어 비현실적이던 별빛들도 전혀 낯설지 않아졌다.
1987년 이후 너무나 반갑고 고마운 얼굴들이었다.
나라를 나라답게 바꾸는 일이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숨통이 좀 트이니 어혈이 하나씩 풀리는 것 같다.
깊고도 오래된 적폐의 그늘도 최소한 상식의 빛을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무술년 새해를 맞으며 지상에서 빛나는 촛불 은하수를 떠올렸다.
문득 죽기 전에 한반도 종단열차를 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나무’ 사진을 찍느라 밤을 새우고 돌아오는 날이면 그야말로 녹초가 된다.
모처럼 13시간 정도 푹 잤다. 문득 자다 깨어 정신을 차렸다.
지난해는 나름대로 바쁘게 이리 뛰고 저리 뛰었지만 여전히 두서가 없었다.
‘별나무’ 아래 쪼그려 앉아 시창작 메모만 했으며, 되도록 술자리를 피하고 맑은 정신으로 집중하려 했으나 능력미달이었다. 그리하여 잠시 시를 잃고, 문단 술친구를 잃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돌이켜보면 지리산 입산 만 20년, 성적을 매긴다면 좀 후하게 B학점을 주고 싶으니 천만다행이 아닌가.
새해 아침부터는 일찍 일어나 아리수, 보리수, 호랭이 고양이 밥을 주고, 지화자와 좋다 2세 좋다몽의 개밥을 줘야겠다고 다짐했다.
매화꽃이 다 피기 전에 일단 그동안 밀린 원고를 다 마무리하면 그동안 내가 걸었던 3만 리를 바이크로 다시 가보고, 소홀했던 친구들을 만나 술도 좀 마셔야겠다.
산다는 것은 혼자 멀리 가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천천히 가는 것이다.
새해 아침에 고양이와 개밥을 주다가 문득 8년 전에 키우던 말똥가리 ‘천’이 보고 싶었다.
서산 천수만에서 사냥꾼들의 총에 맞아 날개 관통상을 입은 말똥가리 두 마리가 있었다.
서산의 ‘천수만지킴이’ 김신환 박사가 구조해 수술까지 했다.
그때 나는 어릴 때 키우던 참매 ‘벼랑이’를 생각하며 지리산의 창공을 자주 바라보던 날들이었다.
때마침 김 박사님이 전화를 했다.
“차마 안락사를 시킬 수 없으니 한번 키워보겠느냐”고.
수술을 했지만 날개뼈 관통상을 입어 끝끝내 야생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했다.
“내가 키워볼 테니 제발 안락사를 시키지 말라”며 곧바로 바이크를 타고 달려가 먼저 ‘수’를 데려 오고, 다음에 ‘천’을 데려왔다.
천수만에 살았으니 이름을 ‘수’와 ‘천’으로 지었다.
불행히도 ‘수’는 수술 후유증으로 두 달을 버티지 못하고 내 품에서 죽고 말았다.
그래도 ‘천’은 적응을 잘하더니 기적처럼 날개뼈가 제대로 아물었다.
한 달 만에 2~3m씩 날아오를 정도로 활발해지더니 열어놓은 지붕을 넘어 탈출할 정도가 되었다.
1년 정도 함께 살던 어느 겨울날 세 번째 탈출한 ‘천’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아침저녁으로 기다리며 참 많이 서운했지만 야생의 길로 돌아간 ‘천’에게 축하 인사를 보내야만 했다.
이미 국민학교 5학년 때부터 중3까지 참매 ‘벼랑이’를 키우다 보내는 이별연습을 해봤기에 마음 아프지만 슬프지는 않았다.
옛말에 ‘천리 길에는 눈썹도 짐이 된다’고 했다.
오래 걷다 보면 주머니 속의 동전이나 볼펜마저 자꾸 무거워지니 참으로 절묘한 속담이다.
그런가 하면 이와는 달리 ‘길동무가 좋으면 먼 길도 가깝다’는 말도 있다.
이 또한 절창이 아닐 수 없다.
요즘 들어 ‘길동무’라는 말이 새삼 가슴을 친다.
길벗이라는 좋은 우리말도 있고 도반道伴과 더불어 동지·동행·동반·반려자 등도 있다.
하지만 길벗은 한껏 멋을 내는 것 같고, 도반은 왠지 품격이 높아 보이고, 동지는 또 너무 어금니를 꽉 깨물게 하니, 정겹고도 눈물겨운 어감의 ‘길동무’라는 말에 온몸의 솜털이 쏠리는 것이다.
세상 휘휘 둘러보면 이 세상에 날개를 다친 것이 어찌 말똥가리뿐이겠는가.
나 또한 지리산 입산을 결심할 무렵에는 스스로 날개를 꺾는다고 생각했다.
지나고 보니 날개가 꺾여버린 것을 알았지만.
어찌됐든 김남주 시인의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가 절절한 한겨울, 매화나무 위 푸른 하늘을 보며 말똥가리 ‘천’을 불러봤다.
![섬진강 첫 매화 시](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san.chosun.com%2Fsite%2Fdata%2Fimg_dir%2F2018%2F02%2F02%2F2018020201798_5.jpg)
봄맞이꽃 변산바람꽃 천운으로 맞아
올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눈이 잘 내리지 않는 남도에도 한파와 더불어 함박눈이 내렸다.
하지만 제 아무리 춥고 눈이 내린다고 복수초가 포기하겠는가.
물론 너무 추운 바람에 복수초가 지난해보다 보름 정도 늦게 피기는 했다.
모처럼 환한 얼굴로 벗들과 복수초를 보러갔다.
나의 ‘야생화 사부’ 김인호 시인과 요즘 산사진 찍는 데 신명을 다하는 화개골 토박이 김종관, 아산의 야생화 사진가 정택근, 군산의 ‘쑥국’ 송숙씨, 아내 ‘고알피엠 여사’ 신희지 등과 설중 복수초를 보러갔다.
하지만 혹한의 칼바람이 몰아치는 눈밭에서 저 홀로 얼마나 힘들었으면 영상의 기온이 이틀째 이어지는데도 끝끝내 꽃잎을 마저 열지 못했다.
눈밭에 꽃대를 막 올린 복수초를 1시간30분 동안 무려 1,137장을 타임랩스로 찍으며 기다렸지만 꽃잎을 열다가 다시 입술을 오므렸다.
하루 이틀 더 기다려야 하는 아쉬움도 컸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나보다 힘든 것은 복수초가 아니겠는가.
조금만 더 기다리면 어느새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반드시 황금 술잔을 내밀며 한겨울 추위에 잔뜩 웅크린 우리에게 미리 봄기운을 심어줄 것이다.
설중화의 대표적인 꽃이 ‘얼음새꽃’인 복수초라면 또 그에 못지않게 미리 봄을 사는 꽃이 있으니 바로 변산바람꽃과 섬진강 첫 매화다.
물론 설중화를 찍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거의 천운에 가까운 일이다.
남도에는 일단 눈이 잘 오지도 않을뿐더러 최소 2cm 이상은 쌓여야 하고, 바로 그때를 맞춰 꽃이 피어야 하고, 그 눈이 녹기 전에 그곳에 도착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삼박자가 맞을 확률은 극히 낮다. 그렇기 때문에 더 간절한 꽃이 바로 설중화가 아닌가.
한겨울에 미리 봄을 사는 꽃, 설중화가 우리들의 안부를 묻고 또 묻는다.
첫댓글 시린 코 끝에 매화 향기 듬뿍 묻히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