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허비의 정의
선현의 자취가 있는 곳을 길이 후세에 알리거나 이를 계기로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비(碑). 유지비(遺址碑)·구기비(舊基碑).
유허비란
유허란 유지(遺址) · 유적(遺蹟) · 구기(舊基)와 같이 ‘남긴 터(자취)’ · ‘옛터’의 뜻으로, 여기에서는 선현들이 태어났거나 살았거나 임시 머물렀던 곳, 또는 순절(殉節)하거나 귀양살이 하였던 곳을 가리킨다.
고려시대까지는 유허비라는 명칭의 비는 보이지 않으나, 조선시대에는 유허비를 비롯하여 유지비(遺址碑) · 구기비(舊基碑)라는 명칭의 비가 적지 않게 조성된다. 경기도 개성에 ‘고려충신정몽주지려(高麗忠臣鄭夢周之閭)’라는 문구와 입비연대(1530년, 중종 25)만을 간단히 새긴 비는 유허비의 성격을 띤 초기의 예라고 하겠다.
충청남도 홍성군 · 논산시의 성삼문유허비, 경상북도 경주시의 김유신유허비, 최치원 독서당(讀書堂)유허비, 신라효자 손순(孫順)유허비, 제주시의 송시열 적려(謫廬)유허비와 서귀포시의 정온(鄭蘊)유허비 등은 선현들의 출생지 · 성장지 · 적거지와 관계하여 세운 비들이다. 또한, 부산의 정발전망유지비(鄭撥戰亡遺址碑), 전주의 오목대조선태조주필유지비(梧木臺朝鮮太祖駐蹕遺址碑) 등은 선현들이 사망하거나 잠시 머물렀던 곳에 세운 비들이다.
한편, 구기비의 예도 적지 않은데, 황해도 해주의 조선인조탄강구기비, 평양의 기자궁구기비, 함경남도 영흥군의 조선태조탄생구기비, 함흥군의 양성(兩聖)탄강구기비와 조선태조독서당구기비, 안변군의 신의왕후(神懿王后)탄강구기비, 황해도 곡산군의 신덕왕후사제구기비(神德王后私第舊基碑) 등은 왕이나 왕후의 탄생지 등에 관련하여 세운 비이다. 특히, 구기비라는 용어는 왕족들에게만 한정되어 사용되었던 점이 주목된다.
이와 같이, 유허비 · 유지비 · 구기비는 입비 장소가 중시된다는 점에서 지연적 성격이 강하지만, 이를 통하여 선현의 뜻을 기린다는 점에서 송덕의 성격도 강하다. 따라서, 공덕비(功德碑) · 의열비(義烈碑) · 정려비(旌閭碑) 등과 내용상 크게 구별되지 않으며, 넓은 의미에서는 사실의 내력을 적어 길이 후세에 남긴다는 뜻에서 기적비(紀績碑 · 紀蹟碑) 또는 사적비(事蹟碑)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하겠다.
충숙공(忠肅公) 이예(李藝)는 조선 전기의 외교관으로 40여 회에 걸쳐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돼 667명의 조선포로를 쇄환(刷還)하고 삼포조약의 체결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한편 조선과 일본의 문화교류에 크게 기여했다.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철종 9년(1872) 비명(碑銘)을 받았다. 상말응정 서당골(현재 유허비의 동북쪽)에 구비(舊碑)가 있었으나 오랜 세월로 비신(碑身)이 많이 훼손돼 없어졌다고 한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도로변에 새 유허비를 세우는 것이 좋겠다는 학성이씨(鶴城李氏) 문중의 의견에 따라 1967년 유허비와 비각을 세웠다
평소에는 키가 잠겨 있으며, 관리처의 연락처가 있으면 우리 일족이나 관심있는 분들의 방문 시 문의도 할 수 있으면 더 졸을듯 하다
이예공원 팻말
유허비명 병서 (초역:고 이수건 영남대교수, 개역: 이명훈 고려대 명예교수)
1. (충숙공의 업적을 알게 됨) 나는 어려서부터 고향 어른들을 따라다니며 울산의 학파 이공이 어진 분이라 함을 많이 들었으나, 워낙 거리가 멀어 귀동냥만으로 상세한 내용을 알기는 어려웠다. 신미년에 경주부윤으로 부임하여 보니 울산은 경주에서 겨우 80리 거리의 이웃 고을인지라, 드디어 지역의 선비와 벗들을 통해 공의 사적을 상세히 전해 듣게 되었다. 공의 실기가 간행되고 이에 맞추어 왕조실록과 여타 자료의 목록도 완비될 것이라 하니 이제야말로 공의 사적이 완전히 밝혀질 터이라 유감이 없도다.
2. (유허비문의 撰을 수락함) 하루는 공의 후손인 상사(上舍) 장찬 군이 와서 유허비문을 청하는데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도연명이 누웠던 취석(醉石)은 한 조각의 돌에 지나지 않음에도 우리 주자(朱子)께서 도연명을 사모한 나머지 여산(廬山)을 찾아가 그 돌 위에 작은 정자를 지어 이를 보호하였거늘, 하물며 학파공과 같은 충훈(忠勳)의 인물이 평소 머물던 유허라 하면, 후세 사람으로서 어찌 거기에 비석을 세우고 드러내어 알리지 않으리오. 이름난 재상과 큰선비들이 공의 충성과 절개를 칭송함이 이전부터 끊이지 않았으니 어째 나 같은 사람의 군더더기 말을 기다릴 까닭이 있으리오, 그러나 공의 충훈 중 가장 중요한 내용을 강조하여 비석에 새김으로써 후세에 말응정 아래를 왕래하는 사람들이 손을 들어 가리키며 공을 칭송하고 사모하게 될 것을 생각하면, 끝내 한마디 말씀을 사양하기는 어려웠다.
3. (위성공-영무자의 고사) 옛날 위(衛)나라 성공(成公)이 진(晉)나라 문왕(文王)에 잡혀서 옥에 갇혔다가 서울로 돌아오니 신하들이 감히 그를 가까이하지 않았는데, 오직 영무자(子)는 대대로 재상을 지낸 귀족 문벌이면서도 가만히 음식을 대접하고 자루에 담아온 죽으로 공양하며 온갖 가난과 고생을 함께 겪음으로써 그 이름이 공자의 논어에 실려 칭송되고 있다.
4. (명영종-원빈의 고사)명나라 황제 영종(英宗)이 토목의 변(土木之變) 와중에 야선(也先)에게 포로로 잡히니 그를 따라 북으로 간 신하가 불과 몇 사람이었는데, 이때 원빈(袁彬)은 영종을 따라가 호위하고 돌보는 데에 신명을 바침으로써 그 충성과 수난의 발자취가 명나라 역사에 크고 뚜렷하게 전해진다.
5. (이은-충숙공 관계의 특수성) 무릇 성공(成公)은 제후국의 세습군주였고 영종(英宗)은 천하를 다스리던 임금이었으니, 그들의 신하된 자로서 목숨을 걸고 그들을 지키고자 함은 응당 있을법한 일이다. 이에 반해 이은(李殷)은 단지 한때의 지방관으로서 3년 임기가 끝나면 울산을 떠나 학파공과는 서로 다른 길을 걸을 관계였으니, 젊은 나이의 일개 기관(記官)이 설혹 뒤처져서 군수를 따라가지 않는다 하여 불가한 일이 아니며 기회를 보아 혼자 도망한다 하여 크게 괴이한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6. (군수 구출의 과정) 그럼에도 공은 왜인들이 백방으로 회유하고 협박하여도 끝 내 절의를 굽히지 않고 군수를 모시기를 울산 관아에서와 꼭 같이 하여, 나무하러 언덕에 오르면 공경히 절하며 쉬게 하고는 문밖에 이르러 자신의 나뭇단을 둘로 나누어 각각 지고 들어오는 등 수년간 매일을 하루처럼 하였다. 마침내 왜인들이 감복하여 군수와 기관을 함께 고국으로 돌려보냈다. 그 후 열다섯 차례나 사명을 받들며 임금의 이름을 한 번도 욕되게 하지 않았으며, 명성은 명나라와 일본에 떨치고 공적이 역사서에 기록되어 전한다.
7. (충숙공의 칭송 및 인적사항)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도록 이러한 절개가 어찌 또 있으리오. 선현의 가르침을 빛내고 뒷사람의 길을 밝힌다는, 예로부터 이른바 광전계후(光前啓後)는 바로 공을 두고 이른 말이로다. 공의 남다른 충성과 뛰어 난 공훈은 모두 근본이 있으며, 어쩌다 개연히 한때의 절개를 지킴에 비할 수 없도다. 참으로 그러하지 않은가! 공의 휘(諱)는 예(藝)이고 자(字)는 중유(仲游)이며 관향은 학성(鶴城)이다. 이어서 명(銘)하노니,
8.(銘: 운문) 벼슬이 낮아도 의리는 높고
왜인 풍속이 달라도 그들에 끼친 감동은 크니
세상에 그 짝을 찾기 어렵네.
임금의 신하이면서 명 황제의 상을 받고
조정에서 임금을 모시면서 사명(使命)으로 국경을 넘으니
두 가지 어려운 일을 한 몸으로 이루었네.
아름답고 단단한 돌로 비를 세우니.
세찬 비바람에 갈라지지 않고 영원히 전해져서
후세 사람에 길을 밝히게 되리.
9. (時期와 撰者) 임신년(1872년) 음4월 가선대부 경주부윤 진성 이만운 지음
遺墟碑文에 들어있던 子孫錄의 내용
1. 위에서 본 비문의 원문과 국역은 자손록을 제외한 것으로서, 원문 750자 중 자 손록 114자를 제외한 636자임.
2. 자손록 114자는 모두 제7문단(충숙공의 칭송 및 인적사항)에 들어있었음.
3. 제7문단의 "公之殊忠勳"바로 앞에 들어있던 자손록 114자의 원문은 다음과 같음.
개론 | 源遠流長根深末茂(8字) |
수사공 | 至子而有節度公之三討馬夷承朝命而葬魂故山(21字) |
육의사 | 至曾玄而有六義士之一門幷擧因士論而幷擬於腰享(22字) |
대봉공 | 又有一事可特書者楊大峯後髮時公見而異之勉其學問而以孫女妻之楊公果位登台輔為世名儒其鑑識之明豈恒人所及哉可謂出尋常萬萬矣以此觀之(63字) |
4. 제7문단의 “공의 남다른 충성과 뛰어난 공훈” 바로 앞에 들어있던 자손록 114자의 국역은 다음과 같음.
개론 | 샘이 깊으면 흐름이 길고 뿌리가 깊으면 가지가 무성하다. |
수사공 | 아들 대에 이르러 절도공(節度公)이 있어 대마도를 세 번 토벌하고 조정의 명에 따라 고산(故山)에 장례되었으며, |
육의사 | 증손-현손 대에 이르러 여섯 의사(義士)가 있어 임란에 함께 거병하고 선비들의 공론에 의해 함께 사당에 모셔졌다. |
대봉공 | 또 하나 특기하자면, 양대봉(楊大鳳)의 어린 시절에 공이 그를 보고 귀히 여겨 그 학문을 후원하고 손녀의 사위로 삼았는데, 양공은 과연 훗날에 재상의 벼슬에 오르고 학문으로 명성을 떨쳤다. 공의 사람보는 눈 밝음이 어찌 범인이 미칠 수 있는 경지라 하겠는가. 과연 특별하고도 특별한 감식안이라 하겠다. 이로써 볼 때 |
5. 자손록 114자는 개론 8자, 수사공 21자, 육의사 22자, 대봉공 63자로 구성되며, 현령공은 아예 언급되지 않았음. 석계서원과 용연서원에 있는 비 뿐 아니라 무신보· 경인보를 포함한 문중의 모든 족보에 충숙공이 두 아드님을 두신 것으로 기록되었는데 유허비문에서는 한 아드님만 기록되었음. 대봉공을 손서로 삼았다고 적었으니, 대봉공이 현령공 아닌 수사공의 사위로 오인될 수도 있는 상황임. "공의 남다른 충성과 뛰어난 공훈은 모두 근본이 있으며, 어쩌다 개연히 한때의 절개를 지킴에 비할 수 없도다"라는 결론은 굳이 대봉공을 언급하지 않고도 충분히 도출 가능함. 그러나 “이로 써 볼 때"라는 말과 함께 대봉공에 대한 언급이 길게 기록되어 있음.
첫댓글 중리 문중회에서 단체 아련을 위해 24.5.26일 딘체 탐방 예정입니다 내부 비석을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