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어주는 여자
강명량
남편은 잠자리에 들기 전 으레 내게 책을 내밀며 읽어 달라고 한다. 몇 장을 채 넘기기도 전에 옆에서 코고는 소리가 나는 걸 보면 책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책을 읽어주는 내 목소리를 자장가 삼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한참이나 그렇게 소리 내어 책을 읽어준다. 그런 걸 보면 내 자신도 꼭 책이 좋아서라기보다 어쩌면 책을 읽어주는 그 자체를 즐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생전에 우리 아버지는 독서광이셨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늘 책을 소리 내어 읽고 계셨다. 당신 무릎 밑에서 뱅뱅 도는 어린 딸이 심심해 할까봐 그러셨을까. 그래서 나는 동화책을 접할 나이에 아버지가 들려주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나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같은 책을 듣고 자랐다. 글을 깨치고 나서는 아예 아버지의 서가에서 내 멋대로 책을 꺼내다 읽었다. 셰익스피어 전집을 독파했던 것도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이었다. 아버지는 너무 어이가 없으셨는지 "너 이게 뭔 소리인 줄 알고 읽는 거냐? 정말 재미있어?" 하시며 웃으셨다. 내가 그 나이에 셰익스피어를 이해했으면 얼마나 이해했겠냐만, '한여름 밤의 꿈'이나 '말괄량이 길들이기' 등 아주 흥미진진하게 읽은 작품들도 더러 있었던 건 사실이다. 아버지는 내가 책 제목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그러셨는지 책꺼풀을 뒤집어 씌워 놓기도 하시고, 19금에 해당되는 책은 내 손이 미치지 못하는 높은 곳에 꽂아 두기도 하셨지만 그렇다고 내 독서열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어린이를 위한 100권짜리 세계 명작 전집을 보게 되었다. '소공녀', '소공자' 등의 동화뿐 아니라 위인전이며 내가 원본으로 읽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요약해 놓은 이야기도 들어 있었다. 친구는 나와 전혀 다른 책을 읽고 있었다는 게 내겐 엄청난 충격이었다. 게다가 내가 그런 책이 있는 줄도 몰랐다는 게 왠지 부끄럽고 자존심이 상해 그날부터 어린이 명작 전집을 빌려다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건너 뛴 동심의 세계가 더는 나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내가 어린 시절을 아이답지 않게 웃자란 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었는지 우리 아이들에게는 일찌감치 '세계 어린이 명작 전집' 100권을 사주었다. 그러고는 아직 글을 읽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매일같이 잠들기 전에 책을 읽어주었다. 아이들은 저마다 좋아하는 책을 뽑아와서는 내 곁에 누워 빨리 읽어 달라고 졸라대었다. 내가 구연동화 하듯이 책을 읽어주면 아이들이 까르르 웃어대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내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아닌가 싶다. 그렇지만 아이들이 글을 읽을 줄 알게 되었는데도 여전히 책을 읽어 달라며, 도무지 스스로 읽으려 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귀로 듣는 데 너무 익숙해져 저 혼자 읽는 것으로는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만 생각했다. 듣기 능력이 읽기 능력보다 먼저 발달하며 중학교 2학년 무렵이 되어야 비로소 듣기 수준과 읽기 수준이 같아진다는 것을 그 때는 알지 못했다. 내가 아이들을 위한다고 책을 읽어 준 것이 오히려 아이들의 독서에 방해가 된 것만 같아 무척 고민스러웠다. 그런데 큰아들이 대학생이 되자 인문 고전을 체계적으로 읽기 시작하는 걸 보고 저으기 안심되었다. 공부와 담을 쌓고 사는 줄 알았던 둘째도 곧잘 서점에 들러 책을 사고 있다. 좀 늦되긴 해도 어려서 밤마다 엄마가 책을 읽어준 효과가 나타나는 것 같아 뿌듯하다. 요즘에야 알게 되었지만 엄마가 매일 15분이상 책을 읽어주면 아이의 어휘력, 기억력, 집중력, 감성까지 성장하는 놀라운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영유아는 물론, 청소년들에게도 책 읽어주는 효과는 상상 그 이상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그 때 내가 너무 일찍 책 읽어주기를 그만둔 것이 지금은 후회가 된다. 다른 엄마들 얘기를 듣지 말고 계속 읽어주었더라면 좋았을걸 그랬다.
애들이 내 곁을 떠나가자 자연스럽게 책을 읽어주는 대상이 남편에게로 옮아갔나 보다. 남편도 젊어서 애들에게 아내를 양보한 보상을 받고 싶었는지 책을 읽어주겠다니까 좋아하였다. 아마 그보다는 책을 읽어주면 마음이 편안해져 잠이 잘 오기 때문이었으리라. 남편에게는 못된 술버릇이 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 잠도 안 자고 계집애들처럼 마냥 수다를 떨며 곁에 있는 사람을 귀찮게 군다. 그럴 때 책을 읽어주면 백발백중, 효과 만점이다. 어떨 때는 자기를 재울까봐 겁을 내며 책을 빼앗으려고 해서 한바탕 소동을 벌이기도 한다. "그런 식으로 귀동냥만 하다 보니 몇십 년 책을 읽어 주어도 진도가 나가지 않지." 하며 내가 가끔씩 핀잔을 주는데도 남편은 남들 앞에서 용감하게 들은 풍월을 읊어대어 내 가슴을 조마조마하게 만든다. 콩나물 키울 때, 시루 밑으로 물이 다 빠져 버린 듯해도 콩나물이 쑥쑥 자라는 것처럼 그래도 세월이 지나니까 잠결에 들어도 뭔가 남는 게 있는지 뜻밖에 읽은 책 내용을 제대로 인용하며 조리있게 말을 하는 걸 보면 감격스럽다.
歲歲年年 花相似, 年年歲歲 人不同.
해 가고 또 가도 꽃은 비슷하지만, 해 가고 또 가면 사람들은 같지 않다네.
얼마 전부터 남편의 태도가 좀 수상하다. 내가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고 있노라면 슬그머니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뭘 하는지 밤 늦게까지 방바닥에 엎드려 있다. 한번은 불쑥 들어가 보았더니 빨간 색연필로 줄을 그어 가며 책을 읽고 있다가 놀라서 후다닥 감추기 바빴다. 혼자서는 읽지도 못하는 책을 왜 맨날 사들이냐고 내가 하도 잔소리를 해대니까 이제는 내게 읽어 달라는 대신에 새로 산 책을 감춰 놓고 몰래 읽고 있는 모양이다. 로또를 사느니 차라리 책 한 권이라도 사는 게 백배 낫지 싶으면서도 툭하면 서점으로 달려가는 남편의 책 수집증은 정도가 넘쳐 거의 중독 상태다. 이것도 내가 책을 너무 오래 읽어준 부작용이니 자업자득이라 하겠다. 쓸 데 없는 짓을 한다고 입으로는 구박을 하고 있지만, 나도 산더미처럼 쌓아 놓은 책들을 이것저것 골라 읽는 재미를 톡톡히 보고 있으니 솔직히 그다지 싫지 만은 않다. 요즘도 나는 들어주는 이 없어도 혼자 소리를 내어 책을 읽곤 한다. 그렇게 책을 읽고 있으면 집중도 잘 되지만 무엇보다 가슴이 따뜻해지고 외롭지 않아서 좋다. 그 시간 동안만큼은 낭랑한 목소리로 책을 읽으시다가 한번씩 사랑스럽게 나를 바라보시던 아버지 그리고 내게 매달려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이야기를 들어주던 우리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책 읽어주는 여자. 친구들은 남편에게 책을 읽어주는 나를 놀린다고 그렇게들 부르곤 하지만, 그들이 책 읽어주는 즐거움을 몰라서 하는 소리일 거다. 지금 나는 손주들이 생기면 그 애들을 데리고 책 읽어주기 놀이를 계속 해야겠다는 행복한 꿈을 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