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1970년 늦은 11월에 태어났다...
연세대 국문과를 졸업한 뒤 1993년 <문학과 사회>에 시를 발표하고, 이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닻>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검은 사슴>, <그대의 차가운 손>, <채식주의자>, <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사건>, 소설집 <여수의 사랑>, <내 여자의 열매>, <노랑무늬영원>,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등이 있다...
동리문학상, 이상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한국소설문학상을 수상했다...(앞장)
채머리를 떠는 노인의 얼굴을 너는 돌아본다...
손녀따님인가요, 묻지 않고 참을성 있게 그의 말을 기다린다...
용서하지 않을 거다...
이승에서 가장 끔찍한 것을 본 사람처럼 꿈적거리는 노인의 두 눈을 너는 마주 본다...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 거다. 나 자신까지도...(45)
당신들을 잃은 뒤, 우리들의 시간은 저녁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집과 거리가 저녁이 되었습니다...
더이상 어두워지지도, 다시 밝아지지도 않는 저녁 속에서 우리들은 밥을 먹고, 걸음을 걷고 잠을 잡니다...(79)
훗날의 온전한 개정판을 약속하며 그는 서문에 썼다...
군중의 도덕성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군중을 이루는 개개인의 도덕적 수준과 별개로 특정한 윤리적 파동이 현장에서 발생된다는 것이다...
어떤 군중은 상점의 약탈과 살인, 강간을 서슴지 않으며, 어떤 군중은 개인이었다면 다다르기 어려웠을 이타성과 용기를 획득한다...
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숭고했다기보다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숭고함이 군중의 힘을 빌려 발현된 것이며, 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야만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야만이 군중의 힘을 빌려 극대화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 다음 문단은 검열 때문에 온전히 책에 실리지 못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어서 먹선으로 지워진 넉줄의 문장들을 그녀는 기억했다...(95)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99)
당신이 죽은 뒤 장례를 치르지 못해...
당신을 보았던 내 눈이 사원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목소리를 들었던 내 귀가 사원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숨을 들이마신 허파가 사원이 되었습니다...(100)
봄에 피는 꽃들, 버드나무들, 빗방울과 눈송이들이 사원이 되었습니다...
날마다 찾아오는 아침,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이 사원이 되었습니다...(101)
소년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그 순간이다...
순식간에 소년은 무대로 뛰어올라가 노파의 굽은 등허리에 바싹 몸을 붙인다...
업힌 아이처럼, 혼령처럼 살금살금 뒤를 따른다...
……동호야...
그녀는 아랫입술 안쪽을 악문다...
노파가 걸음을 멈춘다...
업힌 아이처럼 바싹 붙어 걷던 소년이 객석을 향해 몸을 돌린다...
그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 그녀는 눈을 감는다...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네가 방수 모포에 싸여 청소차에 실려간 뒤에...
용서할 수 없는 물줄기가 번쩍이며 분수대에서 뿜어져나온 뒤에...
어디서나 사원의 불빛이 타고 있었다...
봄에 피는 꽃들 속에, 눈송이들 속에,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 속에, 다 쓴 음료수 병에 네가 꽂은 양초 불꽃들이...
뜨거운 고름 같은 눈물을 닦지 않은 채 그녀는 눈을 부릅뜬다...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이는 소년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한다...(102)
김진수는 우리 중에서도 특별히 변칙적인 고문을 더 당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 외모가 여성적이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아니요, 당시에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십년쯤 지난 뒤에 들은 이야깁니다...
성기를 꺼내 탁자에 올려놓게 하고, 나무 자로 내려치겠다며 위협했다고 했습니다...
하체를 발가벗기고 영창 앞 잔디밭으로 데려가, 팔을 뒤로 묶고 엎드려 있게 했다고 했습니다...
굵은 개미들이 세시간 동안 김진수의 사타구니를 물었다고 했습니다...
석방된 뒤 거의 매일 밤 벌레와 관련된 악몽을 꾸었다고 들었습니다...(109)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군인들이 쏘아 죽인 사람들의 시신을 리어커에 실어 앞세우고 수십만의 사람들과 함께 총구 앞에 섰던 날, 느닷없이 발견한 내 안의 깨끗한 무엇에 나는 놀랐습니다...
더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
그 혈관에 흐르며 고동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
감히 내가 그것을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114)
다음의 일은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더 기억하라고 나에게 말할 권한은 이제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선생도 마찬가집니다...
아니요, 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계단을 올라온 군인들이 어둠속에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 조의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습니다...
방아쇠를 당기면 사람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쏠 수 없는 총을 나눠 가진 아이들이었던 겁니다...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날 군인들이 지급받은 탄환이 모두 팔십만발이었다는 것을...
그때 그 도시의 인구가 사십만이었습니다...(117)
김진수와 나는 여전히 식판 하나를 받아 한줌의 식사를 나눠 먹었습니다...
몇시간 전에 조사실에서 겪은 것들을 뒤로하고, 밥알 하나, 김치 한쪽을 두고 짐승처럼 싸우지 않기 위해 인내하며 묵묵히 숟가락질을 했습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식판을 내려놓고 소리쳤습니다...
참을 만큼 참았어...
그렇게 네가 다 처먹으면 난 어쩌란 말이야...
으르렁거리는 그들 사이로 몸을 밀어넣으며 한 남자애가 더듬더듬 말했습니다...
그, 그러지 마요...
좀처럼 입을 떼지 않는, 늘 주눅 든 듯 조용한 아이였기에 나는 놀랐습니다...
우, 우리는……주, 죽을 가, 각오를 했었잖아요...
김진수의 공허한 눈이 내 눈과 마주친 것은 그때였습니다...
순간 깨달았습니다...
그들이 원한 게 무엇이었는지...
우리를 굶기고 고문하면서 그들이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너희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른 게 얼마나 웃기는 일이었는지, 우리가 깨닫게 해주겠다...
냄새를 풍기는 더러운 몸, 상처가 문드러지는 몸, 굶주린 짐승같은 몸뚱어리들이 너희들이라는 걸, 우리가 증명해주겠다...
그 남자애 이름은 영재였습니다...(119)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든 내가 겪은 일들을 이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묽은 진물과 진득한 고름, 냄새나는 침, 피, 눈물과 콧물, 속옷에 지린 오줌과 똥, 그것들이 내가 가진 전부였습니다...
아니, 그것들 자체가 바로 나였습니다...
그것들 속에서 썩어가는 살덩어리가 나였습니다...(120)
각진 각목이 어깻죽지와 등허리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자신의 곧은 물성대로 활짝 펴지며 내 몸을 비틀 때, 제발, 그만, 잘못했습니다...
헐떡이는 일초와 일초 사이, 손톰과 발톱 속으로 그들이 송곳을 꽂아넣을 때, 숨, 들이쉬고, 뱉고, 제발, 그만, 잘못했습니다...
신음, 일초와 일초 사이, 다시 비명...
몸이 사라져주기를, 지금 제발, 지금 내 몸이 지워지기를...(121)
그러니까 형, 영혼이란 건 아무것도 아닌 건가...
아니, 그건 무슨 유리 같은 건가...
유리는 투명하고 깨지기 쉽지...
그게 유리의 본성이지...
그러니까 유리로 만든 물건은 조심해서 다뤄야 하는 거지...
금이 가거나 부서지면 못쓰게 되니까, 버려야 하니까...
예전에 우린 깨지지 않은 유리를 갖고 있었지...
그게 유린지 뭔지 확인도 안해본, 단단하고 투명한 진짜였지...
그러니까 우린, 부서지면서 우리가 영혼을 갖고 있었단 걸 보여준 거지...
진짜 유리로 만들어진 인간이었단 걸 증명한 거야...
살아 있는 김진수와의 만남은 그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130)
이제는 내가 선생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134)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135)
기억해달라고 윤은 말했다...
직면하고 증언해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삼십 센티 나무 자가 자궁 끝까지 수십번 후벼들어왔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소총 개머리판이 자궁 입구를 찢고 짓이겼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하혈이 멈추지 않아 쇼크를 일으킨 당신을 그들이 통합병원에 데려가 수혈받게 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이년 동안 그 하혈이 계속되었다고, 혈천이 나팔관을 막아 영구히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타인과, 측히 남자와 접촉하는 일을 견딜 수 없게 됐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짧은 입맞춤,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 여름에 팔과 종아리를 내놓아 누군가의 시선이 머무는 일조차 고통스러웠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몸을 증오하게 되었다고, 모든 따뜻함과 지극한 사랑을 스스로 부숴뜨리며 도망쳤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더 추운 곳, 더 안전한 곳으로, 오직 살아남기 위하여...(166)
대부분의 방송은 여대생들이 했다...
그녀들이 완전히 지쳤을 때, 목이 갈라져 더이상 소리를 낼 수 없다고 말했을 때 당신은 사십여분 동안 메가폰을 잡았다...
불을 켜주세요, 여러분...
당신은 그렇게 말했다...
캄캄한 창문들을 향해, 누구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골목을 향해 말했다...
제발 불이라도 켜주세요, 여러분...
군이 그 트럭을 새벽까지 내버려둔 것은 병력의 이동 경로를 노출하지 않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당신은 나중에 알았다...
동트기 직전에 체포된 뒤 여자들은 광산경찰서 유치장으로, 운전을 맡았던 청년은 상무대로 끌려갔다...
총기를 소지하고 있었으므로 당신은 여대생들과 따로 수감되었고 보안부대로 이송되었다...
그곳에서 당신은 이름 대신 빨갱이년으로 불렸다...
과거 여공이었고 노조 활동을 했기 때문이었다...
사년 동안 지방 도시의 양장점에서 숨어지내며 간첩 지령을 받아왔다는 각본을 완성하기 위해 그들은 날마다 당신을 조사실 탁자에 눕혔다...
더러운 빨갱이년...
아무리 소리 질러봐라, 누가 달려오나...
조사실의 조명은 가늘게 떨리는 형광등이었다...
일상적인 그 환한 조명 아래, 당신이 하혈 끝에 의식을 잃을 때까지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169)
태극기로, 고작 그걸로 감싸보려던 거야...
우린 도륙된 고깃덩어리들이 아니어야 하니까...
필사적으로 묵념을 하고 애국가를 부른 거야...(173)
어쩌끄나, 내가 서른살에 막둥이 너를 낳았는디...
나는 타고나기를 왼쪽 젖꼭지 모양이 이상해서, 느이 형들은 잘 나오는 오른쪽 젖만 빨았는디...
내 왼쪽 젖은 퉁퉁 붓기만 하고 애기들이 빨지 않아서, 보드라운 오른쪽 젖하고 딴판으로 단단해져버렸는디...
그렇게 흉한 짝젖으로 여러해를 살었는디...
허지만 너는 달랐는디...
왼쪽 젖을 물리면 물리는 대로, 이상하게 생긴 젖꼭지를 순하디순하게 빨아주었는디...
그래서 두 젖이 똑같이 보드랍게 늘어졌는디...(191)
네 중학교 학생증에서 사진만 오려갖고 지갑 속에 넣어놨다이...
낮이나 밤이나 텅 빈 집이지마는 아무도 찾아올 일 없는 새벽에, 하얀 습자지로 여러번 접어 싸놓은 네 얼굴을 펼쳐본다이...
아무도 엿들을 사람이 없지마는 가만가만 부른다이...
……동호야...(192)
망월동 구묘지에서 지금의 국립 신묘역으로 이장을 하고 나서부터 어머니가 이상해졌다고 그의 형은 말했다...
날을 받아 유족들이 다 같이 이장을 했는데, 관들을 열어보니 처참했던 모습 그대로인 겁니다...
유골에 비닐이 친친 둘러져 있고, 피묻은 태극기가 덜이고……동호는 그래도 처음에 가족이 수습했기 때문에 유골이 얌전했습니다...
우린 무명천을 한마 끊어가서, 누구에게도 맡기기 싫어 뼈 한마디 한마디를 직접 닦았어요...
어머니가 머리 부분을 맡으면 충격이 크실까봐, 내가 얼른 집어서 이빨 하나하나까지 정성껏 닦아줬습니다...
그랬어도 그 일을 이기기가 힘드셨던가봅니다...
그때 내가 우겨서 집에 계시게 했어야 했는데...(214)
- 한강의 <소년이 온다> 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