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안씨 11세 종부시직장 안희직(安希直,1556~1618) 선조님의 묘갈명(역문)
조봉대부 종부시 직장 죽산 안희직의 묘(朝奉大夫宗簿寺直長竹山安希直之墓)
배위 공인 광산김씨 합조(配恭人光山金氏 合兆)
府君。姓安。諱希直。字汝敬。號鶴巖。籍竹山。文惠公元衡後裔也。本順興之安。而文惠公受封竹城君。因貫竹山。而文惠公卽郞文成公晦軒先生之曾孫也。有諱魯生。號春谷。麗朝文科。歷門下舍人。與李牧隱穡李陶隱崇仁(적)遙觴永是。府君之八世祖也。曾祖諱忠達。字孝彦。號荷谷。李朝中宗甲午文科。文章孝行。名於當世。祖諱士朂。字朂哉。考諱仁厚。字伯達。官宗簿寺主簿。妣宜人利川徐氏。進士進宗女。擧四男。長希正。次府君。三希閔。四希芬。府君生於李朝明宗丙辰。官朝奉大夫宗簿寺直長。移住三角山下。構揖翠亭。與鄕士友。講學不倦。山水自娛。不滔。滔於世波。以自修爲業事。載寰輿勝覽。光海戊午卒。墓羅州南平水源里漁翁嶝艮坐。配恭人光山金大受女。與府君同年生。己未卒。墓合兆。生二男。長諱守一。出后伯父。次諱惟一。生四男一女。長世英。次世賢。三世平。四世爀。女適裵繪大邱人。餘不殫錄。世變滄桑。禍反先墓。舊墓在於瑞坊梧峙南一里壬座。而此地一圓編入。於全南大學校庭內。故不得已移葬。時勢之固然也。數歲求山。幸得此地。而奉安。山勢蜿蟺。西이控揖環帝。其中奧衍宏。敝自成勢。行人指點。曰君子可□之地。比實祖先之靈黙佑於冥冥之中占得吉地也。哉心自慰。而神可安。比可謂轉禍爲福者也。今年秋。移葬後。門議齊發。謹衡隧遁。將欲竪碑。命不肖爲文。自□僭越。不敢固辭。略摭其實記之。因而爲銘。曰。詩書自娛。講學不倦。自修爲功。不染世波。士友稱慕。永世●●。種德餘陰。雲仍乃昌。
檀紀四千三百十一年戊午三月 日。十一代孫鍾漢謹撰。幸州奇靈命謹書。
(번역문)
부군(府君)은 성이 안씨(安氏), 휘는 희직(希直), 자는 여경(汝敬), 호는 학암(鶴巖)이고, 본관은 죽산(竹山)으로, 문혜공(文惠公) 원형(元衡)의 후예이다. 본래 순흥안씨로 문혜공이 죽성군에 봉함을 받아 죽산을 본관으로 하였으나, 문혜공은 곧 문성공 회헌 선생의 증손이다.
휘 노생(魯生)은 호가 춘곡(春谷)으로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여 문하사인(門下舍人)을 역임했으며, 목은(牧隱) 이색(李穡),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과 함께 종유했고, 부군의 8세조가 된다. 증조는 휘가 충달(忠達)이고 자는 효언(孝彦), 호는 하곡(荷谷)으로 조선 중종 갑오년(1534)에 문과에 급제하여 문장(文章)과 효행(孝行)으로 그 시대에 이름을 남겼다. 조부는 휘가 사욱(士朂)으로 자는 욱재(朂哉)이고, 아버지는 휘가 인후(仁厚)로 자는 백달(伯達)이고 관직은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를 지냈다.
어머니 의인(宜人) 이천서씨(利川徐氏)는 진사 서진종(徐進宗)의 따님으로, 슬하에 4형제를 두었다. 장남은 희정(希正), 차남이 부군(府君)이고, 삼남은 희민(希閔), 사남은 희분(希芬)이다.
부군은 조선 명종 병진년(1556)에 태어나서 조봉대부(朝奉大夫, 종4품) 종부시 직장(宗簿寺直長)의 관직을 역임하고 삼각산(三角山, 광주광역시 북구 오치동 삼각산) 아래로 이주한 후 읍취정(揖翠亭)을 지어 향사우(鄕士友)들과 끊임없이 학문을 닦고 연구했으며, 산수(山水)를 좋아하고 세파(世波)에 흔들림 없이 자기 수양에 힘썼다는 내용이『환여승람(寰輿勝覽)』에 기록되어 있다.
광해 무오년(1618)에 졸해서 나주 남평 수원리 어옹등 간좌에서 영면하고 있다.
부인 공인(恭人) 광산김씨(光山金氏)는 김대수(金大受)의 따님으로 부군과 같은 해에 태어나서 기미년(1619)에 졸했고 묘소는 합장했다.
슬하에 2남이 있어, 장남 수일(守一)은 백부(伯父)의 뒤를 이었고, 차남 유일(惟一)은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세영(世英), 차남은 세현(世賢), 삼남은 세평(世平), 사남은 세혁(世爀)이고, 사위는 대구인 배회(裵繪)이며,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세상의 변화가 상전벽해(桑田碧海)와 같아 조상의 묘를 지켜내지 못했다. 옛 묘소는 서방 오치동 남일리 임좌에 있었으나, 이 지역 일원이 전남대학교 교정 안에 편입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이장(移葬)하게 되었고,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여러 해 동안 선산을 구하려다, 다행스럽게도 좋은 곳을 얻게 되어, 이곳에 봉안(奉安)하였다. 산세가 지렁이 형상으로 서쪽으로부터 옥황상제를 빙 둘러 읍(揖)하고 서있는 모양으로 둘러 쌓여져 있고, 그 안쪽으로는 따뜻하고 넓은 곳이 있어 자연스럽게 (명당의) 형세를 갖추었다. 사람들은 이 곳을 가리켜 말하길 군자가 쉴만한 곳이라고 했다. 옛 묘소와 견주어 봐도 돌아가신 혼령이 조용하게 편히 쉴 수 있는 좋은 묏자리였고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것 같았다.
금년 가을에 이장(移葬)을 한 후 문중의 하나된 뜻으로 장차 비석을 세우기로 한 후, 못나고 어리석은 이 사람에게 비문 짓기를 명하시니 감히 할 수 없어 굳이 사양하였으나 분수에 지나친 일을 하게되었다. 그 실기(實記)의 기록을 모아 명(銘)을 짓는다.
시와 글을 스스로 즐겨하고, 학문 연구에 게으르지 않았다. (詩書自娛。講學不倦。)
자신의 수양을 공으로 삼아, 세파에 물들지 않았다.(自修爲功。不染世波。)
뜻을 같이하는 선비들이 말하길 영세토록 ●●하고(士友稱慕。永世●●。)
덕을 쌓아 남긴 음덕으로 세세손손 번창하리라.(種德餘陰。雲仍乃昌。)
단기 4311년 무오(1978년) 3월 일에 11대손 종한(鍾漢)이 삼가 짓고, 행주 기영명(奇靈命)이 쓰다.
24세 병주가 항상 비문의 내용이 궁금하여 비문을 베껴 죽산안씨(신) 종친회카페(http://cafe.daum.net/ahncham)에 올리니 26세 재중(제학공파) 종원이 역문을 하였기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2019.03.31. 공의 시제시 복사 배포하게 되었다.
죽산안씨 11세 종부시직장 안희직묘갈명(2019).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