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향 황룡마을 이야기
1.황룡의 역사적 배경 2.황룡의 사회 문화적배경 3.황룡의 자연환경 4.황룡의 주거입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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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선시대 이전의 황룡
1)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의 황룡 황룡마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백제시대로 추정된다. 그것은 두 곳에서 출토되는 당시의 황룡주변의 상황은 삼한의 중심 국가인 마한이 수많은 마을국가를 이루고 있었으 신라가 당군의 도움을 받아 백제와 고구려를 공멸하고 대동강 원산이남의 통일신라를 이 2)고려시대의 황룡 물벌귀족사회인 고려왕조가 무신난으로 문신귀족이 몰락하고 이어서 몽고의 침략을 받아 성리학을 지도 이념으로 삼은 신진 사대부들은 불교를 배척하고 원세력과 결탁한 권문세 이때 장성 황룡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광산김씨 김숭조의 조부인 수산공 김자진은 증조부 세종은 문치정책을 쓰면서 널리 인재들을 불러 모았으니 나주에 은거한 김자진의 장자인 그런데 황룡에 맨 처음 옮겨 산 광산김씨는 김충손의 장자인 김승조로, 그는 자를 희지 김승조는 그후 승차하여 사간원 정언, 사건부지평 등으로 있으면서 민폐를 없애고 근검절 그런데 황룡마을에 처음 정착한 사람들은 여양진씨였다. 그들은 500여년전에 이곳에 옮겨 김숭조의 아들인 김기는 아버지를 따라 서울에서 살면서 자암 김구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그후 벼슬이 수여되었으나 나가지 않다가 계속하여 왕의 부름을 받고 예문과 검열을 제수 김숭조나 김기는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황룡에 머무른 기간은 짧았으나 김기의 아들인 김 요월정의 주인공인 김경우는 김사화로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한 김숭조의 손자며 중종 때 조선의 양반 집권세력이 당쟁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선조 25년(1592)에 일본의 침략으로 일본군은 20여만명이 수륙으로 나누어 침략했는데 20여일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그로부터 그러나 정유재란으로 다시 침범한 왜군은 호남전역을 휩쓸었으니 그것은 임진왜란 때 호 황룡마을에 요월정이 있으며 그 남쪽에 낙화암이 있는데 이곳은 황룡을 덮친 왜병들이 미 요월정 김경우의 손자인 김우급은 호가 추담으로 황룡에서 출생하여 왜란을 당했을 때 명 한편 왜란의 상처가 채 가시기 전에 북쪽에서 오랑캐인 청나라가 두 차례나 침입하여 수 왜란에서 이 나라를 구출한 호남인들은 호란 때에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 앞장섰으니 광주 이때 김우급의 아들인 김여옥의 활동이 컸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겠다. 그는 자가 군수요 바 새로운 개혁정치가 시작되었는데 여러 제도가 고쳐졌고 국민생활의 안정과 또한 정치는 변태적인 양반정치인 세도정치가가 등장하여 권력은 세도가의 손아귀에 넘어 세도정치는 순조때의 안동김씨(김조순), 헌종때의 풍향조씨(조인영), 그리고 철종때의 안동 세도가와 탐관오리의 착취를 감당할 수 없었던 농민들은 철종 13년(1862)인 임술년에 진 이러한 때 황룡출신인 김경찬은 정조 20년(1796)에 태어났는데 자는 이옥이며 호는 황주 이 때 충절과 정의의 고장에 살아온 호남인들은 반봉건의 민주화와 반외세의 자주독립으 한편 경군대장 홍계훈으로부터 동학농민군 추격을 지시받은 이학승 원세록 등은 선발대 장성 황룡에서 서울의 정예부대를 물리친 후 동학농민군은 전주를 점령하여 정부과 전주 한편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정부관료들이 불러들인 청군을따라 서울에 진격한 엄청 전봉준이 인솔한 남접군과 손병희가 이끈 북점의 연합부대는 서울로 진격하여 일본군을 전국적을 300만명이 동원되어 근 1년간 계속된 동학농민혁명은 호남인이 주도하였으며 혁 그런데 동학농민군과 정부군의 휴전인 전주화약을 맺을 때 활약했던 김성규는 전봉준과 이러한 망국의 과정을 좌시할 수 없어 호남인들은 의병활동에 앞장섰고 최후의 항전을 전 기삼연은 호를 성재라 하며 노사 기정진의 문하생이고 집안조카 되는 처지로 1895년에 일 일제 군경을 피해 다니던 기삼연은 김용구, 김태원등과 일심계를 조직하여 의병봉기를 준 그리하여 제 2기는 1919년부터 1931년까지인데 정치적으로는 문화정치, 경제적으로는 산 제 3기는 1931년부터 1945년 일제의 패망기까지인데 일제가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켜 일제 36년간은 나라를 빼앗겼고 민족이 노예적 상태에 들어가 탄압과 수탁을 당하던 시기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으로 찾아온 해방은 자주독립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분단과 6.25 한국 전쟁을 3년 1개월동안 계속되면서 밀리고 밀면서 많은 사상자를 냈고 전 국토 이러한 와중에서 황룡마을은 좌, 우익의 극단에 가담하지 않았으며 자중자애하여 별다른 황룡마을은 그렇개 평온한 곳이었기 때문에 공산치하에서는 우익의 피난처였으며 수복후 그러한 황룡마을의 따뜻한 인간애가 이 고장에서 많은 인재를 배출하게 했으며 그러한 미 오욕과 단절, 왜곡과 굴절로 점철되었던 우리 역사의 근,현대는 파란만장과 우여곡절을 겪 황룡강의 북서안 언덕 위에 강을 맞바라 보며 서 있는 요월정은 전면 3칸 (735cm), 측면3 정의 전면(남동방향) 강 건너에 안산으로서의 옥녀봉을 두고, 그 사이에 좡에서 우쪽으로 안산이 있고 수류가 있으며 송림에 의하여 둘서 싸여 있는 자연의 좋은 조건임에도, 여기 산수경개가 수려한 곳에 정자를 세우고 자연과 벗하며 즐긴다는 전통적인 정자 중심의 원 다만, 왜색 짙은 벚나무의 제거와 함석으로 만든 차양의 개선이 바람직하다. 또 최근에 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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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 마을은 혈연의 공동사회, 공동체로서 역사와 문화를 형성해왔다. 마을 구성은 양지편, 동학군과 관군의 격렬한 황룡 전투속에서도 이 마을은 피해가 없었고 6.25때도 피해자가 황룡과 회사촌에는 위친계, 친목계 등이 자생적으로 조직되어 있으며 촌계, 원협작목반, 모 김영하(金永厦, 1903~1959)는 연희전문 4년을 졸업하고 고향에 돌아와 현 양지편 송병주씨 그는 1962년 6월 10일 조선독립 만세사건으로 왜경에 의해 종로서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그는 다시 1929년 6월 10일 6.10만세운동 3주년을 기념하는 동맹휴학을 추진하다가 일제에 원에서는 20세 이상 40세이하 무필자(無筆者)와 불취학 아동 이 형설학원은 한글, 산수, 일어 등을 가르쳤고 학생들은 인근마을과 동화면 등에서 모여 김영하는 해방 후 목포시장을 비롯 전남 내무국장, 충북산업국장, 전남북 문교사회국장을 김영하는 농민가를 지어 계몽의식을 고취하였다. 하교에서도 마을 연극 공연때도 같이 부 1958년 김영하는 황룡고등공민학교를 설립 인근의 학생들을 모아농과계로서 국어, 영어, 수
김숭조는 김굉필의 문인으로 연산군과 중종을 거쳐 사림정치의 이상을 펴고자 사간원 사 중종 2년 때는 헌납의 직책에 있으며 대사간 강경서 등 몇 사람과 더불어 민생과 교화의 우리 성종께서 깊이 그러한 것을 아시어 만기 (萬機)의 여가에 학교에 뜻을 두시어. 학전 연산 때는 문예를 천시하여. 학교를 폐하여 놀이터를 만들고 유생을 시켜 연(輦)을 메게 하 전하께서 즉위하시어 없어진 것을 회복하시자. 유생들이 공부할 줄 알게 되었으니 이제 학 오늘에는 타성씨는 몇 집이 되지 않으며 광산김씨의 터전으로 전해오고 있다. 광산김씨의 전 도유사(都有司)로서는 김원만(金源万) .김태수(金兌洙) 등이며, 현재는 김기업(金璂業) , 문중 재산으로는 동화면 동호리 산 60정보, 전답 1만평, 황룡 요월정 문답 2,000평 등 연 원래 김숭조의 묘소는 황룡에서 앞들 강을 건너 와룡마을 뒷산에 소재했었다. 명주실 두 더우기 1962년 장성군 장성읍 단광리 524번지에 고려시멘트가 설립되고 병풍같은 산에서 원래 김숭조의 묘소는 와룡 뒷산에 있었다. 선산이 시멘트 가공용 채석을 위하여 75년경 광산김씨 황룡문중은 응집력이 강하고 타 문중에 비해 활발한 활동을 보인다. 문숙공파의 대문중인 문숙공파 종친회는 나주와 장성 출신 후손들이 많으며 5월 시제에는 500여명이 추석 무렵이면 형설학교 마당(현재 방앗간)에서 신파극이 공연되었다. 이 신파극에 마을 청 이 마을에서 오래 된 상호부조의 계는 위친계다. 위친계는 1940년 초에 위친을 목적으로 화목 친목계는 친목도모를 목적으로 1970년도에 조직되었다. 인원은 23명을넘지 않으며 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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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황룡의 위치 자연지리적 위치로 보면 갈재(노령)에서 남서쪽으로 향한 멧발이 방장산, 문수산을 거쳐 본디 황룡강이란 연원이 이 동네 앞을 흐르는 절경에서 나온성 싶으나 "신증동국여지승 일찌기 명당 동네로 알려진 황룡을 찾아가는 길은 장성읍내 군청에서 남서쪽으로 2km 쯤 황룡리를 경유하는 대중교통수단은 1997년 12월 현재 군내 버스가 하루 3회 운행되며 요 비교적 암질이 뚜렷한 석회암은 그 분포상의 횡적 변화가 심하여 주향 방향으로 편암으로 수련산 정상부근과 서양저수지 근처를 중심으로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편암류가 관입되 수련산 중턱과 그 주변은 복운모화강암이 분포하고 있다. 이 암석은 곳에 따라 중립질에 황룡리 주변의 대부분 구릉지성 멧봉들은 대부분 중생대 쥬라기 때 형성된 반상흑운모화 황룡강 유역 평야부는 대부분 충적츠응로 구성되어 있다. 이 층은 영산강과 그 지류 유역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황룡부근의 지사는 고생대 편암류가 수련산과 월선봉에 관입 한편 수련산에서 남동쪽으로 내린 동구산(303m) 줄기는 남쪽으로 향하면서 삼계, 동화면 물줄기는 황룡강이 북동쪽 장성읍내에서 남서진 하면서 회사촌 앞을 거쳐 봉황연에 이르 본디 황룡강은 장성읍내에서 감돌아 황룡 사장산 밑을 타고 흘러 요월정 낙화암 밑에 깊 원황룡마을은 40∼60m의 언덕 경사면에 자리하고 있다. 도정공장이 있는 도청거리가 들 양지편에서 사장등 바로 남서편은 "구석뜸(통시암거리)"이라고 한다. 중토봉에서 사장등으 장성군 북하면 신성리 입암산성 서북쪽 골짜기에서 발원하여 동남으로 내려 산성골을 지나면서 남류하다가 감돌이 동류한다. 남창골에 이르러 북에 내려온 새재물을 더하고 전남대 황룡마을에 남쪽 부흥마을과 봉덕마을 사잉에서 동화천을 더해 남류하여 광산 임곡 광골 장성군 동화면 서양리 수련산(541m)남동쪽에서 발원하여 서양마을을 지나 구서양제와 신 회사촌에 사는 이두만 옹(89세)에 따르면, 황룡은 동쪽에 목으로 월선봉, 서쪽에 금으로 우리 주기에 십이지간과 십간이 있다. 십간을 보면 목은 청색으로 갑· 을이고, 화는 적색 마을 사람들은 6.25 때도 거의 피해를 보지 않고 마을이 안녕을 이뤘고 큰 벼슬은 나지 우리나라 전통 촌락들은 비슷한 형국과 풍수덕담들이 전하고 있다. 황룡마을은 그 중에서 요월정 바로 앞 김영하와 김노식씨 땅 근처에 옛날 황룡장이 있었다가 홍수 때문에 월평 속명은 자미, 백일홍, 자미화, 파양수, 양양화, 자미목, 자형화, 만당홍, 해당수, 목백일홍이 전남대 정동오 교수는 1984년 요월정 일대와 군생하고 있는 배롱나무에 대하여 그 보존의 저자 :: 김경수(향토지리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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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황룡 마을의 입지 집을 앉히는 자리는 주위의 산맥에서 떨어져 나온 높지막한 산기슭의 뫼를 등에 두고 앞 마을의 형성은 대개 宗家집을 중심으로 번창하며 同族村을 이룬다. 마을로 가는 길목에는 황룡 마을은 농사가 잘되어 경제력이 튼튼하고 인접 지역의 다른 일반 동족 촌과는 달리 약 500년의 역사를 지닌 황룡 마을은 황룡으로 불리워진 연원을 정확히 알 수 없다.「新 황룡의 초기 입향조는 驪陽陳氏라 전해진다. 그들은 임진왜란때 거의 황룡을 떠났다고 하 황룡 마을의 광산 김씨는 문숙공파의 지파인 황룡 6파로서 추담공파, 직장공파, 거인공파, 황룡 마을의 지세는 어떠한가. 황룡 마을은 노령산맥의 지맥인 수연산(541m)의 끝자락이 마을은 동쪽 들판에 회사촌, 북쪽 잿뜸 너머에 북쪽이 한마을처럼 인접해 있고, 남쪽 황룡 마을은 원황룡이라 부르며 새낙굴 자락을 동서로 분리하여 양지편과 음지편으로 구 외부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크게 두 방향으로 양지편으로 접근과 음지편으로 접근한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샛강인 요월정천 다리를 건너면 점차 마을이 드러나 보이고 도 황룡 마을은 물이 풍부하여 어느 곳을 파든지 좋은 샘물이 나온다고 한다. 그러나 마을의 전통 마을로서 황룡 마을의 숨결은 아직 살아 있다. 구불구불한 고샅길에 펼쳐지는 생울 요월정은 마을의 남서방에 서 있는 산정에 위치하며 산 이름조차도 정자 이름을 따서 요 조선조 전남 지방 누정의 특징이 그렇듯이 사대부의 지방 토착으로 관직에 종사하면서도 요월정 일대는 노송과 백일홍이 자생하는 4천여평의 園林이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데, 요월정으로 올라가는 길목은 양지편의 도청에서 바로 우측으로 꺾어 올라가며, 곧이어 돌 수십 개의 돌계단을 오르면 토상의 소로가 길게 이어지며 서서히 요월정이 자랑하는 원림 소로 우측에는 언덕 위에 고개를 쳐들면 멀리 황룡강을 바라보고 있는 요월정의 모습이 요월정은 江을 향한 요월정산 산허리에 평탄하게 터를 닦고 주위에 축대를 둘러 단상을 옛날에는 정자 언덕 아래에 황룡강 지류의 수량이 풍부해 빼어난 경관을 간직하면서 時亭 건축 구성은 단층으로 마루방과 온돌방이 결합된 有室形 평면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구조 형식은 전통 한옥 목가구 방식으로 짠 5량 한식 기와집이다. 기단은 평탄한 대지 위 廳마루 壁下部에는 정자의 격을 높이고자 머름을 두어 치장하였다. 온돌방 천장에는 살대 여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물은 茅亭이다. 요월장으로 올라가는 진입부 언덕에 세워져 2 그 배치형태는 대체로 一字형, 二字형, ㄱ자형, 튼ㄱ자형, ㄷ자형, ㅁ자형, 튼ㅁ자형 등을 300여년 이상 동족천을 유지해 온 현대의 황룡 마을의 살림집은 중규모나 소규모의 가옥 황룡 마을에서 가장 보편화된 살림집의 공간 유형은 정면 4칸겹집이었다고 한다. 처음 1 안방 공간은 주인 내외가 주로 거처하는 식침 및 일상 공간이며, 정지는 난방과 주방을 본채 이외의 부속건물로는 살림살이에 필요한 곡식 및 농기구를 보관하는 곡간채와 문간 살림집의 구조에 본격적인 변화가 다가온 시기는 1960년대 새마을 사업으로 초가지붕이 한편 마을의 몇몇 집에는 한때 잠실로 쓰던 창고들이 보인다. 1970∼1980년대 마을앞 들 마을에서 대표적인 살림집들을 살펴보자. 황룡 마을에서 집터가 좋은 집으로 감화식씨댁, 김화식씨댁은 양지편 중앙에 위치하는 중규모의 팔작기와집이다. 황룡 마을 중에서도 오 이밖에 부엌 뒤 후정에 은행나무 아래 가지런히 놓인 장독대가 전통 살림집의 풍경을 그대 문간채의 대문은 문 상부에 창살을 높게 둠으로써 開家의 소슬대문과 같은 위엄을 두고자 앞마당은 마당 중앙에 화단을 둔 구성이다. 건립초기에는 정원을 두지 않았다고 하나, 마 다음으로 김문수씨댁은 양지편 통시암거리에 위치한 우진각 기와집으로 마을에서 가장 규 본채는 공간구성이 정면 6칸, 측면 2칸의 매우 평면규모가 큰 살림채로서 좌로부터 상하 김평식씨댁은 음지편에 위치한 팔작 슬레이트집으로 광산 김씨 문숙공파 12대손인 송백당 부지에는 본채와 부속채, 헛간, 우사가 배치되고 본채 우방과 후방에는 넓은 감나무 밭이 주인인 김평식씨에 의하면 집터 잡기의 원리는 놀랍게도 陽宅大全이라는 風水書를 기초 이 집에 대한 주인의 또다른 중요한 믿음은 풍수적 형국에 두고 있다. 3겹의 두터운 청룡 본채는 실 구성이 부엌2칸큰방 1칸반마루1칸반사랑방1칸반·방1칸반의 순으로 전후 사랑방은 일부 개조하였으며 손님들을 위한 방이거나 제실로 쓴다. 사당이 없는 대신 감 부속채는 원래 누에를 키우던 시절 잠실로 쓰던 건물이며 현재는 곳간이나 외양간으로 사 부속채에는 쌀·잡곡·마늘 등의 식료 및 비료·농기구·빗자루·바구니 등 농사 재료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