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롤로그 12
「나는 주사위가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나오는 것을 부끄러워하며, '그럼 나는 사기꾼인가?' 라고 묻는 사람을 사랑한다.
그는 스스로 멸망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인간으로써 성공하는 것은 위대한 미덕이 아니다.》
성공을 하려면 수많은 비열함과 궤변과 거짓된 약속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성공을 하려면 폭력이 필요하다.
성공한 사람은 사랑의 인간이 아니고, 연민의 인간도 아니다.
진정한 연민과 사랑으로 가득 찬 사람은 용해되고 사라져서 위대한 무언가가 일어나도록 하는 사람이다.
그는 장미나무가 자라기 위한 거름이 되기를 바란다.
「나는 자신의 행동에 앞서 황금 같은 말을 던지고, 자신이 약속한 것보다 항상 더 많이 행하는 사람을 사랑한다.
그는 자신의 파멸을 바라기 때문이다.
나는 미래의 사람들을 정당화하고 과거의 사람들을 속죄하는 사람을 사랑한다.
그는 현재의 사람들에 의해 멸망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나는 자신의 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신을 응징하는 사람을 사랑한다.
그는 그 자신의 분노에 의해 파멸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상처받을 상황에서도 영혼이 깊고, 작은 것도 파멸시킬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한다.
그는 이렇게 해서 기꺼이 그 교량을 건너가고자 한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씨앗이 죽지 않으면 나무로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씨앗이 죽지 않으면 꽃이 있을 수 없다.
그는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 용기를 통해서 그는 기꺼이 위험한 다리를 건널 수 있게 된다.
초월의 여정은 너무나 험난하다.
그대는 사라질 것이고, 새로운 것이 존재계에 태어날 것이다.
그대는 자신을 희생하여 새로운 것이 도래하게 되겠지만, 그 희생은 위대한 축복이다.
그대는 새로운 것, 위대한 것을 잉태하기 위한 자궁이 되고 창조자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인간의 머리 위에 드리운 어두운 구름에서 떨어지는 무거운 빗방울과 같은 사람들을 사랑한다.
예언자가 자신의 파멸을 예견하듯이 그들은 번개가 치는 것을 예견하기 때문이다.
보라, 나는 그 번개의 예언자이자 무거운 빗방울이다.
이 번개는 바로 초인이라고 불린다.」
차라투스트라는 예언자가 미래를 선언하고, 미래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미래를 위해 죽기 때문에 이 속세가 천국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현재의 인류가 순수하고 순결해지려면 인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고, 비난 받던 것들로 더 이상 채워져서는 안 된다.
비가 내리기 시작할 때 비구름이 먼저 다가온다.
비구름은 비의 시작과 번개의 시작을 알리는 선구자이다.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나는 번개의 예언자이다.
나는 초인이 곧 등장할 것을 그대들이 깨닫기를 바란다.
그를 맞이할 준비를 하라.
그를 맞이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대들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는 것이다."
이 번개는 바로 초인이다.
번개는 새로운 계절, 새로운 기후의 시작을 알리기 때문이다.
대지는 다시 초록으로 뒤덮이고, 죽은 나무는 되살아나고, 벌거벗은 나뭇가지는 이파리로 옷을 입고, 온 사방에 꽃이 필 것이다.
나는 초인을 새로운 인간new man 으로 표현한다고 이미 말한바 있다.
초인이라는 용어는 우월성의 개념을 담고 있다.
《존재계에 우월한 것도 없고, 열등한 것도 없다.》
존재계에서는 모든 만물이 각자 독창적이고 서로 다를 뿐이다.
새로운 인간new man 은 서로 다르고 독창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
새로운 인간은 심각하지 않을 것이며, 유머 감각을 타고 날 것이다.
그는 긴장과 근심이 없고, 괴로움이 아니라 환희로 가득 찰 것이다.
새로운 인간은 춤추고 노래하고 자유로이 놀고 어린아이가 될 것이다.
새로운 인간은 인류 전체에게 희망이 될 것이다.
차라투스트라의 말들은 항상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문장 하나하나가 나 자신의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가 아니라 내가 말하는 것처럼 절실하게 느껴지고 그가 나의 경험을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다가온다.
나는 30년 동안 강의를 해왔다.
처음에는 인류 전체에 대한 큰 희망을 품고 강의를 시작했다.
그런데 인류는 서서히 자신을 파멸해왔다.
이제 나는 소규모의 사람들에 대한 희망만을 품고 있다.
나는 그들을 '나의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강의를 하는 것은 너무나 고된 경험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너무나 놀란 경험이었다.
《사람들은 귀를 갖고 있지만, 귀담아듣지 않는다.》
그들은 기껏해야 듣는 척할 뿐이다.
귀를 갖고 있으니 듣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그러나 귀를 기울이기 위해서는 뭔가가 더 필요하다.
《귀 뒤에 고요한 마음이 있어야 하고,
방해나 판단이 없이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그러면 듣기는 경청이 된다.
그것은 그대가 듣고 있는 내용에 동의하거나 반대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소나무 숲에 바람이 불어올 때 그것을 동의하거나 반대하는가?
그저 그 소리를 들을 뿐이다.
산에서 물이 흘러 내려오면서 춤추고 노래할 때 물 흐르는 소리를 듣는다.
그대는 그것에 동의하거나 반대하는가?
내면의 경험도 마찬가지다.
그대가 그러한 경험에 동의하거나 반대하리라고 예상되지 않는다.
《고요한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그것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은 마음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러한 인식은 바로 그대의 존재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진리를 이미 알고 있지만, 그것을 잊어버린 지 오래이다.
귀를 기울이면 기억이 갑자기 떠오르면서 잠들어 있던 것이 깨어난다.
갑자기 동조화가 일어난다.
그대가 동의하느냐 반대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대가 귀담아들은 내용과 똑같은 진리를 자신의 내면에서 발견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그리고 그대 안에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것도 깨어나지 않는다면,
그대가 들은 것은 아무런 내용이 없고, 생명이 없고, 진리가 아니라는 뜻이다.》
진리의 경험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논리적인 면만 강조해서 마음이 그 논쟁에 동의할 때이다.
좀 더 정교하고 예리한 또 다른 논쟁이 첫 번째 논쟁을 무너뜨리고 동의는 사라지기 때문에 이것은 매우 인위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대가 진리라고 믿었던 것은 이제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두 번째는 완전히 다르다.
그것은 논리적이거나 지적이거나 합리적인 논쟁이 아니다.
갑자기 그대 안에서 '이것은 나의 진리이기도 하다. 나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깨어나고 도전을 받았다.' 라는 인식이 일어난다.
그러면 그것은 나에 대한 동의가 아니라 그대 자신의 진리가 된다.
어떤 논쟁도 그것을 무너뜨릴 수 없다.
그 어떤 논쟁도 그것을 검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어떤 논리도 그것에 흔적을 남길 수 없다.
논리가 그 발견의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강의를 하면서 나는 벽에게 말하고 있다는 것이 더욱 명확해졌다.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기껏해야 몇몇 사람이 내말을 들을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만의 편견과 검증되지 않은 생각들로 가득 차 있고, 존재계에 아무런 기반도 없는 수많은 믿음들을 갖고 있다.》
그래서 그들에게 무엇을 말하더라도 집단적인 믿음, 생각, 종교, 철학 속에 묻히고 만다.
그들이 그대에 대해서 보고할 때에도 그들은 전혀 다른 것을 말한다.
그대가 말한 것은 모두 왜곡되고, 내용이 빠지거나 덧붙여지고, 의도하지 않은 전혀 다른 색채와 의미를 얻게 된다.
따라서 그들은 전혀 귀담아듣지 않거나, 듣는다 하더라도 이해가 아니라 오해만 낳을 뿐이다.
《경청을 하려면 고요해지고, 그 순간에 존재하고, 자신의 생각을 모든 쓰레기들과 함께 한쪽으로 치워두는 원칙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경청의 방법이다.
《그것이 진리라면 그대의 가슴속에 종소리가 울릴 것이다.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면 그대 안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앎이다.
《마음을 통한 것이 아니라 가슴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하게 옳은 방법이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차라투스트라의 이 모든 문장들은 절대적으로 나의 것과 동일하다.
2,500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 이 문장들을 말했다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이다.
「차라투스트라가 이렇게 말을 하고서 사람들을 다시 바라보며 침묵에 빠졌다.
그는 마음 속으로 말했다.
저들이 저기 서서 웃고 있다.
그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나는 그들의 귀에 가닿는 입이 되지 못한다.
그들이 눈으로 들을 수 있게 가르치려면 우선 그들의 귀를 부숴버려야 하는가?」
차라투스트라의 무거운 침묵은 그의 슬픔, 인간에 대한 절망, 군중의 무지함을 보여준다.
무릇 스승이라는 사람들은 정말로 그렇게 했다.
그대의 귀를 부수고 그대의 마음을 깨뜨려서 그대가 귀가 아닌 눈으로 들을 수 있고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한 훌륭한 철학자가 진리에 대해 논하고자 고타마 붓다를 방문했다.
철학자들이 유랑하며 다른 철학자들과 논쟁을 벌이는 것은 동양의 오랜 전통이다.
당시는 매우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진정한 사상의 자유가 있던 때이다.
어떠한 적개심도 없이 모든 종류의 철학, 존재계의 온갖 개념들이 존중 받고 논의되던 시대이다.
그런 논쟁은 새로운 것의 발견을 위한 수단이었다.
논쟁은 크나큰 사랑과 우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논쟁에서 패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승자의 제자가 되었다.
말룽캬풋타Malunkyaputta 는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수많은 철학자들과의 논쟁에서 승리했다.
당시 고타마 붓다의 명성은 당대 최고라고 알려졌기 때문에 말룽캬풋타는 그와의 논쟁에서 이기고픈 열망이 컸다.
그는 논쟁을 통해 제자로 삼은 500명의 철학자들을 데리고 고타마 붓다를 찾아왔다.
그가 붓다에게 말했다.
"나는 진리에 대해 논쟁하고 싶다."
붓다가 그에게 말했다.
"나는 그대를 환영한다.
우선 몇 가지를 묻고 싶다.
그대는 진리를 알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대는 진리를 어떻게 논하겠는가?"
당시 사람들은 너무나 진실했기 때문에 말룽캬풋타 역시 진실하게 말했다.
"진리를 알지 못하지만, 나는 진리를 구도하고 있다."
붓다가 말했다.
"나도 한때 진리를 구도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진리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대는 진리 자체인 존재와 여전히 진리에 대해 논쟁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그대는 어떻게 논쟁하려는가?
나는 그대에게 연민을 느낀다.
나는 제안한다.
2년 동안 침묵 속에서 내 옆에 앉아 나의 존재를 들이마시고, 나의 존재를 느끼고, 나의 존재를 흡수하라.
그대는 2년 동안 단 한 마디의 말도 해서는 안되며, 2년이 지나고 난 뒤에 논쟁을 시작해도 좋다."
2년 동안 침묵 속에 앉아만 있으라는 것은 너무나 이상한 조건이었다.
그는 사상가가 아니라 진정한 구도자였다.
그는 논리적인 결론이 아니라 존재론적 깨달음으로써 오직 진리를 깨닫고자 했다.
그는 붓다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붓다의 제자인 마하가섭이 나무 밑에 앉아 있다가 미친 사람처럼 웃어대기 시작했다.
말롱캬풋다는 이해할 수 없어서 붓다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저 사람이 아무런 이유없이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붓다가 말했다.
"그 사람에게 직접 물어보라."
마하가섭이 말룽캬풋타에게 말했다.
"그대가 진정으로 알고 싶다면 바로 지금 물어보라.
2년 뒤에는 그대가 답을 알게 될 것이다.
누가 질문을 하겠는가?
그때 그대는 이미 사라진 상태일 것이다.
이 사람은 위험하다.
나 역시 그와 논쟁을 하려고 왔었지만, 그는 나에게도 똑같은 속임수를 썼다.
2년 동안 그의 옆에서 침묵하고 지내면서 나는 사라졌다.
이제 나는 진리이므로 논쟁은 불가능하다.
나는 그가 또 다시 오래된 속임수를 쓰고 있다는 생각에 웃었던 것이다.
이 불쌍한 친구는 2년 동안 앉아서 기다릴 것이고 그 뒤에 대단한 논쟁을 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그대에게 말한다.
그대가 논쟁을 하고 싶다면 지금이 바로 그때니다."
그러나 말룽캬풋타는 붓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붓다가 하는 말은 모두 타당하다.
나는 진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진리를 논쟁하겠는가?
나는 2년 동안 그의 곁에 앉아 있겠다.
나는 지난 50년 동안 온 나라를 돌아다니며 수천 명의 사람들과 논쟁을 벌이면서 세월을 허비했다.
과연 지금 내 수중에 무엇이 있는가?
아무것도 없다.
나는 50년을 허비했으니 2년 정도는 더 기다릴 수 있다.
그리고 고타마 붓다의 현존, 그의 침묵, 그의 평온, 그의 향기, 그의 주변을 감싼 아름다운 후광은 분명한 실체이다.
따라서 그가 나를 속일 일이 없고 그 누구도 속일 일은 없다고 확신한다."
그는 침묵 속에서 2년을 기다렸다.
그러나 2년이 지나자 그가 사라졌다.
그의 마음은 너무 고요해져서 날짜를 세는 것도 잊어버렸다.
그는 2년이 지난 줄도 몰랐다.
붓다가 말했다.
"말롱캬풋타, 그대는 우리의 약속을 잊었는가?
2년이 지났다.
2년 전 바로 오늘 그대는 나를 찾아왔다.
그 약속에 따라 나는 논쟁할 준비가 되었다.
그대는 질문을 해도 좋다."
질문을 하는 대신 그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고, 붓다의 발에 자신의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저를 용서하십시오.
마하가섭의 말이 옳았습니다.
저는 당신과 혼연일체가 되어 이제는 질문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거니와 당신은 답변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제 저는 당신의 깊은 내면의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당신의 빛과 사랑을 보았고 당신의 진리를 경험했습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제가 그것을 경험했을 때 갑자기 제 안에서 똑같은 경험들이 꽃피우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당신의 진리는 하나의 출발점에 불과했습니다.
그것이 제 안에 무언가를 일깨웠고, 저는 제 자신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가 똑같은 진리입니다.
저를 용서하십시오.
진리는 논쟁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오직 침묵 속에서 경험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끝.
오쇼의 차라투스트라 1
오쇼 강의/박형진 옮김. 젠토피아 출판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