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5. 26. 삼위일체 주일
https://cafe.daum.net/znzdkzkepal/1qvN/1041 김진성
https://cafe.daum.net/rnjstlgur/9oZ8/211 권시혁
예배로 부름
여호와께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하는 모든 일을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 그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말할 지어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 들은 마음이 즐거울 지로다. (시105:1-3)
예배 기원
하나님 아버지! 거룩한 주일 아침에 저희를 성전으로 불러주시며, 또 삼위일체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드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성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가운데 저희가 하나님의 자녀로 택정함을 받았나이다. 성자 예수님의 십자가 속량으로 저희가 의롭게 되었나이다.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저희는 날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승리하며 살아가고 있나이다. 이 크신 은혜에 감격하며 삼위일체 주일예배를 정성껏 올려드리오니 기쁘게 받아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하옵나이다. 아멘
이 주일의 찬송
거룩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님(8)/주가 세상을 다스리니(63)/ 창조의주 아버지께(76)/하나님이 창조하신(477)/참 아름다워라(478)/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508)
고백의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저희는 지난 한 주 동안 여러 가지 추한 죄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성도임을 망각하고 죄와 더불어 먹고 마시며 세상에 취하여 살았습니다. 물질의 욕심에 현혹되어 의로운 길을 포기하고 불의한 재물을 얻었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불의한 재물에 이끌려 거룩한 삶을 포기하며 멸망의 길을 걸을 때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함을 받은 이웃을 멸시하는 죄를 짓기도 했습니다. 형제의 눈에 있는 티끌은 보면서 내 눈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관점으로 살기도 했습니다. 기도를 쉬는 것도 죄라고 하셨는데, 저희는 기도의 잠을 자다가 이렇게 다시 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주님! 우리의 생활 중에 나타났던 나태함과 게으름과 악한 죄악을 모두 용서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 고백의 기도를 드립니다. 아멘.
사함의 확신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9:2b)
2526 여호와를 경외하면 말씀이 즐겁습니다. 시112:1-5.
☞ 마음 문을 열고
목회자로 살아가면서 늘 거울처럼 본받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에 가장 위대한 설교자로 알려진 찰스 해돈 스펄전입니다. 15세에 회심한 이후로 그는 런던에서 가장 뛰어난 설교자로 인정받아 1854년 20세에 런던 뉴파크 스트릿 교회의 목사가 됐으며 27세 때는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몰려든 청중을 수용하기 위해 6,000석의 메트로폴리탄 테버너클을 세워야 했습니다.
그의 삶은 한마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주님 사랑하신 영혼을 위해 생명을 바친 헌신이었습니다. 결국 엄청난 목회 사역과 말씀 연구로 말미암아 건강은 악화됐고, 1891년부터는 더 이상 설교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건강을 회복하고자 여행하면서 휴식을 취하는 시간을 가졌지만, 이듬해 1월 31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스펄전의 책과 설교는 100년이 훨씬 지난 오늘도 생생한 그리스도의 진리로 다가옵니다.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깊은 독서, 뛰어난 이해력, 천부적인 표현력 등 설교자로서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지닌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스펄전이 말하는 목회의 비결은 다른 데 있습니다. 스펄전을 사모하는 많은 목회자들이 방문하여 물었습니다.
“목사님의 목회 비결이 무엇입니까?” 스펄전 목사님의 대답입니다. “무릎을 꿇고 많은 땀을 흘리는 것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주일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그들을 데리고 지하로 내려갔습니다. 그곳에서 목사님의 설교를 위해, 영혼의 변화를 위해 열정적으로 기도하는 300명의 기도 용사를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 부흥의 비결입니다.”기도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최대의 무기입니다. 기도란 하나님을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부흥의 비결입니다.
1.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 계명을 크게 기뻐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중국에 가면 집 문 앞에 ‘복’이란 한자를 걸어 놓은 것을 종종 봅니다. 재미있는 것은 복자를 거꾸로 걸어 놓은 것입니다.
복이 위에서 떨어지도록 거꾸로 붙여 놓은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수저나 이부자리에 가장 많은 새긴 글자가 ‘복’입니다. 세상의 복이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상대적인 우위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전혀 다른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진정 복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것,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가장 큰 두 가지 복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고 존경한다는 말입니다. 그냥 사랑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인하여 엄숙한 두려움을 내포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 두려움은 불안감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두려워하기에 세상 모든 것에서 자유를 누리는 평안을 주는 두려움입니다. 천둥 같은 소리로 쉼 없이 떨어지는 나이아가라 폭포 앞에 섰을 때처럼 감탄에서 나오는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두려움을 포함한다는 말입니다. 누가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우리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알 때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존경이 나타납니다.
자신을 진정으로 깨닫는다는 일은 창조주 하나님 앞에 설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아직 우리는 자신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잠언 1:7은 선언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모든 지식의 근본입니다. 존 칼뱅은 《기독교 강요》의 첫 부분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다루고 다음에 나를 아는 지식을 다룹니다. 그 후에 율법 앞에 심판받을 죄인의 모습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발견할 때 비로소 내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그때 자연스럽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여러 사건이 있습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을 뵈었을 때 이렇게 고백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사 6:5).
이사야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났을 때 기쁨의 탄성을 토해내기 전에 압도하는 신적 임재 앞에서 자신과 민족의 부정한 모습을 본 것입니다. 배의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가득찬 물고기를 바라보며 모두가 기뻐할 때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베드로는 엎드립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눅 5:8). 하나님 앞에서 자기 발견이 일어난 사람에게서 나오는 동일한 고백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빛 앞에서 자신을 발견할 때 우리를 둘러싸는 것이 영광스런 경외감입니다. 시편은 이런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복을 누리는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반응이 있습니다.
경외는 경배를 일으킵니다. 경배란 좋아하는 대상을 향한 단순한 찬양 이상입니다. 우리의 창조주요 우리의 구원자를 향한 절대 존경의 감정입니다. 경외감이 채워져야 진정한 경배가 가능합니다.
예배란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존경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는 삶의 모든 부분에도 변화를 일으킵니다. 우리의 기쁨이나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인생의 목적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하나님의 계명을 즐거워하는 것은 연결됩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경배하는 것이나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말씀을 따라가는 삶에서 시작됩니다.
오늘 말씀에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기뻐하되 크게 즐거워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계명을 잘 지키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해도 될 텐데, 왜 크게 즐거워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합니까?
누가 하나님의 계명을 가장 잘 지킬 수 있는 사람인가? 말씀을 지키는 데도 다양한 수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의무감으로 지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직 복음의 감격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고 지키면 복을 받기 때문에 지키는 사람도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율법처럼 만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말씀을 지키는 것이 속박이 아니라 감격이요 즐거움이 됩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이 주님과 동행하는 것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시편 1편의 복 있는 사람이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한다는 말씀과 맥을 같이 합니다. 사람들은 말씀대로 살아가면 오히려 즐거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말씀에 구속 받는 것을 우리를 속박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아직 말씀을 즐거워하는 것이 어떤 삶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8:31-32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말씀을 즐거워하고 말씀에 속박받을 때 우리가 누리는 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일생 말씀을 즐거워하는 삶은 매일 말씀을 기뻐하는 삶에서 시작됩니다. 성경을 읽을 때 감격이 넘치고 즐거움이 샘솟습니다.
일생을 선교사처럼 살아온 한 여인의 삶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분은 20대의 젊은 나이에 선교사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아내를 잃고 두 아들을 데리고 거의 폐인처럼 살던 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하나님이 그 마음에 말씀하셨습니다. “저 남자와 아이들이 바로 네 선교지란다.” 선교사의 꿈을 포기하고 그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결심이었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셨기에 순종하고 결혼했습니다.
두 자녀를 더 낳고 사는데 이 분이 항상 하시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말씀을 읽고 마음에 간직하라.” 1950년대 미국은 공산 세력의 침략을 많이 두려워했습니다. 이 분이 제일 두려워했던 것은 공산 세력이 미국을 장악하여 성경을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말씀을 읽고 외어 두라고 부탁했습니다. 성경을 빼앗겨도 말씀이 머리와 마음에 남아 있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공산당의 위험은 없어졌습니다. 이분이 50살 되던 해에 뇌종양으로 실명을 하게 됐습니다.
온 세상은 어두움에 잠겼지만, 기뻐할 수 있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평생 마음에 숨겨두었던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감사할 수 있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게 말씀으로 준비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분은 매일 외우셨던 말씀과 더불어 사셨습니다. 80세 후반이 됐을 때 치매가 찾아와 집에서 더 이상 돌볼 수 없어 요양원으로 가게 됐습니다. 자녀들도 알아보지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이분의 삶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매일 요양원 방을 다니며 맑은 미소로 찬송을 부르고 성경 말씀을 암송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분이 돌아가신 날 방에 모여 함께 예배드리던 많은 환자들과 간호사들이 그 딸에게 말했습니다.
“자네 어머니는 치매 속에서도 하늘에 기쁨을 보여주었고 말씀과 찬송으로 하나님을 증거 하였다네. 그래서 우리들이 자네 어머니가 믿는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네. 이 요양원이 자네 어머니의 마지막 선교지 였다네.”
실명 이후에 세상은 온통 어둠이었지만 그에게는 말씀으로 말미암는 거대한 기쁨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본 것은 치매와 어둠 속에 있었던 가련한 한 노인이었지만, 그들이 발견한 것은 하늘의 기쁨을 향해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말씀을 크게 즐거워하는 사람의 삶입니다. 이것이 말씀을 통해 주님과 동행하고 주님을 증거하는 사람의 삶입니다.
시편 119:103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잘 나타납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송이 꿀보다 더 단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이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기에 시편 19:10에 선언합니다.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
하나님을 만나는 일과 말씀을 사모하는 일은 직결됩니다. 하나님을 체험하는 가장 확실한 길은 자신을 계시한 성경을 통해서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나타나는 반응이 경외심입니다.
이 경외심은 세상의 모든 세력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힘을 줍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외심은 우리에게 말씀에 대한 집착적인 사랑을 불러일으킵니다.
2. 정직한 자들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납니다.
정직한 자들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며 의로운 이로다. 은혜를 베풀며 꾸어 주는 자는 잘되나니 그 일을 정의로 행하리로다(4-5)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을 크게 즐거워하는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내적 특징과 외적 특징입니다. 먼저 4절은 하나님이 정직한 자들을 어떻게 보시는지 나타납니다. “정직한 자들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며 의로운 이로다.”
5절에는 이들의 구체적인 삶이 나타납니다. “은혜를 베풀며 꾸어 주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정의로 행하리로다.” 정직한 것이 내적 자세라면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는 삶은 외적 표현입니다. 정직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모습을 지켜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조금도 숨김이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무도 보지 않지만, 말씀이 나를 지배하기에 그의 삶을 하나님의 눈앞에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을 즐거워하는 사람의 구체적인 삶의 표현은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베푸는 인생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향해 쏟으신 모든 은혜를 알 때 나타나는 자연스런 반응이 은혜를 흘려보내는 삶입니다.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생명을 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제대로 깨달을 때 모든 사람을 예수님처럼 사랑하고 베풀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을 거꾸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것을 채워야 만족하는 삶이 아니라 자신에게 들어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눔으로 사람을 섬기고 세우는 인생이 됩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한 사람의 자세뿐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세워진 모든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지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말씀을 전부로 여겨야 합니다.
강단에서 진리의 말씀이 사라질 때 하나님의 영광은 실추되고 경외감도 사라집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교회는 은혜를 흘려보내는 교회가 돼야 합니다. 교회는 또 다른 축복을 구하는 곳이 아니라 이미 얻은 축복을 실현하는 곳입니다.
가장 위대한 축복의 유통이 무엇입니까? 복음을 나눔으로 죽은 영혼을 살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나누는 사람입니다.
인생의 가장 영광스런 나눔이 있다면 우리로 말미암아 생명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서도 전능하신 하나님 사랑의 향기가 드러날 수 있다면 그것보다 가치 있는 인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것이 진정 복 있는 인생입니다.
☞ 갈무리
오늘 시편 112편을 가지고 ‘복 있는 사람’이란 제목으로 곡을 만든 비발디는 노래의 마지막을 이렇게 맺습니다. “성부와 성자 성령 하나님께 영광을! / 태초부터 지금까지 영원무궁토록 / 주께 영광이 있을지라. 아멘.”
삶이란 하늘을 향해 나아가는 짧은 여행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여행이 될 때가 가장 행복한 여행, 보람 있는 여행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비발디의 마지막 노래처럼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