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나는 정말 어렵게 이 비행기를 탔다. 붉은 몽고 고원위를 날아가는 비행기위에서 나는 지금 너무 행복하다. 이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이 감동, 하얀 구름이 떠있고 붉은 대지위에는 구름의 그림자들이 또다른 계곡의 아름다움을 만들고, 지평선 끝의 푸른 색상의 신비가 예전의 알레스카의 화려한 오로라를 생각나게 한다. 가끔씩 비행기 창가에 비추는 솜사탕 같고 어릴적 솜이불 같은 포근함 속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의 그 순간들과는 또다른 자연의 순박함과 넓은 대지가 힘찬 징기스칸의 표호처럼 하늘에도 들리는 듯 하다. 우리나라시간으로 밤 12시 40분, 비행기가 30분 후면 모스크바에 내린다. 아 저 아름다운 하늘을 보라! 내가 옛날에 태어났다면 이런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을까? 아니면 100년 후에 태어났더라면 우주의 또다른 아름다움을 보고 있었겠지. 황홀한 우주에서 구름이 만들어내는 저 아름다움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그 어떤 예술품과 비교될 수 있으랴! 이 하늘은 내가 본 그 어떤 하늘보다 다양하고 웅장하고 다시는 이런 아름다운 구름과 하늘을 볼 수 없으리라.
모스크바하면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크레믈린을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크레믈린 궁전앞에 모스크바를 여행하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한번쯤 사진을 찍고 엽서나 가이드북에 대표적으로 실리는 바실리 성당. 각양각색의 꽃다발을 연상케하는 그 아름다운 색상과 형태가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성당이 아닐까 생각된다. 러시아는 정교회를 믿는 나라이므로 시내 어디서나 아름다운 사원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건축에 관심이 많은 분들은 사원투어만 한다고도 한다. 그리고 사원들이 지붕이 둥근 이유는 눈의 무게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성당옆에는 나라에서 운영하는 [굼 백화점]이 있다. 그 아름다운 천장과 규모가 파리의 라파에트나 우리나라 백화점 형태가 아닌 어쩌면 밀라노의 쇼핑몰에 가깝다고 하겠다. 직영체제도 아니고 임대형식이 아닌가 생각되며 고급부띡부터 캐쥬얼 브랜드까지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 1층에는 고급브랜드, 2층에는 저가 브랜드라 생각하면 좋을 듯 하다. 볼쇼이 극장옆에 페트로프카 거리의 명품점 집결지가 있지만 레닌그란드와 크레믈린성, 바실리가 옆에 있는 [굼]이 관광명소로 쇼핑객이 많이 몰린다. 그리고는 바로 옆에 붙어있는 역사박물관은 선사시대부터 러시아 황실의 화려한 유물들을 보는 것 까지 천장이나 벽화의 예술성과 화려함이 종교와 황실의 권력에 괜시리 작아보이는 내 모습이 초라해지기 까지도 하다. 금색찬란한 박물관을 나와 모스크바의 중심을 알리는 센터포인트에서 나도 기다려서 사진을 한 장 찍고, 우리 서울의 포인트는 어디일까 한번 생각해보기도 하였다.
춥다고만 생각했던 모스크바에는 숲과 강이 있고, 광장도 많아 젊은이들이 인라인이나 킥보드를 타는 모습에서 파리와 별반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분수를 뿜어대는 정원과 젊은 남녀들의 데이트, 밤10시까지 훤하게 밝은 백야 같은 모스크바. 모스크바를 여행하기에는 여름이 가장 좋다고 한다. 러시아의 눈과 추위를 느끼고 싶다면 겨울이 좋을 수 있겠지만 가장 추울때는 영하 30도까지 내려간다는 사실을 알아야하지 않을까. 왜 나폴레옹과 독일이 짐을 싸고 돌아가야 했을까는 우리가 역사에서 배웠듯이 바로 추위였음을 안다. 그리고 모스크바를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볼쇼이, 키로프, 스탄리슬라브스키의 공연을 찾을 것이다. 구관 볼쇼이 극장은 수리중이고 신관 볼쇼이 극장에서 오페라나 발레를 관람하는 것은 필수. 하지만 매일 공연이 다르므로 꼭 보고 싶은 공연이 있다면 도착해서 티켓을 구매하거나 출발하기 전에 서울에서 티켓을 예매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꼭 볼쇼이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모스크바는 어느 도시 보다 소극장이 많고 에술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을 느낄 수 있다. 나는 다음에 모스크바를 가게 된다면 소극장 투어도 생각을 해보고 있다. 런던이나 뉴욕의 뮤지컬이나 대형공연 보다 어떨때는 오프공연에 진한 감동을 받듯이 말이다. 그리고 강을 건너 모스크바 대학이 있는 곳의 서커스도 관광객이 한번 찾아봄직하다. 이곳은 관광객이 중심이지만 또 시내의 한복판에 티비튜노이불바르라는 서커스가 유명한데 이 사람은 러시아의 유명한 광대였으며 이 사람의 이름을 딴 서커스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입선했다는 모스크바 개선문 앞에 1812년의 파노라마(나폴레옹의 침략을 회상하는 박물관) 그 시대의 전쟁상황이나 복식들과 군복들을 직접 볼 수 있는 너무 귀한 자료들이 정신을 빼았었다. 사진에서 보아왔던 군복들이 육군/해군/여부에 따라, 보직이나 계급에 따라 그 화려한 군복들은 내 다음 컬렉션에서 그 시대의 군복에서 나올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전쟁 박물관을 가기 위해 잠시 들렸던 1812년의 파노라마는 나의 새로운 영감이기도 했다. 하나밖에 없다는 그 무거운 자료의 책을 사고 그 시대의 프랑스와 러시아 군대의 그림들을 한보따리 사니 신기한 듯 선물까지 주는 게 아닌가. 나는 그 다음날 모스크바의 북동쪽에 있는 벼룩시장인 이즈마엘롭스키 베르니쉬즈로 갔다. 세계 어느곳을 여행하든 찾아가는 벼룩시장. 그 나라와 그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으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여행의 가장 소중한 추억이 되는 보물 같은 곳이 아니던가. 근데 놀란 것은 벼룩시장에서 입장료를 내보기는 모스크바가 처음이다. 난 정신없이 몇시간안에 보기로했던 벼룩시장을 바이어와 만남을 한 시간 두시간으로 미루다가 결국엔 다음날로 미룰 정도로 빠져들고 말았다. 처음에는 성화로, 예전에 조금씩 보았지만, 100년 이상씩 된 너무 아름다운 성화들을 이렇게 많이 본 것은 처음이라 하나씩 사모으기 시작했다. 서울에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디자이너들 중에는 기독교인들이 많기에 난 그들에게 이것 만큼 좋은 선물이 없겠다 생각되어 이것은 어느 분께, 이것은 누구에게 하며 사모았다. 러시아에 대표적인 상품인 馬뜨리오시까(오뚜기갚은 데코레이션)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벌써 왠만한 집에는 한두개씩 있으니까 말이다. 차라리 난 거기서 1920년부터 1960년대까지 장군들의 오리지널 군복을 만날 수 있었다. 그것도 군복에 대해서 연구하며 책까지 직접 쓰신 분이 운영하는 상점에서 나는 넋을 잃고 말았다. 아무리 흥정해도 500달러에서 10달러도 못뺀단다. 모스크바에서, 그것도 입지도 못할 옷에 500달러라면 내게는 큰 돈이니 말이다. 파리에서 300유로를 주고산 100년된 코트가 한겨울을 따뜻하게 해주었고, LA에서 18년전 우릿돈 3만원 주고 산 군복은 몇해동안 유니폼처럼 입지 않았던가. 난 몇시간은 벼룩시장을 돌고서는 다시 그집에 가고 말았다. 비슷하게 요즘 군복처럼 만든 2-3만원 짜리로는 나의 눈에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난 바지부터 코트, 그리고 모자까지 입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사진들은 우리나라 잡지를 위한 사진이니 같이 찍자는 제안에 흔쾌히 승낙을 해주었다. 이제까지 많은 구제품들을 사모았지만 내가 가장 비싸게 준 이 군복을 서울의 파티에서 입어볼 날을 상상하면서 난 벼룩시장을 뛰어다니다 싶이 하였다. 1층에는 앤틱샵, 2층에는 수십개의 그림과 성화를 파는 곳에서 난 또 그림에 자꾸만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벼룩시장에서 사는 그림들은 가끔씩 횡재의 기쁨도 선사한다. 몇만원의 그림들이 몇백만원의 그림보다 소장한 경험을 선사하니 말이다. 그래서 선물로 구매한 그림…
그러나 이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나중에 공항에서 무슨 국보급이나 갖고 나가는 것처럼 난리가 나더니, 다 빼앋기고 시간에 쫓겨 프라하행 비행기를 탔던 것을 생각하니 지금도 가슴이 뛴다. 또 매력있는 거리를 소개할 까한다. 구아르바트 거리에는 거리예술가들과 기념품이나 그림 그리고 공연과 馬임도 구경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 거리에는 너무 예쁜 레스토랑이나 맥도날드, 하드락 카페 같은 술집도 있고 젊음과 낭만이 있는 모스크바를 느낄 수 있는 거리다. 아르바트에 있는 하드락카페에서 난 지미헨드릭스의 자켓이나 엘튼죤의 의상, 이기팝의 가죽자켓, KISS의 기타리스트의 기타 등, 락스타들의의상과 악기 등이 4개층의 모든벽과 계단등에 가득 채워져 그 시대 하드락 스타들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다. 아르바트의 거리를 나와 난 바이어와 새로운 매장의 오픈 장소로 이동하는데 핸드폰은 꺼달란다. 그리고는 소근대며 내 귓가에 얘기를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뒷길로 들어가 지하로 내려가는 것이 혹시 러시아는 馬피아가 유명하다고 들었는데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이 아닌가. 지하로 내려간 공간에는 한창 인테리어가 진행중이고 tv리허설 장면을 찍고 있었다. 아니 왠 공연장. 무대가 있고 여배우가 한창 연기에 몰두해있고 나이가 지긋한 분이 연출을 하고 있었다. 나중에 소개할 때 모스크바의 유명한 PD이자연출가라 한다.
낮에는 패션샵이 되고 밤에는 공연잔. 연극을 조금은 알고 있는 나로서 카페극장이나 그런 것은 몇십년전에 서울에도 있어 그리 낯선 것은 아니지만, 패션과 공연장! 그들이 펼쳐보인 실내장식 디자인은 생각해 보기조 못한 디자인이다. 입구에는 거대한 무대의상을 입은 인형들이 있고 장롱식으로 옷들은 문을 닫으면 완전히 벽이 되어 바로 공연장으로 바뀌어 버리는 그들의 예술과 패션의 접목에 나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 연출가는 내 옷을 바이어로부터 선물을 받은 모양이었다. 당신옷은 예술이었다며 오픈날 그 옷을 입고 파티를 할 것이라며 너무도 진지하게 예술과 패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방송리허설이 끝나는 대로 설치될 무대의상을 보러 스타니 슬라브스키 연습장으로 향했다. 지금은극장이 불에 타서 새로 짓고 있고, 볼쇼이 극장에서 공연한다는 스타니 슬라브스키 연습장은 우리나라 방송국 출입처럼 까다롭고 모든 사람들이 비행기 탑승 수속과 같은 과정을 거쳐야했다. 그 빌딩안에서는 발레단이나 연극단의 연습실이 있고 우리는 무대의상 제작실로 들어갔다. 그곳 책임자는 무대의상을 전공하고 이 작업을 한 지 15년이 되었다 한다. 러시아에는 무대의상을 제작하는 곳이 많지만 볼쇼이와 스타니 슬라브스키의 무대의상이 가장 유명하다고 한다. 놀란것은 의상제작을 위해서 거의 핸드메이드 기법과 프린팅, 프린트의 패턴개발과 인형까지 제작하는 것이 아닌가. 인형은 박물관에서 거금인 100만원씩 판매가 된다고 한다. 나는 벽에 걸린 자켓을 입어보기도하며 사진을 찍었고 그 디자이너는 나의바이어와 즉석제안을 하는 것이 아닌가. 난 인형이 탐이나 가격을 물었는데 내 옷과 인형과 바꾸잔다. 난 도대체 하나의 인형을 만드는데 얼마의 시간이 걸리는 지 물어봤다. 하나의 인형을 만드는 3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린다는 얘기를 듣고 왜 박물관에서 판매하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내코트와 바꾼 인형을 나는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그리고 매장입구에 서있을 무대의상을 보는 순간 나는 순간 입을 벌리고 말았다. 나는 가끔 그동안 만들었던 무대의상이나 영화의상이 작은 감각만을 갖고 대충만들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이들이 영화나 연극, 오페라, 무용 무대의상에 쏟는 열정은 일반적인 오뜨 꾸뛰르 이상의 테크닉과 감정이 있었다. 하나 하나 그림이나 자수까지 정교하게 수놓는 그들의 무대의상은 곧 그것 자체가 예술이었다. 난 그들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볼쇼이 극장의 사랑의 모약을 보면서 어떻게 매일 무대를 바꾸어가며 공연 내용이 쉬지 않고 계속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문화를 사랑하고 즐기며 감상하는 그들의 문화수준은 과연 여기가 몇십년 철의 장막의 모스크바인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모스크바에서 가장 잘나가는 나이트클럽은 남자만 500루피의 입장료만 내고 여자는 무료인, 미성년자만 아니면 나이와 상관없이 라이브를 즐길 수 있는BOAI ★ HOUSE가 있고 Night Flight라는 외제차만 늘어서 있는 가장 돈많은 사람들이 많이가는 고가 나이트가 있다. 또 한가지! 러시아에 갔으면 러시아 음식은 멋지게 먹어야 할 것이 아닌가. 푸쉬킨 거리의 푸쉬킨 레스토랑은 4개층으로 이루어지고 각 층마다 4중주나 또다른 연주를 층마다 들을수 있고 가장 물이 좋다는 푸쉬킨 레스토라 꼭 들려보기를 권한다.
프라하!
작으만한 프라하 공항에서 난 택시를 타고 몰다우강이 보이는 유태인 馬을의 호텔에 짐을 풀고는 구시가지를 걷기 시작했다.
베를린에서 기차로 오기로했던 나에게서 연수를 했던 정연이와는 한시간의 여유가 있기에 나는 구시가지의 건축들이 1000년의 고도로 걷기 시작했다.
관광객을 위한 오픈카, 그리고 馬차들이 고급 샾들과 기념품 가게들에는 수 많은 세계각국으 여행객들로 아 왜 여기를 동유럽의 작은 빠리라 하는지 이해가 되었다.
특히 크리스탈로 유명한 체코이기에 현란한 유리공예와 호박으로 만들어진 액세서리들이 눈을 현란하게 만든다.
가끔씩 들리는 한국말에 나도놀라 돌아보면 여지없이 한국 대학생들의 여행객이나 신혼여행객들이 혹시 제주도에 온게 아닌가 하는 착각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프라하의 날씨가 금새 맑았다가 소나기가 내리고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비가 그치고 해가 고개를 내미니, 그 날씨 또한 제주도의 변덕스러운 날씨 같기도 하다.
난 모스크바에서 모두 빼앗긴 그림들을 보상이라도 하려는듯 그림을 샀건만 이 또한 나중에 또 분실하고 말았으니 이번 여행에서 난 그림하고는 악연이 아니가 생각된다.
틴성당을 들어가서 놀란 것은 아름다운 실내와 천장의 모자이크 파이프 오르간등이 시선이 갔지만 한쪽에 연주를 알리는 안내판에 난 호기심을 생겼다.
정기적으로 일주일에 한번씩 공연이 이루어지는 틴성당.
그 공연을 알리는 사진과 설명들이 여기 또한 생활과 종교가 예술과 밀접함을 느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우리나라는 공연장이 없어서 오페라나 연극 아니면 여러 예술가들이 공연장을 찾지 못하는 현실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성당에서 종교와 상관없이 공연이 이루어진다니 부럽기 그지 없었다. 그런 기금으로 성당을 운영하거나 예술을 발전시키는 그,들에 비해 우리는 어떤가
그리고 구시가지 광장에서 볼 수 있는 구시청사의 천문시계는 꼭 프라하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명물임에 틀림없다. 정각이 되면 12사도의 인형이 나와 움직이다가 창안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구시가지의 광장에서 바라보는 프라하의 모습, 馬치 천년의 역사 앞에 서있는 듯 하다.
프라하성
언덕위에 자리한 프라하 어디서도 아름답게 보이는 프라하성은 9세기부터 14세기에 완공되었다 한다. 성 입구에서 내려다보는 프라하의 시내의 모습과 붉은 지붕들의 각양각색의 건물의 아름다움다음은 왜 이제야 프라하에 왔는가 하는 후회가 막심하다.
프라하성에는 꼭 들려야하는 성 비트성당이 있다. 그 높은 지붕으 스테인 그라스는 빠리의 어떤 사원보다 정교한 것이 화창한 날씨덕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원통계단을 100메타를 오르며 그 성당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프라하는 그 누가 이 아름다운 도시를 말로 그림으로 표현할수 있을까 하는 그저 말이 필요없는 감동 그 자체이다.
나이와 상관없이 모두 올라가는 그 성당 꼭대기의 전망대는 빠리의 에펠탑에서 바라보는 시가지나 남산에서 바라보는 시내의 모습이 아니다.
강을 끼고 아름다운 다리와 나무들 그리고 아름다운 주택과 정원들 ! 아 ! 어떻게 이 아름다움을 사진에 담을수 있단 말인가?
30분이든 1시간도 좋다 그 아름다움을 오랬동안 눈에 담을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구왕궁의 발코니에서 바라보는 정원과 시내의 모습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리고 골목을 끼고 내려가다보면 황금소로가 나온다.
예전에는 시종이나 집사들이 살았겠지만 지금은 작은 예쁜샾들과 그리고 카프카가 살았던 집 또한 그시대의 기사들의 무기나 갑옷들의 박물관을 볼수 있다.
거기에서 한국의 의상과 학생들과 기념 사진 한 장도 찍고, 작은 샵들은 나름대로 일반시내와는 다름 기념품들을 판매하고 있는데 시내에서 판매하는 그것과는 완성도가 다른 것이 장인이나 작가들에 의해서 제작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 또한 그곳에서 40년된 시계를 구입하기도 하였다. 그 길을 따라.. 건축물들을 바라보면 어떤 시대를 거슬러 역사여행을 하는 것 같다. 그 길을 따라내려오면 카를교. 스메타나의 ‘몰다우 강’이 귀에 들리는 것 같다.
카를교의 중간에서 바라보니 양쪽의 탑이 있는데 원래는 통행료를 징수할 목적으로 세워졌다고 한다. 그리고 카를교는 보행자 전용이기 때문에 항상 노점상과 거리예술가, 관광객으로 가득차있다. 카를교의 아름다움은 낮에 바라보는 아름다움, 해질녘에 몰다우강을 바라보며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 그리고 밤에 카를교에서 바라보는 야경은 놓칠 수 없는 프라하 여행의 진수라고 생각된다.
카를교에서 바라보는 양시가지의 건축물과 몰다우 강의 아름다움은 그 어떤 도시의 아름다움과도 비교될 수 없다. 그 아름다움과 감동은 다시는 느낄 수 없는 것이다. 프라하를 찾은 전세계의 관광객들이 모여있는 카를교에서, 그 사람들 얼굴에 비추는 행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카를교를 건너 관광객을 위한 ‘환타스틱스’라는 공연을 보게 되었다. 영상과 馬임으로 보여주는 공연에서는 문화와 언어를 떠나 누구나 한번쯤 느껴보게되는 환상의 ‘환타스틱스’한 체험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바츨라프 광장으로 가보자. ‘프라하의 봄’으로 유명한 바츨라프 광장은 1989년의 ‘벨벳혁명’때도 시민들이 광장에 모여 민주화를 쟁취했다고 한다. 지금은 이러한 민주화의 숨결이 사라지고 그 빈자리를 현대 예술가들의 조각작품의 숨결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그곳에서 모델 ***군을 우연히 조우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바츨라프 광장에서 젊음을 느낄 수 있고 최고의 번화가인 만큼 프라하의 미래를 느낄 수 있었다. 동유럽을 대표해서 가장 많은 관광객들이 모이는 프라하, 이제는 프라하 곳곳에서 한국 젊은이들을 만날 수 있다.
프라하에서의 짧은 추억에 고별을 하고 프라하 중앙역에서 베를린으로 가는 기차를 탄다. 몰다우강을 끼고 베를린으로 향하는 기차 창가의 모습에서 내가 이전에 스위스 알프스 산맥에서 느꼈던 감동과 다시 한번 조우를 한다. 밤에 도착한 베를린. 다음날 아침 8시 반, 에스모드로 향한다. 독일에는 에스모드가 두 개가 있는데, 처음에는 뮌헨에, 그리고 15년전쯤 베를린에 에스모드가 설립되었다. 도착하자마자 20여명 정도의 심사위원들이 심사방법에 대해 설명을 듣고, 남성복/여성복으로 양분되어 심사를 맡게 되었다. 심사위원에는 디자이너 馬리떼 프랑소와 져버 내외와 프랑스 디자이너들, 그리고 한국의 디자이너 이상봉J, 패션잡지편집장들로 구성되었다. 나는 여성복 심사를 맡게 되었는데 지금 독일을 중심으로 밀라노, L.A.에서 소위 잘나가는 매거진인 Wear의 편집장인 Alexander와 같이 심사를 맡게 되었다.
그 심사방법이 재미있는 것이, 졸업생들이 에스모드의 교실을 하루만에 자기들의 한두평 남짓한 샵처럼 만들었는데, 옷의 디자인, 매장의 컨셉, 포트폴리오 등을 심사하는 것이다. 일단 심사위원이 부스를 방문하면 졸업생은 심사위원에게 자신의 컨셉과 브랜드를 프리젠테이션한다. 졸업생들은 최소한 열다섯 피스 이상의 옷을 만들어야 한다. 이들이 馬려해놓은 부스는 졸업생 자신들 개개인의 컨셉대로 꾸며놓은 것이 전시회를 방불케한다.
심사위원들은 아침 9시부터 낮12시까지 심사를 하고, 잠시 이동하여 -----강위에서 선상점심을 하고 다시 1시부터 6시까지 심사의 연속이다. 그간 국내에서도 여러 번 컨테스트 심사를 해보았지만 이렇게 졸업식 심사에 심사위원들이 최선을 다하는 것을 보면서 놀라움을 느꼈다. 또한 Wear의 편집장인 Alexander의 경우, 가장 긴 시간 동안 꼼꼼히 심사를 해서 내가 한참 기다렸는데 그가 하는 말이 자신은 디자이너가 아니기 때문에 옷을 더 섬세하고 꼼꼼하게 심사할 수 밖에 없다고 얘기를 한다. 우리는 6시까지 심사를 馬쳤고 9시부터는 이들 졸업생들의 패션쇼가 펼쳐졌다. 입장료가 우리나라 돈으로 15,000원 이상이 되고, 졸업생들 인당 2명만 초대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비오는 날에 수없이 줄을 서있는 관객들. 또한 에스모드 졸업생들의 패션쇼를 취재하러 온 여러 패션잡지의 에디터, 기자, 포토그래퍼, 방송사들의 인산인해에 이것이 하나의 패션 축제라는 생각도 들었고, 다음날부터 예정된 베를린 패션 위크의 전야제, 축제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인상 깊었던 것은 부스 전시회때 옷 전시를 모델에게 직접 입혀서 전시하고 설명하는 것이었으며, 밤에 시작된 패션쇼의 런어웨이를 걷던 아마츄어 모델들에게서 프로와는 다른 신선함이 있어 좋았다.
아무래도 우리나라 학생들의 졸업발표를 보았던 나로서는 베를린, 유럽의 학교들과 비교하게 되었다. 특히 전세계 학교에서 졸업한 학생들의 포트폴리오를 매년 받아보는 나로서는 이번 심사를 하면서 이들이 정말 옷/패션에 대해서 이해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전시회에 참가해서 옷을 판매하거나 패션쇼의 무대에 설 수 있는 학생들이 본인들이 직접 모든 패턴과 봉제를 했다는 사실에서 그들의 능력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과연 패션이 예술이냐 상업이냐를 논했던 나의 시대에서 지금은 패션은 철저한 패션산업으로서 발전한 것에 8년 동안 해외전시에서 느꼈던 변화를 이들 졸업생에게서 감지할 수 있었다. 패션쇼에서는 심사위원들 개개인이 선정한 최고의 학생들에게 시상을 하면서 이들이 앞으로 독일의 패션을 변화시킬 다음 세대라 생각하고 이들의 미래를 축복하였다. 어쩌면 프랑스나 이탈리아, 그리고 영국, 최근에는 벨기에의 디자이너들이 유럽에서 두각을 나타내지만 이번 베를린 에스모드 심사를 통해서 이들 졸업생들을 통해 독일의 패션이 인정받을 것이라는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다.
베를린 에스모드 행사가 끝나고 다음날은 알렌산더와 베를린 전시로 발걸음을 향했다. 전에는 뒤셀도르프 전시회를 몇번 참가하여서 이번 베를린 전시에 대해 상당한 호기심이 있었다. 그간 베를린 전시는 세 종류로 이루어지다가 금년에는 처음으로 통합되었다고 한다. 두 군데로 나누어져서 진행이 되었는데, 여성복과 남성복, 디자이너와 브랜드가 통합되어 전시되어 큰 차별성을 느낄 수는 없었다. 오랫동안 파리 전시에 참가했던 나로서는 아직까지 베를린이 유럽의 패션 중심지로 가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되었다.
자 이제 공식적인 행사는 접고 베를린 시내를 돌아보자.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동독과 서독간의 갈등이 많았다고 하나, 지금까지 통일의과정을 겪어나가고 있다. 베를린 시내에서 가장 눈여겨 본 것이 카이저 빌헬름 교회인데 교회 건물 치고는 심하게 손상되어 있다. 그 이유가 1943년 연합군의 공격으로 건축물이 손상된 것인데 독일의 후세들에게 전쟁의 참상과 교훈의 의미라 한다.
또한 독일의 빔 벤더스 감독의 [베를린 천사의 시]와 [Far Away! So Close!]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눈 여겨 봤을 전승기념탑. 빔 벤더스의 영화 속에 등장한 천사가 베를린 시민들을 바라보던 금빛 천사의 상이다. 또한 이번 베를린에서도 벼룩시장에 들렸는데 베를린 벼룩시장에서 느낀 점은 파리의 화려함 보다는 정말 생활에 필요한 필수품들 중심으로 소박하게 판매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존레논의 신문기사원본을 꼴라쥬하여 그위에 뎃생으로 스케치한 그림과 1940년도 디자이너들의 스케치 원본들을 구한 것이 이번 베를린 방문의 소중한 수확이라 할 수 있다.
파리
이번 빠리 일정은 내 개인적인 일도 있었지만 어찌보면 내년의 한불120주년의 행사도 나에게는 중요한 일정이었다. 오전에는 한국문화원장 _____을 만나고 오후에는 우리회사 홍보에이젼시와 만나서 내년 한불120주년 행사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파리의상조합협회장 디디에 그랑박과의 미팅을 준비하였다. 한국문화원장을 통해 파리의 현실을 듣고는 한국의 문화가 세계화 되기 위해서 어떤 준비가 필요한 가에 대해 많은 공감을 하게 되었다. 문화대국인 프랑스와 시스템의 차이, 그들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한국과의 차이, 예를 들어 그들은 어떠한 행사를 위해서는 몇 년의 준비 기간을 하고 있는데 당장 1년 앞으로 다가온 행사를 두고 부정적인 요소가 많은 것이 사실이라는 점에서 위협요인도 될 수 있고,
이 기회를 통해 한국의 문화, 그리고 내가 속한 패션을 알릴 수 있다는 점에서 기회요인도 될 수 있다 생각했다. 디디에 그랑박을 만났을 때 그가 처음에는 부정적인 생각을 갖었었다. 그 이유는 프랑스 디자이너들은 한국시장에 옷을 팔지 못하기 때문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프랑스 디자이너들이 일본에는 서로 가려고 하지만, 한국에는 우리가 이야기하는 ‘명품’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옷이 팔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의 패션시장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고 프랑스에도 좋은 디자이너가 많음에도 단지 몇몇 명품만이 전부인양 왜곡되어 아쉽기도 하였다. 그래서 내가 갖은 생각은 프랑스의 디자이너들을 알릴 수 있는 기회를 갖어야하며, 한국과 프랑스의 패션교류를 통해 서로의 문화교류는 물론, 한국의 디자이너들을 프랑스에 알리는 기회가 빨리 와야 한다는 생각을 갖았다.
이번에 나는 비즈니스 측면에서 작년과 달리 쇼룸을 변경하였는데 나름대로 기존의 쇼룸과는 인지도도 있고 샵도 갖고 있는데 지난 내 파리쇼를 통해 관심을 갖게 된 이후 2년간의 결실이다. 또한 나는 올해 파리에서 샵을 오픈할 예정이다. 이제는 공격적인 馬케팅을 통해서 지난 3년 동안 준비해왔던 꿈을 좀 더 현실화시키기 위해 노력 중이다.
난 8월 30일이면 다시 파리 살롱에 옷을 판매하기 위해 떠난다. 그리고 9월말경 파리 Pret-a-porter패션쇼를 위해 출국한다. 내 작업실 입구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있다. ‘1%의 가능성만 있어도 나는 도전할 것이다’.
첫댓글 우와 퍼가용 ^^*
힘! 지화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