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까쓴눈사람 [ieunmini@hanmail.net]※ ※싸이 : ggogga dream[http://www.cyworld.com/ieunmini]※ ※까페 : LOVE♡꼬까쓴눈사람[http://cafe.daum.net/LOVEsnowman]※ ───────────────【 춘자고교 왕따 오춘자 】─────────────── ※춘자고교 왕따 오춘자※ [61] 바닥을 응시하고 있던 설우의 입이 서서히 웃기 시작한다.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참기위해 입술을 꾹 다물고 있다. 쑥스러워하는 나에 비해 설우는 좋아하는 것이 얼굴에 역력히 드러났다. 벌떡. 내 손을 꽉 잡으며 타이어에서 일어난다. 멀뚱히 설우를 올려다보았다. “우리도 연습하러 가자!” 표정이 밝다. 설우가 기뻐하는 걸 보니 내가 더 기분이 좋다. 내가 이 아이를 웃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하기만 하다. “응!” 밝게 미소를 지으며 일어났다. 우리는 꼭 씨름에서 만점을 받을 것이다. 드디어 가슴 뛰고 고대했던 토요일이 다가왔다. 학교가 파하고 집에서 옷가지들을 챙겨 설우와 함께 그의 집으로 향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중 대형마트 앞을 지나게 되었다. 순간 설우에게 맛있는 저녁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마구 마구 치솟았다. “설우야, 잠깐만 세워봐!” 끼이잉-. 내가 소리치자 설우는 마트에서 10m정도 떨어진 곳에 오토바이를 세웠다. 의아해하며 뒤를 돌아본다. “왜?” “마트에서 뭐 좀 사가자.” “먹을 거라면 집에도 많이 있어.” “과자사려고 하는 거 아니야. 다시 돌아가자. 응?” 설우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핸들을 꺾어 다시 마트가 있는 곳으로 방향을 돌린다. 난 설우와 함께 식품코너를 돌아다니며 야채 및 각종 음식재료를 바구니에 담았다. “뭐 만들려고?” “응? 글쎄. 아직 생각 안 해봤는데?” “야. 그것도 생각 안하고 대중없이 사냐?” “재료를 보고 거기에 맞춰서 만들면 되잖아.”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나를 보는 설우다. 그렇다. 난 아직 무엇을 만들지조차 결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요리를 만들어주겠다는 생각도 너무 갑작스레 떠오른 지라 미처 그것까지 생각하지는 못했다. 마트 안을 돌아다니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봤지만 좀처럼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설우의 말처럼 음식재료를 이것저것 대중없이 사고 있는 중이었다. 결국 세 봉지 가득 음식재료를 산 나는 설우에게 만족스럽다는 듯 웃어보였다. “내가 너 때문에 못 살겠다.”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기분이 좋다. 설우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짐부터 풀었다. 짐이래봤자 옷 한 벌과 속옷, 화장품이 전부다. 난 식탁 위에 마트에서 사왔던 음식재료들을 풀어놓았다. 감자, 애호박, 당근, 콩나물, 시금치, 버섯, 돼지고기, 피망, 양파, 참치통조림, 게맛살, 햄, 계란, 우엉. 난 재료들을 보며 생각했다. 이걸로 과연 무엇을 만들 수 있을까? 하고. 우선 감자와 당근, 돼지고기, 피망을 보니 카레가 떠올랐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카레가루가 없다. 어쩔 수 없이 카레는 패스. 그럼 당근, 시금치, 맛살, 햄, 계란, 우엉으로 김밥이나 만들까? 그렇지만 이것 역시 김밥의 핵심인 김이 없다. 결국 2시간 후. 내가 설우를 위해 식탁에 차린 음식은 감자와 호박, 당근, 버섯, 피망, 햄을 볶아 만든 야채볶음요리, 콩나물밥, 돼지고기와 참치, 양파를 넣은 돼지참치찌개, 게맛살과 햄을 넣은 계란말이, 그리고 우엉조림이었다. 꽤 많이 차린 나름대로의 진수성찬이다. 설우도 꽤나 놀라는 눈치였다. “야, 너 시집가도 되겠다.” “정말?” 내가 만든 음식을 먹어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설우가 말했다. 맛있다는 소리보다 더 듣기 좋은 칭찬이었다. 왜냐하면, 마치 ‘너 나한테 시집와라’로 들렸기 때문이다. 아~부끄러워라. 저녁식사를 끝낸 우리는 TV를 보고, 또 컴퓨터게임도 했다. 그러다보니 시간이 9시나 되었다. 설우가 씻고 나오자 곧이어 내가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하려고 옷을 벗으려다 문득 같이 잘 것도 아닌데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어 그냥 관두기로 했다. 어차피 샤워는 오늘 아침에 했으니까 또 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게다가 샤워를 한 나를 보고 설우가 오해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하여 세수와 손과 발만 씻은 뒤 욕실에서 나와 설우의 방으로 갔다. TV를 보고 있던 설우의 옆에 다소곳이 앉았다. “재밌어?” “그냥 보는 거지 뭐. 피곤하지? 여기서 자. 나는 부모님 방에서 잘게.” 침대에서 일어나는 설우다. 지금 자는 건 너무 아쉽다. “에…벌써 자려고?” “왜? 잠 안 와?” “응…아! 나, 사진 보여줘.” “사진?” 할 일이 뭐가 있나 곰곰이 생각하다 앨범이 떠올랐다. 대게 친구 집이나 애인의 집에 가면 앨범은 꼭 보지 않던가. 물론, TV에서 본 것들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나도 꼭 한번 해보고 싶었다. “보여줘. 설우야. 응?” “알았어. 그런 건 봐서 뭐하려고.” 궁시렁거리며 책상 밑을 살피는 설우다. 박스 안에서 책 2권을 꺼낸다. “자, 앨범.” 설우가 앨범이라며 내게 건넨 것은 초등학교, 중학교의 졸업앨범이었다. 내가 보고 싶었던 앨범은 이런 게 아닌데. 졸업앨범엔 설우의 사진이 많아봤자 서너 개가 전부일 것이다. “졸업앨범 말고 아기 때부터 찍어왔던 사진은 없어?” “어. 없어. 너무 없어서 앨범 같은데 넣지도 않아.” “왜 없는데?” “사진 찍는 걸 그다지 안 좋아해서 많이 안 찍었어. 일년에 두세 장 찍나 몰라.” 엑. 그럴 수가. 그래도 사진은 추억인데. 난 나중에 늙어 얼굴이 쭈글쭈글해졌을 때 젊어서 찍은 사진을 보며 위안을 삼기위해서라도 사진을 많이 찍어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럼 우리 내일 사진 찍으러 가자!” “뭐?” “지금까지 못 찍었던 사진들을 내일 몽땅 찍는 거야! 갈 거지??” “사진은 무슨.” “설우야, 제발……” 난 애처로운 눈빛을 설우에게 보내었다. 그에 마음이 약해진 건지 한숨을 푹 내쉰다. “알았어. 가면 될 거 아니냐. 일찍 자.” “응! 너도 잘 자.” 결국 약속을 받아내었다. 설우가 방에서 나가고 난 설우의 졸업앨범을 구경한 뒤 잠을 청했다. 지금 내가 누워있는 곳이 설우의 침대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 찬다. 베게에 얼굴을 묻어보기도 하고 또 이불을 안아보기도 했다. 이곳저곳에서 설우의 체취가 느껴진다. 행복하다. 그간 몇 년 동안 아이들에게 시달려왔던 힘든 나날들도 모두 날아가 버린다. “흐음…”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서서히 눈이 감긴다. 그렇게 난 설우의 방에서 잠이 들었다. ********* 달려오는 자동차. 그리고 설우. 그는 가까워지는 자동차를 응시한 체 제자리에 가만히 서있다. 끼이이익 - 꽝!! 하늘에서 설우가 떨어진다. 핏빛의 비를 뿌리며. 그렇게 쿵. 바닥에 떨어진다. “꺄아아아악!!!!” 벌떡. 난 악몽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 너무나도 생생한 꿈이 내 심장을 조인다. 쾅! “무슨 일이야? 왜 그래??” 내 비명소리를 들은 설우가 헐레벌떡 방문을 열었다. 이마에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힌 나를 멍하니 바라본다. 곧 내게로 다가와 손등으로 땀을 닦아주었다. “악몽이라도 꾼 거야?” 걱정스럽게 날 쳐다본다. 설우는 멀쩡했다. 왜 그런 꿈을 꾼 걸까?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꿈을 꾼 적이 있다. “아무데도 가지마.” “뭐…?” “같이 있어줘.” 너무 무서운 나머지 설우에게 안기고 말았다. 그에 설우가 흠칫 놀란다. 아직까지도 진정이 되지 않는다. 비록 꿈이지만 심장이 철렁했다. 설우가 두 팔로 내 어깨를 감싸주었다. “알았어. 곁에 있을 테니까 진정해.” 난 고갤 들어 설우를 보았다. 우리는 어두운 조명 아래 서로의 눈을 응시했다. 가슴이 진정됨과 동시에 설우의 입술이 다가온다. 그에 내 가슴은 또 다시 쿵쾅거린다. 길고 긴 키스와 함께 우려했던 일이 일어났다. ........... 첫 문자, 첫 친구, 첫 사랑, 첫 교제, 첫 키스… 그리고 첫 경험……. 설우는 내게 있어 항상 처음인 존재였다. 그날 밤. 난 깊이 후회를 했다. 그냥 샤워를 하는 거였는데…하고. 다음날. 설우와 함께 가까운 유원지로 나들이를 나왔다. 가을이 다가오는 건지 날씨가 덥지도 않고 딱 좋다. “야야. 그만 좀 찍자. 도대체 그 필름은 몇 판 짜리냐? 한 백판은 되냐?” 2시간 내도록 사진만 찍으며 돌아다니자 설우가 불만을 토로했다. 난 재미있는데 설우는 그렇지가 않은 가 보다. “괜찮아. 아직 필름이 2통이나 남았으니까.” 일부러 사진을 많이 찍으려고 필름을 4통이나 준비했었다. 참고로 즉석카메라의 필름은 너무 비싼지라 일반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난 나무아래에 앉아있는 설우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몇 판이나 찍었냐?” “음…40판정도? 내가 앨범 만들어서 너 줄게.” “필요 없어.” 설우가 담배 한 대를 입에 문다. 정말 이해가 안 된다. 설우는 사진발도 잘 받아서 백이면 백 모두 잘 나오는데, 왜 사진 찍는 걸 싫어하는 걸까? 내가 설우였다면 매일 사진을 찍고 다닐 텐데…. 맴맴맴맴 -. 나무 위에 매미가 붙어있나 보다. 귀를 울린다. 오늘 아침 설우와 함께 한 침대에서 눈을 떴다. 모두 벗고 있었던 터라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하지만 솔직히 나보다 설우가 더 쑥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야. 이불 속으로 들어가.’ ‘응?…왜?’ ‘옷 입어야지. 내가 먼저 입고 나갈 테니까 그 전에 절대 이불 밖으로 나오지 마. 알았지?’ ‘…아…알겠어.’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우스울 수가 없다. 그리고 설우가 너무 귀엽게만 보인다. 귀엽다고 하면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겠지만. 후후. “아이스크림 먹을래?” “아이스크림?” “저기.” 눈짓으로 우측을 가리킨다. 그곳엔 아이스크림 장수가 어린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을 건네주고 있었다. 설우는 아이스크림을 2개 사서 다시 내 곁으로 돌아왔다. 설우에게 받은 아이스크림이 혀끝에서 사르르 녹아내린다. 달콤하다. 우리는 장작 5시간 동안 이 거리 저 거리를 돌아다녔다. 필름도 이제 한 통밖에 남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우리는 길을 건너기 위해 횡단보도 앞에 섰다. 신호가 아직 빨간색이다. 녹색신호가 켜지길 기다리며 정면을 응시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량들이 도로를 쌩쌩 달린다. “한통은 다음에 찍어야겠다. 다음에 또 놀러가자. 응?” “사진 찍는 게 그렇게 좋냐?” “응? 그냥 보통.” “좋으면 좋은 거고 싫으면 싫은 거지. 보통은 뭐냐? 내가 그랬잖아. 자기 의사는 똑바로 밝히라고.” “그치만 그렇게 좋은 것도 아니고 그렇게 싫은 것도 아닌 걸. 난 그냥 네 얼굴을 항상 보고 싶었을 뿐이야.” 내 대답에 설우의 시선이 한동안 나에게 머물러 있다. 너무 조용하다 싶어 슬쩍 눈동자를 올려 설우를 확인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설우가 부끄러워하며 시선을 정면으로 피해버린다. 그에 나또한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공중 위의 자동차 신호등이 녹색에서 노란색으로 바뀌었다. 자동차들이 정지선에서 하나, 둘 멈추기 시작한다. “나중에 결혼하면 지겹게 볼 텐데, 뭐하려고.” 두근!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우의 발언에 설레어 가슴이 뛰어서가 아니다. 그 말…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이 상황도 처음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역력이 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설우가 붉어진 얼굴을 하며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했다. ‘그래. 본 적이 있어. 지금 이 상황, 저 뒷모습. 어디서 봤지?…… 꿈. 그래, 꿈이야! 꿈에서 봤던 기억이 나!’ 순간 어제 꾸었던 악몽이 떠올랐다. 차에 치이던 설우의 모습이. 빵빵!! 아니나 다를까, 마치 꿈이 현실이 되듯 승용차 한 대가 설우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설우는 놀라 제자리에 멈춰버렸고 동그래진 눈으로 멀뚱히 승용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설우야…안돼….” 난 중얼거리며 앞으로 한 걸음 걸어 나갔다. 그리고 설우를 구하기 위해 힘껏 뛰기 시작했다. “설우야!!!” 내가 소리치고 설우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난 설우를 밀어내기 위해 손을 뻗었다. 설우 대신 다쳐도 좋다고 생각했다.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부아아앙 -. 승용차에 타고 있던 운전자는 당황한 나머지 브레이크대신 엑셀러레이트를 밟아 속력을 높였다. 차는 이제 설우와 10cm가량의 거리를 두고 있다. 내 손도 설우에게 닿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런데 그때…… “가!!!” 파악 ─ ! 설우의 손에 의해 난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쾅!!!!!!! 끝내 악마 같은 승용차는 설우를 받고 5m가량을 더 달린 후 세워졌다. “서…설우야…안돼…” 눈물이 내 뺨을 타고 흘러내리면… 붉은 선혈이 설우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춘자고교 왕따 오춘자※ [노래 들으며 소설보기]클릭☜ [62] 눈(雪)…그리고 비(雨) Ⅰ (내기) “이설우! 그게 사실이더냐!” 오랜만에 당구를 치기위해 광현이와 함께 당구장을 찾았다. 그곳엔 친구 녀석들이 먼저 와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호민이가 나를 보곤 오두방정을 떨어댄다. 당구를 치고 있던 다른 친구들까지 나에게 주목했다. “뭐가?” “뭐기는 인마! 너 왕따랑 사귄다고 전교에 소문이 자자하던데. 시치미 떼는 거냐??” “왕따?” “오춘자말이야! 진짜 사겨?” 또 그 얘기다. 춘자와 사귀기로 한지 이제 겨우 3일째이건만 모르는 사람이 없다. 춘자 이 노무 지지배가 소문을 내고 다니는 건지…소식이 무지하게 빠르다. 하긴 춘자로서는 나 같은 놈이랑 사귀는 게 가문의 큰 영광일지도 모른다. “사귀면 왜?” “이 녀석 진짠가 보네. 야, 너 미쳤냐? 왜 그런 애랑 사귀고 그래?” 호민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미친놈 바라보듯 나를 보며 말했다. 어느새 다른 녀석들까지 내 주위로 몰려들었다. 부담스러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농담이지? 너 지금까지 그 예쁜 애들이랑 사귀었으면서 왜 갑자기 그런 못생긴 애랑 사귀는 거야?” 이번엔 호민이가 아닌 공철이가 말했다. 그런데 오춘자가 그렇게 못생겼나? 내 눈엔 귀엽기만 하던데. 친구들의 설교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우아…난 걔 진짜 싫더라.” “오춘자는 애가 너무 답답해서 짜증나.” “그거 보면 졸라 쏠려.” “도대체 걔 어디가 좋아서 사귀는 거야??” 기분이 더러웠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 내 자존심에 커다란 흠집이 생겼다. 난 아직 사랑보단 자존심이라는 걸까? 금이 간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순간 거짓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너…너희들은 그걸 또 그냥 곧이곧대로 믿냐? 내가 미쳤다고 그런 기집애랑 사귀겠어?” “그럼 그 소문은 뭐야?” “소문은 다 사실이야. 사귀는 것도 진짜고. 하지만 난 지금 광현이랑 내기 중이야. 내기만 아니었으면 나도 그런 애랑은 사귀지도 않아. 이것들이 날 뭘로 보고.” 옆에 있던 광현이가 놀라며 나를 본다. 놀랄 만도 하다. 모두 사실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내 말이 거짓말인 줄 모르는 녀석들은 일제히 ‘그럼 그렇지’라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기? 무슨 내기?” 호민이가 물었다. “오춘자가 넘어오나 안 넘어오나…그거야. 그치, 광현아.” 난 녀석들이 믿지 않을까봐 광현이까지 합세시켰다. 그에 광현인 태연하게 잘 받아넘겼다. “응. 확실하게 넘어오면 만원, 키스 한번씩 할 때마다 또 만원, 잠자면 3만원 주기로 했어. 만약, 춘자한테 차이면 설우가 나한테 10만원 주는 거야.” “오! 그거 재밌겠는데? 나도 끼워줘! 난 광현이 쪽!” “나는 설우 쪽!”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자기들도 하겠다면 끼워달라는 친구 녀석들이 아닌가. 당황한 내가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있자 광현이가 대신 대답을 해주었다. “그래. 너희들도 같이 해.” “좋아! 이설우 파이팅!!” “난 춘자 파이팅!” “하하하.” 이리하며 내 사랑은 얼떨결에 내기가 되어버렸다. 이제 와서 사실대로 말하려니 내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그리고 왠지 늦었다는 생각이 역력히 들었다. 그땐 정말 춘자만 모르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엔 정말 비밀이란 없었다. (감기) 몇 달 뒤, 친구들에게 내기에 이긴 값을 받았다. 하지만 뒤늦게 이 돈을 내가 받게 되면 나까지 춘자에 대한 사랑을 내기로 인정한 꼴이 된다는 생각에 모두 되돌려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나, 오춘자 진심으로 좋아해!” 친구들은 저마다 입을 벌리고서 놀라워했다. 그리고 존경한다고까지 말했다. 미친놈들. 춘자가 얼마나 귀여운데…. 그날 오후 정말 십년 만에 돈을 주웠다. 그것도 뭉치로 말이다. 꼬깃꼬깃 접혀있는 돈은 총 3만원이었다. 일단 내 신조가 ‘주우면 임자’라는 것이기에 그냥 내가 가지기로 하였다. 그리고 주운 돈은 잽싸게 써야하는 것이 원칙이므로 난 춘자에게 찾아갔다. 비록 주운 돈이지만 이 돈으로 맛있는 걸 사주고 싶었다. 어쩐 일인지 오늘따라 통 연락이 안돼 집으로 찾아갔더니 춘자네 아버님과 만나게 되었다. 아버님 덕에 집으로 들어가게 된 나는 곧장 춘자의 방으로 올라갔다. 춘자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제야 왜 전화를 받지 않았는지 이해가 되었다. 잠이 든 춘자의 모습은 너무 사랑스럽기만 했다. “내일 보자.” 혼자 인사를 한 뒤 방에서 나가기위해 뒤돌아섰다. 그런데 자는 줄로만 알았던 춘자가 나를 불러 세웠다. “왜 그랬어?” 다짜고짜 이유를 묻는 춘자의 행동에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그것도 아주 잠시였다. 춘자가 어떻게 내기에 관한 걸 알고 있는지 놀라울 뿐이다. 이런 일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기에 난 아무런 변명도 할 수가 없었다. 화가 난 춘자가 침대에서 일어나 울분을 토해낸다. “나한테 잘해주면, 나 너 영영 포기 못할 지도 몰라. 네 친구들 말대로 너 정말 나한테 코 낄 지도 모른다고!” 바보…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내가 왜 널 포기 못하는 지 알아? 왕따라는 거…애들한테 무시당하고, 짓밟히고, 개 마냥 얻어터지고… 그러는 거 정말 지긋지긋 했어. 그런데 네가 내 옆에 있으니까 애들도 더 이상 괴롭히지 않더라고.” 왠지 더 이상 들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춘자는 내가 귀를 막기도 전에 모든 말을 퍼부어버렸다. “그래서 아! 이거다, 싶었지. 학교 졸업할 때까지만 이용해먹자고 생각했어. 뭐 그것도 이젠 끝이지만.” 찰싹!!!! 내 머리가 화가 났다고 판단하기도 전에 내 손이 먼저 올라가버렸다. 실망감이 물 밀 듯이 밀려온다. 난 진심이었는데 이 바보는 그게 아니었나 보다. 날 이용해먹을 줄이라곤 상상도 못했다. 소란에 춘자의 아버님이 들어오셨다. 난 죄송하다는 말을 드리곤 그 집에서 나와 버렸다. “하아.” 집밖으로 나온 난 갑갑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손바닥이 얼얼하다. 그만큼 너무 세게 때려버리고 말았다. 앞집 담벼락에 기대어 춘자네 방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 말…진심이었을까? 그렇게 창문을 바라보고 선지도 1시간째. 하늘에선 비를 쏟아내고 있다. 내 머리가 젖고, 옷이 젖고, 몸이 젖고, 게다가 마음까지 젖어버렸다. 그렇게 모진 말을 듣고도 쉽게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난 바보를 사랑했다. 비는 2시간이 더 지나서야 완전히 그쳤고 개인 밤하늘을 보며 난 발길을 돌렸다. 집에서 난 생각했다. 춘자가 했던 말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괘씸하기만 하다. 그렇게 열이 받아서인지 아님 장시간 비를 맞은 탓인지 난 고열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래서 다음날 학교도 늦게 가게 되었다. 여자아이들은 모두들 날 걱정해주었지만 춘자만은 그렇지가 않았다. 아픈 와중에도 춘자의 뺨을 계속 보게 되었다. 많이 아팠겠지? 정말 미안하기만 하다. 결국 너무 아파 더 이상 학교에 있을 수가 없었던 나는 조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여자들의 배웅을 받으며 교실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쓸쓸히 운동장을 걸으며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다. 우리 교실 유리창을…. ‘쳇. 한번도 안 내다보냐? 매정하기는.’ (help me) 아이들은 정말 눈치가 빨랐다. 특히 여자들이 더 했다. 춘자와 내가 지금 사이가 안 좋다는 걸 어찌 알아채곤 이토록 날 괴롭히는 것일까? 하지만 내가 좋아 매달리는 것 따윈 괴롭힘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나와 헤어졌다는 게 확실시되자 여자아이들이 춘자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탁! 갑자기 춘자의 뒤통수를 날리는 희자의 행동에 내가 더 놀랐다. 그리고 화가 났다. 당장이라도 저 여자의 머리채를 잡아 책상에 받고 싶은 심정이었다. 철썩!!! 희자가 뒤통수를 두 대나 때리자 춘자가 눈에 불꽃을 튀기며 희자의 뺨을 힘껏 내려쳤다. 정말 통쾌했고 너무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그에 가만히 있을 불여우가 아니었다. 흥분을 하며 희자가 손바닥을 쳐들고서 춘자의 뺨을 내려치려고 했다. 휘익-. 난 늦을 새라 잽싸게 소리쳤다. “그만해!!” 정확히 춘자의 뺨에 닿기 전에 손바닥이 멈췄다. 모두들, 춘자마저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싸우려면 나가서 싸워.” 그에 희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춘자를 끌고 밖으로 향했다. 저게 진짜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나. 저대로 그냥 나가게 두면 춘자가 불여우에게 맞을 것이 뻔했기에 난 불여우를 큰 소리로 불러 세웠다. “최희자! 너 아침 먹었냐?” “아침? 아니, 안 먹었는데?” “그럼 나랑 같이 매점이나 가자. 나도 안 먹었어.” 자리에서 일어나 춘자의 옆을 지나갔다. 가슴이 쓰라리다. 희자가 기뻐하며 내 팔에 팔짱을 낀다. 춘자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 지 그리고 뒷모습은 쓸쓸한지 확인을 해보고 싶었지만 이미 교실에서 나와 버린지라 그럴 수가 없었다. 휙. 난 팔을 들어 희자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갑갑함에 담배나 피고자 옥상으로 향했다. 그에 희자가 어리둥절해한다. “매점 안 가? 내가 사줄게.” “됐고. 너 나 좀 따라와.” 희자를 데리고 옥상으로 올라왔다. 담배 한 대를 꺼내 입에 물었다. 난 그 한 대를 다 태울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희자는 두려움 반, 기대 반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다. 꽁초가 된 담배를 끄기 위해 희자에게 말했다. “손바닥.” “응? 뭐라고 그랬어?” “손바닥 대라고.” “자. 근데 왜?” 서슴없이 손바닥을 내민다. 난 꽁초를 희자의 손바닥으로 향했다. 마치 손바닥에 담배를 지져 끌 것처럼 말이다. 희자의 표정이 가관이 아니다. 겁에 질려 얼굴이 새파랗다. “으…으…” 치직-. 난 희자의 손바닥을 비켜 옥상 난간에 담뱃불을 지졌다. 불이 모두 꺼지고 난간은 시커멓게 탔다. 희자가 손바닥을 덜덜 떨며 불에 그을린 난간을 응시하고 있다. 난 꽁초를 옥상 아래로 내던지며 말했다. “한번만 더 내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간 다음엔 네 손바닥이 저렇게 될 거다. 내 말 명심하는 게 좋아.” (음악시간) 음악선생이 열 받을 대로 열 받아있는데 오춘자 이 기집애는 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울리지 않게 땡땡이라도 치려는 건지 걱정이 여간 되는 게 아니다. “오춘자, 체육인 줄 알고 밖에 나간 거 아냐?” 옆에 앉아있던 광현이가 말했다. 걔가 체육으로 알고 있다니 그럴 리가 있겠는가. “왜?” “아까 애들이 장난친다고 칠판에다 수업 변경됐다고 적는 걸 봤거든. 하여튼 오춘자 걘 이제 음악한테 죽었다.” 이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 같다. 순진한 그 바보는 속고도 남을 게 분명하다. 그래서 지금쯤이면 체육복을 입고 운동장을 헤매고 있을 것이다. 난 급한 마음에 체육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었다. [난데, 지금 운동장에 좀 가봐. 만약에 춘자가 울고 있으면 좀 달래주고. 부탁 좀 할게.] 그래. 그 바보는 속았다는 생각에 또 울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음악이 무서워 올 엄두도 못 내고 있을 게 분명하다. 수업이 시작된 지 10분이 지나서야 춘자가 왔다. 체육복에 음악책도 들고 있지 않은 맨손이다. 춘자는 아이들의 시선에 많이 창피해했고, 또 음악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역시 그냥 넘어갈 음악이 아니었다. “왜 늦었냐니까!!” “체육인 줄 알았어요.” 음악의 물음에 착한 춘자는 아이들의 장난을 그냥 숨겨주었다. 결국 음악은 매를 들었고 춘자의 엉덩이를 향해 힘껏 휘둘렀다. 적어도 10대는 때릴 게 분명하다. 난 차마 춘자가 맞는 꼴은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급한 나머지… 뻐억!!! 옆에 있던 광현이의 뺨을 주먹으로 날려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라도 음악의 시선을 내게로 돌려야만 했다. 퍽!! 퍼억!!! 난 광현이를 마구 때렸고, 광현인 황당해하며 나를 보았다. 미안하다, 광현아. 철썩!!! “당장 엎드려뻗쳐!!!” 음악에게 맞은 뺨은 정말 아팠지만 그래도 시선을 돌리는 데에는 성공을 했다. 대신 내 엉덩이가 불어터졌지만 그래도 춘자가 맞지 않았기 때문에 참 다행이다. 음악시간이 끝나고 난 광현이의 화를 풀어주기 위해 진땀을 빼야만 했다. “그럼 건담로봇 나 줘.” 그리고 결과는 내 보물2호인 건담로봇을 줌으로서 해결이 났다. (동전과 변태) 친구들과 광현이 집에서 잠을 자고 학교로 향했다. 광현이 집은 춘자의 집과 가깝기 때문에 잘하면 버스정류장에서 만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은근히 기대를 하며 친구들과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하지만 춘자는 없었다. 기대한 만큼 실망도 컸다. “야. 저거 타야해! 빨리 뛰자!!” 광현이의 말대로 학교로 가는 버스가 정차해있는 것이 보였다. 난 이곳에서 춘자를 기다리고 싶었지만 저 차를 놓치면 지각을 하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친구들을 따라 버스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늦은 시각에 춘자가 등교할 리가 없었다. 맨 마지막으로 버스에 오른 나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춘자가 바로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째 표정이 영 심상치가 않다. 손에 만원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차비가 없는 듯 했다. 삑-. 난 교통카드를 한번 찍은 뒤 춘자 것까지 또 한번 찍었다. 삑-. 그리고 일부러 그랬다는 걸 숨기기 위해 운전기사에게 실수로 두 번 찍었다며 돈으로 다시 내줄 것을 요구했다. 운전기사는 내게 동전을 주었고 난 그것을 받지 않기 위해 1986년도에 만든 동전으로 바꾸어달라는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였다. 역시나 운전기사는 화를 내며 그런 건 없다고 받기 싫으면 관두라고 말했다. 그래서 난 기다렸다는 듯이 동전을 되돌려주었다. 뒤로 돌아서 친구 녀석들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별 희한한 녀석을 다 보겠네. 학생은 왜 계속 그러고 서있어? 돈 없어? …후. 됐으니까, 그냥 타. 어차피 앞 학생이 두 번이나 찍었으니까.” 다행이다. 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맨 끝자리로 들어갔다. 버스가 출발한 지 몇 분쯤 지나자 버스 안은 어느새 사람들로 꽉 들어찼다. 그래도 난 춘자를 찾을 수가 있었다. 한 시도 눈을 떼지 않고 죽- 지켜봤으니까. 그런데 그때 웬 변태 녀석이 춘자의 뒤에 붙는 것이 보였다. 저 늙은이는 아까 춘자 옆에 있던 여자의 엉덩이를 쓸어 만지던 녀석이었다. 춘자의 표정이 굳어졌다. 바보같이 소리 한번 지르지 않고 가만히 있다. 난 보다 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어디 가게?” 옆에 있던 광현이가 물었다. 난 대답하지 않고 자리에서 내려왔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을 파고들어 춘자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변태의 뒤에 섰다.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좋아?” 흠칫. 놀라 당황한 얼굴로 나를 본다. 난 변태를 버스 앞쪽으로 끌고 갔다. “미안해. 한번만 못 본 척 해줘, 학생.” 난처해하며 사정을 한다. 적어도 내 나이 벌 되는 자식이 있어 보이는 남자다. “못 본 척 했어요.” “으응…?” “딴 기집애들 엉덩이 만지는 건 못 본 척 했다고요. 하지만 저 여자 엉덩이 만지는 건 절대 용서 못해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괜히 소란을 피웠다간 춘자가 눈치 채기라도 할까 조용히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아저씨, 자식 있어요?” “아…아들만 둘이야. 왜 그러는데…?” “그래요? 그럼 지금부터 제 말 잘 새겨들어요. 저 매일 이 버스 타거든요? 한번만 더 내 눈에 띠었다간 아저씨 애들 제가 반은 죽여 놓을 거예요. 거짓말 아니니까 명심하세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내일부턴 나도 이 버스를 타지 않을 것이고, 춘자도 이 버스를 타지 않을 것이기에 그가 타도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겁을 줘야지만 내 성이 그나마 풀릴 것 같았기에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다음 정거장에서 남자는 내렸다. 난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체육을 찾았다. 부탁 한 가지를 하기 위해서였다. “내일부터 춘자랑 학교 와.” “명령?” “아니. 부탁. 걔 좀 데리고 와줘. 부탁이야.” “흠. 왜?” “변태 녀석들이 자꾸 꼬이잖아.”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그래도 방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체육에게 춘자를 태우고 오라고 부탁을 한 것이다. 역시나 체육은 순순히 응하지 않았다. “부탁 좀 할게.” “그럼 조건이 있어.” “쳇. 그냥 해주면 되지 왜 또 조건을 달아?” “싫음 말고.” “아…알았어. 뭔데?” “클럽에서 일 좀 해줘.” 조직에 들어오라는 것보단 백배 낫지만 그래도 클럽 같은데서 일을 하라니…마음에 안 든다. “나더러 지금 삐끼나 웨이터 따윌 하라고??” “아니. 그게 아닌데.” “그럼…?” “주차요원. 주차정도는 할 줄 알지?” 윽. 이렇게 황당할 때가……. 하지만 춘자를 생각한다면 어쩔 수가 없다. 난 결국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그 후로 체육은 매일같이 춘자를 태우고 다녔다.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 ※춘자고교 왕따 오춘자※ [노래 들으며 소설보기]클릭☜ [63] 눈(雪)…그리고 비(雨) Ⅱ (걱정시키지 마) 우연히 춘자를 끌고 옥상으로 가는 옹식이 애들을 보았다. 순간 화가 나 멱살을 잡고 몇 십대 갈겨주고 싶다는 충동이 드는 걸 간신히 참아내었다. 녀석들의 뒤를 밟아 옥상으로 올라갔다. 난 곧장 체육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당장 옥상으로 와줘! 알바 비 한 푼도 안 받을 테니까 와서 춘자 좀 도와달라고!” 그렇게 일방적인 통화를 끝내고 체육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옥상 문틈으로 옹식이 녀석을 지켜보았다. 겁에 질린 춘자를 두 팔 안에 가두어 이상한 짓을 하려하고 있다. 피가 끓는다. “왜 그래?” 잠시 후 체육이 왔다. “저 놈들 밖으로 좀 내보내줘.” “후. 알겠어.” 체육이 옥상 안으로 발을 들여놓고 난 그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말을 춘자에게 전해주길 부탁했다. “저 바보한테 걱정 좀 시키지 말라고 해.…내가 그랬다고는 말하지 말고.” 체육이 들어가고 몇 분 뒤 옹식이 애들이 나왔다. 나를 보더니 화들짝 놀란다. “설우야…?” “따라와.” 오늘이 네 놈들 멱따는 날이다. (마지막 부탁) 밥을 먹지 않고 교실에서 나가는 춘자를 보았다. 오늘 아침 이 바보가 나에게 사과를 했다. 사실 기분이 좋았다. 이제 다시 함께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뛸 듯이 기뻤다. 하지만 기뻐하는 것도 아주 잠시였다. “어색한 사이는 싫어. 그러니 우리 좋은 친구로 지내면 안 될까?” 친구로 지내자는 바보의 말에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사랑하는 여자랑 친구 따윌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난 심한 말로 거절해버렸다. 창밖을 보니 춘자가 있다. 운동장 벤치에 홀로 앉아있는 바보를 보니 가슴이 아프다. 어쩌다 내가 저런 앨 좋아하게 된 걸까? “밥 먹자! 설우야!” “네들끼리 먹어라. 난 속이 울렁거려서.” 친구들을 두고 교실에서 나왔다. 매점으로 가 빵과 우유를 샀다. 아무래도 이번 역시 체육의 도움을 받아야만 할 것 같다. 교무실로 체육을 찾아갔다. “이것 좀 춘자한테 전해줘.” “또? 싫어.” “마지막이야. 부탁 들어주면…” “들어주면?” “존댓말 쓸게. 부탁…부탁 좀 드려요. 선생님.” 체육이 꽤 만족스럽다는 듯 웃어 보인다. 난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한 가지 부탁을 더 청했다. “그리고…주말에 춘자랑 좀 놀아줘…요.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기분 좀 풀어주세요.” 내가 해주고 싶지만…하는 수 없지, 뭐. (재회) 일요일. 지금쯤이면 춘자는 체육과 함께 신나게 놀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나마 내가 했던 심한 말을 잊고 기분이 풀렸으면 좋겠다. 난 체육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었다. 지금 뭐하고 있을지 괜스레 궁금했다. [지금 번지 뛰려고 준비 중이야. 춘자도 뛸 거야. 막 우는데 엄청 웃겨. -체육-] 번지점프를 한다고? 춘자는 그거 굉장히 무서워하던데. [뛸 거면 춘자랑 같이 좀 뛰어줘요. 그리고 뛸 때 걔 이름 크게 불러주고. 그래야 걔 긴장이 풀리거든요.] 메시지를 보낸 뒤 침대에 누웠다. 춘자랑 같이 번지를 하던 때가 떠오른다. 그때가 참 좋았었는데…. 오늘 밤에도 체육에게 부탁받은 일을 하기위해 클럽으로 향했다. 몇 시간 쯤 지나자 체육의 차가 도착했다. 체육은 내게 키를 주며 주차를 부탁했다. 차안엔 춘자가 있었다. 나를 보자 고개를 숙인다. 지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뒤 내리라고 말하니 이 바보가 말을 안 듣는다. 이젠 내 말 따윈 듣지도 않을 거래나 뭐래나. 별 수 없이 그냥 두고 혼자 나가기위해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그때 차에서 내리며 바보가 소리쳤다. “화가 났어!!! 그래서 마음에도 없는 소릴 했어!!! 난 정말 진심이었는데 넌 장난이었다는 게 미치도록 화가 나고 분했어!!!!” 바보의 말이 날 기쁘게 만들었다. 바보는 울고 있었지만 난 웃고 있었다. 날 사랑한다는 말에 미안하기만 했다. 진짜 바보는 춘자가 아니라 바로 나였다. 진짜와 거짓말도 구분하지 못 했다니…. 기쁨을 억제하지 못해 병신 같다느니 헛소리를 해버렸다. 얼른 주차장에서 나왔다. “하하하!! 푸하하하!!!” 좋아서 큰소리로 웃어재꼈다. 몇 분 후 춘자가 나왔고 난 내 진심을 말해주었다. 널 사랑한다고… (악몽) 바다 이후 두 번째로 춘자와 한 지붕아래에서 잠을 잤다. 같은 방에서 자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내 방을 춘자에게 주고 난 부모님 방에서 잠을 청했다. 하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는다. 내 방, 내 침대에서 춘자가 자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렇게 가슴이 떨리고 긴장이 될 수가 없다. 그렇게 난 새벽1시가 되도록 잠을 청하지 못했다. “꺄아아악!!!!” 그런데 갑자기 춘자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쿵! 난 너무 놀라 침대에서 떨어져버렸다. 아픔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급히 일어나 내 방으로 뛰어갔다. 벌컥!! 문을 여니 악몽이라도 꾼 건지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춘자가 보였다. 가지 말라며 나에게 안기는 춘자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같이 있어줘.” 떨리는 음성. 그리고 날 바라보는 눈빛. ‘이 바보야. 네가 그렇게 쳐다보면 난 널 안을 수밖에 없어. 나도 남자라고.’ 그래. 나도 남자였다. 사랑하는 여자를 완벽하게 내 여자로 만들고 싶어 하는…그런 남자였다. 그날 밤 난 바보를 안았고…바보와 함께 잠이 들었다. ******** 빠르게 달려오는 승용차. 그 앞에 내가 서있다. 빨리 피해야하는데 두 발을 꼼짝달싹도 할 수가 없다. 이게 가위라는 것인가. 하긴 꿈이니 부딪혀도 상관은 없겠지. 난 그냥 단념한 체 가만히 서있었다. 그런데…춘자가 보인 것이다. 내게로 달려오는 춘자… 그리고는 이 바보가 나를 밀쳐내었다. 꽝!!! 꿈… 그래. 이건 단지 꿈일 뿐인데…이 바보가 나타난 것이다. 나를 밀쳐내고 자기가 대신 차의 먹이가 되었다. 난 생생히 보았다.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숨을 쉬지 않고 있는 그 바보를… 바보와 함께 눈을 떠버리고 말았다. 후회 따윈 하지 않는다. 내가 후회를 하면 이 바보가 뭐가 되겠는가. 난 춘자를 보며 다짐했다. ‘넌 내가 끝까지 책임질게.’ 그렇게 난 대수롭지 않게 악몽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그날 우린 사진을 찍으며 돌아다녔다. 자기 사진은 별로 찍지 않고 계속 내 사진만 찍어대는 춘자에게 짜증을 내었다. 그래도 이 바보는 좋다고 실실 웃는다. “내가 앨범 만들어서 너 줄게.” “필요 없어.” 필요 없다고 말은 했지만 그래도 내심 갖고는 싶었다. 춘자가 찍어준 사진이라면 가보로도 간직할 용의가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난 내 얼굴을 항상 보고 싶어 사진을 찍는다는 춘자의 말에 “나중에 결혼하면 지겹도록 볼 텐데 뭐하려고.” 라는 프러포즈 아닌 프러포즈를 했다. 난 가슴이 너무 두근거려 춘자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노란불일 때 성급하게 횡단보도를 건너가고 말았다. 평소엔 이때 건너도 별 탈이 없었는데 오늘은 그 악몽 때문인지 재수가 없었다. 빵빵!!! 갑작스런 클랙슨 소리에 옆을 돌아보았다. 승용차 한대가 내 쪽으로 달려오고 있다. 거리가 얼마 안 되어 그런지 내 두 발은 그 자리에 얼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꿈이 떠올랐다. 현실이 되어버린 악몽. 그리고 사랑하는 여자의 목소리. “설우야!!!” 춘자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지만 피하기엔 이미 늦어버렸다. 꿈에서처럼 춘자가 나를 밀어내기위해 손을 뻗었다. 이 바보는 꿈속에서처럼 나를 밀어내고 대신 다치려하고 있다. 난 깡다구가 있어 다치는 걸로 끝나겠지만 바보는 꿈속에서처럼 피를 많이 흘리며 죽을 지도 모른다. 이번만은 절대 저 손을 잡을 수가 없다. “가!!!” 파악─!! 난 춘자를 힘껏 밀어버렸다. 그리고…쾅!!!!! 큰 충격이 내 온몸을 짓눌렀다. 아스팔트 위로 떨어지며 난 생각했다. ‘내가 너무 세게 밀었던 건 아닐까? 다쳤으면 어쩌지…?’ ※춘자고교 왕따 오춘자※ [64] 눈이 부시다. 그간 너무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얼마나 잤을까? 내가 눈을 떴을 때 난 병원침대에 누워있었다. 흰 시트와 흰 병원 복, 흰 벽지…모든 것이 새하얗다. 하얀 나라에 온 듯한 기분이다. 그나저나 너무 오래 잔 탓일까? 머리가 띵하다. “춘자야, 깼어?” 제일 먼저 들려온 목소리는 아빠의 목소리였다.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하나님, 감사합니다.’를 몇 번이고 중얼거리신다. “아빠…나 얼마나 누워있었던 거야…?” “하루 종일 자고 있었어. 이 녀석아, 아빠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비행기 타고 단숨에 날아왔어.” “미안해….” “됐어. 그런 소리 듣자고 한 말 아니야. 미안하면 빨리 일어나던가.” 정말 많이 걱정하셨나 보다. 난 차에 부딪히지도 않았는데 왜 그렇게 정신을 놓고 있었던 걸까? 아무래도 피를 흘리고 쓰러진 설우를 보곤 충격이 심했던 모양이다. 맞아… 설우… 설우는 어떻게 됐지? “아빠, 설우는? 설우는 어디 있어?? 안 죽었지? 죽진 않았지?? 그치??” 난 벌떡 일어나 아빠의 팔을 붙잡고 흔들어대었다. 아빠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그리고 엷은 한숨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설마……. “아니지…? 안 죽었어. 안 죽었다구.” “춘자야…설우는 15시간 전에 수술을 끝냈어. 의식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상태고. 의사선생님 말씀으론 심한 뇌진탕을 입었다는구나.” 하아…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번엔 내가 신에게 감사를 드렸다. 무너질 것 같던 하늘이 다시 단단해졌고, 캄캄하던 눈앞이 다시 밝아졌다. 뇌진탕이면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은데… 하지만 앞의 ‘심한’이란 단어가 마음에 걸린다. “아빠, 뇌진탕은 걱정 안 해도 되는 거지?” “그게 말이다…뇌진탕과 함께 뇌출혈이 발생했다더구나. 수술은 성공인데 후유증이나…그런 건 의식이 돌아와 봐야 알 것 같다더라.” “설우, 지금 어디 있어?” “바로 옆 병실에 있어.” 난 침대에서 내려왔다. 맨발로 성큼성큼 병실 문으로 걸어가자 아빠가 다급히 나를 붙잡으셨다. 난 아빠의 힘에 억눌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지금은 가족 외 면회금지라서 가면 안돼. 네 마음은 알겠지만 조금만 기다리자. 응?” 꿈만 같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행복했었는데 왜 갑자기 이런 시련이 닥친 걸까? 그리고 난 이런 시련을 준 하늘을 원망해야 옳은 것일까, 그래도 설우를 데려가지 않은 하늘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것일까? 난 결국 다시 침대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1시간 후 내 눈은 TV로 향해있었지만 마음은 온통 설우에게 먼저 가있었다. 설우가 깨어나면 설우네 부모님이 연락을 주신다고 아빠가 그랬는데 통 연락 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아빠, 설우는 괜찮을까?” “벌써 20번째 묻는 거잖니.” “언제쯤 볼 수 있을까?” “그것도 벌써 20번째야.” 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망울로 아빠를 응시했다. 이런 시선을 보내는 것도 이번이 20번째지만 아빠는 못 이기는 척 대답을 해주셨다. “설우는 괜찮을 거고 또 깨어나자마자 볼 수가 있을 거야. 됐지?” 아빠 역시 같은 대답을 20번째 하셨다. 이렇게 대답을 들어도 마음이 놓이지가 않는다. 설우를 직접 봐야지만 안심이 될 것 같다. “아빠…그 후유증이란 거 그게 어떤 거야?” 아빠는 내 질문에 고개를 돌리셨다. 대답을 피하시는 것 같았다. 불안하다. 뭔가 숨기시는 게 있다. “아빠!” “…충격 안 받을 자신 있니?” 내가 한 번 더 부르자 그제야 입을 여신다. 잔뜩 근심어린 표정이다. “어쩌면 운동실조증일 지도 모른다더구나. 근육은 건전한데 각 근육간의 조화장애로 일정한 운동이 되지 않는 거지. 그리고 기억력감퇴나…” 쾅! 난 침대 밑으로 내려왔다. 그리곤 아빠가 막기도 전에 병실 문을 열고 나와 버렸다. 아빠가 하시는 어려운 말 따윈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냥 모든 걸 내 눈으로 보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이설우…이설우…’ 난 마음속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며 병실을 찾았다. 아빠의 말대로 내 병실 바로 옆이었다. 철컥. 쾅. 난 서슴없이 병실 문을 열어 재꼈다. 깜짝 놀라 뒤돌아보시는 설우네 부모님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춘자야!” 뒤따라온 아빠의 목소리와 함께 설우가 보였다. 침대에 반듯하게 누워 내가 온지도 모르고 잠만 자고 있는 설우가…. 난 내 팔을 붙잡는 아빠의 손을 뿌리치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오랜만에 뵙는 설우네 부모님께 인사드릴 정신도 없이 설우에게 다가갔다.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아빠가 나대신 아저씨, 아주머니께 사과를 드리신다. 설우는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머리에는 흰 붕대를 둘둘 감은 채 눈꺼풀 내리고 있다. 병원 복은 왠지 설우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 강하고 강해보이던 아이가 오늘따라 연약해 보인다. 설우의 향기도 지독한 약냄새에 묻혀 더 이상 찾을 수가 없다. “흑…흑…어엉엉-” 끝내 난 참고 있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설우가 깨어나길 바라며 그의 병실을 지키고 있은 지도 벌써 두 나절이 지났다. 설우네 부모님은 일 때문에 잠시 회사로 가셨고 우리 아빤 다시 제주도로 돌아가셨다. 아빠는 나에게 아프지 않으면 학교에 가라고 말씀하셨지만 난 막무가내로 떼를 써 아직도 입원해있는 중이다. 내가 다친 곳이라곤 오른쪽 팔꿈치의 타박상이 전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싼 돈을 들여가며 입원해있는 건 엄살이나 마찬가지다. 난 내 병실에 있는 시간보다 설우의 병실에 있는 시간이 훨씬 더 많았다. 하루가 24시간이라면 그 중 22시간을 설우와 함께 있었다. 밤이 병실 유리창을 검게 칠해놓고 갔다. “너 허리 안 아파? 난 오래 누워있으면 허리가 아파서 도저히 못 누워있겠던데. 그만 자고 일어나. 응?” 눈을 감고 있는 설우의 모습은 예쁘지만 눈을 떴을 땐 아름답다. “매일 밥 대신 주사만 맞고. 밥 안 먹고 싶어?” 며칠 전 내가 만들어준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던 설우의 모습이 아직까지도 눈에 선하다. “빨리 눈 떠. 네 눈 어떻게 생겼는지 나 다 까먹을 것 같아.” 난 설우의 손을 잡았다. 따뜻하다. 살아있다는 증거다. 그래. 살아있는 게 어딘가. 난 다짐했다. 설우가 눈을 뜨면 언제까지고 그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한참을 설우만 바라보고 있으니 졸음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때 내 손 안에서 뭔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내 손 안에 들어있는 것은 설우의 손이다. 깜짝 놀라 졸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두근두근.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는 내 가슴을 안고서 설우의 눈을 응시했다. 꿈틀꿈틀. 검지가 움직이고 있다. “하…설우야.” 그의 얼굴을 보았다. 눈꺼풀이 들썩인다. 이 순간이 오기만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내 얼굴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 일그러졌다. 입은 웃고 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린다. 설우가 눈을 뜨자 그 안으로 빛이 흘러들어갔다. 설우의 눈동자에 빛이 한 가득 담겼다. 그리고 곧 내가 들어갔다. “설우야…정신이 들어?” 내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설우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고 있다. “나…나 알아보지? 응…?” 울먹이며 내가 묻자 곧 설우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그가 그립던 목소리를 내게 들려준다. 그의 대답은 내 눈물을 쏙 빼놓았다. .............. “당연하지…” ※춘자고교 왕따 오춘자※ [노래 들으며 소설보기]클릭☜ [65] 혹시라도 드라마에 나오는 기억상실증이면 어떡하나 했다. 만약, 날 기억 못하면 어떤 얼굴로 그를 바라봐야하나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다행이도 설우는 당연하지라고 말해주었다. 날 기억한다 말했다. 다시 그 행복하던 나날들이 돌아올 날도 그리 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난 주저앉아 설우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말했다. “고마워. 기억해줘서 고마워…” 설우가 내 머리를 만진다. “내가…바보냐? 널 까먹게.” 난 설우를 보기위해 고개를 들려했다. 하지만 그의 손이 내 머릴 눌러버리는 바람에 다시 가슴에 얼굴을 묻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내 옷에…눈물 다 닦고 일어나. 네가 우는 건 이제 보고 싶지 않아.” “……응…” 대답은 했지만 왠지 당장은 고개를 들 수가 없을 것 같다. 설우의 그 한마디가 내 눈물샘을 더 자극시켜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5분가량을 계속 그러고 있었다. 설우의 환자복이 젖어버렸다. “다 울었으면, 나 물 좀 줄래…?” 물을 달라는 그의 말에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울음은 그쳤지만 내 눈은 빨갛게 충혈이 되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가 있다. 난 눈물을 글썽이기만 해도 눈이 금방 충혈 돼버리기 때문이다. “잠깐만…” 선반 위에 뒤집어져 있던 컵을 바로 세우고서 주전자에 든 물을 컵에 따랐다. 투명한 생수가 컵을 채워갔다. 반 정도 따른 뒤 설우에게 내밀었다. 설우가 상체를 세우고 앉았다. 설우의 오른손이 내가 건넨 유리컵을 잡기위해 가까이 다가온다. 컵을 건네받은 이설우. 그의 엄지와 검지, 중지, 약지가 컵을 잡고 나머지 새끼손가락이 마지막으로 컵을 잡으려는 순간, 구부렸던 검지와 엄지가 펼쳐졌다. 툭. “헉. 설우야?” 난 이불 위에 떨어진 컵을 보며 소스라치게 놀라 얼른 휴지를 세 장 뽑아들었다. 그리곤 쏟아진 물을 닦기 위해 컵부터 들려는데 설우가 막아버린다. “그냥 둬.” “설우야…?” 설우는 넋이 나간 얼굴로 컵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이불 위에 엎질러져 있는 물을 보더니 이내 컵으로 시선을 돌린다. 컵을 쥐려는 건지 컵에 손을 가져간다. 난 그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설우의 손 안에 컵이 들어왔다. 컵을 들기 위해 손가락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왠지 뭔가 마음대로 되지 않아 보이는 손가락. 구부렸다 폈다를 반복하더니 끝내는 컵을 잡는데 성공을 한다. “물…좀 줄래?” 물을 몽땅 쏟아버려 텅 비어있는 컵을 응시하며 설우가 말했다. 난 고개만 끄덕인 후 휴지를 선반 위에 놓곤 대신 주전자를 들었다. 긴장감이 흐르는 분위기 속에서 나까지 손을 떨며 컵에 물을 따랐다. 내가 반 정도 물을 따르자 설우가 그 물을 마시기 시작한다. 꿀떡꿀떡. 목구멍으로 물이 넘어가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 나까지 시원해진다. 하지만 정작 목을 축인 설우의 표정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탁. 힘없이 선반 위에 컵을 놓으며 설우가 내게 물었다. “나…어쩌다 이렇게 된 거냐?” *************** 설우는 뇌진탕으로 그때(사고) 당시 상황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의사선생님이 말했다. 그리고 어쩌면 사소한 것들도 기억하지 못할 거라 했다. 그러니까 건망증과도 비슷한 그런 현상이 종종 올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전혀 문제되지가 않는다. 사고 당시의 기억을 잊는 것은 오히려 잘 된 일이다. 그리고 건망증 따위도 큰 문젯거리는 안 된다. 다만…설우의 움직임이 예전 같지가 않다는 것이 걱정이었다. 난 괜찮지만, 설우 본인이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걸을 때도 비틀거려 타인의 부축을 받아야만 했고 물건을 쥘 때도 항상 어려움을 겪었다. 설우는 예전의 강인함이 사라지자 점점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말수도 줄어들었다. 그런 것들 말고는 모두 정상이었다. 병실도 2인실로 옮겼다. 난 퇴원을 했지만 학교는 가지 않았다. 그렇게 설우가 깨어난 지 3일이 지났다. “엄만 그럼 회사 다녀올 테니까 밥 제때 챙겨먹고…춘자는 아줌마가 부탁 좀 할게. 매번 미안해서 어쩌니.” “아니에요. 제가 원해서 하는 걸요. 걱정 마시고 다녀오세요.” 병실 안. 단정하게 차려입으신 설우네 어머니께서 나를 보며 미안해하셨다. 내가 학교에 가지 않고 설우를 돌보는 것이 꽤 마음에 걸리셨던 모양이다. “그럼 갔다 올게. 설우도 이따 보자.” 설우는 병실에서 나가는 엄마를 보고도 인사 한번 하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하게 쳐다만 볼 뿐이다. 그 말 많고 힘 있던 설우가 말 없고 힘없는 아이가 되어버렸다. 그에 덩달아 나까지 기운이 없어져버린다. 하지만 나라도 말 많고 기운이 넘쳐야한다는 걸 나도 잘 알고 있다. “너희들 무슨 사이니?” 같은 병실을 쓰고 있는 언니가 물었다. 나이는 21살인 걸로 알고 있다. 새침한 표정으로 침대에 앉아 나와 설우를 번갈아 쳐다본다. “사귀는 사인데요.” “사귄다고? 학교는 안 다니니? 보아하니 고삐리 같은데.” “설우는 아파서 못 가요.” “그럼 넌? 너도 아프니?” “전 설우 간호해야 돼요.” 언니에게서 설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설우는 TV를 보고 있다. “사랑하니?” 언니의 질문에 다시 그녀를 볼 수밖에 없었다. 언니는 왼쪽 팔에 깁스를 하고 있다. 듣자하니 친구랑 레슬링기술을 따라하다 부러졌다고 한다. 난 다시 설우를 보았고 또 단호하게 대답했다. “네. 사랑해요.” 설우가 눈동자를 돌려 나를 본다. 난 쑥스러워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머쓱히 미소를 지어 보이는데 설우가 금방 시선을 돌려버린다. 사랑한다는 말을 원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미소 정돈 지어줄 줄 알았는데…. 실망할 겨를도 없이 언니가 콧방귀를 뀌었다. “칫. 쬐그만 것들이 사랑은 무슨.” 휙. 침대에 돌아 누워버린다. 예상이지만 저 언닌 애인이 없나보다. 꼭 질투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점심시간이 되었다. 언니는 어디 간 건지 나가고 없다. 난 쟁반에 밥과 반찬을 챙겨 설우에게 가져다주었다. 이 병원 반찬은 그래도 꽤 괜찮은 편이다. 밥뚜껑을 열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밥을 퍼기 위해 수저를 들었다. 설우에게 직접 먹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설우는 그걸 원치 않아했다. “줘. 내가 먹을 거야.” 수저를 뺏기 위해 손을 뻗는다. 휙. 하지만 수저에서 빗나가버리고 말았다. 표정이 어둡다. “그냥 내가…” “줘!” 신경이 날카로워진 설우. 몸이 제 마음대로 되지 않아 화가 나있었다. 결국 난 그에게 수저를 건네주었다. 수저로 밥을 떠먹던 설우는 반찬을 집기위해 젓가락을 들었다. 댕그렁. 하지만 젓가락질하기가 힘이든지 자꾸만 떨어뜨린다. 그렇게 젓가락과 씨름을 하다 결국 젓가락 한 짝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아…내가 새로 가져올게.” 새 젓가락을 가져오기 위해 의자에서 엉덩이를 들었다. 그런데 그런 날 설우가 붙잡았다. “됐어.” 됐다며 수저로 반찬을 퍼 담는다. 가슴이 아프다. 애써 강한 척 하려는 그가 가엾기만 하다. 하지만 그를 위해 동정어린 시선 따윈 보낼 수가 없다. 설우가 비참해질까봐 감히 그럴 수가 없다. 탁! 밥을 몇 숟갈 먹지도 않고 수저를 놓아버린다. 벌떡 일어나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를 신는다. 입술을 굳게 닫고서 성큼성큼 문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시원하게 걷지 못하고 자꾸만 비틀거린다. 난 얼른 설우에게 다가가 부축을 하기위해 어깨를 붙잡았다. 타앗! 설우는 그런 내 손마저 뿌리쳐버렸다. 벽을 짚고서 균형을 잡으며 설우가 걸어간 곳은 비상구계단이었다. 난 마지막 계단에 앉는 설우의 곁에 엉덩이를 붙였다. 설우가 환자복 남방 가슴팍에 있던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는다. 주머니에서 담배 한 대가 나왔다. “설우야, 담배는…” 내가 말려봤자 그가 관둘 리가 없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그냥 둘 수밖에 없었다. 담배를 입에 문 설우가 이번엔 엉덩이로 손을 가져갔다. 남방을 들춰 바지사이에 끼워둔 일회용라이터를 빼낸다. 저런 건 언제 또 꽁쳐 놓은 건지…. 틱. 불을 켜기 위해 엄지로 줄날 바퀴를 당긴다. 하지만 그 옆으로 빗나가 허공에 대고 손가락을 굴린 꼴이 되었다. “에이씨.” 짧게 욕을 내뱉으며 다시 한번 줄날 바퀴를 당긴다. 하지만 이번엔 힘이 없어 불이 켜지지 않았다. 틱틱-. 여러 번 헛손질만 하게 된 설우는 짜증이 났는지 인상을 구겼다. 탕! “더러워서…내가 안 피고 만다…” 라이터를 계단 아래로 던지고 물고 있던 담배마저 바닥에 버렸다. 담배를 피지 않아 다행이긴 하지만 마음만은 편치가 않다. 이로 인해 설우의 마음이 더 상했을까 걱정이 된다. 계단 아래에 떨어진 라이터를 바라보는 설우가 너무 안쓰럽기만 하다. 차라리 고함이라도 치면 좋을 텐데… 예전처럼 화를 내면 마음이라도 편할 텐데…. 이러다 설우가 삶을 포기하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된다. 그래서 나까지 포기할까 두렵기만 하다. ‘저 라이터와 담배처럼 나도 버리는 건 아니겠지…? 괜히 미안해서 날 놓아주려는 건 절대 아니겠지…? 그치, 설우야.’ 오후 늦게 쯤 전화가 왔다. 예전 왕따스쿨 아이들이었다. 내 연락을 받곤 다같이 병문안을 온 모양이었다. 난 병원로비에 와있다는 후락이에게 병실을 알려주곤 전화를 끊었다. “애들이 지금 병원에 와있대. 지금 로비에 있다니까 곧 올라올 거야.” “오지 말라고 그래!”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지르는 설우의 행동에 깜짝 놀랐다. 왜 화를 내는 거야…? “하지만 벌써 왔는걸.” “다시 돌려보내!” “그래도 어떻게…” “몰라! 절대 들여보내지마!!” 침대에 누워버리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써버린다. 난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설우를 보자 아이들을 도저히 들어오게 할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병실에서 나와 아이들을 기다렸다. 잠시 후 다섯 명이 도착했다. 비야는 꽃다발을 안고 있었고 후락이는 음료수 한 통을 들고 있었다. 후락이, 랑해, 비야, 지우, 소유. 이 다섯 명이 모인 모습도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누나! 설우 형은??” 지우가 물었다. 내 등 뒤의 병실 문을 바라본다. “으응. 병실 안에서 자고 있어.” “그래? 그럼 들어가서 보자. 안 깨울게!” 나를 비켜 병실 문을 열려는 지우의 행동에 깜짝 놀라 얼른 그를 저지했다. 그에 모두들 이상하다는 듯이 나를 보았다. “왜 그래요, 언니?” “누나, 이상해.” 비야와 소유가 말했다. 이상해도 어쩔 수가 없다. 설우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으니까. “미안해. 오늘은 그만 돌아가야겠다.” “엥? 왜? 그게 무슨 얼토당토 안한 말이야?” 후락이가 제일 먼저 흥분을 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다시 돌아가라니 당연히 이해가 안 될 것이다. “설우형 깰 때까지 기다리면 되잖아.” “맞아.” 랑해가 말하고 소유가 맞장구를 친다. 참으로 난처하다. “정말 미안해. 사실은 설우가 아무도 만나고 싶지가 않대. 후유증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하거든. 정말 정말 미안해. 대신 사과할게.” “그럼 누나는 왜 만나줘?” 소유가 불공평하다는 듯이 따져들었다. 그런 그의 머리를 비야가 한 대 때린다. “이 바보야! 춘자언니는 설우오빠 애인이잖아! 동생이랑 애인이랑 같니? 애인은 아주 아주 특별한 거야!” “어쩔 수 없지, 뭐. 그럼 나중에 또 올게. 안부나 좀 전해줘.” 랑해가 머리를 긁적인다. 그렇게 그들은 꽃다발과 음료수를 남긴 체 돌아가 버렸다. 정말 미안하다. 내가 좀 더 일찍 설우에게 물어봤어야하는 건데. 그들을 엘리베이터까지 배웅을 해준 뒤 병실로 돌아왔다. 문을 열자 이불 속에 숨어있는 설우가 보였다. 설우는 자신의 약해진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나에게 가장 보이고 싶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난 설우의 곁으로 다가갔다. 언니의 침대는 비어있다. 설우가 덮고 있던 이불이 조금씩 들썩이고 있었다. 난 조용히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설우를 보았다. 이불이 들썩이고 그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처음으로 설우의 우는 소리를 들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있어 우는 얼굴을 보진 못했다. 하지만 울음소리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아픈데 만약, 우는 얼굴을 본다면 가슴이 찢어질 지도 모른다. “흑흑…흐흐흑……” 설우는 울음소리가 이불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이를 악물고 울었다. 난 이불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손을 얹었다. 정확히 눈 아래에…. “흐……흑…” 설우가 흠칫거리며 애써 울음을 참아낸다. 난 손끝에 닿는 설우의 눈물을 닦아내며 나지막이 그에게 말했다. “울지 마.” “흑……” “나도 이제 안 울 테니까…그러니까 너도 울지 마. 오늘만 울고…이젠 울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