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書院)이란 당나라 현종(玄宗) 때 궁중(宮中)에 있던 서적(書籍)의 편수처(編修處)이던 여정전서원(麗正殿書院). 집현전서원(集賢殿書院)에서 유래(由來)한 것인데, 특히 주자(朱子)가 강론(講論)하던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 유명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조(朝鮮朝) 중기이후 명현(名賢). 특정인(特定人)을 모시고 봉사(奉祀)하며 인재(人才)를 양성하기 위해 세웠던 사학(私學)인 유생(儒生)들의 학당(學堂)으로서 처음에는 선현(先賢)을 추모(追慕)하는 뜻으로 향사(享祀:제사)를 모시는 것으로 그쳤으나 중종(中宗) 37년(1542) 경상도 풍기 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관내 순흥(順興) 백운동(白雲洞)에 고려 유교의 중흥자(中興者)였던 문성공(文成公) 안 향(安 珦)의 고택(古宅:옛 집, 생가)이 있음을 알고 그곳에 사우(祠宇)를 세워 제사(祭祀)를 지내고 유생(儒生)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사(祠)와 재(齋)를 겸비한 최초의 서원으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다. 그 뒤 퇴계(退溪) 이 황(李 滉)이 풍기 군수로 있을 때 명종(明宗)으로부터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았으며 더불어 토지(土地)와 노비(奴婢)에 대한 면세(免稅). 면역(免役)의 혜택까지 받게 되었다. 이것이 또한 사액서원(賜額書院)의 시초(始初)가 되었던 것이다.
초기의 서원은 인재(人才)를 기르고 제사를 드리며 유교적(儒敎的) 질서(秩序)를 유지(維持)하고 시정(時政)을 비판하여 사림(士林)의 공론(公論)을 형성하는 등 긍정적인 기능(機能)을 발휘(發揮)하였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양적(量的) 성장을 가져오면서 혈연(血緣) 지연(地緣) 관계나 학벌(學閥). 사제동문(師弟同門). 당파(黨派) 등과 연결이 되어 지방토호(地方土豪)들의 이권(利權)과 세도가(勢道家)의 집단화가 되어갔다. 또한 양민(良民)들까지 서원의 노비로 들어가 군역(軍役)을 기피(忌避)하였으며 유생들은 학문(學問) 보다 붕당(朋黨)을 조성 당쟁(黨爭)에 빠져들어 국가(國家)의 정사(政事)에 혼란(混亂)과 분열(分裂)을 가져와 폐단(弊端)이 빈번(頻煩)하게 되었다.
이에 영조조(英祖朝)에 이르러 서원정비에 노력하였으나 특권층의 개입으로 별로 성과를 보지 못하였으며 후로 정조(正祖). 철종조(哲宗朝)에 들어와 붕당의 쟁론이 심화(深化)하여 과감(果敢)히 서원정비(書院整備)에 나섰으나 역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조선조말(朝鮮朝末)에 대원군(大院君)이 섭정(攝政)하면서 서언에 대한 특권을 없애고 적극적으로 정비를 단행하여 사액서원(賜額書院) 47개소만 남기고 일체 사설(私設)의 서원 등에 철폐령(撤廢令)을 내려 서원의 정비를 감행(敢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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