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이데올로기)비평
사회주의비평은 문학작품을 사회적 문화적 요인의 복잡한 관계 의 반영이나 결과로 해명하려는 문학연구방법이다. 그래서 이 방법은 문학과 사회와의 여러 문제를 주요 과제로 삼는다. 일차적으로 문학작품이 미친 사회와 경제 및 정치 등과의 상호 관련성에 유의하지만 점차적으로는 윤리와 문화와의 연관성을 밝히는 데도 관심을 표명한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사회계층간의 갈등이 작품의 모태가 되며, 그 갈등 해결을 분석의 핵심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역사․전기비평과 비슷하다. 하지만 실증적이라기보다는 이념적이며 이데올로기를 내세우고, 작가가 창작한다기보다 사회구조적인 조건이 문학을 낳는다고 보는 점에서는 구조주의(탈구조주의․형식주의)를 포용한다고 볼 수 있다.
1) 사회주의비평의 배경(19세기 비평가들의 주장)
① 문학작품은 사회․문화적 요인들의 복합적인 상호작용의 결과이며 그 자체가 복합적 문화 개체이므로, 그것을 생산한 환경이나 문화나 문명을 떠나서 충분히 혹은 진실하게 이해될 수 없다.
② 문학작품 속에 있는 관념은 형식 및 기교와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③ 생명력 있는 모든 문학작품은 그것을 나오게 한 문화와의 관계에 있어서나, 개개의 독자와의 관계에 있어서 매우 도덕적이다. 그래서 문학작품은 일종의 도덕적 경험이다.
④ 문학작품은 특정한 물질적 요인이나 집단의 정신적 문화적 경향이라는 사회의 두 방면을 반영할 수 있다.
⑤ 비평은 곧 살아 있는 활동이니까, 문학작품에 대해서 초연한 심미적 관조로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⑥ 사회주의 비평가는 과거와 현재의 문학에 책임을 다한다.
2) 루카치의 반영론과 리얼리즘론
(1) 내용과 형식의 변증법
구조주의는 현실과 문학작품을 분리시키며, 역사적 연구보다는 공시적 연구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랑그의 연구에 치중하는 구조주의와는 달리「빠롤」이나「담론」(사회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는 그 언어의 빠롤적 측면)에 관심을 갖는 탈구조주의는 복잡한 방식을 통해 다시 역사에 접근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이 접근은 여전히 현실을 언어로 이해하는 관점에 근거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역사(혹은 현실)를 단순히 텍스트의 지시대상으로 생각해온 전통적인 사고에 새로운 충격을 주고 있다. 이제 우리는 (현실과 작품의 내용을 중시하는) 변증법적 미학이 어떻게 탈구조주의와 만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반영론」으로서의 변증법적 미학을 탐구한 대표적인 이론가는 게어르크 루카치이다. 반영론이란 문학(예술)을 현실의 반영으로 이해하는 미학을 말한다. 이러한 관점은 문학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형식주의(혹은 구조주의)와 정반대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루카치의 반영론이 문학의 형식(또는 구조)을 무시하고 작품 내용을 곧바로 현실과 동일시하는 것은 아니다. 루카치는 누구보다도 형식을 중시했으며 올바른 형식을 갖는 것이 현실을 진실하게 반영하는 방법임을 강조했다. 물론 루카치의 형식 개념은 형식주의(혹은 구조주의)의 그것과는 달리 내용의 개념을 내포한 것이다. 형식주의에서 형식이란 현실과의 연관을 배제한 작품 자체의 내적 질서를 말한다. 그러나 루카치의 경우 형식이란 현실의 내용이 작품 속으로 반영되어 들어오는 방법을 나타낸다. 그 방법은 현실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동시에 그것을 미학적으로 처리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따라서 반영론에서는 미학적 과정(형식)과 현실의 인식과정(내용)이 별도로 분리되지 않는다. 형식이란 현실의 내용이 문학의 내용으로 변환되는 방법이며 그 속에 현실의 인식과정을 내포하는 것이다.(*형식주의-표현의 형식-외적 형식-시점, 서술, 문체, *루카치-내용의 형식-내적 형식-주제, 인물, 플롯) 이처럼 내용과 형식은 상호 연관된 관계를 지니는데, 이 작품의 외부(현실 내용)와 내부(작품 형식)의 상호 침투가 바로 변증법적 미학의 근본 원리이다.
(2) 헤겔 미학과 관념적 변증법
헤겔 미학은 미와 예술에 대한 논의를 변증법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헤겔은「무목적의 목적성」이란 명제로 미를 설명한 칸트와는 달리 내용의 진실성이 미적 현상에 관여하는 것으로 생각했다.「진실한 것이 아름답다.」는 헤겔의 주장은 미가 자율성만 지니는 것이 아니라 과학의 영역인 진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말한 것이었다. 그의 이런 주장에 따르면 진(과학)․선(윤리)․미(예술)의 삼분법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예술이란 진실한「내용」이 미적인「형식」으로 잘 형상화된 것이기 때문이다.(예술의 특수성 간과)
헤겔은 미를 자연미와 예술미로 나누어 논의한다. 그리고 그는 자연미에도 아름다움이 존재하는데 왜 인간이 예술작품을 만들어내게 되었는가를 설명한다. 헤겔은 자연미를 소박의 정도에 따라, 감각적인 것(수정), 생명력을 갖고 있는 것(꽃), 정신을 소유한 것(사슴), 자아의식이 있는 것(사람) 순으로 나눴다. 따라서 사슴이나 인간(인체)의 아름다움은 단순히 감각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 가령 조각가가 모형 사슴을 실물보다 더 예쁘게 만들었더라도 생명력과 정신이 없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이 살아 있는 사슴에 미칠 수는 없다. 이런 논리에 따라 헤겔은 가장 뛰어난 정신을 소유한 인체의 아름다움을 자연미 중에서 가장 고차원적인 것으로 보았다.(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안치환의 노래)
그러면 인간은 왜 자연의 아름다움이 있는데도 굳이 예술작품을 만들게 되었을까. 헤겔에 의하면 자연미는 생명이나 정신 등의「내용성」을 완전히「외화(객관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미인대회에서 우승한 여자가 가장 아름다운 정신을 소유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즉, 겉으로 드러난 아름다움과 내용의 아름다움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적「내용」과 감각적「형식」의 불일치라는 자연미의 한계를 극복한 것이 예술작품이다. 따라서 우리가 예술작품을 보는 순간, 정신의 수준까지 고양되어서 우리의 내부에는 감정이 불러일으켜지는 것이다.
헤겔은 예술의 본질이「이념과 형상의 통일」에 있다고 보았으나, 이념의 내용에 의해 예술의 형식이 결정되므로, 결국「이념」이 어떤 정신성을 담느냐에 따라 예술의 가치를 평가한다. 이는 예술의 내용을 (형상으로 완전히 담을 수 없는) 정신으로 보는 관념론에서 기인된 것으로 예술의 특수성을 간과한 셈이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루카치의 반영론 미학은 예술의 내용을 (형상으로 충분히 드러낼 수 있는) 현실의 반영(혹은 인식)으로 보아, 과학이나 철학과 똑같이 진리를 구현할 수 있으며 단지 예술이라는 특수성을 지닐 뿐이라는 것이다.
(3)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과 역사철학적 관점
≪소설의 이론≫은 헤겔 미학의 역사적 관점을 문학의 장르 변화를 설명하는데 적용시킨 루카치의 저서다. 이 책을 지배하는「역사철학적 관점」이란 문학과 사상의 여러 형식(혹은 장르)들이 역사적 변화에 따라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견해이다. 이처럼 역사철학적 관점은 문학을 무시간적 공간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역사적 변화를 매개로 파악한다. 다시 말해 역사적 흐름에 따라 형식을 부여하는 원리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헤겔의 경우에 형식을 만드는 원리는「이념과 형상의 관계」였으나 ≪소설의 이론≫에서는「삶과 본질의 관계」이다. 헤겔은 역사적 변화에 따라 표현할 수 있는 이념의 내용이 달라지고 그 내용이 형식을 규정한다고 생각한 반면에, ≪소설의 이론≫은 삶과 본질의 관계가 변화하며 그 달라진 관계가 새로운 형식을 만든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루카치의 삶과 본질의 관계라는 형식화의 원리는 관념적 내용(절대정신)과 한정된 형상과의 관계를 기준으로 하는 헤겔보다 한층 더 역사적이다. 왜냐하면 루카치의 경우 (헤겔의「형상」과는 달리)「삶」자체가 역사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루카치는 역사적 삶이 본질의 내재성을 지닌 시기, 즉 양자가 통일된 시기를 총체성(현실의 본질적인 연관관계)이 있는 시대라고 말한다.
(4) 루카치의 리얼리즘
≪소설의 이론≫ 의 장르관과 소설 유형론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요소가 많지만,「역사적 연구와 형식적 연구의 통일」이라는 측면에서 풍부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1918년 이후 루카치는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여 유물변증법에 근거한 본격적인 논의를 전개하기 시작한다. 그의 리얼리즘은 30-40년대에 주요 골격이 이루어졌으며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우리시대의 리얼리즘≫(1957년 이탈리아어, 1958년 독일어)이라는 책으로 출간된다.
루카치의 논의는 자연주의와 모더니즘, 그리고 교조주의에 대한 반대의 과정에서 진행된다. 전위주의(혹은 모더니즘)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루카치는 이른바「표현주의 논쟁」에 가담한다.
전위주의는 자본주의 생활의 직접성에 근거함으로써 균열과 단절을 형상화한다. 그러나 생활의 직접 체험은 표면상만 반영할 뿐 그 이면의 본질적 연관관계(총체성)는 드러내지 못한다. 현실을 총체적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균열된 표면상을 지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숨겨진 본질적 연관관계를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여기서 현상이란 직접 체험으로 지각할 수 있는 현실의 표면적 측면을 말하며 본질이란 그 표면현상을 규정하는 핵심적인 연관관계를 말한다. 또 총체성이란 현실의 본질적인 연관관계를 말한다.) 예를 들어 1920년대 우리의 식민지 사회에서는 농민들이 몰락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농민의 몰락과 궁핍화 현상은 당대의 소설들에서 자주 형상화되었다. 그러나 그 모든 소설들이 당대의 현실을 진실하게 반영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표면현상만을 그리는 데 그치고, 그 이면의 본질적 연관관계를 간과할 때 현실은 올바르게 반영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김동인의 <감자>는 복녀와 남편을 통해 농민의 몰락과정을 그리고 있지만, 그것이 당대의 본질적 관계인 지주/소작인 간의 모순 된 관계를 놓치고 있다.「식민지 반봉건 사회」와 지주/소작인 관계라는 본질적인 관계를 배제한 채 남편의 게으름에 의해 몰락이 야기된 듯이 서술함으로써 <감자>는 「자연주의적 편향」을 갖게 된다.
이렇게 볼 때 루카치의「현상(개별성)과 본질(보편성)의 변증법(특수성)」이나 「총체성(현실의 본질적인 연관관계)」의 개념은 분열된 자본주의 사회를 화해되고 통일된 것으로 그리자는 것이 아니라, 그 분열의 요인이 되는 본질적인「관계들」을 (매개적으로)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의 본질적인 연관관계는 친일지주/소작인이나 자본가/노동자의 관계처럼 오히려 대립과 차이의 관계로 되어 있다. 루카치가 강요하는 총체성이나 통일성은 표면의 균열현상들이 제멋대로 파편화된 것이 아니라 근원의 본질적 연관관계에 의해 총체적으로 매개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루카치는 이런 이론을 근거로 표면현상(자연주의)이나 주관적 심리(모더니즘)에만 집착하여 현실의 본질적 연관관계를 놓치고 있는 자연주의와 모더니즘을 비판한다. 왜냐하면 문학작품(특히 소설)은 인간(인물)과 환경의 상호작용을 그리면서 외부현실과 내면의식을 반영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상의 (루카치의) 총체성은 동일성으로의 환원이 아닌 총체적 관계성의 매개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변화하는 역사적 조건에 따른 새로운 기법의 필요성(사회가 변하면 새로운 예술적 관습이 요구됨 : 생산이론)에 대한 인식을 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낸다.
(5) 루카치의 특수성 미학
루카치는 1957년 이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미학과 윤리학의 저술에 전념한다. 루카치의 미학은 이전의 논의 결과들을 포괄하면서 그것들을 미학적 이론 속에 체계화하려는 시도다. 그는 예술을「인류 발전의 자기의식」(혹은 자기인식)으로 설명하면서 특수성의 범주로서 조명한다. 여기서 특수성이란 개별성(현상)과 보편성(본질)을 역동적으로 매개하는 범주이다. 과학과 같은 이론적 인식이 개별성에서 보편성으로 운동하는 데 반해, 예술은 개별성과 보편성 양쪽으로, 다시 중심적인 특수성으로 수렴된다. 가령 식민지 반봉건 사회라는 보편적 사회구조는 그 시대의 소설들에서 기아, 살인, 방화, 이농민의 비애 등 개별 현상을 통해 제시된다. 이 보편성이 포함된 개별성, 혹은 개별성을 통해 보편성을 드러내는 범주가 바로「특수성」이다.
이러한「특수성」에 대한 설명은 리얼리즘론에서「현상과 본질의 변증법」으로 불렀던 것을 보다 체계화한 것이다. 루카치는 그의 미학이론에서 현상과 본질의 관계에 따라 현상과 본질의 통일체인 실제 현실(생생한 체험), 양자를 해체해서 본질을 추출해내는 과학(명료한 본질인식), 현상을 통해 본질을 보여주는 새로운 통일체인 예술(체험과 본질인식)로 구별했다.
루카치의 현상과 본질의 변증법에 대한 논의는 어떤 의미에서 바흐친의 담론 이론의 변증법적 번역이라고 볼 수 있다. 바흐친에 의하면 (자연)과학이 물화된 대상에서 보편법칙을 연구하는 반면 인문과학은 대상이 담론일 뿐만 아니라 이해 방법 자체가 담론의 성격을 지닌다. 담론이란 랑그의 법칙을 포함하면서 빠롤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빠롤은 랑그에 수렴되는 구심력(보편성)을 지닐 뿐 아니라 그것에서 이탈되는 원심력(개별성)도 지닌다. 이 양자의 운동 속에 빠롤(담론)은 역사적으로 변화하는 사회역사적 성격을 지닌다. 루카치의 특수성 범주도 사회역사적 조건에 따라 다양한 형식으로 끊임없이 변화하여, 개별 작품들의 차이를 한층 명확히 한다.
3) 생산이론(예술적 관습 유념)
루카치의 반영론은 다양한 매개성과 형식적 가능성을 고려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식론적인 차원을 중요시하고 있다. 그 이론은 결국 인식 내용의 다양한 형상화 혹은 자기의식화에 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의 형식개념 역시 현실의 예술적 반영이라는「인식」의 방법인 셈이며 재료나「생산조건」의 변화에 의한 형식(양식)의 변화(혹은 방법 및 기법의 변화)는 생각하지 않는다.
「생산이론」은 루카치의 이런 측면을 지적하고「생산조건」들의 변화에 따라 예술의 양식(혹은 형식)이 달라짐을 논의한다. 예컨대 복제 예술(사진, 소설, 영화)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대중적인 수용자와 대면하게 된다. 또 서사극은 효과를 위해 무대를 없애거나 영상, 노래, 무용 등을 사용한다.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요즈음 TV에 나오는 연속극을 시청자의 의견을 들어 구성이나 등장인물의 성격을 고쳐가는 것까지 포함할 수 있다. 이러한 생산이론은「생산조건」의 변화를 강조하는 점에서「인식론」을 중시하는 미학과 다르지만 양자가 반드시 대립되는 것은 아니다. 구비문학(설화)에서 문자문학(소설)으로의 발전은 인쇄술 등의 생산조건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 설화에서 소설로의 변화는 단순한 전달방식의 차이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생산조건」의 변화는 현실의 내용 및「세계관」의 변화와 상응관계에 있다. 다시 말해, 「생산조건」의 변화에 의한 설화에서 소설로의 양식 변화(서술 언어가 고정되어 작품의 일부가 된 것)는 현실을「인식」하는 방법의 변화(신성한 세계관에서 인간적 세계관으로의 변화)와 일치하는 것이다.
생산이론은 작가가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예술적 방법보다는 예술적 생산의 근본이 되는 조건들에 의한 형식의 결정을 논의하므로, 보다 거시적인 예술적 관습(미학적 코드)과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시대의 예술작품을 이해하려면 우선 그 시대의 미학적 코드를 이해해야 하는데 이는 마치 라디오의 적당한 주파수를 맞추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미학적 코드 혹은 예술적 관습이 변화되면 작품의 내용과 형식이 달라진다. 예컨대 영웅소설이 근대소설과 다른 것은 조선시대의 예술적 관습이 근대와는 상이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웅소설을 근대문학의 기준으로 읽을 수 없으며 그 시대의 관습과 코드의 기준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현실의 반영이라는 것도 거울로 비추듯이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적 관습을 매개로 한 일종의 굴절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에 나타난 내용을 이러한 예술적 관습의 이해 없이 직접 현실에 연관시키는 것은 결코 올바른 이해가 될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고전주의, 낭만주의, 리얼리즘 시대의 작품들이 왜 그토록 다르게 현실을 다루고 있는지 설명이 불가능해진다.(낭만주의는 현실을 되도록 무지개 빛깔로 채색한 반면 사실주의는 아무리 처참한 현실이라도 온도계처럼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이러한 예술적 관습은 (생산조건과 더불어) 그 시대의「이데올로기」와 연관성을 맺고 있다. 예컨대 영웅소설의 형식이 관념적 이상을 옹호하는 결말로 되어 있는 것은 당대의 유교 이데올로기와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사회가 변하면 새로운 예술적 관습이 요구되는데 루카치는 이를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차피 예술 형식은 이데올로기나 역사를 거울처럼 매끄럽게 반영하지는 않는다. 그와는 달리 예술작품은 이데올로기적인 예술적 관습(코드)에 의해 형상화(굴절, 왜곡, 파편화)됨으로써 그 억압 작용에 의해 현실과 역사를 (총체성이 아닌) 왜곡과 침묵의 형태로 그려낸다. 따라서 우리는 텍스트에 나타난 왜곡과 침묵을 단서로 현실과 역사에 대해 언급할 수 있을 뿐이다. 이처럼 생산이론이 텍스트의 기능을 역사의 총체적 인식이 아닌 이데올로기적 왜곡으로 보는 것은 탈구조주의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4) 까간의 가치론 미학(가치 지향적 활동, 가치평가)
가치론은「인식론」에 중점을 두고「문학중심주의」의 경향을 갖고 있는 전통적인 반영론 미학을 비판하면서, 예술은「인식지향적」활동인 과학과는 달리 (윤리, 법률, 이데올로기와 같은)「가치지향적」활동임을 말한다. 과학의 진리는 객관적이어야 하며 주관적 요소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반면에 가치지향적 활동은 객체와 주체 간의 가치적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예술의 대상인 현실은 단순히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가치평가(감정이입법-새가 울고 있는지, 노래하고 있는지는 전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의 감정 상태에 달려 있다.) 대상으로서 가치가 있는 객체인 것이다. 예술은 현실이 어떤 객관적 구조로 되어 있는가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그 객관적 구조가 우리에게 어떤 가치적 존재인가를「가치평가」하는 것이다. 예컨대 1920-30 년대의 우리 소설들은 식민지 시대의 현실이 식민지 반봉건이라는 구조로 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의 현실이 슬프고도 고통스러운 삶이었음을 이야기 한다. 1921년 11월에 발표된 현진건의 <술 권하는 사회>(개벽 7호)는 술을 마실 수밖에 없는 당시의 사회 환경(일제)에 대한 분노의식(저항의식)을 소설로 집약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 작품은 하나의 아이러니 기법으로써 시대정신의 비극성을 자기 욕구 불만으로 노출시킨 것이 되기도 한다. 그 점에서 술은 욕구 불만의 폭력적인 매개물인 셈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1920년대에 일제 탄압정책으로 가장 암울하고 비참한 상황 하에서, 한민족이 어떠한 삶의 시련을 겪었는가를 대변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예술의 주체-객체 간의 가치적 관계는 단순히 주관적 감정이나 평가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가치평가는 객체(현실)에 대한 인식을 전제로 하는 것이므로「인식」과「자기인식(가치평가)」, 지각과 정서적 표현은 통일된 것으로 나타난다.
결국 까간의 가치론은 다양한 예술 장르와 방법들을 편중되지 않게 복합적으로 고찰하려는 관점에서 기호학, 구조주의 등 최근 새로운 분석방법들을 유물변증법의 입장에서 수용해야 함을 주장한다. 까간의 가치적 미학은 다양한 형식과 유파, 사조, 방법들을 설명하는 한편 근래의 새로운 연구방법들을 미학 속에 받아들이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루카치의 미학을 모두 무용하게 만든 것은 아니다. 루카치가 서사문학과 리얼리즘에 편중된 것은 그 시대가 그런 장르와 방법을 요구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리얼리즘에 관한 한 루카치도 가치론적 인식과 자기인식의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이다.(김춘수 ‘꽃’)
5) 제임슨과 모순 제거를 통한 역사 인식(역사를 해석 코드로)
지금까지 논의된 생산이론은 예술과 현실의 복잡한 연결에 주목하여 예술적 관습(혹은 미학적 코드)에 유념하였고, 까간의 가치론은 예술이 가치지향적 활동(가치평가)임을 말했다. 즉, 현실은 (직접적으로 작품 속에 담겨지는 것이 아니라) 작가에 의해 예술작품으로서 코드화(혹은 코드변환)되며, 미학적으로 코드화된 작품을 현실과 연관시켜 해석하려면 다시 그 코드를 해독해야 (변환시켜야) 한다. 현실이 미학적으로「매개」되어 예술적 반영물이 된다는 루카치의 말에서「매개」가 바로 「코드변환(transcoding)」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실을 미학적으로 매개한다는 것은, 예술작품이 현실의 반영물인 동시에 현실 그 자체와는 구별되는 특수한 미학적 구조임을 의미한다. 이처럼 루카치의 매개 개념은, 반영뿐만 아니라「차이」의 개념을 포함하는데, 이 점에서「동일성」을 매개하는 헤겔과 구분된다. 헤겔은, 예술(혹은 예술적 매개)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루카치와 달리, 예술․종교․철학이 절대정신(관념적 내용)이라는 동일한 기준에 의해 평가된다고 보는 것이다.
어쨌든 루카치의 미학은 과학적으로 인식한 역사적 현실을 해석의 최종 근거로 삼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과학적 체계화가 가능하며 그렇게 인식된 역사적 현실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탈구조주의는, 이제까지 텍스트의 지시대상으로 여겨온「역사」자체가 일종의 또 다른「텍스트」라고 말한다. 이는 역사라는 텍스트는 자꾸 변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이런 (역사를 실체로 보지 않는) 탈구조주의의 견해를 받아들이면서도 역사 허무주의에서 탈출하려 한다. 제임슨은 역사란 고정된 실체로(텍스트의 지시대상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텍스트처럼 무규정한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이는 여전히 역사를「해석의 코드(약호)」로 삼을 수 있다는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사람이 능력에 따라 자유롭게 기회를 부여받는다는(근면의 대가로 행복을 보장받는다는) 이데올로기로서, 욕망과 좌절을 상징적으로 해소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역사와 욕망 사이의 모순을 은폐하는 기능을 할 뿐,(그에 휘둘리는 우리에게는 고통스런 경험만 내면에 고스란히 남겨줄 따름이다.) 그 같은 이데올로기에 회유될 수 없는 고통스러운 경험은 모순으로 우리의 내면에 남게 된다. 욕망과 역사의 갈등이 담겨 있는 이 모순을 마치 소원 충족과도 같이 해소시키는 것이 바로「서사 텍스트」이다. 서사 텍스트는 지배이데올로기가 작용하는 일상생활을 그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억압된 역사와 욕망(혹은 양자의 갈등관계)을 해소시키려 시도한다. 그러나 역사와 욕망은 서사 텍스트 속에 액면 그대로 형상화되지는 않는다.
마치 꿈을 해석해야만 무의식을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서사 텍스트를 해석해야만「모순」을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또 그 모순을 매개로 했을 때만「역사」를 인식할 수 있다. 따라서 서사 텍스트는 필연적으로 해석되어야 하며 그 해석 작용은 여전히 역사를 코드로 삼아야 한다. 이처럼 제임슨의 모순 개념은, 역사를 서사 텍스트의 지시대상으로 삼는 알레고리(寓意)적인 해석을 반대하면서도, (복잡한 기제를 통해) 여전히 역사가 해석의 코드로서 존재해야 하는 필연성을 드러낸다.
제임슨의 이론은 개별 작품을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이기보다는 작품이 해석되어야 할 필요성과 그 복잡한 기제를 설명한 전체적인 논의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실제로 작품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분석 방법이 필요하게 된다. 제임슨은 그 실제적 분석 도구로서 형식주의나 구조주의(탈구조주의)의 이론을 빌려온다. 제임슨에 의하면 형식주의(구조주의․탈구조주의)의 결함은 이론가 개인의 실수라기보다는 이데올로기의 제약에 의한 불가피한 실수이다. 따라서 형식주의 이론을 이데올로기의 한계를 넘어서도록「역사화」시키면 그 이론적 성과는 아주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
예컨대 김유정의 <동백꽃>은 ‘나’와 점순이라는 시골 청년들의 애정 갈등을 그린 소설이다. 이러한 주제(의미)는 어느 시대든지 있으며, 그것을 통해 당시대의 역사를 살펴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 작용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은폐들을 제거해보면 그 밑에 숨어 있는 역사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나’와 점순을 구성하고 있는 의미소들 중에서 공통되는 것은 같은「마을의 청년들」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점순은「마름」의 딸이므로 ‘나’와 신분적으로 모순되는 관계에 있다. 그런데 두 사람의 화해는 그런「사회적 모순」이 없는「자연」속에서 이루어지며 그것은 그들이 마을 청년들이라는 공통점을 부각시켜준다.(계급장 떼고 나면, 목욕탕에서 만나면) 또 그것은「자연」속에서의 화해이면서, 농촌 청년들 혹은 동백꽃(들)이라는「복수적(혹은 집단적)」의미가 부가된 화해이다. 자연, 마을 청년, 공동체라는 의미는 ‘나’와 점순의 이상적인 소망으로서 내면에 잠재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 속에서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나’와 점순 사이의 사회적 갈등을 해소시키지 못한다.(부부도 침실에 들어야 성생활을 할 수 있듯이)따라서 이 소설의 심층에는 마을 청년들의 소망과 마름/소작인의 갈등, 자연의 화해와 사회적 모순, 애정의 소망과 현실적 모순의 역동적 의미들이 운동하고 있다. 표면적 서사구조에 은폐된 역사는 바로 이 양자의 차이들 속에 위치한다고 할 수 있다. 그 차이를 확대해보면 마을 청년들의 소망과 식민지 농촌 구조의 모순, 그리고 공동체(농민, 민중)의 소망과 식민지 반봉건 사회의 차이적 갈등으로 이해될 수 있다. <동백꽃>을 이처럼 역사와 소망(욕망)의 모순이 투사된 작품으로 해석하는 데에는, 자연, 화해, 복수성(집단성의 단초)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동백꽃 설정이 중요한 요인이 된다.
이러한 예들은 탈구조주의 이론을 변증법적으로 이용해 숨겨진 역사를 드러내는 도구로 삼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세부적 분석에는 형식주의가 유용하지만, 그것을 역사적 해석으로 확대할 때는 변증법이 유용하다는, 제임슨 이론은 이처럼 풍성한 형식주의 성과들을 변증법적 맥락에서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장점이 있다.
이제까지의 논의를 정리해보면, 형식주의․구조주의․탈구조주의 등은 예술작품이 역사적 현실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자율성)을 논의 전제로 삼고 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암암리에 역사적 문맥을 설정하지 않을 수 없으며 최근의 탈구조주의 논의에 이르러서는 복잡한 방식으로 역사에 접근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반면에 변증법적 이론은 예술작품이 역사적 현실의 반영이라는 사실을 단초로 삼는다. 이처럼 형식주의 이론은 탈구조주의에 이르러 역사와 만나고 있으며 변증법적 이론은 최근에 와서 작품과 역사의 복잡한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루카치는 소설에 중점, 부레히트는 극 양식 중시, 아도르노는 시와 음악, 형식주의: 신비평은 시에 관심, 시카고학파<구성>는 소설 중시, 내적 형식은 인식론적 미학 강조, 외적 형식은 형식주의, 생산이론 중시-장르의 특성에 따라 이론적 논의의 성격과 방향은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
한 마디로 줄이면, 우리는 형식주의 논의들을 변증법적 관점에서 수용하는 태도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6) 사회주의비평의 장․단점
(1) 장점
① 모든 문학작품이 우리로 하여금 어떤 우회로를 거쳐 결국 현실로 돌아오도록 한다는 사실을 중시한다.
② 적극적으로 시대의 폭력과 사회의 타락에 저항하고, 건강한 민중생활과 올바른 역사의 진행에 이바지하는 것이, 새롭고 참다운 문학의 창작과 비평을 위해서 필요 불가결한 조건임을 인식시켜준다.
③ 사회주의비평이 근본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현실과 역사에 대한 합리적인 이해와 극복의 훈련이며, 우리의 삶을 바르게 질서화 하고, 편견에 맞서 싸우려는 인간다운 인식의 확인이다.
(2) 단점
① 작품의 미학적 질이나 창조적 솜씨를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
② 문학작품의 복잡성을 충분히 분석하거나 해명하지 못한다. 예컨대 작품 속에 서로 얽혀 있는 모티브들, 상징들의 여러 가지 뜻, 내용과 형식의 상호의존, 억양과 강조의 미묘한 파동 등을 소홀히 하기 쉽다.
③ 결국 문학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중요한 요소들이 사라져, 미학적 체험을 손상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첫댓글 11월 2일 공부할 자료입니다.
박사님 자료에 마음 후련히 젖습니다
공부 할께요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