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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가고전한시 스크랩 두보(杜甫, 712~770)의 한 측면. 중국 고전명시 감상 ⑤ / 심경호
가은 추천 0 조회 65 16.03.25 04:3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중국 고전명시 감상 ⑤ / 심경호

 

두보(杜甫, 712~770)의 한 측면

 

침울한 심사의 진실한 표출

 

 

杜甫?像,?于《晩笑堂竹??傳》

 

 

1.

 

두보(杜甫, 712~770)는 정말로 다양한 얼굴을 가진 시인이다. 조선 성종 때 두보 시를 우리말로 풀이한 《두시언해》의 서문에는 두보가 충군애국의 뜻을 시에 담았기 때문에 그 시를 높이 친다는 논평이 있다.

하지만 두보는 충군애국을 고취한 이데올로그는 아니었다. 시의 사회성을 중시하는 연구자들은 두보가 장편의 고체시(古體詩)가 역사성을 담고 있다고 하여 그 시들을 시사(詩史)라고 부르며 칭송한다. 그러나 두보는 시를 통해 정치에 참여하고자 했던 선동자는 아니었다. 두보는 자연과 인간의 거리를 깨닫고 서글픈 감정을 시에 담았고, 전란으로 떠돌게 된 자신의 처지를 서글퍼하다 못해 침울한 모습을 시로 드러냈다.

물론 두보의 침울한 정서는 개인적인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보편성을 띠었다. 그렇기에 두보의 서정은 허위도 아니고 과잉도 아니다. 오히려 그의 서정시들은 내면의 고통을 여과 없이 드러내 주어 솔직한 느낌을 주고, 인간 존재의 보편적 슬픔을 시로 그려내어 쉽게 공감이 간다.

 

2.

 

두보의 시 가운데서도 〈동곡칠가(同谷七歌)〉라는 두보의 가행체(歌行體) 연작시는 특히 비애의 감정이 직접 드러나 있다. 가행체란 노랫가락처럼 들쑥날쑥한 시구를 교차하는 고체시의 한 형식이다. 본래의 제목은 〈건원 때 동곡현에 부쳐 살면서 지은 노래 일곱 수(乾元中寓居同谷縣作歌七首)〉인데, 줄여서 ‘동곡칠가’라고 한다.

 

〈동곡칠가〉는 두보가 48세 때 간쑤성(甘肅省) 퉁구(同谷, 지금의 成縣)로 향하면서 지은 것이다.

당나라 현종의 천보 14년(755)에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고 이듬해 숙종 건원 원년(756)에 두보는 가족을 백수현(白水縣)으로 피신시킨 후 자신은 숙종의 행재(行在)가 있던 펑샹(鳳翔)으로 가려고 하다가 적군에게 포로가 되어 장안에 연금되었다. 숙종 지덕 2년(757) 정월에 안녹산은 안경서와 엄장·이저아에게 피살되는데, 4월에 두보는 장안을 탈출하여 펑샹으로 가서 좌습유(左拾遺)의 관직에 올랐으며, 관군이 장안을 회복한 후에는 장안의 조정에서 벼슬을 살았다. 그러나 힘이 되어 주던 방관(房琯)이 외직으로 나가자, 두보도 건원 원년(758) 6월에 화저우(華州)의 사공참군(司功參軍)으로 좌천되었다.

 

 

  王天一《杜甫在?右??上江南》

 

 

그런데 이듬해 건원 2년(759) 여름에 경기 지역인 산시성(陝西省)에 한발이 계속되고 안경서 일당은 더욱 날뛰자, 음력 7월에 화주를 떠나 간쑤성 친저우(秦州, 지금의 天水)로 가족을 데리고 이사했다. 두보는 농서(?西, 당시에는 ?右道)의 산속에서 4개월이나 생활하다가, 그해 10월에 조금 따뜻한 곳인 퉁구(동곡)로 이사했다.

 

 

王天一《杜甫在?右??上江南》

 

 

두보의 〈동곡칠가〉는 헤어져 있는 아우와 누이를 두 수에서 노래하고, 그다음에 기아를 해결하기 위해 들고 다녔던 삽을 특별히 의인화하여 노래했으며, 나머지 네 수는 자신의 처지와 시국을 노래했다.

먼저 제1수에서 두보는 굶주림에 허덕이는 자신의 처지를 애처로워했다.

 

有客有客字子美 나그네, 나그네, 이름은 자미여

白頭亂髮垂過耳 흰 머리 헝클어져 귀를 덮누나.

歲拾橡栗隨狙公 해마다 도토리 줍느라 원숭이를 따른다니

天寒日暮山谷裡 추운 날 저물도록 산골 속에서.

中原無書歸不得 중원에선 소식 없어 돌아가지 못하고

手脚凍?皮肉死 손발 얼어 터져 살가죽이 죽었네.

嗚呼一歌兮歌已哀 아아, 첫 번째 노래여, 노래 너무 애처롭구나

悲風爲我從天來 슬픈 바람은 날 위해 하늘에서 불어오네.

 

제2수에 두보는 구황식물인 황정(黃精.둥굴레)을 캐러 가지만 하릴없이 빈손으로 돌아와, 황정을 캐려고 메고 갔던 긴 삽을 노래했다.

 

長?長?白木柄 긴 삽아, 긴 삽아, 흰 나무 자루여

我生託子以爲命 나의 삶은 그대를 의지해 목숨 부지하노라.

黃精無苗山雪盛 황정은 싹이 없고 산에 눈은 쌓였는데            : 黃?

短衣數挽不掩脛 짧은 옷을 자주 당겨 보지만 정강이를 가리지 못하네.

此時與子空歸來 이때 너와 함께 빈손으로 돌아오니

男呻女吟四壁靜 처자식은 신음하고 방안 네 벽은 고요하네.

嗚呼二歌兮歌始放 아아, 둘째 노래여, 노랫소리 크게 내니

閭里爲我色?? 마을 사람들도 날 위해 슬퍼하도다.  :?裏?我色??

 

제3수에서는 아우와 멀리 떨어져 있는 사실을 슬퍼했다.

 

有弟有弟在遠方 아우야, 아우야, 먼 땅에 있으니

三人各瘦何人强 너희 셋 각각 여위어 있으리니 누가 건강하겠나.

生別展轉不相見 생이별에 전전반측하면서도 만나지 못하니

胡塵暗天道路長 오랑캐 일으키는 먼지가 하늘을 덮고 길이 너무 멀구나.

東飛駕鵝後?? 동쪽으로 날아가는 기러기야 뒤따르는 무수리야

安得送我置汝傍 나를 보내 너희들 곁에 둘 수 없느냐.     :旁

嗚呼三歌兮歌三發 아아, 세 번째 노래여, 세 번째로 부르노라

汝歸何處收兄骨 너희가 귀향한 뒤 어디서 이 형의 백골을 수습할 거냐.

 

제4수에서 두보는 멀리 떨어져 지난 십 년간 만나지 못한 누이동생을 그리워했다. 누이동생은 당시 종리(鍾離) 고을에 있었는데, 종리는 지금의 안후이성(安徽省) 펑양(鳳陽)이다.

남편을 일찍 여의고 자식들은 어려 고통을 겪고 있을 누이동생을 생각하니, 두보는 더욱 가슴이 아파 왔다.

 

有妹有妹在鍾離 누이여, 누이여, 종리 고을에 있나니

良人早歿諸孤癡 남편 일찍 죽고 자식들은 모두 어리네.

長淮浪高蛟龍怒 회수(淮水)의 파도 드높고 교룡은 성내니

十年不見來何時 못 본 지 십 년이건만 어느 때나 돌아오랴.

扁舟欲往箭滿眼 편주 타고 가자니 시야 가득 화살 날고

杳杳南國多旌旗 아득한 남국까지 전투 깃발 가득하다.

嗚呼四歌兮歌四奏 아아, 네 번째 노래여, 네 번째로 연주하노라.

竹林猿爲我啼淸晝 죽림의 원숭이는 날 위해 맑은 대낮에 우네.    (竹?)林猿?我啼?晝

 

 

王天一<杜甫在?右??上江南 >杜子美蓋云 :

萬古仇池穴,潛通小有天,神魚人不見,福地語?傳,近接西南境,長懷十九泉,何時一茅屋,送老白雲邊。

 / 和桃花源詩?序  蘇軾

 

 

제5수에서 두보는 자신이 처해 있는 궁벽한 골짜기를 노래했다. 궁벽한 골짜기는 곧 존재의 불안감을 극대화시키는 환경이다.

 

四山多風溪水急 사방 산에 바람 많고 시냇물 급한데

寒雨颯颯枯樹濕 차가운 비 후드득후드득 고목을 적신다.

黃蒿古城雲不開 쑥대 뒤덮은 옛 성은 구름에 잠겼고,

白狐跳梁黃狐立 흰여우 뛰놀고 누런 여우 서 있도다.

我生胡爲在窮谷 내 삶이 어쩌다가 깊은 골짝에 있는가

中夜起坐萬感集 한밤에 일어나 앉으니 만감이 모여든다.

嗚呼五歌兮歌正長 아아, 다섯째 노래에 노래가 정말 길도다

魂招不來歸故鄕 넋은 불러도 오지 않고 고향으로 달려가네.

 

제6수에서는 용이 남쪽에 칩거하고 모진 뱀이 물 위에 노니는 상황을 노래했다. 옛 주석에 따르면 용은 당나라 현종을 비유하고 모진 뱀은 사사명을 비유한다. 그렇다면 이 시는, 천자는 남쪽을 떠도는데 사사명은 중원에서 발호하고 있는 현실을 개탄한 셈이다. 그러나 굳이 당대의 현실에 대응시키지 않아도 좋다. 혼란스런 현실을 비유했다고 보아도 좋다. ‘칼 뽑아 베려다 그만 다시 멈추었다’는 말에서 무기력감이 배어 나온다.

 

南有龍兮在山湫 남쪽에 용이 있어 산 못이 사네

古木??枝相? 늙은 나무 치솟아 가지 서로 뒤얽힌 곳.

木葉黃落龍正蟄 나뭇잎 누렇게 떨어지고 용은 칩거 중인데  

?蛇東來水上遊 모진 뱀이 동쪽에서 와서 물 위에 노닐기에

我行怪此安敢出 내 지나다 어찌 감히 나왔느냐 괴상히 여겨

拔劒欲斬且復休 칼 뽑아 베려다 그만 다시 멈추었네.

嗚呼六歌兮歌思遲 아아, 여섯째 노래여 노래하는 심사 맥없기만 한데

溪壑爲我回春姿 계곡은 날 위해 봄 모습을 회복하는 듯.

 

 

 

 

〈동곡칠가〉의 제7수에서 두보는 포부를 이루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비참해했다. 마음과 현실의 괴리라는, 한시 일반의 대표적 주제 가운데 하나를 담고 있다.

 

 

男兒生不成名身已老 남아로 태어나 공명은 못 이루고 몸만 늙어

三年飢走荒山道 삼 년을 거친 길에 굶주려 다니누나.         : 饑

長安卿相多少年 장안의 재상들은 젊은이가 많나니

富貴應須致身早 부귀는 일찌감치 이루어야 할 일.

山中儒生舊相識 산속 유생으로 전부터 알던 이는

但話宿昔傷懷抱 지난날 포부만 이야기하며 서러워하네.

嗚呼七歌兮?終曲 아아, 슬프다 일곱 번째 노래여, 서글프게 마치고

仰視皇天白日速 하늘을 우러러보매 해가 빠르게 기우네.

 

 

이 일곱 수는 정말로 슬픔의 감정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래도 남송의 철학자 주희(朱熹) 즉 주자는 이 연작시가 대체로 호탕(豪宕)하고 기굴(奇?)하다고 했다. 다만, 두보가 결국 마지막 노래에서 늙음을 탄식하고 비천함을 한탄한 것은 도를 알지 못하는 누추한 심리라고 혹평했다.

주자의 문집 《회암집(晦庵集)》 권 84의 〈발두공부동곡칠가(跋杜工部同谷七歌)〉에 그 논평이 실려 있다. 조선 세종 때 편찬한 《찬주분류두시》도 〈동곡칠가〉 끝에 주자의 이 논평을 수록했다.

두보는 〈동곡칠가〉 제7장에서 이렇게 탄식했다.

 

남아로 태어나 공명은 못 이루고 몸만 늙어

삼 년을 거친 길에 굶주려 다니누나.

장안의 재상들은 젊은이가 많나니

부귀는 일찌감치 이루어야 할 일.

男兒生不成名身已老,三年饑走荒山道。
長安卿相多少年,富貴應須致身早。

 

이를 두고 정말 비루하다고 할 수 있을까? 주희는 인간 이상의 실현에 매진할 것을 늘 주장한 철학가였기에 두보가 ‘부귀는 모름지기 일찌감치 이루어야 한다.’고 한 것에 공감하지 않았다.

하지만 두보는 부귀를 부러워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불완전한 처지를 애처로워한 것이다. 처자식이 굶주림에 허덕이는 모습을 보면서 어느 누가 탄식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렇기에 마음과 현실의 괴리를 겪은 많은 시인이 〈동곡칠가〉의 시상에 공감해서 그 시를 모방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송나라 말의 문천상(文天祥)은 세상을 향한 울분을 육가(六歌)에 토로했고, 조선의 김시습(金時習)은 창자 속 가득한 수심을 〈동봉육가(東峰六歌)〉에 담았으며, 이별(李鱉)은 세상을 경멸하는 완세불공(玩世不恭)의 뜻을 육가에 실었다.

 

 

 

 

3.

 

두보는 퉁구에서도 안주하지 못한 채, 1개월 만에 쓰촨성(四川省) 청두(成都)를 향하여 떠났다. 산천은 험하고 식량은 늘 부족했으며 처자를 이끌고 갖은 고생을 해야 했다. 그때 그는 저 유명한 기행시인 〈성도기행(成都紀行)〉 12수를 지었다.

두보의 〈성도기행〉 12수는 모두 오언고시로 장편이다. 구조오(仇兆鰲)가 편찬한 《두시상주(杜詩詳注)》에는 권 9에 수록되어 있다. 두보의 원주에 “건원 2년 12월 1일에 농우를 떠나 성도로 갔다”고 했다.

12수는 〈발동곡현(發同谷縣)〉·〈목피령(木皮嶺)〉·〈백사도(白沙渡)〉·〈수회도(水會渡)〉·〈비선각(飛仙閣)〉·〈오반(五盤)〉·〈용문각(龍門閣)〉·〈석궤각(石櫃閣)〉·〈길백도(桔柏渡)〉·〈검문(劍門)〉·〈녹두산(鹿頭山)〉·〈성도부(成都府)〉이다. 퉁구에서 청두까지는 500킬로미터에 가깝다고 한다.

〈성도기행〉 12수의 첫수인 〈발동곡현(發同谷縣)〉은 퉁구(同谷)를 떠나면서 지은 것으로, 20구의 장편이다.

 

 

賢有不黔突 현인 묵자도 굴뚝이 검도록 앉아있지 못했고

聖有不煖席 성인 공자도 자리가 더워지도록 있지 못했거늘

況我飢愚人 하물며 나같이 배고프고 어리석은 사람이

焉能尙安宅 어찌 편안히 한곳에 살리오.

始來玆山中 처음에 이 산속에 와서는

休駕喜地僻 수레를 쉬고 땅이 그윽함을 기뻐했으니

奈何迫物累 나는 왜 이러저러한 사정에 핍박받아

一歲四行役 한 해에 화주·진주·성주(成州)·동곡 네 곳을 떠돌았나.

??去絶境 하지만 시름겹게 이 절경을 버리고

杳杳更遠適 아득하니 또 멀리 가게 되어

停?龍潭雲 용담 가 지날 때 구름 보며 말을 머물고

回首虎崖石 호애(虎崖)의 흰 바위를 사랑하여 머리 돌려 바라본다.

臨岐別數子 갈림길에 임하여 두어 벗을 이별하매

握手淚再滴 손잡고 눈물을 다시 떨어뜨리나니

交情無舊深 우정이란 오랜 벗이라 해서 깊은 것도 아니기에

窮老多慘慽 곤궁하고 늙은 터라 너무도 슬프구나.        : ?

平生懶拙意 내 평생에 게으르고 어리석은 뜻만 있었기에

偶値棲遁跡 우연히도 은둔할 자취를 행여 만났었다만

去住與願違 가거나 머물거나 내 뜻과 어긋나 정처 없이 분주하니

仰慙林間隔 숲속 새들이 자득함을 쳐다보며 부끄러워하노라.   : ?

 

 

현인 묵자도 한곳에 안주하지 못해서 굴뚝이 검어질 겨를이 없었고, 성인 공자도 천하를 주유하느라 앉은 자리가 따스해질 겨를이 없었다. 그렇기에 배고프고 고달팠던 내가 이 동곡에 머물게 되었을 때는 무척이나 기뻤다.

하지만 이곳도 버리고 떠나게 되매, 호애라는 경승지를 못 보게 된 것도 서글프고, 그동안 사람들과 헤어지는 것도 너무도 슬프다. 세간과 조화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이곳에 은둔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지만 그 뜻도 어긋나, 숲 속에서 제 있을 곳을 얻어 재잘거리는 새들이 부럽기만 하고 또 자신의 처지가 부끄럽기만 하다.

 

 

蜀?道?

 

 

두보는 퉁구현의 동남쪽 20리쯤 현재의 휘현(徽縣) 서쪽 총산(蔥山) 동맥(東脈)에 있는 목피령 고개를 넘어가면서 〈목피령(木皮嶺)〉이란 제목의 시를 지었다.

 

 

首路栗亭西 율정 서쪽으로 길을 향하면서

尙想鳳凰村 봉황 마을을 오히려 잊지 못하네.

季冬携童稚 늦겨울에 아이를 데리고

辛苦赴蜀門 고생하며 촉문[검각]으로 가는 길.

南登木皮嶺 남쪽으로 목피령에 오르는데

艱險不易論 그 험난함은 두말할 것 없으니

汗流被我體 땀이 흘러 내 몸을 덮어

祁寒爲之暄 큰 추위에도 이로 인해 덥구나.

遠岫爭輔佐 먼 뫼들은 다투어 보좌하고

千巖自崩奔 뭇 바위도 스스로 무너지듯 달려오기에

始知五嶽外 비로소 알리라 오악 이외에도

別有他山尊 각별히 존귀한 산이 있는 줄을.

仰干塞大明 산령이 위로 간범하여 태양을 가리고   :幹

俯入裂厚坤 굽혀서는 두터운 땅을 찢은 형세

再聞虎豹鬪 호랑이와 표범 싸움 소리를 다시 들으며

屢?風水昏 바람과 강물 어둑한 곳을 자주 굽혀 지나노라.

高有廢閣道 높은 데에는 버려진 잔도가 있어

?折如轅 꺾여 굽은 모습이 수레 바퀴살 끊긴 듯하다.   ?摺如短轅

下有冬靑林 아래에는 동청의 수풀이 있어

石上走長根 돌 위에 긴 뿌리가 내달리며

西崖特秀發 서쪽 벼랑은 두드러지게 빼어나

煥若靈芝繁 빛나는 것이 영지가 떨기 진 듯해라.

潤聚金碧氣 촉촉하기는 금벽(金碧)의 기운이 모인 듯하고

淸無沙土痕 맑기는 흙모래 흔적이 없으니

憶觀崑崙圖 전에 곤륜산 그림을 본 적 있다만    昆崙

目擊圃存 현포 선경을 실제로 보는 듯하다.    :懸

對此欲何適 이 좋은 데를 두고 어디로 갈까

默傷垂老魂 늘그막의 이 영혼을 가만히 슬퍼하노라.

 

 

두보는 검각이 중국의 보편적인 산악신앙에서 손꼽는 오악보다도 더 존귀하다고 했다. 검각으로 이어지는 목피령은 산령이 위로 태양을 가리고 아래로 두터운 땅을 찢은 형세인 데다가 그곳을 지나는 여행자는 호랑이와 표범 싸움 소리를 들으며 바람과 강물 어둑한 곳을 굽혀 지나야 하는 형편이다. 하지만 두보는 그곳이 곤륜산의 현포와도 같은 선경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선경을 놓아 두고 떠돌아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슬퍼했다.

 

 

  蜀中名家周??中??

 

 

제3수는 〈백사도(白沙渡)〉이다. 이 나루는 휘현(徽縣) 서남쪽 소하관(小河關)의 낙하(洛河)가 탁수(濁水)와 이어지는 곳에 있는 관교패(官橋?, 관청에서 관리하는 다리 둑)이다.

 

 

畏途隨長江 무서운 길이 긴 강을 따라 났고

渡口下絶岸 나루터는 끊어진 기슭 아래로 이어졌는데

差池上舟楫 분분하게 배들이 오르내리며

杳窕入雲漢 아스라이 구름하늘로 들어간다.

天寒荒野外 하늘은 거친 들 밖에 춥고

日暮中流半 해는 강 흐름 가운데서 저무나니

我馬向北嘶 나의 말은 북쪽을 향하여 울고

山猿飮相喚 산 원숭이는 물을 마시며 서로 부른다.

水淸石?? 맑은 물 속에 돌들이 무리 지고

沙白灘漫漫 모래 흰 강 여울이 느릿느릿 흘러가기에

逈然洗愁辛 환하게 시름을 씻으니

多病一疎散 큰 병이 단번에 흩어진다만

高壁抵?? 높은 돌벼랑은 더욱 아스라하고

洪濤越凌亂 넓게 이는 거친 물결은 갈수록 어지러워

臨風獨回首 바람에 임하여 홀로 머리 돌려 바라보며

攬?復三歎 말고삐 잡고 다시 세 번 탄식한다.

 

 

“하늘은 거친 들 밖에 춥고, 해는 강 흐름 가운데서 저문다”는 표현은 협곡의 을씨년스런 풍광을 매우 교묘하게 묘사한 명구이다. 두보는 “맑은 물 속에 돌들이 무리 지고, 모래 흰 강 여울이 느릿느릿 흘러가는” 풍광을 보면서 시름을 씻고 숙병도 다 나은 듯했지만, 높은 돌벼랑이나 거친 물결을 보면서 이곳에는 안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 낭패감이 마지막 두 구에 잘 드러나 있다.

 

 

 

 

제4수는 〈수회도(水廻渡)〉이다. ‘회’는 ‘回’나‘會’로도 적는다. 이 나루는 휘현(徽縣) 노우관(老虞關)의 어관도(漁關渡)를 가리킨다고 한다. 두보는 배로 가릉강(嘉陵江)을 건너면서 이 시를 지었다.

 

 

山行有常程 산길 가는 일정이 있어

中夜尙未安 한밤에도 쉬지 못하는데

微月沒已久 희미한 달은 일찌감치 지고

崖傾路何難 벼랑은 기울어 길이 험난하다.

大江動我前 큰 강물이 내 앞에서 일렁거려

洶若溟渤寬 넘실넘실 넓은 바다 같거늘

?師暗理楫 뱃사공은 어둠 속에 삿대를 잘 저어

歌笑輕波瀾 노래하고 웃으며 물결을 무던히 여긴다.

霜濃木石滑 서리 두터워 나무 바위 미끈거리고

風急手足寒 바람 급하여 손발이 차가운데

入舟已千憂 배에 들면 온갖 시름 일어나고

陟?仍萬盤 뫼에 오르면 산길은 일만 굽이.

廻眺積水外 많이 쌓인 물 밖을 되돌아 바라보니

始知衆星乾 뭇 별이 바싹 말라있음을 알겠나니

遠遊令人瘦 먼 길 여행은 사람을 여위게 해서

衰疾慙加餐 병든 늙은이 밥 더 먹으란 옛말이 부끄럽구나.

 

 

일정에 따라 산길을 가면서 밤에도 쉬지 못하고 묵묵히 걷는데, 달은 일찌감치 져서 길이 더욱 험난하다. 문득 큰 강이 눈앞에 나타나 도도하게 흐른다. 뱃사공은 깜깜한 밤중에 배를 저어 배따라기 노래를 부르면서 물살을 헤치고 나아간다. 서리는 내려 나무와 바위를 물기로 적셔 매끄럽게 만들고 바람이 강하게 불어서 손과 발을 차갑게 만든다. 배에 탔을 때부터 근심에 휩싸였지만, 배에서 내리자 더욱 험준한 산길이 기다리고 있다.

머리를 돌려 밤하늘을 보면 별들이 찬란하게 흩어져 있는데, 먼 길을 오느라 이미 여위고 지쳐, 억지로 밥을 먹어도 기운이 좀처럼 나지 않는다. 두보는 여행길의 풍경을 세밀하게 응시하다가, 결국 여행의 고단함을 토로하고 말았다.

 

제5수는 〈비선각(飛仙閣)〉이다. 비선각은 지금의 산시성 뤠양(略陽)인 흥주(興州)의 동남쪽에 있는 비선진(飛仙鎭)의 전망 좋은 곳이다. 그 부근의 고개를 비선령이라고 한다.

현재는 검각의 초입인 검문관진(劍門關鎭)을 출발해서 신현성(新縣城)을 지나 가릉강(嘉稜江)을 따라나가 소화고진(昭化古鎭)에 닿고 다시 광원(廣元)으로 향하다가 명월협(明月峽)의 고잔도(古棧道)에서 마주치게 된다고 한다.

 

 

土門山行窄 문처럼 열린 좁은 산을 헤쳐나가매

微徑緣秋毫 가는 길이 가을터럭처럼 한데

棧雲?干峻 잔도의 구름은 성하여 높고

梯石結構牢 돌계단은 단단하게 얽어져 있다.

萬壑?疎林 일만 골짝엔 성근 수풀 갸웃하고

積陰帶奔濤 짙은 숲 그늘은 내닫는 파도를 띠었는데

寒日外澹泊 차가운 해는 각도(閣道)의 바깥에 엷고

長風中怒號 긴 바람은 골짝 안에서 울부짖누나.

歇鞍在地底 말을 쉬게 하길 땅 밑에서 하니

始覺所歷高 지나온 곳이 높았음을 비로소 깨닫나니

往來雜坐臥 오고 가며 앉고 눕고를 뒤섞어서 하느라

人馬同疲勞 사람이나 말이나 숨 가쁘고 고단하다.

浮生有定分 뜬 인생에는 정해진 분수 있거늘

飢飽豈可逃 고프거나 배부른 운명을 어떻게 도망하랴

嘆息謂妻子 탄식하며 처자식 향해 이르기를

我何隨汝曹 내 무슨 이유로 그대들을 데리고 이 고생인가.

 

 

사람이 혼자 지나가기도 어려운 잔도를 따라 처자식을 데리고 말을 몰며 가는 고통을 매우 사실적으로 노래했다. 두보는 이 험로에서 “뜬 인생에는 정해진 분수 있거늘, 고프거나 배부른 운명을 어떻게 도망하랴”고 체념하는 듯도 하다가, 처자식을 향해 “내 무슨 이유로 그대들을 데리고 이 고생인가!”라고 극도의 탄식을 내뱉고 있다.

다음은 제6수 〈오반(五盤)〉이다. 오반은 다섯 번 서린다는 고개를 말한다. 현재는 칠반관(七盤關)이라 부르는데, 한중(漢中) 영강현(寧羌縣) 서남쪽에 있다.

 

 

五盤雖云險 오반이 비록 험하다 말하나

山色佳有餘 산 빛은 아름다움이 남아 있기에

仰凌棧道細 우러러 잔도 좁은 곳을 오르고

俯映江木疎 굽어 물가 나무 드문 데를 비춰본다.

地僻無網? 땅이 유벽하여 그물로 잡을 이 없으니

水淸反多魚 물이 맑아도 도리어 고기들 많아라.

好鳥不妄飛 좋은 새 멋대로 날지 아니하고

野人半巢居 뫼의 사람은 반만 깃들여 산다.

喜見淳朴俗 순후 검박한 풍속을 보고 즐거워

坦然心神舒 훤히 내 마음을 펴겠다.

東郊相格鬪 동교[섬락(陝洛)]에선 여전히 싸움을 하니

巨猾何時除 큰 모진 이[安慶緖]는 어느 때 없어질까.

故鄕有弟妹 고향에 아우와 누이 있거늘

流落隨丘墟 유락하여 황폐한 땅을 다니노라.

成都萬事好 성도는 만사가 좋다지만

若歸吾廬 어디 내 집에 돌아감만 같으랴.  : 豈

 

 

이 시는 전반부와 후반부의 시상이 상반된다. 오반은 좁은 잔도에서 마주치는 험준한 고개이지만, 시의 전반부에서 두보는 “우러러 잔도 좁은 곳을 오르고, 굽어 물가 나무 드문 데를 비춰보”면서 그곳의 유벽한 풍광과 순후한 풍속에 위안을 얻고자 했다. 하지만 산시성(陝西省)과 뤄양(洛陽)에서는 안녹산의 잔당인 안경서가 여전히 발호하고 있고, 아우와 누이는 먼 곳에 떨어져 있어 안부가 걱정되기에, 두보는 도회지인 청두(成都)에 이른다고 해도 안정을 얻을 수 없으리란 불길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렇기에“성도는 만사가 좋다지만, 어디 내 집에 돌아감만 같으랴”라고 한 것이다.

 

 

蜀道難 詩意圖?袁耀繪

 

제7수는 〈용문각(龍門閣)〉이다. 현재의 쓰촨성 광원(廣元) 동북쪽에 있는 용문각을 지나면서, 두보는 잔도의 험준한 광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공포심을 생생하게 토로했다.

 

 

淸江下龍門 맑은 강(가릉강)이 용문 아래로 내려 흐르고

絶壁無尺土 높다란 벼랑에 한 치 흙도 없으며

長風駕高浪 긴 바람에 높은 물결 가로지르나니

浩浩自太古 넘실넘실 태고부터로다.

危途中?盤 밭은 길이 벼랑 사이에 서려

仰望垂線縷 우러러보니 실올이 드리운 듯.

滑石?誰鑿 미끄러운 돌은 기우뚱하게 누가 깼나

浮梁?相? 부교(뜬 다리)가 흔들려 서로 괴어 두었군.

目眩隕雜花 눈 어질어질 잡꽃이 떨어지듯 하고

頭風吹過雨 머리에 바람 일어 비를 부르듯 하니

百年不敢料 백년 인생을 헤아리지 못할 지경

一墜那得取 한번 떨어지면 어찌 잡겠나.

飽聞經瞿塘 구당협 다닌다는 말을 익히 들었고

足見度大庾 대유령 건너는 일을 많이도 보았다만

終身歷艱險 일생 험한 데 지나는 일일랑

恐懼從此數 여기서부터 꼽아야 하리.

 

 

산시성과 쓰촨성의 경계를 흐르는 가릉강(嘉陵江)은 태곳적의 웅대함을 지니고 있다. 절벽에 난 밭은 잔도는 벼랑 사이에 서려 마치 실올이 드리운 듯한데, 중간에는 미끄러운 돌을 깎고 부교를 얽어둔 곳까지 있어, 당초 그렇게 길을 낸 사람이 누구인지 신기할 정도이다. 장강(양자강)의 구당협이나 영남의 대유령이 험하다고 하지만 인간 세상에서 험준한 곳을 꼽는다면 단연코 이곳을 손꼽아야 하리라. 두보는 그 험준함이 인생의 험로를 너무도 잘 비유한다고 생각한 듯하다.

제8수는 〈석궤각(石櫃閣)〉이다. 이 요새는 쓰촨성 광원의 북쪽 천불애(千佛崖) 남단에 있으며, 삼국시대 촉나라 병사가 지키던 곳이다. 광원은 산시성과 간쑤성으로 나가는 교통의 요충지며, 북방의 간쑤성 천수(天水)에는 맥적산(麥積山)이라는 불교 유적이 있다. 두보는 이 시에서 석궤각이 층층 물결 위에 있고, 허공을 마주해 높은 벼랑이 이어져 있는 형국이라고 했다.

 

 

季冬日已長 맹동에 해가 이미 길어

山晩半天赤 산에 석양 비춰 하늘이 붉은데

蜀道多草花 촉도에는 화초가 많고

江間饒奇石 강물 사이엔 기이한 돌이 많다.

石櫃層波上 석궤는 층층 물결 위에 있어

臨虛蕩高壁 허공을 마주해 높은 벼랑에 이어져

淸暉回群鷗 말간 햇빛에 들갈매기 돌아오고

暝色帶遠客 어둔 빛은 길손을 에워싼다.

羈栖負幽意 나다님이 은둔의 뜻을 저버렸으니     栖 : 棲

感歎向絶迹 사람 자최 끊긴 데로 향하여 탄식하고.

信甘孱懦? 모진 처지에 걸렸음을 달게 여기니

不獨凍?迫 춥고 주림에 핍박받아 그럴 뿐이 아니다.

優游謝康樂 사강락(사영운)은 유유하고

放浪陶彭澤 도팽택(도연명)은 방랑했건만

吾衰未自由` 나는 노쇠해서 자득하지 못하기에    由 : 安

謝爾性有適 그대 두 사람의 유유자적함을 사양한다오.

 

 

두보는 인적이 끊어진 곳으로 나다니며 탄식하고, 춥고 주림에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달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곧, 사영운의 넉넉한 삶도 자신의 몫이 아니고 도연명의 일민(逸民)으로서의 삶도 몫이 아니라고 체념했다.

 

 

  杜甫 成都紀行(9) 『桔柏渡

 

 

제9수는 〈길백도(桔柏渡)〉이다. 이 나루는 쓰촨성 소화현(昭化縣)의 옛 성 바깥에 백수강(백룡강)과 가릉강이 합류하는 곳에 위치해 있다. 가맹관(?萌關)이라고도 부르는 군사 요지이다. 전국시대 이래 옛 역로로, 나루 어구에 오래된 잣나무들이 하늘로 솟아 있어서 길백이라 불렀다고 한다.

 

 

靑冥寒江渡 높은 하늘 아래 찬 강물이 지나는데

駕竹爲長橋 대를 가로질러 긴 다리로 삼았는데

竿濕烟漠漠 죽간 젖은 데 아지랑이 아득하게 퍼져 있고

江水風蕭蕭 강물에는 바람이 스르르 불어온다.

連?動?娜 연이은 대다리는 흔들흔들

征衣颯飄? 길손 옷은 바람에 팔랑팔랑

急流??散 물 급한 곳에 자고새 놀라 흩어지고

絶岸??驕 깎아지른 기슭에 자라들 건장하다.

西轅自玆異 서쪽(성도) 향하는 수레가 여기부터 길이 달라

東逝不可要 동쪽으로 가자고는 요구치 못하겠나니

高通荊門路 높다랗게 형문으로 길이 통했고

闊會滄海潮 널찍하니 창해에 조수가 모여든다.

孤光隱顧眄 외론 햇빛이 돌아볼 사이에 숨고

遊子恨寂寥 떠도는 나는 고요함이 서러워라

無以洗心胸 마음을 헤쳐 씻어내질 못하고

前登但山椒 전진해서 산마루를 오를 뿐.

 

 

마지막 구절의 산초(山椒)는 산마루를 뜻한다. 이 시도 산길의 험준함을 묘사하되, 숨이 막히는 광경보다는 시야에 들어오는 원경과 미세한 근경을 대비적으로 묘사했다. 그런데 “외론 햇빛이 돌아볼 사이에 숨고, 떠도는 나는 고요함이 서러워라”라는 구절은 여전히 처참한 느낌을 담고 있다.

 

 

 

 

10수는 〈검문(劒門)〉이다. 검문은 검각(劍閣)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쓰촨성 검각현(劍閣縣)에 있는 검문관(劍門關)을 가리킨다. 아스라한 절벽이 중간에 끊겨 문을 열어둔 듯하고 마치 칼을 꽂아놓은 듯하다. 삼국시대 촉(蜀)의 강유(姜維)가 위(魏)의 종회(鍾會)를 막아낸 천연의 요새이다.

 

 

惟天有設險 하늘이 험한 곳을 설치하되

劒門天下壯 검문이 천하에 가장 장대하다.

連山抱西南 연이은 뫼는 서남으로 끌어안고

石角皆北向 돌부리는 모두 북쪽을 향했다.

兩崖崇墉倚 양 기슭은 높은 성벽처럼 갸우스름하여

刻畵城郭狀 성곽의 형상을 새겨 그린 듯.

一夫怒臨關 한 사람이 노하여 관문에 임하면

百萬未可傍 백만 사람이 가까이 못 할 정도.

珠玉走中原 여기 출토의 주옥은 중원으로 나가니

岷峨氣悽愴 민산과 아산 기운이 처창도 하다.

三皇五帝前 삼황오제 이전에는

鷄犬莫相放 닭과 개를 풀어놓지 않았더니

後王尙柔遠 후대 왕이 주변국의 회유를 숭상하자

職貢道已喪 조공을 행하면서 순후한 도가 사라졌다.

至今英雄人 지금에 이르도록 영웅들이

高視見覇王 자만하여 패왕 되는 일을 보았거니

幷呑與割據 땅을 삼키거나 차지해 버텨

極力不相讓 있는 힘 다 부려 사양하지 않았다.

吾將罪眞宰 내 장차 조물주를 죄주어

意欲??? 첩첩 묏부리를 깎아버리려 하나니

恐此復偶然 그러면 저런 사람 또 있을까 하여

臨風默?? 바람 맞으며 가만히 슬퍼하노라.

 

 

두보는 영웅들이 패권을 쥐려고 그 험준한 곳을 근거로 발호하지나 않을까 우려하여, “내 장차 조물주를 죄주어, 첩첩 묏부리를 깎아버리려 한다”고 말했다. 군웅이 할거하여 힘의 논리에 따라 침략을 자행하는 폭력의 논리를 증오하고, 순후한 도리를 존중하던 상고시대를 그리워한 것이다.

제11수는 〈녹두산(鹿頭山)〉이다. 녹두산은 쓰촨성 더양시(德陽市) 뤄장현(羅江縣)에 있다.

 

 

鹿頭何亭亭 녹두산이 자못 높으니

是日慰飢渴 이날 나의 주리고 목마른 마음을 위로해 준다.

連山西南斷 연이은 뫼가 서남쪽에 그쳐 있어

俯見千里豁 굽어 촉 땅을 보니 천리에 훤하다.

遊子出京華 여행객이 번화한 서울을 나와

劒門不可越 검문이 험해서 넘지 못할 듯하더니

及玆險阻盡 여기 이르러 험난함이 다하여

始喜原野闊 비로소 들판이 훤함을 기뻐한다.

殊方昔三分 특수한 이곳에서 유비는 천하를 셋으로 나눠 갖고

覇氣曾間發 패주(覇主)의 기운이 그 사이에 발했으나

天下今一家 천하가 이제 한 집이 되었으니

雲端失雙闕 구름 끝에 패주의 쌍궐이 없어졌도다.

悠然相楊馬 양웅(楊雄)과 사마상여(司馬相如)를 생각하노니

繼起名?兀 서로 이어 일어나 명성이 우뚝했지.

有文令人傷 문장재주가 사람을 서럽게 하니

何處埋爾骨 어느 땅에 너의 뼈를 묻을까.

紆餘脂膏地 기름지고 찰진 땅이 멀고 넓어서

慘憺豪俠窟 호협 배출하는 굴혈이 슬프기만 하여라.

杖鉞非老臣 부월 지녀 진무할 노성한 신하가 아니라면

宣風豈專達 풍화를 베풂을 어디로부터 통달하리오.

冀公柱石姿 기국공(冀國公) 배면(裴冕)은 급류 막아설 주석(柱石) 자질로

論道邦家活 도리를 의논하여[태자를 즉위시킴] 나라를 살렸다.

斯人亦何幸 여기 사람은 또 무슨 행운이었나

公鎭餘歲月 기국공이 진무함이 여러 해 되었다니.

 

 

두보는 녹두산에 이르러 들판이 드넓은 지형을 만나 비로소 안도했다. 그리고 한(漢)나라 때 양웅과 사마상여와 같은 문장가가 나서 일시에 명성이 높았던 일을 회상하고, 또 당시에 배면(裴冕)이 당나라 숙종을 보필해서 촉 땅을 기반으로 국면 전환을 도모하고 있는 사실을 예찬했다.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자 당나라 현종은 촉 땅으로 피신하여 마외(馬嵬)에 이르러 부로들의 요청에 따라 군사를 나누고 셋째 아들로서 태자였던 형(亨)에게 전지를 내려 전위하려고 했다. 태자는 두홍점(杜鴻漸)과 배면(裵冕)을 측근에 두었는데, 그들이 모두 삭방으로 가기를 권하고, 영무(靈武)에 이르러 마외에서의 명령을 따르기를 청하자, 즉위했다. 그가 당나라 숙종이다. 숙종은 배면ㆍ두홍점ㆍ곽자의(郭子儀)ㆍ이광필(李光弼)을 임용하고, 산인(山人) 이필(李泌)을 불러 군국(軍國)의 참모를 시켰으며, 광평왕(廣平王)으로 원수(元帥)를 삼아 팽원(彭原)으로 진격했다. 이듬해 군사를 펑샹(鳳翔)으로 옮겨 그해에 양경(兩京)을 회복하였는데, 상황인 현종을 서울로 맞아들였다. 뒷날 이보국(李輔國)이 재상이 되려고 하자, 배면은“내 팔을 자를지언정 이보국을 재상으로 삼을 수는 없다.”라고 했다. 숙종도 아직 이보국을 재상으로 삼을 수는 없음을 알았으나, 결국 그를 재상에 등용하여 정치상의 혼란을 초래하고 말았다.

〈성도기행〉의 제12수, 즉 마지막 시는 〈성도부(成都府)〉이다.

 

 

??桑楡日 어둑어둑 석양이   

照我征衣裳 길가는 나의 옷을 비추나니

我行山川異 길을 가매 강산이 달라져

忽在天一方 홀연 하늘 한 끝에 와 있다.

但逢新人民 오직 새로운 사람을 만날 뿐

未卜見故鄕 고향 사람 만날지는 못하겠네

大江東流去 큰 강물은 동녘으로 흘러가고

遊子日月長 집 버리고 떠난 날이 벌써 오래기에.

曾城塡華屋 높은 성에 훌륭한 집들 가득하고

季冬樹木蒼 섣달에 따뜻해서 수목이 푸르며

喧然名都會 이름난 도회지 떠들썩하여

吹簫間笙簧 젓대와 생황 소리 뒤섞여 울려난다.

信美無與適 진실로 아름다우나 갈 땅이 없고 보니

側身望川梁 몸을 기울여 강의 다리를 바라볼 뿐

鳥雀夜各歸 밤 들어 새와 까치 제자리로 가거늘

中原杳茫茫 중원은 멀어 아득하기만 해라.

初月出不高 갓 나온 달이 채 높지 못하여

衆星尙爭光 뭇 별이 오히려 빛을 다툰다만

自古有羈旅 떠도는 사람이란 예로부터 있었거늘

我何苦哀傷 내 어찌 심하게 슬퍼하랴.

 

 

두보는 도회지인 청두에 이르러 평온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중원은 멀어 아득하고 여전히 ‘뭇 별이 오히려 빛을 다투는’ 혼란스런 세상이지만, 떠도는 사람이란 예로부터 있었으니 나 자신만 떠돌고 있다고 여겨 심하게 슬퍼할 것은 없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갓 나온 달이 채 높지 못하여, 뭇 별이 오히려 빛을 다툰다”는 것은 당나라 숙종이 왕위에 오른 초기에 도적들이 잠잠해지지 않은 상황을 말한 것이다.

두보는 쓰촨성 청두시(成都市) 서쪽 교외 금강(錦江)의 지류인 완화계(浣花溪)에 초당을 짓고 일시 안주하게 된다. 그 초당을 완화초당(浣花草堂)이라 부른다.

 

조선의 정약용(丁若鏞)은 순조 20년(1820) 음력 3월의 춘천 여행 때 지은 시들을 《천우기행권(穿牛紀行卷)》으로 묶었는데, 그 속에는 두보의 〈성도기행〉 12수에 하나하나 화운(차운)한 화두시 12수가 들어 있다.

《천우기행권》 은 칠언절구 25수, 화두시(和杜詩) 12수, 잡체시 10수로 이루어져 있다. 화두시가 곧 두보의 〈성도기행〉 12수에 화운(차운)한 것으로, 정약용은 남일원을 동곡현에, 호후판을 목피령에, 입천도를 백사도에, 삼악을 오반에, 현등협을 비선각에, 석문을 검문에, 신연도를 길백도에, 소양도를 수회도에, 마적산을 녹두산에, 기락각을 석궤각에, 우수주를 성도부에 각각 비유했다.

정약용은 춘천의 지세가 성도와 같아서 국가위난의 시기에 국운을 보존할 곳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조카의 혼사를 기회로, 거룻배를 마련해서 형과 함께 한강을 거슬러 올라 춘천으로 향했다.

 

시집의 제목은 두보의 〈관군이 하남과 하북을 수복했다는 소식을 듣고(聞官軍收河南河北)〉 시에 나오는 “즉시 파협에서 무협을 뚫고 가서, 바로 양양을 내려가 낙양으로 향하리”(卽從巴峽穿巫峽, 便下襄陽向洛陽)라는 구절에서 뚫을‘천(穿)’ 자를 따왔다. 정약용은 이 시집의 칠언절구 25수 가운데 마지막 수에서, “이 여행은 뚫고 간다 이름하겠군, 연근 같은 산하가 동전같이 꿰였으니(此行大抵可名穿, 藕孔山河貫似錢).”라고 했다.

춘천 협곡을 장강(양쯔강) 상류의 파협과 무협에 비기고, 협곡이 이어진 춘천의 지형을 두고 연근에 대롱 모양의 관이 실로 연결되어 있는 모양에 비유한 것이다. 또 중국에 네모꼴 동전인 우심전(藕心錢)이 있었으므로 연근에서 다시 우심전을 연상했다. 정약용은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자신의 여행이 두보의 성도 여행과 유사하다고 여겼기에 〈성도기행〉에 화운을 한 것이다.

특히 12수 가운데 첫수 〈아침 일찍 남일원을 출발하다. 두보의 ‘동곡현’에 화운함〉(早發南一原和同谷縣)에서 정약용은, “국토가 비록 좁다만, 속세를 벗어날 뜻이면 갈 곳 많고말고(國境縱?小, 意逸多可適)”라 말하고, 그간에 국토를 두루 여행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애써 물속의 오리가 되어, 구름 속 고니를 우러러보노라(勉爲水中鳧, 仰冀雲間?)”라고 해서, 배를 타고 물결 따라 출몰하게 된 신세를 체념하되, 고니의 고고한 뜻은 버리지 않겠노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정약용이 〈성도기행〉에 화운한 것은 두보의 그 시가 중국 기행시 가운데 압권으로 꼽힌다거나 춘천에 이르는 협곡이 성도 부근처럼 험난하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약용은 춘천 여행에서 일민(逸民)으로서의 즐거움을 맛보고자 했지만 늘 백성의 고통과 국가의 위기를 염려했다. 그렇기에 〈성도기행〉에 담긴 두보의 심리를 추상(追想)한 것이다.

 

 

杜甫草堂

 

 

4.

 

퉁구로 향하면서, 또 퉁구를 떠나 청두로 향하면서, 두보는 극도로 지쳐서 눈물도 흘리지 못할 상태에 처해 있었다. 그런데도 슬픔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고 슬픔의 감정으로 시적 언어로 표현해 냈다. 퉁구에서 청두로 향하면서 다시 두보는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곳곳의 자연경관에 눈을 주고 역사사실을 반추하면서 시를 남겼다.

그런데 두보는 〈동곡칠가〉나 〈성도기행〉의 연작시에서 자연 풍경을 묘사하되, 자연을 결코 친근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산수자연은 귀향의 의지를 꺾고 여행의 고통을 증폭시켰다. 두보는 매몰찬 풍경 속에서 고독감을 느꼈다. 공명(功名)을 이루지 못한 채 객지를 떠돌아다니는 신세를 그는 서글퍼했다.

또한 두보는 경치를 묘사할 때 단순한 스케치로 끝내지 않고 사색을 중시했다. 그렇기에 그가 묘사한 경물은 그다지 구상적(具象的)이지 않다. 두보는 오묘한 깨달음을 통해 경물과 정신이 통일하고 그 경험의 끝에 자동기술(自動記述)을 하곤 했다. 일일이 분석하지는 않았지만, 〈동곡칠가〉나 〈성도기행〉의 연작시에서도 그 점을 잘 알 수가 있다.

〈동곡칠가〉나 〈성도기행〉의 연작시는 침울한 심사를 잘 드러낸 서정시들이다. 사실 두보는 결코 고정된 이념에 따라 충정(忠情)을 토로하거나 현실에의 참여의식만을 드러낸 것은 아니다. 두보는 오히려 내면의 슬픔을 있는 그대로 토로하고는 했다. 그 토로가 진실되므로 후대의 작가들은 그의 시를 귀하게 여기고 또 기꺼이 그 소재나 어휘를 이용해서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고는 했던 것이다.

진정한 시는 관념의 덩어리를 근사한 어휘로 포장하려 애쓰지 않는다. 진정한 시는 시인이 깊은 내면을 솔직히 드러낸다. 그 사실을 두보의 〈동곡칠가〉나 〈성도기행〉을 읽으며 다시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모르겠네, 천지 사이에

다시 몇 년이나 더 살지

이제부터 몸이 끝날 때까지는

모두 다 한가한 세월로 삼으리

 

 

심경호 |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1955년 충북 음성 출생.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일본 교토(京都)대학에서 으로 문학박사 학위 취득. 저서로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 《한국한시의 이해》 《김시습평전》 《간찰, 선비의 마음을 읽다》 등과 역서로 《불교와 유교》 《일본서기의 비밀》 등이 있음. 성산학술상과 일본 시라카와 시즈카(白川靜) 선생 기념 제1회 동양문자문화상 수상. 한국학술진흥재단 선정 제1회 인문사회과학 분야 우수학자.

 

 

/ 유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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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는 임의로 올렸으며 기사 내용중 ? 로 표기되어있는 결자는 맞는 자(字)를 찾아 넣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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