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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장 - 행운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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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답 및 탐방 스크랩 참선법에 대하여 : 진제스님
고운나비 추천 0 조회 94 08.05.08 21:27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참선법에 대하여

 

질문 : 일반적으로 참선에 대해서 말할 때 상근기(上根機)자, 즉 대신심, 대분심, 대용맹심이 있는 그런 상근기에게나 참선이 해당되지 않느냐 이런 의문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진제스님 : 그런 의문을 가질 수가 있는데 이 심성(心性), 즉 마음의 고향이라는 것에는 모든 진리와 모든 덕(德)과 복(福)이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이미 다 갖추어져 있는데 ‘참 나’를 알지 못하여 쓰지도 못하고 수용도 못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고향, 심성의 본향에는 천 사람, 만 사람이 동일하게 갖춰져 있으니 일체 차별이 없습니다. 바른 선지식, 바른 지도자를 만나서 바른 수행을 듣고 바르게 배워서 연마하면 다 됩니다. 아무리 서울이 멀다 해도 한 걸음 한 걸음 한 달만 걸어가면 서울에 도착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이걸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될 일이 없습니다. 이제 이해가 됩니까?

질문 : 상근기, 하근기 구분할 것이 없이 이미 다 갖춰져 있는데 모르고 있을 뿐이다. 자기 성품을 알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다 똑같은 이치니까 상근기니 하근기니 구별할 것도 없다. 바른 선지식을 만나서 바른 수행을 듣고 바르게 배워서 닦아 나가면 반드시 된다는 그런 것이죠.

 

진제스님 : 그렇지요. 바른 지도를 받고 한 걸음 한 걸음, 하루하루 바르게 지어가다 보면 언젠가 진리의 고향, 마음의 고향에 이른다는 말입니다.

 

반드시 바른 선지식에게 지도를 받아라

 

질문 : 강조하셨듯이 출가자든 재가자든 간에 바른 선지식을 만나는 게 중요하다고 하셨는데요. 깨침에 발심(發心)이 나서 화두를 참구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요 ?

 

진제스님 : 바른 선지식, 지도자를 찾아 방문해서 바른 지도를 받아야 해요. 참구하는 법, 바로 참선을 지어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만 바로 받아 놓으면 어디든지 산이나 들이나 장사를 하나 기업을 하나 아무 관계가 없어요. 마음으로 지어가는 이 참선 수행법은 언제 어디서든 할 수 있습니다. 아무 것도 필요 없어요. 오직 화두를 참구하겠다는 마음 하나만 있으면 어디서든 다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질문 : 그러면 생업과 생활에 바쁜 일상인들이 화두를 쉽게 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바른 지도자와 인연이 안 될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진제스님 : 우리가 천하 갑부가 되고 아무리 높은 자리에 앉았다 해도 숨 한번 들이쉬고 내쉬지 못하면 다음 생입니다. 지금은 영원할 것 같은 이 생명도, 부귀영화도 언젠가 다 없어지고 말아요. 우리가 항시 그런 허망을 알아야 됩니다. 자기 참 모습을 발견하는 이 수행에 몰두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마음이 편안해지면 여기에서 건강도 유지되고 자비스러운 덕도 행하게 되는 그런 멋진 인생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질문 : 스님 법문 중에 활구(活句)를 참구하고 사구(死句)를 참구하지 말라고 자주 하셨는데요. 이때 사구와 활구가 어떻게 다른지 궁금합니다.

 

진제스님 : 활구(活句)는 일천 성인(一千聖人)의 이마 위의 일구(一句)를 투과해야 하고, 일천 성인의 이마 위의 일구를 뚫고 지나가야 활구세계라고 해요. 그러면 사구(死句)라는 것은, 항시 정해(情解)와 정식(情識)이 붙어가지고 밝은 눈을 열지 못한 경지에서 머무는 것을 사구라 하지요. 밝은 진리의 경계를 활짝 열지 못한 그 경계가 사구예요.

질문 : 스님 어렵습니다. 조금 쉽게 풀어 주시죠.

 

진제스님 : 활구경계는 일천 성인의 이마 위의 일구를 뚫고 지나간 자만이 활구세계를 알 수가 있고, 사구는 밝은 눈을 열어 갖추지 못하고 정해와 정식에 가려 있을 것 같으면 그것은 사구에 항시 머물러 있거든.

질문 : 그러니까 사구를 참구한다할 때 그 사구라는 것은 알음알이의 지해(知解)를 말하는 것인가요 ?

 

진제스님 : 알음알이가 항상 따라다니고 밝은 눈을 활짝 열지 못한 경계가 사구예요.

질문 : 결국은 알음알이로 화두를 참구하지 말라 이런 말씀을 스님께서 일러주신 게 그것인가 보지요?진제스님 : 알음알이로 참구하는 것을 사구라고 한다기 보다는 정해, 정식이 항시 따르기 때문에 사구라고 하는 것입니다.

질문 : 정해, 정식이라는 것은 뭔가요 ?

 

진제스님 : 알음알이거든, 분별식(分別識)!

 

화두는 2미터 앞 아래에 두라.

 

질문 : 스님께서는 화두 참구 방법을 일러 주실 때 2미터 앞 아래에 화두를 두는 게 좋다고 하시는데 왜 그런지요?

 

진제스님 : 왜 그러냐? 참선할 때 항시 2미터 앞 아래에다 화두를 두게 되면, 상기도 피하고 바른 자세가 유지됩니다. 항시 아래에다 두라는 것은 화두가 달아나면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거든요. 나도 모르게 용을 쓰게 되어요. 그렇게 힘이 들어가면 상기(上氣)가 되어 머리가 무거워서 더 이상 화두를 참구하지 못하게 됩니다. 화두 참구할 때 항시 생각을 아래에 두어 기가 위로 올라가는 것을 방지하는 뜻에서 아래에 두라는 거지요.그리고 2미터에 두라는 것은 앉는 바른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서인데,  2미터 앞에 화두를 두면 바른 자세가 유지됩니다. 허리를 곧게 세우고 앉아야 오래 앉아도 피로가 없고 위장에도 부담이 없습니다. 허리가 굽으면 쉽게 피로하고 위장에도 탈이 생길 뿐만 아니라 혼침, 망상에 끄달려서 화두를 성성하게 들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허리를 곧게 세워 바른 자세를 유지해야 합니다. 또 앞에다 두라는 것은 앉으나 서나, 가나오나, 일을 하나, 밥을 하나, 목욕을 하나, 항시 앞에다 화두를 두면 무르익어져요. 화두를 단전에다 두면 앉아서 할 때는 단전호흡과 같이 장단을 맞추지만 움직이게 되면 단전호흡이 잘 안되거든요. 그러니까 눈 앞에다 화두를 두면 가고, 앉고, 눕고, 일을 하고, 산책하는 가운데에도 항시 화두가 순일하게 무르익어지기가 쉽습니다. 그게 제일 좋습니다.

질문 : 초심자들은 항상 시선이나 화두를 어떻게 할 것인지 이런 것이 고민이 되는데 이렇게 하면 편해지겠군요. 혹시 이 방법은 스님께서 창안하신 건가요?

 

진제스님 : 스님들이 대개 단전에다 화두를 두고 호흡을 내리면서 장단을 맞추라고 하는데, 이 화두 일념 상태는 가고 앉고 눕고 일하고도 항상 흐르는 물과 같이 끊어지지 않고 무르익어야 되는 것이에요. 일념으로 끊어지지 않고 지속이 되어야 공부가 되는 겁니다. 이해가 돼요 ? 이것은 내 창안입니다.

 

간화선(看話禪)에선 화두가 핵심이지, 호흡은 신경 쓰지 말라

 

질문 : 그런데 어느 선지식께서는 단전호흡을 굉장히 강조하시던데요. “화두 드는 법”이란 법문에서 단전 호흡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자상하게 일러주시더군요. 또 어떤 분은 “화두를 일심(一心)으로 하는 게 중요하지 호흡은 크게 상관없다. 화두가 자리 잡히면 호흡은 저절로 된다. 오히려 단전호흡을 하다 보면 화두가 멀어질 수가 있다” 하시는 분도 계시고요.

 

또 어떤 분은 “간화선이란 오로지 화두 참구 그 자체에 뜻이 있는 것이다. 간화선에서 단전호흡을 말하는 것은 불순물이 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고 단전호흡을 배제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도 들었습니다. 스님께서도 역시 단전호흡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네요.

진제스님 : 호흡 장단 맞추려니 화두 일념이 잘 안되겠지. 화두는 일념 삼매가 지속되는 게 중요합니다. 화두 일념이 가나, 오나, 앉으나, 서나, 누우나, 일어나나 쭉 흘러가야 되거든. 흐르는 물과 같이 끊어지지 않고 일념으로 흘러가야 됩니다.

 

질문 : 화두를 2미터 앞 아래에 두고 응시하면서 행주좌와나 산책하거나 공양을 하든지 일심으로 참구하라는 것이군요..

진제스님 : 화두를 2미터 아래에 두되 눈을 꼭 응시할 필요는 없고 생각만 거기에 두면 됩니다. 가령 산책을 하더라도 반드시 2미터 아래에 시선을 둘 필요는 없고, 생각을 2미터 아래에다 두되 눈은 그러지 않아도 되지요.

 참, 오늘 내 살림을 다 털어놓구만, 하 하 하 …

 

일념삼매가 지속이 되어야 한다

질문 : 간화선에서 공부를 해나갈 때 화두가 일념삼매(一念三昧)가 지속되어 동정일여(動靜一如), 몽중일여(夢中一如), 오매일여(寤寐一如) 과정을 거쳐 은산철벽(銀山鐵壁)을 투과해야 깨칠 수 있다고 하는데 이것이 일반적인 과정입니까 ?

 

진제스님 : 그렇지요. 일념삼매가 지속이 안 되면 화두 타파가 안 돼요. 육조혜능선사와 같이 과거 전생에서부터 공부해온 이는 들으면 척척 열리지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일념 삼매가 쭉 지속이 되는 과정이 오면 그때는 진의(眞疑)가 발동이 되어 보는 것도 잊어버리고 듣는 것도 잊어버리고 앉아서 밤이 되는가 낮이 되는가 다 모르는 그게 일념삼매예요. 그렇게 지내다가 흐르고 흐르다가 며칠이고 계속되다가. 보는 거 듣는 거 다 잊어버리고 흐르고 흐르다가 보는 찰나에 듣는 찰나에 화두가 깨지고 깨치게 되지요.

질문 : 성철스님 말씀으로 보면 화두 참구에서 동정일여, 몽중일여, 오매일여 이 과정을 굉장히 강조하시더군요.

 

진제스님 : 그게 일념삼매예요.

질문 : 스님 가풍에서는 일념삼매라 하는 거지요? 화두가 흩어지지 않고 항시 어묵동정(語黙動靜) 행주좌와(行住坐臥)에 일념으로 지속되는….

 

진제스님 : 쭉 흘러가는 거지요.

 

 

재가 생활인의 참선 방법

 

질문 : 재가생활인의 경우 직장생활을 하거나 가정생활을 하다보면 화두가 자주 끊어지지 않습니까? 그때 혹시 직장인들에게 화두 참구를 잘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시면 좀 가르쳐 주십시오.

진제스님 : 항시 가나오나, 앉으나 서나, 대화를 하거나, 장사를 하거나, 사업을 하거나, 밥을 먹으나, 산책을 하거나, 잠을 자거나 쭉 화두를 간절히 챙기고 의심하고, 의심하고 챙기고 계속 반복이 되고 그렇게 하다가 진의(眞疑)가 발동이 걸리면 일상생활의 모든 것이 차단이 되고 화두에 몰두가 되거든요. 그렇게 진의가 발동이 되면 아들이고 딸이고, 남편이고 부인이고, 모든 일들을 다 모르게 되어 보고 듣는 것도 다 잊어버리고 시간가는 줄 모르는데 그렇게 흐르고 흐르다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며칠이 지나는 그런 경지가 오면 깨치게 되는 겁니다. 아무리 세상이 소중하다 해도 이 일을 해결하는 게 근본이 되어야 합니다.

 

질문 : 그렇게 화두가 자리 잡히면 계속 향상의 일로로 가게 되니 문제될 게 없지만, 그 이전 단계 즉, 초학자의 경우 하루에 단 5분 마음 내기가 쉽지 않고 혹 내더라도 회사 사무실에 가면 바쁘게 일처리 해야 되고 여러 인간관계 속에서 바쁜 일상을 보내게 되는데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

 

진제스님 : 일 처리할 때는 착오 없이 하고, 차타고, 돌아다니고, 들어오고 나가고, 목욕하고 쉬고, 그러는 가운데 하면 좋거든요. 집에 들어 와서 텔레비전 앞에 앉기보다 뉴스가 궁금하면 잠깐 보고는 딱 앉아서 화두 들고 삼매에 들면 옆에 아이들 떠드는 소리도 다 끊어지고 온갖 번뇌 망상을 쉬게 되거든요. 그렇게 매일매일 하게 되면 마음에 평화가 오고 지혜와 복덕이  날로 증장됩니다. 이 참선이 얼마나 좋은지는 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고,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거예요.

염불, 주력, 위빠사나에 대하여

질문 : 불자들이 참선도 많이 하지만, 대체로 염불, 주력, 간경, 위빠사나 수행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참선이 가장 빨리 가는 최상승(最上乘)이란 것은 이해가 되는데 다른 수행으로는 깨칠 수 없는 것인가요? 진제스님 : 아 ~ 염불, 주력, 간경 등으로는 견성하는 게 불가능하지요. 관법(觀法:위빠사나)은 가능하겠지만,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최상승의 경지에는 관법 가지고도 안 됩니다.

 

견성(見性), 깨침에 대하여

 

질문 : 선에서 깨침인 돈오(頓悟) 즉, 견성(見性)에서 돈수(頓修)와 점수(漸修) 논쟁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스님 법문에서는 일관되게 돈수가 옳지, 점수라는 것은 돈법(頓法)에 없다고 하시는데 다시 한 번 일러 주시죠.

진제스님 : 그대로입니다. 선의 돈법에 점수라는 게 없습니다. 오직 돈오돈수이지요. 돈오돈수는 일념삼매가 지속이 되어서 향상의 일구를 투과해야만 되는 거지요.

 

질문 : 이 질문은 좀 외람됩니다만, 평소 궁금해서 여쭙습니다. 스님께서 전법 인가를 받으신 향곡선사께서는 다시 법사이신 운봉선사에게 인가를 받으셨잖아요. 그런데 인가를 받은 향곡선사께서는 이후에 봉암사에서 도반들과 결사 정진하다가 대오견성하셨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전에 운봉선사로부터 인가를 받았다는 것은 무얼 말하며, 우리가 이 깨침을 어떻게 이해해야 되는지요 ?

진제스님 : 그것은 우리나라 선법이 전해 내려온 후로 그러한 과정만을 거치면서 내려 왔어요. 가령, 여래선(如來禪), 법신변사(法身邊事)를 견성이라 해가지고 그 과정만 전수를 쭉 해왔다고 봐야지요. 법신의 진리, 여래선의 진리 위에 향상의 일구를 투과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그 밑의 한 단계를 가지고 견성법을 세워가지고 인증을 하고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선법이 들어온 후로 ‘덕산탁발화(德山托鉢話)’라는 이 고준한 법문을 검증하고 대중에게 설법한 선사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렇듯이 한 단계 낮은 견성을 가지고 지금까지 내려왔었는데, ‘덕산탁발화’라는 법문을 성철선사, 향곡선사 대에 와서야 알게 되었지요. 그 이전에는 그만큼 대중들에게 내놓을 수 있고, 인가를 검증할 선사가 아무도 없었어요. 좀 낮은 공부를 가지고 견성을 했다, 인가를 한다 그렇게 해서 내려왔다고 봐야지요. 예전에는 안목이 한 단계 낮았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질문 : 스님, 그러면 그것을 같은 견성(見性)으로 봐야 되는 건지요?

진제스님 : 그걸 같은 견성으로 못 보지요. 부처님과 모든 도인이 비밀히 전해 내려오는 그 과정은 향상(向上)의 일구(一句) 세계를 깨쳐야 되는 것이지 여래선이나 법신을 경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질문 : 스님께서 말씀하시는 ‘향상의 일구’ 세계라는 것이 뭔지요?

진제스님 : 그게 견성이에요.

 

질문 : 향상의 일구라는 것이 바로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이고 견성이고 정각(正覺)이란 말이잖아요. 그럼 그 밑에 단계의 전법이 내려왔다면 부처님의 경지에 미치지 못하는 아라한의 경지를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

진제스님 : 아라한의 경지보다는 조금 낫지….

 

질문 : 말씀하시는 향상의 일구라는 것은 무상정등각이고 견성의 세계다 이렇게 이해하면 되는 건가요?

진제스님 : 그렇지 향상의 일구를 모르면 견성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문답에 착오가 생기는 거지요. 원인이 거기에 있어요.

진제스님 : 예, 그래요.

 

질문 : 스님 이제 마지막으로 불자들에게 한 마디 일러 주십시오.

진제스님 : 모든 분들에게 이 기회에 한 말씀 전합니다.

 

  인생은, 생명은 찰나지간(刹那之間)이니,  호흡지간에 인생이 있으니,  공연히 밖에 일에 참견하지 말고,  ‘참 나’를 바로 알면 세세생생에 행복을 누리고 행복과 출세를 누리노니,  모든 고뇌와 갈등을 여의고 행복해지고자 할진대,  고뇌와 갈등을 여의고 대안락을 누리고자 할진대,  일상생활 중에 일상생활 가운데 어떤 것이 부모에게 나기 전 ‘참 나’인고?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 나’인고? 이것을 모르면 백년을 살고 천하 갑부고 명예를 떨쳐도 소용없는 것이다.  ‘참 나’가 무엇인고?  일상생활 속에 오매불망 참선 정진에 몰두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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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8.05.08 23:14

    첫댓글 ......._()_

  • 11.09.26 12:10

    모든 불자가 견성하여야 함은 사실이나 금타대화상님께서 말씀하신 수법에 있어선 간경이나 송주나 참선이나 관법이나 다소 그차이가 유하지만 미오의 경은 일야요 증이란 신증이요 오란 심오일세 신증 심오를 증오라 한다고 하셨듯이 마음으로 몸으로 증득 한 사람은 3신5지의 덕상이 몸으로 나타나는데 그증거로 금타대화상님의 모습을 오도전과 오도하신 이후의 모습을 보시고 전세계의 목사님 신부님 요가수행자 한국중국 디벧의 견성도인의 달라이라마 틱냑한스님경허 만공향곡성철 전강청화숭산스님등진제스님을 포함하여 상호를 보시면 눈동자에서 얼굴에서 3신오지의 덕상과 반야지혜의 차이를 중생들도 알수 있읍니다. 나무석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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