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4일 금요일
6시 기상 프런트에 전화비 7달러를 냈다.
버스를 타고 레드우드 수목원에 들러 삼림욕을 했다.
표피에 붉은 빛이 나는 레드우드는 수령이 100년 이상 된
수십 미터 높이의 나무로 아이들 네댓 명이 손을 뻗어도
감싸 안지 못 할 정도였다.
빽빽이 들어찬 레드우드는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이 나라는 나무가 자라는 속도가 빠르다고 한다.
숲 속 길은 신발을 벗고 걸어도 좋을 만큼 산책로가
정비되어 있었다.
와카레와레 민속촌으로 가는 길엔 공동 묘지를 볼 수
있었는데 시내 한 복판의 평지에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어
음산하지 않고 언제든지 참배 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마오리들은 양지바른 언덕에 주로 무덤을 만들고
흰색 장식으로 치장하기를 좋아하는데
마오리족의 생활 양식은 동양적인 데가 많이 있다고 한다.
그들의 근원을 서남 아시아로 본다고 하니 그럴 만도 하겠다.
민속촌 입구에는 마오리가 코 인사를 하며 우리를 반긴다.
2번 비비면 안녕하세요 이고 3번 비비면 사랑한다는
의미라나?
그들의 주택과 통나무를 파서 만든 배도 보고 풀잎을 이용
섬유를 뽑아서 전통 옷을 만드는 모습도 보았다.
여기서 마오리족이 이 나라에 정착하게 된 역사를 살펴보자.
서기 950년 폴리네시아(polynesia : 호주의 동쪽 해역에
분포하는 수천 개 섬들의 총칭)인(사람) 쿠페는 마오리족
탐험가로서 부인과 폴리네시아 하와이키를 떠나 뉴질랜드를
발견하게 된다.
이때 그들이 명명한 길고 흰 구름이 이어진 나라라는
뜻인‘AOTEAROA'는 뉴질랜드의 원명이 되었다.
이후 14세기부터 마오리족이 이주하기 시작했으며
이주 초기에는 날지 못하는 Moa새를 식용으로 했는데
지금은 멸종되었다고 한다.
천적이 없는 섬에는 날아다닐 필요가 없어진 이 새의 날개가
퇴화되었다고 한다.
최초의 유럽인은 네덜란드인 아벨 타스만(Abel Tasman)이
1642년 남 섬에 도착하여 네덜란드의 Zealand의 이름을
따서 Nieuw Zealand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이것이 후에 New Zealand가 되었다.
이들 탐험가들 중 마오리족들에게 4명의 선원이 피살되어
사람이 살지 못할 곳으로 알려졌고
이후 영국의 James cook선장이 1769년 뉴질랜드에 도착
6개월간 남북 섬을 왕래하며 지도를 만들었는데
그 지도는 최근까지 사용될 정도로 정교하다고 한다.
Mt.cook을 비롯하여 cook선장의 이름을 딴 지명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1839년 영국의 이민자들이 상륙하여 마오리의 토지를 매입
하고 경작하는데 원주민과의 잦은 마찰로 인하여 영국왕실과
48개 부족의 마오리 추장이 와이탕이에서 조약을 맺게
되는데 마오리들은 영국인으로 권리를 인정받고 재산을 인정
받는 대신 영국 왕을 인정하고 영국의 식민지로 남는다.
토지 매매는 영국 왕실을 통해서만 할 수 있다는 역사에
유래 없는 불평등 조약으로 지금도 문제가 되고 있다고 한다.
영국인의 강제적인 토지 매입이 발단이 되어 원주민과
북 섬에서 전쟁이 발발하여 12년간의 전쟁 끝에 마오리가
패배하였다.
체격과 용맹성에서 앞선 그들이었지만 신무기엔 당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후 영국인들의 마오리족에 대한 유화정책으로 지금은 서로
잘 어울려 살고 있다고 한다.
1861년 남섬의 린데스 강에 대량의 금이 발견되면서 골드
러쉬를 이루었고 남북 섬의 정치적인 균형을 이루려는
시도로 수도를 오클랜드에서 북 섬의 남쪽 끝에 있는
웰링턴으로 옮겼다고 한다.
민속마을 주변엔 죽처럼 끓고 있는 진흙 열탕이 부글거리고
가끔씩 치솟는 온천수를 볼 수 있었다.
곳곳의 지하에서 뿜어져 나오는 수증기로 안개가 낀 듯하다.
넓적한 바위는 지열로 인해 따끈한 천연 온돌을 이루고 있어
잠시 누워 등을 지져보기도 했다.
민속마을을 둘러본 후 롱고타이 산을 곤돌라를 타고 올라가
로토루아 시내 전경을 감상하며 뷔페 중식을 즐겼다.
포 카레 카레가 탄생하게 된 로토루아 호수를 내려다 보며
그들의 사랑이야기를 떠올리고
항만의 도시인 오클랜드로 이동했다.
면세점에 들러 간단히 쇼핑을 하고
시내 한 복판에 있는 마운트 이든의 에덴공원에 올라
오클랜드 시내를 조망하였다.
숲 속에 도시를 건설하였는지 도시 속에 숲을 조성하였는지
모를 정도로 나무 속에 묻힌 도시는 우리의 회색 도시와는
딴 판 이었다.
시력이 허용하는 한 멀리 볼 수 있는 맑고 깨끗한 도시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정상의 기념탑에는 세계 각 나라의 도시들이 새겨져있고
거리가 표시되어 있었는데 서울은 없었다.
일제 치하 당시 제작된 것으로 서울이 표시될 수 없었단다.
나라 잃은 아픈 기억을 이곳까지 와서 되살리다니...
공식 일정의 마지막 코스인 석식을 위해 니코 횟집으로 갔다.
이제 일행들과 작별의 시간이 오고 있다.
여행 중엔 길게 느껴졌던 일주일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일행들과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누는데 막내아들과 친하게
지냈던 아이는 눈물을 흘리며 버스에 올랐다.
무척 정이 들었나 보다.
우리는 미리 연락을 받고 마중 나온 오클랜드에 사는 친구를
따라 그의 집으로 갔다.
그 친구가 하는 토마토 농장엘 갔는데 큰 유리하우스가
20여 동이나 있었다.
한국 교포 중에 제일 크게 농장을 하고 있다니 성공해 가는
그 친구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밤늦게까지 수확하느라 정신없이 바쁘다고 한다.
밤늦도록 포도주 잔을 기울이고 시내에 있는 카지노 구경도
난생 처음하고 배팅도 해보았다.
친구와 둘이서 백인 여성들이 나체쇼를 하는 클럽에도 갔는데
꼴깍꼴깍 침만 삼키다가 집으로 향했다.
이곳에도 예전에 없던 밤 문화가 생기기 시작한다고 한다.
---계속
첫댓글 도데체 누가 가이드여~?!
결국 끝 부분에서 나와야 될 얘기가 슬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