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프라하의 봄 나무
봄은 사계절의 처음이고, 마주 보거나 같이 봄이며, 민주화의 상징이다. 이는 봉건사회, 제국주의에 맞서 반봉건, 반외세를 지향하는 시민혁명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를 흐르는 ‘비스와강’ 가에 칼을 든 인어상이 있다. 오래전, 이 비스와강에서 그물에 걸린 인어를 어부가 살려주었기에 인어는 도시의 상징이었다.
1944년 8월 1일, 나치에 신음하던 시민들은 또다시 소련군이 온다는 소식에 봉기했다. 이날 앞장섰던 시인이자 작가인 24살 ‘크리스티나 크라헬스카’가 독일 진압군 다섯 발의 총탄에 목숨을 잃었다. 비스와강 인어상의 얼굴은 바로 그 여성이고, ‘바르샤바 봄’의 상징이다.
1956년 10월 23일 시작돼 17일 만에 진압된 헝가리 혁명의 또 다른 이름은 ‘부다페스트의 봄’이다. 당시 동유럽의 민주화 운동 중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프라하의 봄은 1968년 1월 5일 체코슬로바키아 개혁주의자 ‘알렉산데르 둡체크’가 집권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8월 21일 소비에트 연방과 바르샤바 조약 회원국인 동맹국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던 봄이다.
서울의 봄은 바르샤바와 프라하의 봄을 이은 1979년 10월 26일부터 1980년 5월 17일 사이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이다. 이 서울의 봄은 군부독재자 박정희가 사망한 10·26사건 뒤 보안사령관 전두환의 신군부세력이 1980년 5·17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이에 저항하는 광주시민을 군인을 동원 무력으로 유혈 진압했다.
중국의 1976년 제1차, 1989년 제2차 천안문 항쟁이자, 민주화 운동은 ‘베이징의 봄’이라 한다. 이 역시 중국 공산당 정부는 군대와 전차로 유혈 진압하였다.
그리고 2010년 12월이다. 아프리카 튀니지의 남동부 지방 도시 ‘시디 부지드’에서 26세 청년 ‘무함마드 부아지지’가 경찰의 단속으로 과일과 좌판을 빼앗겼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직을 못 해 노점상을 하던 그는 시청에 항의하다 12월 17일 분신자살을 시도했다. 분노한 시민이 시위에 나섰고 2011년 1월 4일 부아지지가 사망하면서 시위는 더욱 커졌다. 튀니지의 시위는 리비아, 이집트, 예멘, 시리아 등 북아프리카와 중동 등 주요국으로 퍼졌고 이는 ‘아랍의 봄’이다. 그리고 이들 ‘봄’은 수많은 희생과 미완의 숙제를 남기고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미국 헌법의 기초를 잡은 미국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때로는 애국자와 압제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고 했다. ‘불의가 제도가 될 때 저항은 국민의 의무가 된다.’고도 했다. 그래서 ‘봄’에 맞서는 말은 ‘겨울’이 아니라 ‘피와 저항’일 것이다.
체코 영화 ‘프라하의 봄’은 체코의 명감독 ‘카렐 카치나’가 1970년에 만든 ‘귀(Ucho)’이다. 프라하의 봄 좌절 후 개혁파들이 숙청당하고 감시당하는 상황을 다룬 내용인데, 상영 금지로 인해 1990년 칸 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됐다.
프라하의 ‘바츨라프’ 광장은 체코 국립 박물관에서부터 무스테크 광장까지 이어지는 길이 750m, 너비 약 60m의 대로이다. 여기 국립 박물관 앞에는 체코인들의 수호성인 ‘성 바츨라프’ 기마상이 있다. 이 기마상 앞에 1968년 ‘프라하의 봄’이 좌절된 뒤, 이듬해 소련군의 침공에 맞서 ‘얀 팔라흐(Jan Palach)’가 분신자살했던 장소가 있다. 그 가까이 얀 팔라흐와 또 한 명의 젊은이 ‘얀 자릭(Jan Zajic)’의 묘가 있다. 누가 가져다 놓는지, 항시 장미꽃이 있다.
누구나 무릎 꿇고 참배해야 할 두 젊은이의 낮은 무덤을 누운 향나무 등 키 작은 나무가 지킨다. 한동안 두 젊은이 앞에 허리 낮게 숙여 마침내 프라하의 봄 한가운데에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