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가신(洪可臣) : 1541(중종 36)~1615(광해군 7)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로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흥도(興道), 호는 만전당(晩全堂), 간옹(艮翁), 아버지는 온(昷)이며, 어머니는 신윤필(申允弼)의 딸이며 1567년(명종 22) 진사시에 합격했고, 1571년(선조 4) 강릉참봉이 된 이래 형조좌랑, 지평, 안산군수, 수원부사 등을 지냈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그와 친했다하여 파직되었으며 1593년 파주목사, 다음해 홍주목사 부임 당시 1596년 이몽학(李夢鶴)의 난 때 박명현(朴名賢), 임득의(林得義) 등과 함께 홍주(洪州)를 방어하고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청난공신(淸難功臣) 1등으로 영원군(寧原君)에 봉해졌다.
서문내용 (1960년대 작성된 글로 맞춤법이 현재와 상이한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 홍성골은 지금부터 50여년전에 군폐합으로 인하여 홍성골과 합하기 전까지는 홍주라고 불렀다. 가문 박에서 동편으로 oooo 예산으로 통하는 신작로 길가 말부덤이란 곳에 아이들이 짓으로 군데군데 창쌀이 절단났으며 돌팍을 집웅위에 던져 갓뜩싸이고 기왓장 상한겄이 만을 뿐만아니라 아이들이 올라가 기와를 뒤집어 노왔다.
이 비각안에는 폭이 상당히 넓고 키가 꽤 높은 비석이 돌거북 바탕위에 웅장한 기세로 서있다. 이 비각은 홍만공선생이 청난한 기념비다, 자세한 내력은 아래에 번역한 비문을 읽으면 알것이다. 대강 말하자면 이 비는 지금으로 부터 근 400년전 이조 선조대왕 시절 병신년에 만전공이 역적 이몽학을 잡아 난을 평정하여 우리 홍주백성들을 화란에서 구해준 은덕을 사모하기 위한 것이다.
난을 겪은지 40년후 그때 목사 이미고(李米考)의 발의로 당시 홍주부로, 즉 우리 선조네들이 이 산에 사당집을 세워 제사를 바뜰며 여기에는 만전공의 충정과 덕행의 공적을 기록해 색여 오래오래 자손들에게까지 잊지말게 하기 위하여 이 비를 만드러 세우고 비를 보호하기 위하여 비각을 지었었다.
그리 햇던 겄이 해가 바뀌고 시대가 변함으로 따라 월산에 세윗던 사당집은 그 언제부터인지 없어져 제사를 폐하고 비각도 어느시절에 쓰러졌는지 몰을너니 지금부터 21년전 을묘에 만전공의 후손들이 자기 선조의 유서깊은 유적을 보존하기 위하여 비각을 중건했던것이다.
우리 홍주사람들이 인식이 부족이랄까 아이들에 대한 단속이 절당치 못하랄까, 하여간 비각이 자조 침해를 당하여 1~2년간에 한번식은 반드시 만전공의 후손들이 100여리 거리에서 불소한 비용을 드려 수리하게 된다. 이 위에 말한바와 같이 300~400년전에 우리 홍주사람들이 해 놓은 사업이며 물건인즉 당연히 영구히 우리 홍주사람들이 물건인 동시에 우리홍주 사람들이 보호하고 수리하여 짘혀야 할 의무가 되고 책임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지금과 같은 즉 우리 홍주사람으로 생각할 때에 만전공 영혼에 대하여는 미안스럽고 또 우리 선조들이 하신 사업과 성의에 대하여 생각하면 불미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몇해에 한번씩이 비각을 수리할 때를 당하면 만전공의 후손이 우리 홍주사람들이 선조에 대하여 감사보다도 도로혀 원망이 있을 겄이다.
몽학란이 역사를 더듬고 우리 선조들이 만전선생의 은덕을 사모하던 자최를 알아서 현명하신 우리 홍주인사들이 각성을 바라며 반성이 있기를 감히 촉구할가하며 이에 청난비문을 번역해서 참고에 이바지 하고저 한다. - 홍성(洪城) 감고생(感古生) -
홍양 청난비명 역(洪陽 淸難碑銘 譯)
지나간 만력24년 (李朝宣廟 二十九年 丙申)에 역적 이몽학(李夢鶴)이 호내(湖內, 忠淸, 全羅道)에서 난(難)을 이르켜 여섯골을 공함(功陷)하고 두골원(홍산현감 윤영현, 임천군수 박진국)을 납치하니 원근이 놀래었다. 그때 홍주목사 만전홍공(晩全洪公)은 문학공부만 하는 원으로 외로운 성(城)을 짘혀 몆일 안가서 그 난리를 평정하니
소경대왕(宣祖)이 가상히 여기서서 표창글을 주시고 직품을 돋으시며 또 명하여 역사에 기록하게 하시고 얼마후에 또 청난훈호(淸難勳號)와 벼슬 2품 작(爵) 영원군(寧原君)을 주시니 이에 우리나라 조정대부로 부터 시골사람들 까지라도 공의 이름을 알고 생각하여 사모하지 안는 사람이 없거던
하물며 오직 홍주백성으로서 직접 공이 주린범의 발길에서 구해내여 편안한 자리에 누워있게 하여 주웠음이라~ 그 거룩한 공의 덕을 사모함이 이망말지 못할터인데 일즉히 초상(肖像)에 제사를 바뜰어 덕을 생각하는 찬송이 있다함을 드러보지 못한지가 우금 40여년 적막함은 어찐일인고
가정년간(嘉靖年間)0000에 중국 복건 안찰사 종신 자상(福建 安察使 宗臣 子相)이 복건(福建)을 침략하는 왜적을 막아물리치니 복건(福建) 사람들이 살려준 덕을 생각하여 사당(祠堂)을 조석산 복건(福建) 청난성 내00에 세우고 그 일을 비(碑)에 세겨 송덕하기를 오늘날 까지 그치지 안거늘
이제 공이 홍주사람 살린공이 자상(子相)에게 비하여 지남이 있을지언정 못하지 않고 정난한 열적이 자상(子相)에게 비하여 더하거늘 어찌 홍주가 홀로 조석산과 같이 한번 난리 겪은담 살려준 공을 기념하는 한개의 돌이 없으리요~비록 풍속이 미비하다고 나물해도 마땅하다.
금년 봄에 완산리후(完山李候)와 조정의 명을 받아 이 골 목사로 부임하여 즉시 공의 일을 섬섬히 여겨 향리부노(鄕里父老)들과 의논하고 사당터를 골으고 또 비석을 마련해 놓고 내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그대의 글을 통하여 만전공의 충성과 덕을 발양(發揚)하여서 오래 오래 전하기를 원하노라"하니 내가 생각하다 못하여 이제 쓰노라
홍주는 요색지(要塞地)라 홍주를 잃으면 호내(湖內)가 없을 겄이요 호내가 없으면 원나라가 어떻게 될 것이냐~ 만전공이 홍주를 보전하여 직함이 어찌 다만 일시지공(一時之功) 뿐이라~ 처음에 도둑이 졸기불의하여 공겁있기에 힘쓰고 장원한 생각은 없었다. 임진왜란 계사흉년 뒤를 승시하여 무뢰배들은 꿰서
여러골에 선동하기를 두고두고 오래했다. 이러므로 이목(耳目)이 노림이 아전과 백성들 사이에 셖여 있었다. 이것이 다른 적에게 비하여 어려운 점이었다. 병신 7월 7일에 정산골에서 공에게 급보가 있다. 공이 즉시 이민(吏民)을 격려하여 골을 사수(死守)하자고 효유하고 널리 인읍에 있는 장사을에게 격서(檄書)를 전하여 다 불러왔다.
성중 군사 수백명에 불과하고 성이 또한 혀수하다 했던 사람이 공에게 성을 버리고 달리 경영하자 원한대 공이 말하되 "성을 지혀 방비하는 신하가 성곽봉강(城廓封疆=자기 맡은 골)에서 죽는겄은 고제(古制=옛법)이라 이제 내가 봉강지신이 아니야~ 또 공에게 처자피난 식히기를 권한이 공이 말하되
"나는 나라에 죽고 쳐자들은 내게 죽음이 의(義)에 해가 됨이 있으랴~" 하고 이에 다른데 있던 자제들을 모다 불러들여 성중에 모이게 하니 이로 인하여 여러사람들이 마음이 안정되어 피난준비 하던자, 그치고 걱정 근심 하던자, 불안하다 아래 아전들이 무비기강지복(無非紀鋼之僕)이다.
- 중 략 -
공(公)이 간지 이미 오래되고 세상에 여러 번 난(亂)을 겪었으나 공의 충성(忠誠) 더욱 빚나도다. 홍주사람은 공(公)의 덕을 생각하며 사당(祠堂)집을 세워 제사(祭祀)를 드리니 월산 남쪽 소나무 기동 잣나무 판이로다. 영혼(靈魂)이 의지하고 제기를 빌려놧다 여기열매 붉어지고 파초 잎이 누르러진 가을철 무르닉은 계미년에 옳은 사적비에 색여 이것을 오래오래 보이노라
통훈대부(通訓大夫) 원임홍문관(原任弘文館) 전한(典翰) 겸(兼) 지제교(知製敎) 조경(趙絅) 찬(撰)
비문(碑文)을 찬(撰)한 조경(趙絅)은 대제학판돈영(大提學判敦寧)을 지낸 용주(龍洲) 선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