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 14-4: 『내 생애의 산들』, 제4장 「라바레도 북벽 동계 초등」(1953) 해제
14-4-1 알피니스트의 글쓰기와 글읽기
등반은 자신을 파괴하는데 이르는 고통일까, 자신을 회복하는 기쁨일까? 알피니스트가 등반 이후에 쓰는 글은 자신이 경험한 고통 혹은 기쁨의 드러냄 혹은 확인인가? 올랐다는 기쁨을 환기하면서 정상 에 오른 환희를 두 배로 만드는 것인가? 지금까지 믿었던 바와 다른 무엇을 발견했기 때문일까? 그리하여 등반의 절대성을 확보하려는 어떤 혁명같은 것인가? 알피니스트는 산을 오르는 존재로 출발하지만, 그 끝은 글을 쓰면서 작가, 문인으로 글 속에 묻히는 존재가 되는 데 있다. 알피니스트는 글을 쓰면서 자신의 등반과 삶 전체를 사유하는 존재이다. 그들만큼 높은 산에 오르지 못하는 나는 그들이 남긴 글과 책을 읽는다. 책을 펼쳐서, 글을 내 앞에 놓고 읽으면서, 그들이 글을, 책을 쓰는 행위를 떠올린다. 누가 지시하거나 강제한 것도 아닐 터인데, 그들이 산에서 내려와 글을 쓰는 바를 묻는다. 그런 면에서 등반은 공동체 의식으로 귀결된다.
나는 글을 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혼자 있어야 한다고 배웠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자신을 극단적으로 개별화하는 법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 존재로서 보나티를, 보나티의 글과 책을 읽는다. 이 참에 나는 한국 산악문학의 고전인 박인식의 『사람의 산』(1985, 2003)을 다시 읽고 싶어졌다. 알피니스트가 남긴 언어는 학교의 제도교육에서 배운 언어와는 다른 법, 그들은 어떻게 언어를 더듬고, 헤집고, 찾아 쓰는 것일까를 공부해보려고 한다. 땅 위에 솟아오른 산, 그 가운데 거대한 암봉을 오른다는 것은 알피니스트에게는 제 삶을 통과하는 일이다. 산은 삶을 격리시키는 공간으로 보이거나, 여겨질 때가 있지만, 알피니스트는 산에 올라 산과 삶을 더 크게, 넓게 보이게 한다. 알피니스트에게 등반은 새로운 기쁨이 아니라 오래된 기쁨이다. 그러므로 알피니스트들이 남긴 글과 책을 읽는다는 것은 언어의 기원을 찾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그들이 글과 책을 쓰는 행위는 자기자신에게 말걸기, 그러므로 독자인 내가 글과 책을 읽는 일은 일종의 대화하기, 질문하기, 그 끝은 글쓰는 알피니스트처럼 고독하기라고 믿는다.
14-4-2 복잡한 역사, 착종된 번역
1930년에 태어난 보나티가 1953년 2월 이전에, 그는 15개월의 의무 군복무를 마쳤다. 그리고나서 자신의 조국 이탈리아 북부, 라바레도에 있는 3개의 암봉, ‘트레 치메’를 오른다. 침묵하는 거대한 암봉이다. 입대하기 위해서 적성검사를 받던 날, 3개의 암봉을 보면서 경탄을 금치 못했던 보나티, 15개월 의무 복무기간동안,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지대 산악부대에 근무하면서 조금씩 3개의 암봉으로 이동했다. 등반의 심연으로 군복입은 그의 몸은 빠져들어갔다. 제대 후, 제 삶의 땅을 떠나, 3개의 암봉에 당도한다. 그리고 오른다. 3개의 암봉 가운데 마지막 암봉인, 가장 큰 암봉을 아직 달빛이 있는everything is moonlit, la lune nous éclaire(한57, 영66, 불62) 이른 아침에 올라, 마지막 햇볕by the last rays of the sun, par les derniers rayons du soleil(한63, 영73, 불74)에 정상에 이르고, 일어 번역본처럼, “최후의 잔광이 비추고 있는”, 저녁 달빛by moonlight, au claire de lune, im Mondlicht한63, 영74, 불73, 일65, 독56) 속에 치마 그란데를 내려온다.(한63) 자신을 지워가며 올랐다가, 새로워진 자신의 모습으로, 매혹된 영혼을 지닌 채, 은밀한 존재가 되어 다시 현실세계로 돌아온다.
제4장의 내용은 복잡하지는 않지만,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주의가 필요하다. 보나티는 트레 치메 즉 3개의 암봉을, 작은 암봉, 그 다음에 서쪽 암봉, 마지막으로 큰 암봉을 올랐다. 첫 번째 작은 암봉은 정상까지 오르지 못했고, 나머지 두 개의 암봉은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두 번째 암봉 등반에 관한 내용이 가장 길고, 큰 암봉 등반에 관한 글은 매우 짧다. 제4장 읽기가 매우 혼란스러운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한글 번역본이 지명, 산 이름, 바위의 고유명사를 독어와 원본, 다른 나라 번역본에 있는 번역어와 혼용하여 쓰고 있어, 내용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글의 내용이 많은 것도 아니고, 긴 것도 아니지만, 산, 암봉, 장소의 이름이 독어와 영어로 한 데 뒤섞여 있다. 예컨대, “우리는 밤새 추위에 떨며 결국 드라이 친넨을 하기로 했다. 우리의 행복감은 너무 커서 치마 오베스트 북면에 새로운 직등 루트를 개척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한56) 여기서 독일어 드라이 친넨과 이탈리어어 치메 오베스트의 혼용은 독자의 이해를 가로막는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경을 마주하는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남 티롤, 돌로미테, 티롤 알프스라고 일컬어지는 이곳의 역사는 매우 복잡하다. 이탈리아가 1866년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를 합병하는 과정에서 영토가 축소되면서 이스트라, 카르나로, 트렌티노, 알토 아디제 등의 지역이 해결해야 할 잃어버린 영토가 되었고, 미수복 영토 귀속운동Irredentismo의 기원이 되었다. 귀속 후, 이탈리아 정부는 지방자치의 독립성과 자치성의 기준에 따라 헌법에서 부여한 5개의 특별주를 인정했는데, 그 가운데 ‘트렌티노-알토 아디제’가 있다. 주의 명칭도 이탈리아어와 독일어로 함께 지정되어 있으며 이탈리아어의 '알토 아디제'는 '아디제 강 상류', 독일어의 '쥐트 티롤'은 '남부 티롤'이라는 뜻이다.
라바레도 트레 치메의 북쪽이 남티놀의 도비야코Dobbiaco in South Tyrol(트렌티노-알로아디제 주)에 속하고, 남쪽은 베네토 주의 벨루노에 속한다. 그러니까 트레 치메의 정상은 이들 주의 경계이다. 트렌티노-알토 아디제 주(이탈리아어 Trentino-Alto Adige, 독일어로는 Trentino-Südtirol)는 이탈리아 최북단에 있는 주이다. 트렌티노-알토 아디제 주는 트렌토(트렌티노)와 쥐트티롤(알토 아디제)로 이루어져 있다. 이탈리아 북동부에 위치해 있고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제1차 세계 대전 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해 있었다가, 전쟁 후에는 이탈리아 왕국으로 할양되었다. 이로 인하여 오스트리아와의 사이에 영토 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트렌티노는 트렌티노-알티제 주의 남부 도이고, 중심 도시는 트렌토이다. 트렌티노 자치주Provincia autonomia di Trento는 이탈리아어가 압도적인 지역이며, 쥐트 티롤에서는 독일어가 압도적이다. 보나티의 이름인 발터Walter의 어원도 힘이라는 뜻을 지닌 독일어이다.(Walter is a German masculine given name of Germanic origin, composed of the elements walt-"power", "ruler", and hari, "army".) 이런 이유로 번역자 김영도는 ‘트레 치메’를 이탈리아어로 그대로 쓰지 않고, ‘드라이 친넨’이라는 독일어로 번역했을 것이다. 한글 번역본에 있는 “돌로미테에서 티롤 산악지대까지”(한54)는 일어 번역본 있는 “돌로미테에서 티롤 알프스까지ドロミテからチロル ⦁アルプスにかけて”(일49), 불어 번역본의 “티롤 알프스에 있는 돌로미테Des Dolomites anx Alpes tyroliennes”(불55), 영어 번역본 “from the dolomites to Breonie Alps”(영61)의 것과 같지만, 독일어처럼 쥐트 티놀이라고 번역하지 않았다. 한글 번역본은 이탈리아 사람인 보나티가 이탈리아어로 쓴 책을 번역한 것이므로, 나는 이탈리아어로 옮기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일본 사람이 책에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썼다고 해도, 이를 한국사람이 한글로 옮길 때에는, 독도라고 표기하는 것이 옳다는 믿음과 같다.
제4장은 1953년, 보나티가 친구와 함께 오른, 베네치아 북쪽, 돌로미테 지역의 ‘라바레도Lavaredo’에 있는, ‘라바레도 3개의 암봉Tre Cime di Lavaredo’ 등반에 관한 것이다. 한글 번역본은, 독어본에 나와 있는 지명과 등반 용어에 대하여 독일어와 영어를 구분하지 않고 그대로 썼다. 이와 달리, 영어 번역본, 불어, 일어 번역본에서는 이탈리아 고유명사를 그대로 사용했다. La Cima Grande(영65, 불56), La Cima Poccola(영 61, 불56), La Cima Ovest(불56, 72, 73, 영61,65,72,74) 일어 번역본에서는 “チマ⦁ピツコラ, チマ⦁オヴェスト, チマ⦁グランデ”(일, 50, 52, 65), 원어 그대로 번역했다. 서양의 유명한 알피니스트들을 소개한, 신승모의 『정상의 순례자들』(수문출판사, 1990)에서도, 제1장 ‘현대 인공등반의 마술사’라는 제목의 에밀리오 코마치에 관한 글과 제2장 ‘모던 알피니즘의 번성기’라는 제목의 발터 보나티에 관한 글에서, “라바레도의 치마 그란데, 치마 오베스트”라고 썼다.(29, 31, 132)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글 번역본 번역자 김영도는 한글 번역본에 이러한 지명을 독일어로 표기했다. 제4장의 첫문장의 시작인, ‘드라이 친넨Drei Zinnen’(한54)은 보나티가 오른, 돌로미테 지역 라바레도에 있는 3개 암벽 즉 이탈리아어 ‘트레 치메Tre Cime’를 독일어로 번역한 것이다. 암봉의 이탈리아어는 치마Cima이고, 그 복수는 치메Cime이다. 독일어로는 여성형 명사 Zinne이고, 단어가 e로 끝나므로, 복수형은 n을 붙여 Zinnen이다. 2012년 5월 17일자, 한국 산서회 다움 카페, 산악컬럼에, 이용대는 <암벽등반의 파라다이스 돌로미테 산군>에서 이 암봉을 ‘드라이 찌넨’으로 표기했다. “드라이 찌넨Drei Zinnen은 독일말로 ‘세 개의 뾰족한 암봉’을 뜻하며, 찌네는 영어의 니들needle과 같은 뜻이다...이탈리아 이름은 트레 치메 디 라바레도Tre Cime Di Lavaredo다. 치마 피콜라(2856m). 치마 그란데(3003m). 치마 오베스트(2972m) 등 3개의 봉우리로 나란히 연결되어 있으며”(https://m.cafe.daum.net/peakbook/MK7Q/22) 라고 썼다.
한글 번역본 역자인 김영도는 영어 번역본에서 적힌 “...at the foot of the Tre Cime”(영61)도 독일어 ‘드라이 친넨 밑으로’(한54)라고 옮겨놓았다. 한글 번역본에서, 제4장에 나오는 3개 암봉을 독일어 Drei Zinnen(한54)으로, 큰 암봉을 ‘그로센 친네Grossen Zinne’(한54, 57, 63)로, 작은 암봉을 클라이넨 친네’Kleinen Zinne’(한54)라고 독일어로 표기했고, 서쪽 암봉은 이탈리아어 그대로 ‘치마 오베스트Cima Ovest’(한57, 63)로 번역해서 옮겨 놓았는데, 독일어 번역본에서는 “Westlichen Zinne”(독50, 56)으로 표기되어 있다.
어떻게 한글 번역본 제 4장에 독일어, 이탈리아어가 등장하는 것일까? 김영도는 3개의 암봉의 존재와 이름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암봉 이름을 굳이 독일어로 표기한 바는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이용대는 월간 『산』, 2021년 6월호, 산행 상담실에서, “원래 드라이 친네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오스트리아 영토였으나 전쟁이 끝난 이후 이탈리아 영토가 된 땅이기 때문에 지금도 독일어와 이탈리아어가 함께 쓰이고 있습니다.”라고 이름이 복잡한 바에 대하여 설명을 덧붙였다.(http://san.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14900) 그리고 2011년 11월호, 해외 등반란에 있는 기사를 보면, “공원 북쪽 드라이 친네Drei Zinnen의 뾰족하게 우뚝 솟은 암봉 세 개는 돌로미테 국립공원을 대표하는 바위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벌어진 산악전투 현장으로, 부서진 건물과 바위 곳곳에 흔적이 남아 있다. 세 봉우리 중 가장 작은 치마 피콜라(Cima piccola·2,857m)와 서쪽을 뜻하는 치마 오베스트(Cima Ovest·2,973m), 큰 봉우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치마 그란데(Cima Grande·2,999m)는 돌로미테의 맹주로 꼽힌다.”라고 쓰고 있다.(http://san.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6401) 이런 것을 보면, 한국 산악계에서 ’트레 치메 디 라바레도’와 독일어식 지명인 드라이 친넨이 혼용되어 쓰이고 있다.
번역어의 혼용은 독해의 혼란을 가져다 주는데, 트레 치메라고 쓰고 괄호에 독일어 지명을 써놓고, 설명을 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히말라야Himalayas 혹은 사가르마타Sagarmatha, 초모랑마Chomolungma보다 제국주의 영국의 측량장교였던 에베레스트Colonel Sir George Everest라는 용어에 익숙한 바에도 이와 같은 질문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첫 번째는 번역자가 라바레도 3개 암봉의 이름과 지역 위치를 몰랐을 수도 있다는 가정이고, 두 번째 가정은 독일어 번역본을 저본으로 삼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겠다. 1990년에 나온 신승모의 책에서 보았던 것처럼, 한국 산악계에서 이 암봉을 ‘드라이 친넨’이라고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라고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이와 같은 지명에 관한, 등반 용어에 관한 독일어 번역용어의 혼합은 제4장에 많이 있다. 한글 번역본은 한글 독자를 위한 것일 테니까, 이탈리아 고유명사를 굳이 독일어식 번역용어로 번역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이탈리아 고유명사를 한글로 번역하는데, 독일어로 표기한다는 것은 일종의 착종錯綜이 아니겠는가? 많은 한국인들은 트레 치메에 대하여 독일어 표기보다는 이탈리아 고유명사로 더 잘 알고 있고, 그 지명을 모르는 이들이 이를 알기 위해서는 트레 치메로 옮기는 것이 낫다고 여긴다. 일제 강점기 일본 제국주의 교육을 받았던 번역자 김영도 세대는, 이탈리아보다는 추측국Axis powers이면서 연합군에 대항했던 군사연합체 일본과 오스트리아 그리고 독일과 밀접한 감성적 교류가 잠재되어 있을 것이라는 짐작도 해볼 수 있다. 보나티의 조국 이탈리아 입장에서 보면, 오늘날 이탈리아에 속하는 지명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것을 반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오스트리아의 요한 스트라우스 1세의 <라테치키 행진곡Radetzky March>과 이탈리아의 쥐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Nabucco」 가운데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Va, pensiero>의 대비를 떠올려도 좋을 것이다.
보나티의 등반과정을 이해하기 위하여, 제4장에 나오는 지명을 좀 더 분명하게 적을 필요가 있다. 이탈리아 북부, 돌로미테 지역의 라바레도의 거대한 3개 수직 침봉은 작은 암벽Cima Piccola(2857미터), 큰 암벽Cima Grande(2999미터), 서쪽 벽Cima Ovest(2973미터), 이렇게 3개이다. 이탈리아어로 ‘트레Tre’는 3개, ‘치메cime는 암봉인 치마cima의 복수형이다. 트레 치메로 가는 길에 산을 반영하는 큰 거울같은 미주리나 호수Lago Misurina(1756미터)가 있다.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이탈리아 북부 돌로미테를 여행하는 이들은 ‘트레 치메’가는 것을 빼놓지 않는다. 코르티나 담페조Cortina d’Ampezzo를 출발해서 ‘트레 치메 둘레길’을 걷는 것은 아주 유명한 트레킹 코스이다. 미주리나 계곡Misurina valley을 지나, 아우론조 산장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라바레도 산장, 로카델리 산장 등을 따라 걷게 된다. 트레킹 하는 이들은 ‘트레 치메’의 기슭인 라베레도 안부La Forcella Lavaredo에서 쉬고, 사진을 찍고, 트레 치메의 웅장한 분위기에 놀라게 된다. 이런 지명은 제4장에서 여러번 볼 수 있는데, 역자는 모두 독일어로 옮겨 놓았다. 트레 치메 주변에 있는 보나티는 친구와 함께 ‘토파나 디 로제스 암릉Tofana di Rozes(3244미터)을 1953년 2월에 등반하지만 날씨가 나빠지며 중간에 내려오기도 했다.(한55) 이런 내용도 제4장 앞부분에 쓰여있다
제4장은 보나티가 군에 징집될 때 처음으로 꿈꾸었던 ‘치메 디 라바레도Cime di Lavaredo’ 등반 즉 3개의 암봉(Tre cime)을, 15개월 동안의 군복무를 마친 후에 했던 내용을 담고 있다. 베니스Venice 위쪽, 돌로미테Dolomites 북쪽 지역에 있는 거대한 3개의 암봉과 그 주변 산을 등반한 내용이다. 첫 번째는, 3대의 암봉 가운데, 정상에 오르지 못한 작은 암봉(Cima Piccola, 2857미터), 두 번 째 등반은 서쪽 암봉(Cima Ovest, 2973미터) 그리고 마지막 등반은 큰 암봉(Cima Grande, 2999미터)으로 모두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웅대한 ‘트레 치메’를 동계 등반하고 싶은 염원을 지니게 된 것은 보타니가 군복무를 위한 적성검사를 받던 날이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입대를 위한 신체 검사를 통과했을 때, 보타니는 산악부대에서 근무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로마에 있는 부대로 명령을 받았다. 그 후, 보나티는 여러 번 군에 전출 청원을 했고, 그 덕분에 제6 산악연대에 배속될 수 있었다. 보나티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15개월이었고, 그 기간동안 군사훈련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등반을 할 수 있었다.(한54, 불55, 영61, 일49, 독46)고 회고했다. 그 즈음 그의 등반 파트너는 카를로 마우리Carlo Mauri였다.
14-4-3 글 읽기의 어러움
제4장의 이탈리아 원본의 제목은 <Sulle pareti nord di Lavaredo, d’inverno>(1953), 우리 말로 옮기면, ‘겨울철, 라바레도 북벽에>이다. 한글 번역본 제목처럼, 초등이란 말은 없다. 독어 번역본의 제 4장 제목은 <Die Nordwände der Drei Zinnen im Winter, 겨울철, 3개 침봉의 북벽이고. 영어 번역본 제목은 <The North faces of the Lavaredo in winter, 겨울철, 라바레도 북벽>이다. 불어 번역본 제목은 <Dans les faces nord de Lavredo en hiver, 겨울철, 라바레도 북벽에서>이다. 일어 번역본 제목은 <ラヴァレドの北壁冬季登攀라베레도의 북벽 동계등반>이다. 한글 번역본의 제목처럼, 초등에 대한 미혹은 다른 나라 번역본에서는 찾아볼 수 있다. 보나티는 트레 치메 등반을 위해서, 이탈리아 동부 돌로미테 관광의 중심지인 코르티나 담페초에서 출발했다. 미주리나Lago di Miosurina를 거쳐, 아우론조 산장에 도착해서 등반을 시작했다.
한글 번역본에서는 아우론조Auronzo 산장을 론제레스Longeres 산장이라고 번역했다. 이 산장은 칸도레의 아우론조Auronzo di Cadore 지방자치단체의 도움으로, 이탈리아 알파인 클럽이 1912년에 공사를 시작, 1915년에 개장을 앞두고 있었지만 5월 전쟁으로 폭격을 받아 폐허가 되었다. 이 때 이름이 론제레스Rifugio Longeres였다. 실제 개장은 1925년에 했는데, 이 때 이름은 움베르토 왕자이름을 딴 산장Rifugio Principe Umberto였고, 1955년에 화재로 소실되어, 1957년에 재건축되었고, 이 때부터 아우론조 산장Rifugio Auronzo이라고 명명했다. 오랜 기간동안, 이 산장은 다양한 이름과 다양한 형태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pur con diversi nomi e svariate forme, 이탈리아 알피니즘의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https://www.rifugioauronzo.it/it/storia.html 참조) 보나티가 트레 치메를 처음으로 등반했을 때 이 산장 이름은 론제레스였고, 영어, 불어, 일어, 독어 번역본에서도 모두 론제레스 산장이라고 표기했다. 일반적으로 이곳에 도착해서, 트레킹을 시작해서 드레 치메를 가운데 두고, 시계방향 혹은 그 반대 방향으로 둘레길을 걷는다. 그 가운데서 로카델리 산장(2405미터)을 지나치게 된다. 미주리나 호수를 중심으로 보면, 좌측이 Cima Cadini di Rinbianco 2402미터, 산군이고, 우측은 크리스탈로 산Monte Cristallo(3221미터) 방향이다.
한글 번역본을 읽는 독자가 첫 페이지, 첫 문장인 “드라이 친넨 북벽을 동계에 오른다는 생각이 떠오른 것은 군복무 중 어느날이었다.”(한54)의 뜻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독일어 번역본의 문장은 “Die Idee, die Nordwände der Drei Zinnen im Winter zu Begehen, hat in gewisser Weise mit dem Tag meiner Einberufung zum Militär zu tun”(독46)이고, 불어본은 “L’idée d’escalader en hiver les faces nord des cimes de Lavaredo a un rapport...avec le jour de mobn conseil de révision”(불55) 이다. 영어 번역본은 “The idea of climbing the north faces of Tre Cime di Lavaredo in winter...”(영61), 일어 번역본은 “ラヴァレドの北壁冬季登攀”(일49)이다. 제4장 글제목에 대한 이해는 본문을 읽는데 매주 중요한 부분이다. 「트레 치메 디 라바레도(Tre Cime di Lavaredo」는 베니스 북쪽 돌로미테에 있는 세 개의 수직 석회암 첨탑이다.(The Tre Cime di Lavaredo are three vertical limestone spires in the Dolomites north of Venice. 영60 참조) 한글 번역본에 있는, “군복무 중 어느날”(한54)은, 입대를 위한 적성검사Conseil de révision를 통과했던 날이었다.(불55)
보나티가 군에 입대한다. 15개월 의무 복무, 그 곳에서 카를로 마우리Carlo Mauri를 만난다. 나중에 그와 등반을 같이 한다. 소속 부대는 “아주 산속에 있는”(한54) 제6산악연대. 기간은 15개월. 보나티 말대로, “생애에서 가장 즐거웠던 시기”(한54)였다. 근무하는 동안, “돌로미테에서 티롤 산악지대까지, 오르틀러Ortler에서 몽블랑Mont Blanc으로 이어지는...이탈리아 북쪽 알프스는 가보지 않은 데가 없었”(한54)고, 군복무를 마칠 무렵에는, “등산훈련을 많이 했기에 산에서는 어떤 어려움에도 도전할 수 있게 됐다.”(한54)고 썼다. 그러나 제대 후, 집으로 돌아와서는 할 일이 없었다. “서글프고 보람이 없는”(한54) 일상이 이어지고 있었다. 서서히 그의 가슴 속에서 “정열과 반항심”(한54)이 한꺼번에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즈음, 보나티의 일상적 삶은 “그날이 그날이었다.”(한54) “인생이 서글프고 보람이 없는” 날들 속에서, “남과 다르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희생이 따르기 마련”(한54)임을 깨닫고, 산악 부대에서 함께 근무했던 친구들과 다시 기차를 타고, 스키를 타고, 걸어서 산으로 들어갔다. 그곳이 롬바르디아 주 레코 지방에 있는 해발 2400미터 급의 산악대산괴라고 일컫는 '그리냐'Grigna와 3000미터 급의 산이 3개나 있는 토파나Tofana 산이었다.(한55)
위 문장은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7년이 지난 당시, 이탈리아 사람들의 무료한 삶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날들은 마냥 변화없이 이어졌고, 보나티는 산에 가는 일 이외에는 무감해졌다. 쓸쓸한 일상이 이어졌다. 별로 할 일이 없었다. 위 문장을 다시 번역하면, 보나티는 자신의 삶 뿐만 아니라 전쟁 이후, 많은 이들의 삶의 환경은 나아지지 않았고, “마냥 무료한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그런 삶을 강요당하고 있는 것은 얼마나 서글프고 보람이 없는가How sad and useless it is to live like that! and to think the greater part of humanity is restricted nowadays in this way, Comme vivre une vie si banale et si triste? Et dire que la plupart des gens y sont aujourd’hui contraints”(영62, 불56)라고 토로하고 있다. 보나티에게는 산이 유일한 출구였다. 이런 삶의 선택은 희생을 치러야 하는 법, 그럼에도 보나티는 열정과 반항을 내세워 알피니스트로서의 삶을 선택한다.(한54-55),
1930년대 이탈리아 등반사에서 겨울철 ‘트레 치메’ 북벽 등반은 매우 큰 숙제last great problems(영60)였다. ‘트레 치메Tre Cime di Lavaredo’ 즉 세 개의 암봉 가운데, 가장 큰 암봉은, 1869년 파울 그로만Paul Grohmann이 가이드 프란츠 인너코플러Franz Innerkofler와 함께, 처음으로 올랐다. 서쪽 암봉은 1879년 미헬 인너코플러Michel Innerkofler가 초등했다. 작은 암봉은 1881년 미헬과 한스 인너코플러Hans Innerkofler가 함께 등반해서 올랐다. 1933년, 에밀리오 코미치Emilio Comici와 안젤로 디보나Angelo Dibona는 큰 암봉의 북벽을, 이틀은 바위에서 한둔하면서, 3일 동안 등반해 처음으로 올랐다. 서쪽 암봉의 북벽은 1937년, 리카르도 캐신Ricardo Cassin이 처음으로 등반했다. 모두 여름에 등반했다. 그 후 많은 유럽 알피니스트들이 “악명높은 90미터 횡단구간”(한57)이 있는 캐신 루트를 따라 등반을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동계에 등반한 것은 1953년 보나티와 마우리였다. 세 개의 암봉 가운데 등반하기 가장 어려운 곳은 서쪽 암봉이다. 제4장을 보면, 보나티는 서쪽 암봉을 등반하지 못했다. 번역자 김영도는, 암봉을 말할 때, 서쪽과 북쪽 혹은 여름과 겨울을 나눠, 이에 따라 초등이라는 말을 붙였다.
치마 그란데 즉 큰 암벽 밑에는 돌로미테의 많은 암봉을 등반한 오스트리아 출신의 알피니스트 파울 그로만Paul Grohman을 새긴 돌로된 기념비가 있다. 유학 시절, 이탈리아 알파인 클럽Club Alpino Italiano이 세운, ‘Tre Cime di Lavaredo’가 새겨진 간판이 벽면에 붙어있는 아우론조 산장Auronzo Rifugio(2333미터)에서부터 치마 피콜라 기슭에 있는 라바레도 산장Lavaredo Rifugio2344미터을 거쳐, 3개 침봉의 북면을 보면서 로카델리 산장Locatelli Rifugio을 향해 긴 타원형의 둘레길을 트레킹한 적이 있었다. 많은 이들이 걷는 코스이기도 하다. 이 산장 뒤편에 크리스탈로 산군이 펼쳐져 있다. 로카델리 산장을 독일어로 쓰면 Drei-zinnen Hütte인데, Drei는 3개, zinnen은 벽(암봉, 침봉)을 뜻한다. 이 산장의 왼편에서 ‘트레 치메’ 즉 3개의 암봉을 볼 수 있다. 보나티가 군에서 제대 후, 등반한 트레 치메 즉 3개의 암봉 이름을 순서대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이탈리어어/독일어/영어 순.
1)첫 번째 등반: 작은 암봉Cima Piccola /Kleinen Zinne /little peak-1952년 9월, 실패.
2)두 번째 등반: 서쪽 암봉Cima Ovest /Westlichen Zinne /western peak—1953년 2월 12-13일, 정상 등정
3)세 번째 등반: 큰 암봉Cima Grande /Grossen Zinne /big peak, 1953년 2월 27일, 정상등정
제4장 한글 번역본의 첫 문장은 “드라이 친넨 북벽을 동계에 오른다는 생각이 떠오른 것은 군복무 중 어느날이었다.”(한54)와 세 번째 단락에는 “1952년 9월 중순 어느날...드라이 친넨 밑으로 갔다. 그로센 친네 북벽에 있는...반항심에서 더욱 더 친넨 북벽으로 향했다.”(한54,55) 55쪽 맨 아래 문장에는 “치메 디 라바레도를 내가 하고, 치마 스코토니를...따로따로 할 수 없었다.”(한55) 치마 스코토니는 cima Scotoni를 발음 그대로 적은 것이고, “파테른 자델을 넘어...”(한57)에서 파테른자텔은 독일어 Paternsattel(독49)의 발음 그대로 적어 놓은 것이다. 불어 번역본은 La Forcella Lavaredo(불61), 영어 번역본은 via Forcella di Lavaredo(dud65), 모두 라바레도 안부로 번역할 수 있다.
라베레도 산장을 뒤로 하면, 드레 치메와 파테르노 산Monte Paterno(2744미터)의 안부인 라베레도 고개Forcella Lavaredo(2454미터)로 향하게 된다.(김영도는 이 부분을 독일어 번역본에 나오있는 단어인 파테른자텔Paternsattel을 그대로 사용했다. Paternsattel은 파테른 고개Patern Pass를 뜻한다. 57쪽에는 “그러나 치마 오베스트(서쪽, ovest, west) 북벽은 전혀 다르며...”(한57) “3일 뒤인 2월 27일에는 그로센 친네 차례다”(한63) 3일 뒤에는 “그로센 친네 정상에 섰다.”(한63) 이런 탓에 이 부분을 읽는 일이 매우 혼란스러워 졌다. 거듭 말하지만, 번역자가 암봉을 뜻하는 독일어 ‘친네Zinne’와 이탈리아어 ‘치마Cima’의 뜻을 구분하지 않고 썼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번역한 김영도가 이 뜻을 몰랐을 리는 없을 것이다. 설명을 하지 않고, 그대로 옮긴 지명들은 이 외에도 많다. 라바레도, 그리냐, 토파나 디 로제스 암릉, 토파나 등반(한55), 치마 스코토니(한55), 미주리나, 론제레스 산장( 지금의 아우론조 산장, 린비안모 산장 (한56), 파테른자델(한57), 메조 안부와 친넨코프 사이(한58), 크로다 로사 산마루(한59) 등.
그리고 다음과 같은 문장에 나오는 '린네'와 '니췌' 같은 단어들도 그대로 적어놓아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더욱 더 친넨 북벽으로 향했다.”(한55), “벽 상반부에 검게 보이는 린네가 문제였다.”(한57, 영65, 불61), “가파르고 얼어붙은 린네가 나와 스키를 벗어야만 했다.”(한58), “비박했던 하얀 니쉐(벽감)를 향해 조금씩 이동했다.”(한59), 독일어 린네Rinne/Rinnen은 홈통처럼 생긴 나팔 모양의 깔때기를 뜻한다. “in der schwarzen Rinne”(독49)는 영어 번역본에서는 “Black couloir”로, 불어 번역본은 “l’entonnoir sombre”(불61)이다. 니쉐는 한자어로 벽감壁龕이라고 쓰는데, 바람에 의해 벽에 움푹하게 패인 부분을 뜻한다. 영어, 불어 번역본 모두 niche라고 번역했다. 일어 번역본도 "하얀 벽감"(일58)이라고 번역했다.
14-4-3-1 첫 번째, 작은 암봉Cima Piccola 등반
제4장에서, 보나티는 3개의 암봉 가운데, 처음에는 ‘치마 피콜라’를, 그 다음에는 치마 오베스트 북면(한57)을 등반했고, 마지막으로 치마 그란데를 올랐다. 1952년 9월 중순, 3개의 암봉 가운데, 첫 번째 등반 대상인 작은 암봉인 치마 피콜라, 보나티는 거대한 수직 암봉을 보자마자 “경탄한 나머지 몽상에 젖었entre admiration et rêverie”고, “거인géants”(한54)이라고 했다. 한글 번역본에는 빠졌지만, 그 다음 문장은, 경탄과 몽상이 이 암봉에 올라야겠다는 영감inspration을 주었다I had an inspiration, que surgit l’inspiration.(영 61, 불56) 이다. “이 거인과 멋지게 맞서기로 마음을 굳혔다.”(한54)는, 좀 더 정확하게 풀면, “이 엄숙한 풍경에 걸맞게, 나 자신을 이 암봉에 견주어보기로 했다pit myself against these giants in the way most appropriate to this austere place, me mesurer à ces géants, et d’une manière digne de ce paysage austère”(영61, 불56)이다. 그것도 “냉기와 고독the frost and solitude, le gel et la solitude이 벽을 지배하는 한 겨울에.”(한54) 여기서 냉기frost, gel(영61, 불56)는 얼음이 얼어 매우 추운 혹한을 뜻한다. 22살의 젊은 보나티의 패기를 볼 수 있는 서술이다.
이렇게 해서, 보나티는 “불가능의 새로운 견해”(한54)를 지닐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새로운 견해'라는 문구는 ‘a new concept of the impossible, une nouvelle conception(영61, 불56)인데, 불가능에 도전해보겠다는 생각을 지니게 되었다는 뜻이다.’견해’라고 번약한 것은, 출생, 임신이라는 어원을 지닌 concept/conception인데, 의욕을 지니게 되었다는 뜻으로, 이 문장에서 '견해'라는 단어는 조금 낯설다. 보나티가 평생 지니고, 실천한, 알피니즘과 알피니스트의 원칙인, ’불가능’이라는 위험에 스스로를 내던지는 바는 이 때부터 굳건하게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암봉을 오르기 위하여 여러번 훈련을 거듭했다. 비박을 통해서 “장비를 줄이고...기온을 재고, 추위에 대한 반응을 기록”(한55)하면서 등반준비를 했다. 때는 1953년 2월이었다. 보나티는 이 암봉에 오르지 못했다. 대신에 “극단적인 위험에 노출됨이 없이 귀중한 경험을 쌓게 됐다”(한55)라고 썼다. 이 등반을 위해서 토파나 디 로제스 암릉 등을 등반하면서 준비했지만, 다른 친구들이 포기하는 바람에 등반에 이르지는 못했다.(한55) 그 때 그는 “너무 외로웠다”(한55)라고 토로했다. 제4장에서 첫 번째 등반에 관한 서술은 길지 않다
14-4-3-2 두 번째, 서쪽 암봉Cima Ovest 등반
제4장의 서술 가운데 두 번째 ‘서쪽 암봉’ 등반에 관한 것이 가장 길고, 중심을 이룬다. 1953년 2월 12일, 보나티는 이 벽을 오르기로 하면서, “예측할 수 없는 일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 있단 말인가?”(한59)라고 하면서, 끝까지 오르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 곳에서 “하얀 니췌(벽감)을 향해 조금씩 이동하며, 빈틈없는 벽을 시도했다.”(한59). 그러니까 “예측 불가능한 원인only something completely unforeseen, seul l’impondérable”(한59, 영66, 불65)만이 등반을 멈추게 할 뿐이고, 그런 일만 없다면 끝까지 등반하겠다는 뜻이다. “빈틈없는 벽을 시도했다I attacked the compact wall, J’ai attaqué le mur compact, ぼくは目のつんだ岩壁をアタックした, Ich habe die kompakte Wand angepackt(영67,불65,일58,독52)에서 빈틈없는 벽이란 매우 작은 바위들이 오밀조밀하게 붙어있는, 촘촘하게 박혀있는 벽을 뜻한다. 실제로 트레 치메는 낙석이 많은 곳이다.
보나티는 계속되는 “불가능한 구간that diabolical slab, 곡예the acrobatics와 숨막힘 그리고 저주the imprecations는 잊을 수 없다.”(한59)고 하면서, 어려운 서쪽 암봉의 벽을 오른다. 두 개의 피톤이 박혀있는 구간에서, 첫 번 째 피톤에 걸려있는 고리는 쓸모가 없었고, 추락하지 않기 위하여, 모든 힘을 쏟아부어 두 번째 피톤(영어, 일어, 불어 번역본은 piton, 한글 번역본은 모두 하켄으로 번역)에 의지해야 했지만, 너무 먼 곳에 있었다. 그 피톤을 잡기 위하여 애쓰는 자신의 행위를 곡예와 저주에 비유했는데, 여기에 한글 번역본에 나오는 ‘숨막힘’이란 단어는 없다. 영어 번역본에서만 이 슬랩 구간을 ‘악마같은 슬랩diabolical slab’(영68)이라고 썼다. 이 앞에 나오는 저주는 이 슬랩이 등반하는 보나티에게 강제하는 고통이었다.
보나티는, 전에 이곳을 등반했던 이들이 남겨놓은, “벽으로 굽어 사용이 불가능”해진 하켄을 보고, 어렵게 구간을 통과한 다음, 첫 번째 비박을 했다. 그곳에서 “하켄 두 개에 확보되어 발은 공중에 떠있”(한59)고, “녹일 눈도 없어 각설탕을 코냑으로 어느 정도 녹여 입에 넣는 것으로 만족하며...추위에 언 손발을 주무르며”(한59) 밤을 지새웠다. 그 다음 날, 케신이 이 첨봉을 등반하면서 두 번째로 비박한 곳을 거쳐, 두 번째 비박을 했다. 하켄에 줄을 걸고, 그것에 의지해서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노래를 부르며 눈이 감기지 않도록”(한61) 해야 했다. 이 등반의 어려움을 가장 잘 드러내는 문장은, “무너질지 모르는 설벽에 의지suspended on the fragile wall of snow”(한62,영71)하면서, “사람 생명이 얼마만큼 오래 균형을 유지할 것인가What followed was one of those times when one's life hangs in th balance. Ce qui suit fait partie des moments où se joue une vie, 정말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숨이 끊어질 듯 몸부림치며 나는 이 눈도랑 속으로 기어 들어가 무너지는 눈속에 손을 파묻고 놀랍게도 나를 붙들어 주고 있는 이 변덕스러운 물질과 한몸이 되려는 듯 몸 전체를 맡기고 앞으로 나아갔다...그러다가도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하나로 열을 올려 조금씩 조금씩 올랐다.”(한62)이다. 치마 오베스트 즉 서쪽 암봉 등반의 과정을 서술한 이 문장은 제4장에서 가장 빼어나다. 등반의 고통을 아름답게 서술한 문장이다. 치마 오베스트를 오르면서, 설벽을 지나가며 쓴 글이다.
이 문장은 길고, 한글 번역은 조금 과장되었다. 잘라서 보면, 한쪽으로 기울어진 저울추에 매달린 삶의 경우처럼 되어 위험한 순간이었다는 뜻에서 출발해서, 내리는 눈the yielding snow, dans la neige fraîche에 손을 파묻고, 그 속에 기어들어가자,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눈과 자신의 몸이 하나가 된 것 같다는 놀라운 경험을 적고 있다. 한글 번역본에 있는 '변덕스러운’은 내리고 있는 눈을 비유한 "비현실적인 물체insubstantial substance"(영71)를 번역한 것이다. 불어 번역본에서는 ‘놀랍게도incroyablement’(불71)라는 말로 줄여 썼다. “살아 남아야겠다는 생각 하나로 열을 올려”라는 문구는 다른 번역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2월 24일, 정상에 이르렀다. 산장까지 하강은 1시간 정도면 충분했다. 1시간 뒤, 그들은 산장으로 돌아왔다.
14-4-3-3 세 번째, 가장 큰 암봉Cima Grande 등반
1957년 2월 27일, 첫 번째 등반 시도는 리카르노 케신이 1935년에 처음 오른 “신비에 싸인 얼어붙은” ‘그로센 친네 북벽’(한58), 이 벽은 “대암벽, 통바위”(한58)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큰 어려움없이 등반을 할 수 있었다. 말미에 번역한 문장인, “너무 순조로와 한 때는 비박없이도 가능하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치마 오베스트 근방에서 고전적 등반을 하게 된 것이다.”(한63)는 오역이다. 이 문장은 “치마 그란데는 치마 오베스트에서 할 수 없었던(거부되었던) 고전적 등반을 할 수 있게 했다The north face of the Cima Grande gave us what we had denied on the Cima Ovest, a classic climb, Ce qui nous a été refusé à la Cima Ovest nous est offert à la face de la Cima Grande, Une Classique.”(영72, 불72, 일64)라는 뜻이다.
보나티는 오후 5시가 조금 지나서, 가장 큰 암봉인 치마 그란데 정상에 이르렀다. 한글 번역본은 아름다운 마지막 단락을 반쯤 줄여 번역했다. 있는 대로 풀어쓰면, 다음과 같다. 정상에 섰을 때, 보나티는 “행복감에 젖어almost euphorid with delight”(영74, 불73, 독56) 있었다. “오후의 마지막 햇볕almost euphoric with delight...which was still lit by the last rays of the sun, encore éclairé par les derniers rayons du soleil, die von den letzten Sonnenstrahlen beleuchtet wird”(영74, 불73, 독56)이 정상을 비추고 있었을 때였다. 마지막 줄을 내려die letzten Seillängen, avoir effectué les derniers rappels, completing the last abseils을 때, “달빛이 비추고au clair de lune, by moonlight down, im Mondlicht, 月明りで”(영74, 불73, 독56, 일65) 있었다. 보나티는 달빛 속에서 치메 그란데 마지막 하강을 완료해 산장으로 돌아왔다. 이런 내용을 “달빛 속에 현수 하강을 계속하며 그날 저녁 론제레스 산장으로 돌아왔다”(한63)라고 줄여 번역하면 문장의 향기가 줄어 든다.
제4장의 맨 마지막 단락에서, “우리는 17시간 조금 지나 마지막 햇볕을 받고 있는 그로센 친네 정상에 섰다”(한63)에서, 17시간은 오후 5시 지나(“a little after five in the afternoon, un peu après 5 heures de l’après-midi, nach 17 Uhr”, 午後5時少過ぎ, 영74, 불73, 독56, 일65)의 오역이다. 3개의 암봉 가운데 마지막 등반이었던 ‘치메 그란데’, 보나티는 “마지막 햇볕을 받고 있는 정상”에 오른 후, “달빛 속에 현수하강rappels, abseils을 계속하며 그 날 저녁에 론제레스 산장으로 돌아왔다.”(한63) 앞서 언급한 것처럼, 론제레스 산장은 지금의 아우론조 산장이다. 독일어 번역본에서는 이 산장을 “Auronzo-Hütte”(독56)로 처음부터 끝까지 표기했고, 불어 번역본은 “le refuse Longeres”(불73)으로, 영어본은 “the Longeres hut”(영74)로, 일어 번역본도 “ロンジエレス 小屋”(일65), 모두 론제레스 산장으로 번역해서 실었다. 한글 번역본은 독일어 번역본과 달리, 처음부터 ‘론제레스 산장’으로 번역했다. 트레 치메에서 내려온 보나티는 이듬해 1954년 4월, 2차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시달리고 있던 이탈리아의 원정대 소속으로 K2봉으로 간다. 그곳에는 알피니스트의 위선과 과시 그리고 산악 권력이라는 알피니즘의 절망이 도사리고 있었다. 보나티는 이 때를 생의 중대한 전환점이라고 썼다. (2024.0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