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朝鮮) 명종조(明宗朝) 통정대부(通政大夫) 휘 계종(諱 繼宗) 선조님은 밀양임씨(密陽林氏)의 득관조(得貫祖)이시며, 부안임씨(扶安林氏) 전서공파(典書公派)의 파조이신 전서공 난수공(典書公 蘭秀公)의 육세손이시다. 통정대부(通政大夫) 휘 계종(諱 繼宗) 선조님은 강직하시고 외유내강의 성품을 가지신 어르신으로 전하여 진다.
2세인 휘 명서(諱 蓂瑞) 선조님은 조선 선조조에 밀양부사(密陽府使)이셨으며, 모친은 숙부인 전주이씨(淑夫人 全州李氏)이시다. 휘 명서(諱 蓂瑞) 선조님은 선대(先代)의 유훈을 받들고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에게 많은 칭송을 받았다고 구전된다.
3세인 통정대부 휘 윤석(諱 允錫)선조님은 조선 선조조 과천현감(果川縣監)으로 밀양(密陽)에서 이거(移居)하시어, 조선조 과천현 동면 양재리 역말(果川縣 東面 良才里 驛村)에 정착한 이래로 4백여 성상(星霜)의 세대를 거듭하며 집성촌(集姓村)을 이루고 있다. 선조님의 모친은 숙인 경주이씨(淑人 慶州李氏)이시다. 선조님의 선견지명으로 한양에서 가까운 역삼동에 세거하면서 중앙 정부의 문화와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었다. 그로 인해 오늘날 자손들에게 커다란 힘이 되었다.
밀양임씨의 집성촌인 서울시 강남구 역삼동 주변 지역을 살펴보면 북으로는 한강에서 10여리 정도의 거리이고, 남으로는 낙생(樂生)과 광주(廣州)를 이어주는 양재역(良才驛)이 있었으며, 선정릉과 헌인릉이 가까운 곳에 의하여 교통의 요지였다. 역삼동이라는 동 유래는 많이 알려진 말죽거리와 역말(驛村), 방아다리(方下교) 이 세 개의 동네를 합쳐 1914년부터 광주군 언주면 역삼리라고 하였고, 1963년대에 서울로 편입되면서 역삼동이라 불리었다. 밀양임씨의 집성촌의 역말(역촌 驛村)과 방아다리(방하교 方下橋)를 말한다.
전래의 선영인 감푸리(甘棠山)와 방아다리 솔개골은 현재의 테헤란로 전철 2호선 강남역과 역삼역 사이에서 양재동방향(남쪽)의 언덕부분의 골짜기에 있었으나, 서울의 광역화와 도시화로 인해서 1971년 강남개발과 함께 지금의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동원동에 임좌향(壬坐向)으로 선영을 이전하였다.
선조의 기본 정보 자료는 가승보에 의해 전해지다가 정유(丁酉 1957)년에야 부안임씨대동보(扶安林氏大同譜, 을미보, 1955년)를 간행한 후에 밀양파를 중보 간행하였고, 기해(己亥 1959)년에 임씨대동세보원편(林氏大同世譜元編, 편수 및 집행위원장 : 임지수) 옛 밀양관 부사공파로 합보 발행되었다. 그 후 2005년에 全國林氏中央會에서는 충절공을 1세조로 하는 팽성임씨로 하고, 각 관향은 종전대로 관향의 명칭을 사용하자는 의견이 있어 족보간행을 준비하고 있던 우리 밀양임씨는 그 의견을 따라“팽성임씨밀양관역삼세보”를 중보 출간하였다.
세보를 살펴보면 10세인 휘 내봉(諱 來鳳)은 영조연간에 중추부 동지사에 나가기도 하였으며, 10세인 휘 윤기(諱 允起), 제12세인 휘 백원(諱 伯元), 제13세인 휘 시영(諱 時榮), 휘 석록(諱 奭錄), 제14세인 휘 문환(諱 文煥)은 정조연간에 절충장군용양위부호군(折衷將軍龍陽衛副護軍)에 나아갔으며, 제14세인 휘 형진(諱 亨鎭)은 고종4년(1867) 정묘무과(丁卯武科)에 급제하였고, 자헌대부(資憲大夫)를 제수받기도 하였다.
요즈음은 도시화로 말미암아 전형적인 집성촌이 많이 해체되어 문화의 체상전승(遞相傳承)이 쉽지는 않으나, 그래도 성남시 분당구 동원동에 자리한 선영에서 묘사당(廟祀堂)에 소목을 모시고 세일사(歲一祀)등을 받들며 계대(繼代)간의 친화를 도모하고 있다.
또한, 임씨대종문(林氏大宗門)의 역사를 마음 깊이 인식하기 위하여 추증봉익대부(追贈奉翊大夫) 서하공(西河公) 휘 춘(諱 椿) 어른을 배향한 옥천서원(玉川書院)과 김포 묘제 등에 동참하거나 참배하고 있다. 그리고 전서공파의 파조이신 난수(典書公 蘭秀)공을 제향하는 세일사와 전국임씨중앙회, 부안 숭모제, 충남 연기 독락문화제 등에 동참하거나 참배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시절의 변화에 따라 상장의례(喪葬儀禮)의 변화도 있어 사설매장의 제한에 따라 선영의 묘사당에 별도의 납골봉안처를 마련하여 추세에 응하고 있다.
현재‘밀양임씨’는 집성촌인 역삼종문의 구성은 성인 250여명의 종원으로, 일가 1천 여명의 친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밀양임씨 전체 인구는 2000년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2,086명으로 확인된 바 있다.
2005년 11월 중보 출간한 “팽성임씨밀양관역삼세보”에는 우리 임문(林門)의 근원을 여실하게 새기고자 1세 충절공(忠節公) 한림학사(翰林學士) 휘 팔급(諱 八及)을 연원한 19세에 걸친 각 관향의 계보표와 밀양관의 중시조인 典書公 蘭秀의 六世孫인 밀양관 1세 휘 계종(諱 繼宗)에 연결하여 종문(宗門)의 역사와 현재를 한 눈에 볼 수 있게끔 밀양관 세보(世譜)에 실 었다.
또, 한편으로는 종문의 전승과 소통을 원활히 하기 위하여 세보의 부록으로 제례의식집(祭禮儀式集)을 실어 문화의 전통이 끊기지 않도록 각종 상장례와 제례의식의 시행 세부형식을 문서화하여 가시적 설명을 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