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극에 달한 피폐한 민생과 허물어진 사회기강, 광범위한 사회경제적 구조의 변화들이
조선후기에 실학사상이 발생하게 된 사회적 요인으로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그리고 17~18세기에 유입된 중국 실학의 영향과 중국을 통해 유입된
서학이 가져다준 새로운 세계상도 외적 요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 성리학이 전개 과정에서 드러난
성리학의 학문적 모순의 심화라는 학문 내적 요인도 실학 발생의 한 계기가 되었다.
실학자들에게 있어서 모든 이론은 현실을 설명함에 있어서 검증가능성이 있거나 생활상에 유용성이 있어야 한다.
검증될 수도 없고 생활에 유용하지도 못한 형이상학적 논쟁은 그들에게 흥미를 유발하지 못한다.
담헌과 다산과 혜강은 리기철학의 한계를 자각하고,
리기를 기존의 성리학자들과는 다른 의미의 맥락에서 사용함으로써
사실상 성리학적 패러다임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킨다.
실학자들은 리를 기의 현상에 내재하는 조리의 뜻으로 한정하여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실학자들은 지식관과 지식 탐구 방법에 있어서도 성리학자들과는 다른 입장을 취하였다.
전통적으로 성리학은철학과 윤리학, 정치하과 역사학 분야의 지식을 중시하였지만,
실학자들은 이들 분에야 국한하지 않고 탐구의 폭을 크게 확대한다.
그래서 다산은 인사 경제학·경영학·군사학·공학 등에 대한 폭넓은 지식의 탐구를 추구하였다.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는 박제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기존의 실학사상과 마찬가지로 진보적인 사상들을 설파했다.
절약이 아닌 소비와 무역을 해야함을 주장하거나
수도로 통하는 도로 건설, 신분제를 고착시키는 과거제 개정,
풍수지리와 같은 미신타파, 과학기술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 등
백성들의 삶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고 국가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것들을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