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규례와 법도를 왜 가르치시는가?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규례와 법도를 가르치고 있고 지켜 행하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규례는 계명, 율법등을 의미하고 법도도 역시 거룩한 율법, 선과 악을 판단하는 법도를 의미한다.
이 규레와 법도를 가르치는데 즉 뾰족한 막대기로 찌르듯이 부지런히 이러한 법도에 익숙해지고 노련해지도록 가르친다.
이렇게 가르치는 이유는 살기 위해서이다. 즉, 생명을 얻게하고 소성시키고 회복시키기 위해 서다. 여기서 '그리하면'은 히브리어로 목적을 의미하므로 '살기 위해서'라는 뜻이다.
그리고 순종할 때 우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차지하고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다. 이것은 침입하여 얻어내는 것과도 같다. 왜냐하면 내가 순종하기만 하면 차지할 수 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얻을 수 있다. 참으로 공평하다
(신4:1)
2. 하나님의 명령을 가감하지 말라
하나님의 명령에 무엇을 보태거나 빼지 말고 그대로 지키라고 말씀하고있다.
빼는 것은 명령을 줄이거나 감소시키거나 제거하는 것이다.
가감하지 말라에서 '말라'는 '결코 ~하지 말라, 결코 안된다'라는 강한 금지를 나타낸다.
우리는 더한 것이 없나? 크리스마스, 사순절, 매 첫째날 예배등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사실 첫째 날 예배하는 것은 성경에 6일 일하는 것을 어긴 것과 같으므로 정확히 말하면 일요일 예배는 계명을 어기는 것이다.
또한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령강림절은 성경과 다른 날 지킴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변개시킨 것이다. 또한 성경에 날짜를 바꾸어 임의로 정한 날에 예배한 여로보암의 죄를 짓는 것이고 그건 금송아지 우상숭배였다. 여로보암은 백성이 다시 르호보암에게 갈까봐 염려되어 짝퉁을 만들어 분리시켰다.
천주교는 사람들이 유대교로 가는 것이 싫어서 스스로 짝퉁을 만들지 않았을까?
또한 절기 예배는 다른 날에..
대속죄절, 월삭 예배등은 지키지 않음으로 명령을 제거한 것이다.
우린 이렇게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더하고 빼는 불손을 창조물이 저지르고 있다.
더 심각한 것이 있다.
율법은 이제 안지켜도 된다!라고 말한다.
이런 것을 바로 신성모독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과 유업을 위해 주신 것을 저주라 말하며 안지켜도 된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모독인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오해는 사도바울의 글을 오해함에서 온 것이다. (신4:2)
3. 선악에 대한 다른 가르침은 뱀의 철학이다.
하나님께서 강하게 금하신 것은 선악과를 먹는 것이었다. "결코 먹지말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강력하게 금하신 것처럼 결코 가감하지 말라 가감하면 죽으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감하면 여호와의 명령을 준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여호와의 명령은 신의 명령, 율법이다. 우린 창조물로써 조물주의 명령을 지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그러나 명령에 가감하면 다른 하나님이 된다. 왜냐하면 말씀이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선악과는 선과 악에 대해 하나님과 다른 가르침을 말한다.
하나님의 율법은 선이 무엇인지 악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해 깨닫게 하는 나무가 선악과가 아니라 선악의 개념을 반대로 뒤집는 이론이 선악과이다. 예를들어, 하나님의 율법을 악하다고 말하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을 선하다고 반대로 말하는 것이 뱀의 가르침이다. (창2:17)
4. 사단도 자신의 규례와 법도가 있다.
바알브올 즉, 태양신을 따르는, 사단을 따르는 모든 자들을 하나님께서 멸망시키셨다.
'따른다'는 것은 '함께 걷는 것'을 의미하며 '그처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만약 뱀의 가르침대로 행동함으로 동행한다면 우린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이 아니라 바알브올을 따르는 자들이다.
이와 같이 사단은 나름대로 규례와 법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여호와의 규례와 법도와 다르다. 여호와를 따르는 자들, 그래서 여호와의 규례와 법도를 따르는 자들은 약속의 땅에서 영원히 살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따르느냐 사단의 규례와 법도를 따르느냐 두가지 길 밖에 없다. 가감한다면 그건 더이상 여호와가 아니다. (신4:3)
5. 가치관이 바뀌면 거꾸로 보이기 시작한다
뱀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굉장히 지혜롭게 지음받았지만 그 지혜를 악하게 사용하여 간교한 짐승이 되었다.
뱀은 처음부터 사람과 여호와의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한 질문을 한다.
"정말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아무 나무 열매도 먹지 말라고 하셨어?"
벌써 뉘앙스는 하나만 뺀 모든 나무 열매를 먹게 하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아니라 하나를 금하신 것에 대한 원망과 비난의 어조를 느낄 수 있다.
아버지와 자녀사이를 이간질기 위한 계략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이때 전혀 눈치를 못챈 하와는 죽지 않기 위해 만지지도 말고 먹지도 말아야 한다라고 대답했다.
물론 만지지도 말라는 추가한 것이고 이를 통해서도 하나님을 향한 원망의 어조를 느낄 수 있다.
이때 바로 사단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 말이 있다.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즉, 하나님의 가르침과 반대이다.
정녕 죽으리라를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오히려 먹으면 하나님처럼 지혜로와 질 것이고 그것을 하나님을 질투하는 거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반대로 뒤집었다.
오히려 선악과를 먹으면 지혜를 얻게 될 것이고
하나님은 명령을 우리를 사랑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괴롭게하기 위해 주신 분이라고 다른 가르침을 주는 것이다.
이때 하와가 다시 그 열매를 보았다. 하와는 지금 마인드 컨트롤 되었고 세뇌되었다. 정말 그 열매가 먹을 만한 음식으로 보이기 시작했고 지혜롭게 될 거 같았다. 즉, 뱀의 가르침에 완전히 넘어가는 것을 보게 된다.
선악과는 이와 같이 선악에 대한 뱀의 가치관을 말하며 뱀의 법도는 하나님의 법도와 반대이므로 그 가르침을 따른다면 여호와의 법도를 결코 지킬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가감하지 말자. 짝퉁에 속지 말자 (창3:1~6)
6. 지켜 행해야 지혜로워지고 탁월해진다.
하나님께서는 법도를 지켜 행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여러 민족이 이렇게 인정할 것이다. 너희는 지혜롭고 지식이 있는 위대한 민족이라고...
여기서 지혜는 명철하고 재치있고 숙련되고 재주가 탁월한 것을 의미하며
지식은 깊이 깨닫아 알고 의미를 이해한 사람을 말한다.
뱀은 죄를 지으면 지혜로와진다고 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순종을 통해 지혜와 명철을 얻고 인정을 받게 된다고 말한다.(신4:6)
7. 하나님만 옳다고 생각하는 유대인 법정
유대인 법정에서 판사들은 어리고 경험이 없는 사람들부터 발언하게 한다.
어리다고 지혜가 없는 것이 아니다. 경험이 있다고 꼭 지혜가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누구든지 하늘로 부터 오는 지혜를 가질 수 있고 존중받아야 한다.
리더들은 항상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해야한다.
또한 리더가 틀렸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을 설득시킬 의무, 책임이 팀원에게 있다.
그러므로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기술은 최고의 리더쉽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다.
아무도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놓지 않는다.
자신은 틀릴 리가 없다. 자신에게 반대하는 것은 마치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과 같다라는 식의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은 만장일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만장일치는 분명 누군가가 심하게 조정 통제한 결과라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코 리더라는 이유로, 또는 목사, 예언자라는 이유로 자신은 틀릴 수 없다라는 비현실적인 교만을 가져서는 안된다.
이것은 자신을 우상화하는 것이고 사람들이 자신을 우상숭배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틀릴 수 있다. 언제나 옳으신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 우리가 사람임을 인정할 때 우린 모두를 존중할 수 있고 지나치게 높이지 않을 수 있다.
8 공의롭고 위대한 나라가 되는 이유는?
위대한 나라는 하나님의 모든 율법처럼 공의로운 규례와 법도를 가진 나라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모든 율법이 공의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따르는 자들이 위대한 성도이다. 그리고 이러한 위대한 성도들이 모인 곳이 위대한 나라이다.
율법은 히브리어로 토라이다. 토라는 물과 같이 흐르는 세상이 창조되고 돌아가는 자연 법칙이며 하나님의 교훈이고 가르침이다. 이 모든 토라는 공의이다. 율법이 저주라고 말하는 것은 불순종할 때를 말하는 것이다. 생명의 법은 순종할 때 생명이 되는 율법을 말하는 것이다. (신4:8)
9 하나님께서 성회로 모이게 하시는 이유
여호와께서 백성을 모이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샤밧때도 절기때도 백성에게 모이라고 명하셨는데 그 이유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을 배우게 하고 자녀를 말씀으로 가르치기 위함이다. (신4:10)
호렙산에서 세우신 언약 즉, 규례와 법도와 율례와 같은 모든 율법의 말씀은 조상들과 세우신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살아있는 우리와 세우신 언약이다. 왜냐하면 모든 율법은 여호와를 경외하게 하고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영원히 복받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 언약의 말씀은 그때 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를 위한 것이다. (신5:2,3,29)
10 왜 여호와께서 말과 문서로만 언약하셨는가?
우리가 호렙에 갔을 때 산에 불이 붙어 하늘 중심까지 닿았다. 또한 하나님의 말소리만 듣고 형상을 보지 못했다.
왜 하나님께서 말로만 명령하신 것일까? 왜 얼굴을 보이시지 않으셨을까?
우리가 만약 얼굴을 보았다면 그 모습에 집중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외모가 아니라 말에 집중하기 원하신 것이 아닐까? 외모가 아니라 공의를 추구하기 원하신 것이 아닐까? 그래서 형상을 보이지 않으신 게 아닐까? (신4:11,12)
11. 앞으로 형상이 큰 미혹이 될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불 속에서 이와 같은 명령을 하셨다. 아무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 (신5:8)
그럼에도 패역한 사람들은 십계명까지 빼면서 형상을 만들어 섬기고 있다.
그것은 명백한 우상 숭배이다.
예슈아의 형상이어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여호와의 형상은 섬겨도 괜찮았다면 모습을 당연히 보여주셨을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날에 어린 양같이 생긴 짐승이 나와서 말은 용처럼, 즉 불법을 말하고 가르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린 외모를 따라가서는 안된다. 메시아가 율법을 말하는지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준행하는지 여부로 분별해야한다.
이러한 미혹이 계시록 시대뿐 아니라 불법의 미혹이 항상 있기 때문에 우린 더더욱 형상에 집중하지 말고 법도에 따른 가르침과 삶에 집중해야 한다.
우린 외모와 이름에 속아서는 안된다. (계13:11,12)
12. 외모나 이름이 아니라 가르침으로 하나님을 알아야한다.
여호와께서 그분의 언약을 지키라고 명하시며 두 돌판에 십계명을 직접 친필로 써주셨다.
즉, 직접 계약을 하셨다. 그리고 동시에 규례와 법도를 가르치도록 명령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켜 행할 것은 십계명과 규례와 법도 즉, 모든 율법이다.
이때 여호와께서 불길중에 어떤 형상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어떤 형상도 만들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아무 형상도 보지 못했으므로 삼가 주의하여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바로 패역한 우리가 부패하여 여호와의 형상을 만들어놓고 우상 숭배할 까봐 하나님 자신의 형상도 보여주지 않으신 것이다.
오히려 불가운데 말씀하신 것은 교훈하시려고 즉, 마음을 개심시키시려고 말씀을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는 우리의 마음을 올바르게 바꾼다. (신4:13~36)
13. 예슈아께서 볼품없는 외모로 오셨다.
왜 여호와께서 그분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는데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는 아름다움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외모로 보내셨을까?
그래서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았고 거절당했으며 슬픔을 아는 자였다. 예슈아를 보면 못 본척숨고싶은 외모였으며 멸시받기에 적당한 모습으로 이 땅에 보내지셨다. 왜일까?
또렷한 이목구비로 멋진 풍채로 아름다운 자태로 사람들이 따르게 하기를 원치 않으셨다. 여호와께서는 내면에서 나오는 아름다움과 공의와 정의와 같은 진정한 것을 보고 따르는 사람들을 신부로 원했다.
그러므로 우린 외형에 속아서는 안된다. 이름에 속아서도 안된다. 중심에 있는 공의를 찾으시는 하나님처럼 우리도 공의로 하나님을 알아보고 참 메시아를 알아보는 자들이 되야한다. (사53:2,3)
14. 항상 이러한 마음을 품어라
불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보고도 살아있는 자가 누가 있겠는가? 바로 하나님께서 불가운데 주신 말씀이 성경이다. 그럼에도 살아있어 우리에게도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너무나도 두려웠다. 어떻게 우리가 그 위대하시고 온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살아있을 수 있었는가! 다만 모세에게 전해달라고 그러면 모두 듣고 행하겠다고 청했다. 여호와께서 그 말에 만족하셨다. 그리고 항상 이러한 마음을 품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두려워 하는 마음으로 여호와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여 너희와 자손이 영원히 복 받는 것이 당신이 원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이 원하시는 말씀일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우리가 영원히 복받기 원하신다.
복받는 방법은 형상을 따라가지 않고 이름에 속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법도를 지켜 행하는 그것이다. 다른 어떤 것도 필요없다. 오직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이다. 이 성경을 왜 우리에게 주셨겠는가? 지켜 행하라고 그러면 복이 될 것이고 우리도 자손도 영원히 복받을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복음이다. (신5:26~29)
15 모세가 우상숭배를 크게 우려하며 경고하고 있다.
모세는 예전 므리바 사건으로 진노하셔서 요단을 건너지 못하지만 그곳에서 결코 우상 숭배를 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사실 므리바 사건도 우상 숭배와 연관이 있다. (신4:20~23)
16.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가 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고 하면 물이 나와 모두가 풍성히 마실 수 있을거라 말씀하셨다.
그러나 모세는 "우리가 너희를 위해 반석에서 물을 내랴?"라고 말함으로써 물을 주는 사람이 마치 모세와 아론처럼 되었다. 여기서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을 책망하실 때 자신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다. 즉, 자신을 거룩하게 구별하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이다. 모세와 아론은 마치 자신들의 능력으로 물을 내게 하는 것 처럼 이야기함으로 여호와를 자신들과 구분하지 않았다. 구분하지 않은 것, 구별하지 않은 것이 하나님을 거룩하게 하지 않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과 같다. 즉,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 충성하지 않는 것은 그분을 나를 구분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이 은사로 하나님과 동일시 한다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고 자신을 우상화하는 것이며 모두 사람을 우상 숭배하게 만드는 죄이다.
모세와 아론은 바로 이러한 죄 때문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이 사건을 언급하며 우상 숭배를 강하게 경고하는 것이다. 우상 숭배는 형상을 섬김으로 가능해짐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나를 섬길 때 당연히 우상 숭배가 된다. 그러므로 사람을 섬겨서는 안된다. (민20:8~13)
17.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무엇인가?
거룩한 것은 바로 구별하는 것이고 구분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안식일을 다른 날과 구별하여 지키는 것은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런 이야기를 한다. 이날을 저날보다 낫게 여기는 사람도 있고 모든 날을 같게 여기는 사람도 있다고 말이다. 분명 성경적으로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구별해야 하므로 그 날이 다른 날보다 낫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건 무슨 의미일까? 구별하지 않아도 각각 마음으로 정하면 된다는 뜻일까? 그러면 샤밧이나 절기가 다른 날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도 상관없다는 말일까? 밑에 구절에 보면 번역하지 않은 구절이 나오는데 "날을 중히 여기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지 않고"이다. 절기와 샤밧을 중히 여기지 않는 것도 여호와를 위해 그럴 수 있다는 말일까?
이것은 음식을 설명하는 것에서 그 힌트를 찾을 수 있다. 음식에서 고기를 먹는 자와 채소를 먹는 자를 비교하고 있다. 여기에 모든 것을 먹는 자는 큰 믿음을 가진 자인데 돼지고기가 음식에 포함되었을까? 돼지 고기를 먹는 자가 믿음이 있다는 그런 말일까? 당연히 돼지고기는 음식이 아니므로 정결 음식중에서를 말하는 것이다. 이건 당연하다. 그러므로 날에 대한 것도 샤밧이나 절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외 날들을 비교한 거라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외 날들은 이름이 없이 그저 첫째날, 둘째날... 여섯째날이기 때문이다. 다른 날은 이름이 없지만 샤밧만은 구별된 이름이 있다. 그러므로 샤밧을 뺀 날들을 언급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롬14:1~6)
18. 출애굽과 같은 위대한 일을 행한 신이 또 있는가?
세상을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돌아보면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살아있던 민족은 없었다.
또 어떤 신도 열가지 재앙을 내리는 이적과 기적을 보이시고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의 역사와 그 많은 백성을 애굽에서 데리고 나와 나라를 세우시고 2000년동안 사라진 나라를 하루만에 세우신 하나님은 여호와 외에 아무도 없다. 어떤 신이 이런 위대한 일을 행하였는가? 아무도 없다. (신4:32~34)
19. 위대한 일을 행하신 이유가 있다.
이러한 위대한 일들을 행하신 이유는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이 없음을 알리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우린 더욱 여호와밖에 다른 신이 없음을 마음에 새기고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켜야 한다. 그러면 우리와 후손이 약속의 땅에서 영원히 복을 받을 것이다. 우리가 믿는 신의 법도를 행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는 우리로 하여금 복을 받게 하고 살게 한다. 이러한 위대한 보화와 같은 말씀은 어디에 보관하는가? 마땅히 지극히 거룩한 곳 바로 지성소에 율법이 보관된다. 물론 거룩한 것이기 때문에 아무나 접근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긍휼의 자리에 함께 있다. (신4:35~40)
20. 그렇다면 왜 우린 예슈아가 필요한가?
분명 여호와께서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고 말씀하셨다.
또한 예슈아의 메시아 사역은 우리를 자유케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산위 불 가운데 오셔서 대면하여 말씀하셨다. 물론 우린 얼굴을 보지 못했다. 여호와께서 보여주지 않으셨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얼굴을 보며 대면하셨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대면하시면서 나외에는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예슈아께서 율법을 모두 이루셨기 때문에 다른 신을 둔다고 해도 예슈아로 구원받는다.
아무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하셨다.
이것도 예슈아께서 모두 이루셨기 때문에 형상을 만들지 말라라는 계명에서 자유해졌다.
이제는 형상을 만들어도 된다.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말씀하셨지만 예슈아께서 다 이루셨고
살인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라하셨지만
어짜피 우린 계명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예슈아께서 오셨고
계명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것이 아니라 예슈아를 믿고 그 이름으로 간다
도둑질하지 말고 거짓 증거하지 말고 탐내지 말고 이러한 율법도 예슈아께서 다 이루셨다.
정말 그럴까?
정말 예슈아께서 이땅에 오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지 않아도 복받게 하려고 오신 것일까? 여호와의 멍에를 벗고 죄의 멍에를 지라고 예슈아께서 오신 것일까? 그렇다면 성경을 모두 다시 써야한다.
만약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지켜야만 복을 받을 수 있다면 그런데 안지켜져서 고민인 우리에게 하나님은 왜 예슈아를 보내시겠는가? 지키지 말라고 보내시겠는가? 지킬 수 있게 도와주려고 보내시겠는가?
21. 예슈아께서 오신 이유는 법을 새겨서 행하게 하기 위함이다.
예슈아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그날에는 하나님의 계명을 우리의 마음판에 새겨서 순종하게 해주시겠다고...
하나님의 영인 성령이 하는 일은 분명 율례와 규례를 행하게 하는 것이다.
성령은 우리로 하나님을 알게 하고 사랑하게 하여 계명을 행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이것이 여호와와 예슈아와 성령이 하나인 이유이다. 한 진리만을 이야기 하기 때문에 하나인 것이다.
우린 불법의 종 예슈아를 따라가면 반드시 어린양의 뿔을 가진 짐승을 만나게 될 것이다.
예슈아께서는 불법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죄를 없애려고 오셨다.
예슈아께서는 반드시 우리가 살아낼 수 있게 하실 것이다.
샤밧 예배: 토요일 10시 30분
헌금 계좌: 농협 301 0293 8190 01 레올람토라
대전시 동구 가양동 39-11 2층 레올람 토라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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