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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 나눔 세리를 긍휼히 여기신 예수님
노베 추천 5 조회 240 24.06.20 07:18 댓글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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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24.06.20 08:15

    첫댓글 제목이 좋아요. 정확히 말하면 세리일지라도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회개하며 예수께로 나아오는 자들이니 긍휼히 여김을 받은 것이겠죠.

    복음의 끝판왕은 주님이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라고 샹각합니다.

  • 작성자 24.06.20 10:01

    네, 공감합니다.

  • 24.06.20 08:28

    "세관"은 어느 시대에서나 가혹한 세금 징수와 부당한 토색으로 유명한 곳이었고, 당시에는 그런 일로 특히 더 악명이 높았다. 그리스도께서 마태를 택하셔서 그가 있던 곳에서 나오게 하여 자신의 권속으로 삼으실 뿐만 아니라 사도의 직분으로 부르시는 것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놀라운 예를 본다.
    -------------------------------
    <마 9:9. 예수께서 ...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세관"은 어느 시대에서나 가혹한 세금 징수와 부당한 토색으로 유명한 곳이었고, 당시에는 그런 일로 특히 더 악명이 높았다. 그리스도께서 마태를 택하셔서 그가 있던 곳에서 나오게 하여 자신의 권속으로 삼으실 뿐만 아니라 사도의 직분으로 부르시는 것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놀라운 예를 본다. 그리스도께서 단순하고 무지한 자들을 택하셔서 사도로 삼으신 의도는 “이 세상의 지혜”를 무너뜨리시기 위한 것이었다(고전 2:6). 그러나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하고 많은 악행들로 얼룩진 직업을 택하여 생활해 온 이 세리가 그리스도에 의해서 택함을 받은 추가적인 이유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이 세리를 그리스도의

  • 24.06.20 08:29

    무조건적인 선하심을 보여주는 본보기로 삼으시고, 이 세리를 통해서 우리 모든 자들이 부르심을 받는 것은 우리 자신의 의(義)에 의한 공로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그리스도의 인자하심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마태는 증인이자 전도자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은혜의 증거이자 예시(示)였다. 마태는 자기가 받은 그리스도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증언하기 위해서, 그가 부르심을 받기 이전에 어떤 일을 행하였는지를 기록하여 대대로 전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음으로써 자기가 감사하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바울도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라고 말하였다. 마가와 누가가 마태를 "레위"라고 부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레위라는 이름이 그의 본명이었고, 그가 세리가 되면서 "마태"라는 외국식 이름을 갖게 되었던 것 같다.

    『칼빈주석: 공관복음』, pp.391~392.

  • 작성자 24.06.20 10:05

    @장코뱅 죄인을 그냥 제자가 아니라 사도로 부르신 것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잘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 24.06.20 08:31

    <마 9:9. 나를 따르라.>
    그리스도께서 마태에게 그가 왜 그리고 어떤 조건들 위에서 부르심을 받게 되었는지를 자세하게 설명하셨을 것임을 의심할 이유가 없다. 이것은 누가가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눅 5:28)고 말하고 있는 것에 의해서 한층 더 분명하게 확인된다. 왜냐하면, 만약 그리스도께서 사도직을 염두에 두고 마태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단지 일개 제자로 부르신 것이라면, 마태가 “모든 것을 버릴" 필요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태가 아주 기꺼이 그리고 열심을 품고서 순종하는 모습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지닌 신적인 능력을 본다.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 모든 자들이 그들의 가슴속에 동일한 감화를 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람을 하나의 두드러진 모범으로 삼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부르심이 결코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고자 하셨다.

    『칼빈주석: 공관복음』, .392.

  • 작성자 24.06.20 12:58

    일반 제자가 아닌 사도로 부른 이유를 합리적으로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O.K.

  • 24.06.20 08:34

    <마 9:11.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서기관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공격하는데, 얼핏 보면 천하고 수치스러운 것 같이 보이는 일을 트집잡아서 그리스도를 책망하여, 제자들로 하여금 그에게 반기를 들도록 부추기고 충동질을 한다. "너희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서 물러나서 더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를 너희의 선생으로 모실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 아니냐? 그런데도 정반대로, 그는 너희를 단정하고 무난한 삶에서 이끌어 내어서 불경건한 방탕한 삶으로 이끌고, 악한 자들과 어울리게 하여 너희를 더럽히고 있지 않느냐?" 심지가 굳지 못하고 무지한 제자들이었다면, 그들은 이러한 질책에미혹이 되어서 얼마든지 그들의 선생을 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중상모략에 제대로 대처할 수 있는 준비가 그들에게 갖춰지지 않은 것을 알았기 때문에, 서기관들의 항변을 그들의 선생께 고함으로써, 적절하게 행동을 하였고, 그리스도께서는 서기관들의 항변을 반박하심으로써, 장래를 위하여 자기제자들을 더욱 견고히 세우신다.

    『칼빈주석: 공관복음』, pp.393~394.

  • 작성자 24.06.20 13:16

    예수의 이름 뜻이 이미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입니다.

  • 24.06.20 16:08

    @노베 아멘!

  • 24.06.20 08:37

    <마 9:12.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그리스도의 대답을 보면, 서기관들이 두 가지 잘못을 하였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즉, 그리스도의 직임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 그들의 첫 번째 잘못이었고, 자신의 악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서 교만하게도 자기를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을 멸시한 것이 그들의 두 번째 잘못이었다. 이 두 번째 잘못은 우리가 특히 유의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언제나 우리 가운데 널리 퍼져 있는 병이기 때문이다. 외식하는 자들은 그들 자신의 의(義)에 대한 어리석은 자만과 자기만족에 빠져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목적을 생각하지 않고, 인류가 빠져 있는 저 깊은 악(惡), 또는 모든 사람 위에 놓여있는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진노와 저주, 또는 인류를 내리누르고 있는 저 축적된 악들의 무게를 시인하지 않는다. 그 결과, 그들은 너무나 우둔하게 무감각하게 되어서, 사람들의 참상을 느끼지도, 그 치료책을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좋게 여기고 스스로 자만하여, 그들이 죄인들과 동일하게 취급되는 것을 그들에 대한 부당한 처사라고 여겨서 참지를 못한다. 우리 주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다"고

  • 24.06.20 08:38

    말씀하심으로써, 이 두 번째 잘못을 슬쩍 건드리신다. 이것은 그들이 죄인들을 보고서 마음에 거리낌을 느끼는 이유는 그들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기 때문임을 보여주시기 위한 반어법적(反語法的)인 말씀이다: "너희는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병든 자들을 멸시하고, 그들을 보면 마음에 거리낌을 느끼고, 그들을 보면 견딜 수 없어 한다. 그러나 의사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는 아주 판이하게 다를 것임에 틀림없다.” 나중에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죄인들을 부르기 위하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으셨기 때문에 "의사의 직무를 다해야 하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말씀을 책망으로 시작하지만, 그의 가르침을 제대로 받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가 두 번째에 놓으신 구절을 무엇보다도 가장 우선적으로 깊이 숙고하여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을 다시 살리시고, 죄가 있어서 정죄를 받은 자들을 의롭다고 하시며, 부정(不淨)한 것들로 온통 더럽혀진 자들을 깨끗이 씻기시고, 길을 잃어버린 자들을 지옥에서 건져 내시며, 혐오스러운 악행들로 못쓰게 되어 버린 자들을 새롭게 만드셔서 저 복된 영생을 얻게 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이것이 그의 직임이자

  • 24.06.20 08:39

    그가 오신 목적이라는 것을 깊이 숙고하고, 이것이 그가 우리의 육신을 입으신 이유이자 그가 피를 흘리신 이유이자 그의 죽음으로써 희생 제사를 올리신 이유이자 지옥에까지 내려가신 이유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그가 가장 극악무도한 자들이었던 자들, 수많은 죄악들로 뒤덮여 있던 자들을 불러 모으셔서 구원을 베푸신 것을 결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혐오스러워 보이는 자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라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친히 희생제물과 저주가 되신 이유가 그의 손을 저주받은 죄인들에게 뻗치시기 위한 것이 아니면 무엇인가? 그런데도, 우리가 악한 자들과 함께 세례와 성찬에 참여하는 것을 꺼려하는 마음이 있고, 그들과 어울리는 것을 우리에게 일종의 흠이 되는 일이라고 여긴다면, 우리는 즉시 우리 자신 속으로 내려가서, 우리 자신이 눈감아 주고 있는 우리 자신의 악들이 없는지를 꼼꼼히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우리 자신을 살피게 되면, 우리는 가장 더러운 자들과 함께 같은 샘에서 씻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모든 불경건한 자들에게 차별 없이 주시는 의(義)와,

  • 24.06.20 08:39

    죽어 있는 자들에게 주시는 생명(生命)과, 길을 잃어버린 자들에게 주시는 구원(救援)을 거부하지 않게 될 것이다.

    『칼빈주석: 공관복음』, pp.394~395.

  • 작성자 24.06.20 16:35

    @장코뱅 차별 없이 주시는 의와 무조건 선택의 논리가 잘 어울릴 수 있는 설명 같습니다.

  • 24.06.24 17:24

    @노베 공감합니다.

  • 24.06.20 08:42

    <마13.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이 말씀은 서기관들의 교만과 외식을 책망하기 위한 것이지만, 일반적으로도 아주 유익한 교훈을 담고 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우리의 죄악들을 인식하고 그 짐 아래에서 고통하고 신음하면서 겸손히 그리스도께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에게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또한, 여기에는 연약한 양심들을 확고한 신뢰로 끌어올리기에 적합한 교훈이 들어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부르시기 위하여 그의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것이어서, 그가 죄인들을 거절하실 것이라고 염려할 이유가 우리에게는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회개시키리라"는 표현에 주목하여야 한다. 이 표현의 의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죄사함을 베푸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우리의 죄들을 품고 살아가게 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우리 속에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임을 알게 해주시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조건 하에서 우리를 아버지 하나님과 화목하신 것이기 때문에, 그의 피로 구속받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참된 제물로 드릴 수 있는데,

  • 24.06.20 08:42

    이것에 대하여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게" 하셨다(딛 2:11-12).

    『칼빈주석: 공관복음』, pp.396.

  • 작성자 24.06.20 16:22

    @장코뱅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게 하시는 것은 성화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 24.06.20 15:18

    익히 다 아는 내용 같지만 쉬운 주석이라도 이렇게 한땀 한땀 읽으니 수박 겉핥기식이 아니라 확실히 더 많은 정보를 얻게 되어서 좋습니다. 예수께서 세리와 창기를 왜 한통속으로 취급하셨나 하는 물음에 답을 주네요.
    이스라엘 속에서 이미 사람 취급을 못 받던 대표적인 그룹으로서 죄인 중에서도 더 중한 죄인들이었기 때문이죠. 이러한 값어치 없는 죄인들도 예수님의 구원의 대상이 된다는 것, 또 마태와 삭개오 같은 사람들은 스스로 죄책감에 많이 눌려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복음을 더 간절하게 받고 확실한 회심을 통해 구주를 영접하였다는 사실에 예수께서 주목하신 것이죠.
    이들의 이야기가 귀감이 됩니다. 삭개오는 토색한 것이 있다면 5배를 갚겠다고 선언함으로써 율법의 명령도 준수하는 것을 보여주는데요. 신자의 회심이 어때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 24.06.20 16:19

    좋은 댓글에 공감하며 배웁니다.

  • 작성자 24.06.20 16:26

    코람데오님의 좋은 댓글에 매우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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