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2023년 10월 27일/연중 제29주간 금요일 강론 모음
로마 7,18-25ㄱ 루카 12,54-59
두 개의 나, 내 안의 나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로마서 7장 18절 이하 참조)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을 요즘 말로 요약하면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다는 또는 두 개의 내가 있다는 말이고,
그래서 자아의 분열은
누구에게나 어떤 식으로든 있다는 말입니다.
이에 대해 저의 이론은 이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의식과 무의식이 있고,
우리의 의지에는 의식적 의지와
무의식적 의지가 있습니다.
그러니 두 개의 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내 안에는 지금까지 형성된 나와
되고 싶은 내가 있는데 수십 년에 걸쳐 형성된
내가 마음먹었다고 바로 되고 싶은 내가 될 수 없기에
형성된 나와 되고 싶은 나 사이에 분열이 있게 됩니다.
사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고 하는 우리 속담처럼
어렸을 때 형성된 것은 좀처럼 바뀌지 않습니다.
1987년 제가 일본에 처음 갔을 때
교또에는 코리안 센터가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한일간의 왕래가 많지 않았기에
그때 미사는 오래간만에 한국에서 온 신부가
교포들에게 우리말로 드리는 미사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제가 강론을 하는데
할머니들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제 강론이 감동적이서가 아니라
한국말 강론이었기 때문이지요.
왜 그렇게 생각했냐면
미사가 끝나고 담소를 나누는데
일본말은 잘하시지만
우리말은 잘못하시는 거였습니다.
그러니까 오랫동안 안 해서
우리말을 잘하지 못하지만
알아듣는 것은 좀 할 수 있는데
그것이 마음에 와닿은 것이었지요.
그런데 정작 놀란 것은
그런 분들이 치매에 걸리면
어떤 분은 일본말을 싹 잊어버리고
잘 못하는 우리말만 해서
아파 병원에 가면
통역이 필요하다는 거였습니다.
이처럼 어렸을 때 배운 말과
엄마가 해준 음식이 우리 안에 깊이 박혀 있고,
그렇게 형성된 습관과 기호와 인식과 의식이
나를 형성하고 있기에 그런 나는 쉽게 바뀌지 않고
이렇게 저렇게 하려고 해도 잘 안 되는 거지요.
게다가 제가 그저께 우리 안에는
이성과 감성과 의지가 있고
감성이 상선을 쫓지 않으면
욕망이 하선을 따르게 된다고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아무리 이성이 진리를 따라야 한다고 하고
의지가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고 해도
오랫동안 욕망을 따라 산 사람이
오늘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듯
이성의 법을 따르기 쉽지 않은 건 당연하지요.
그러니 그저께 이미 말씀드렸듯이
지상선이신 하느님을
프란치스코처럼 체험하기 전에는
그리고 시편 말씀처럼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깨닫기 전에는 아무리 애를 써도
우리는 두 개의 내가 싸울 수밖에 없고
하느님 체험을 했다 해도 그 좋으심에
깊이 맛들이기 전에는 두 개의 내가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바오로 사도는
두 개의 내가 있는 것 때문에
자신이 비참한 인간이라고 하면서도
결론처럼 이렇게 얘기하지요.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인성 면이나 성덕 면에서
바오로 사도보다 뛰어난 사람이 아니고
그래서 주님을 따르는 한 두 개의 내가
싸우는 것은 피할 수 없는데
이 싸움을 포기하겠습니까,
구원자 주님의 도움으로 계속하시겠습니까?
ㅡ 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ㅡ
************************************************************************************************************
오상선 바오로 신부
2023년 10월 27일/연중 제29주간 금요일 강론 모음
로마 7,18-25ㄱ 루카 12,54-59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 내면을 돌아보도록 이끄십니다.
"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를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루카복음 12장 57절)
예수님의 한탄에 귀를 기울입니다.
자연과 세상 일에 대해서 짐짓 아는 체하면서
막상 지금 어느 "때"가 도래했는지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귀를 막은 이 세대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성령의 빛으로 자기네 역사를 통찰하면
예언자들이 남긴 하느님의 말씀이
완성에 이르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을 겁니다.
이방 민족들의 연이은 점령과 흥망성쇠,
유배와 귀환, 동방 박사와 세례자 요한의 출현 등등,
그리고 이 모든 사건을 거쳐
이제 이스라엘은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오셔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백성들을
생명의 나무 아래로 모으고 계심을
눈앞에서 보는 중입니다.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환경이나 능력 탓에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하는 무지는 죄가 되지 않지만,
스스로 진리를 거부하는 완고함은 다른 문제입니다.
그런 이들은 올바른 일을 판단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애써 외면하는 것이지요.
보지 않으려는 눈, 듣지 않으려는 귀,
열지 않으려는 마음은 그 앞에서
아무리 진리를 외친들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진리가 자기 영광과 이익에 털끝만큼이라도
손실이 될 것 같으면 모르쇠가 되어 버리기 일쑤지요.
예수님 당시 종교 기득권자들은 걸핏하면
예수님께 율법과 관습의 잣대를 들이대며
그분의 정당성을 폄훼시키려 애썼고,
예수님은 그들을 "위선자"라 부르셨습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인간 실존 안에
깊이 배어 있는 죄성을 들려 줍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로마서 7장 18절-19절)
진지하게 영성 생활에 들어선 이들이라면
깊이 공감하는 내용일 겁니다.
예수님께서 사신 것처럼 살고자 용기를 내보지만
그보다 자신 안에 스멀대는 욕정과 탐욕,
자기애와 이기심,
자기 영광의 유혹과
타협하는 게 더 쉬울 때가 많지요.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로마서 7장 22절)
하지만 원래 하느님의 모상인 우리의 영혼은
"하느님의 법"을 사랑하고 이끌리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우리 영혼에 스며든 "죄의 법" 곧 "죽음의 법"이
더 손쉽고 가까우며 자극적이기까지 한 건 사실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거짓 속에서 진리를 향하려고
고개를 드는 용기는 더욱 가치있고 귀합니다.
어둠 속에서 빛을 향하는 것,
두려움 속에서 믿음을 붙잡는 것,
절망 속에서 희망하는 것,
우리 육 안에 자리한 죄와 죽음의 법에
절연을 선언하고 선과 생명의 손을 잡는 결단은
참으로 거룩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서 7장 25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자연의 징조 못지 않게 주님의 "때"를 깨닫고
생명의 나무인 그분 십자가 아래로 모여든 이들입니다.
그분과의 사랑의 관계가
세상적 욕망을 채워주지 못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죄의 법이 아닌 주님의 법을
선택했기에 주님 곁자리를 떠나지 않는
충실한 벗들이지요.
나약한 죄인인 우리가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길은
지긋지긋하게 달라붙는 죄의 짐을 직시하고
벗어버리면서 지치지 않고
주님께 돌아서는 것뿐입니다.
인간으로 살아가는 이상,
욕정과 탐욕, 자기 영광의 죄성을
완전히 탈피할 수 없지만,
그보다 더 끈질기게 죄와 죽음에서
승리하신 예수님을 선택할 수는 있으니까요.
각자 자신의 영혼 안에서
거룩함의 영역을 넓혀 나가시길 기원합니다.
죄에 떨어지는 회수보다 한 번 더 주님을 선택하고
또 그게 거듭거듭 쌓이면 가능한 일입니다.
이 세상에 흐르는 주님의 섭리에 따라
영의 생명을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ㅡ 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ㅡ
****************************************************************************************************************
이병우 루카 신부
2023년 10월 27일/연중 제29주간 금요일 강론 모음
로마 7,18-25ㄱ 루카 12,54-59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루카 12장 56절)
'이 시대?'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날씨의 변화에 대해서는 민감하면서도
이 시대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둔감한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위선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시대'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에 대해
둔감한 위선자들이 살아가고 있는 지금
우리의 시대인 21세기이자, 삶의 자리이며,
더 근본적으로는 카이로스(kairos),
곧 '예수님의 시간(시대)'을 의미합니다.
흐르는 물과 같은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유한한 존재로서 결코 피할 수 없는
죽음과 영원한 생명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시간'은 너무나도 중요하고
소중한 시간으로 다가옵니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마태오 7장 23절)
예수님의 이 말씀은 불법을 일삼는 자들,
예수님의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들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만약,
마지막 때인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보며
심판을 받아야 할 그 때에 내가 이런 말씀을 듣는다면
얼마나 서글퍼질까?
그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에' 갇혀 있고,
'대장동에' 갇혀 있고,
'대통령 선거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모두가 '부동산 전문가' 같고,
모두가 '정치 평론가' 같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복음의 기쁨'을 통해
정치와 선거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권고하셨지만,
그것은 '하느님의 나라 건설'과
'하느님의 정의 실현'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말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로마서 7장 19절)
우리를 죽음으로 이끄는 것에 너무 관심을 두지 말고,
우리를 생명으로 이끄는 것에
더 관심을 두면서 살아가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ㅡ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