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의 나라 조선
'그 나란 참 신비했다. 각각 사람들이 쓰고 있는 모자도 저마다 달랐다'
'마치 모자의 나라를 연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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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모자가 생겨나게 된 배경
조선의 모자.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좁게는 갓과 같은 대표적인 것 부터 넓게는 투구와 망건 등 까지 조선시대 모자는 신분과 그사람의 직위를 상징했다.
갓을 쓰면 선비, 정자관을 쓰면 대감, 관사모를 쓰면 대신, 익선관을 쓰면 왕 등으로 그 사람의 직급을 표현하는 것과
학생이면 유건, 나그네면 삿갓, 장사꾼이면 패랭이 등과 같이 신분을 상징하는 것
실내에선 탕건, 밖에서는 갓 과 같이 실외와 실내를 구분 짓는 것에서도 사용했다.
즉 모자는 조선시대 유교라는 법도 하에 자연스레 발생되였고
신분, 직급, 구분과 같은 부문에서도 나뉘어 사용되게 된 것이다. 그럼 과연 조선의 모자는 뭐가 있을까?
왕, 한나라의 지존
왕은 한 나라의 지존이다. 따라서 의복도 그에 걸맞게 화려하게 짜여졌다.
다들 왕이라 하면 눈부시게 화려한 옷을 입고 금관을 쓴 서양의 왕을 생각한다.
하지만 조선의 왕은 빨간색과 용이 수놓여진 곤룡포를 입고 면직물로 만들어진 익선관을 착용한 뒤 정사를 보았다.
조선왕실에서 금은 왕의 옷에 수놓여진 용을 수놓는 것 외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백성을 겸허히 여기는 왕실의 태도는 아니였을까?
임금이 처리하는 일을 만기라 한다. 만가지 일이라는 뜻이다. 그러하다면 임금은 수 많은 예식을 치를 것이다.
그에 걸맞는 모자는 뭐가 있을까?
정무를 볼 때
- [사진] 영친왕 익선관
정무를 볼때 왕은 익선관이라는 모자를 착용한다. 면직물로 짜여졌다.
뒤에는 매미의 날개를 본따 만든 두 익(翼)이 하늘로 뻗쳐있고 그 아래로 선이 타고 내려와
모자의 하단부 정중앙에서 그친다.
조선초기, 조선왕실에서는 익선관을 쓰지 않고 따로 정무관을 착용하고 익선관이 아닌 절상건이라 부른다.
하지만 조선 세종대왕 때 중국 황실에서 면복과 함께 이 정무관을 익선관으로 명명하여 끼워 보낸 뒤로
익선관을 정식적으로 착용하게 된다.
사적인 일, 과거
- [사진] 세종대왕 익선관
이것은 조선 초 세종대왕의 익선관으로 최근에 발견된 유물이다.
이렇듯 조선 전기, 명나라에서 익선관을 내리기 전까지는 익선관을 거의 착용하지 않았다.
태조 어진에서 볼 수 있는 익선관은 당대에 어진을 그리기 위하여 잠시 착용했을 뿐이다.
따라서 세종대왕 익선관과 같은 '만(卍)'자가 수놓여진 모자를 착용했고
중국에서 익선관을 내려준 뒤로 부터는 사적인 일에 주로 착용되였다.
국가 행사시
- [사진] 면류관
왕은 행사시 무슨 모자를 착용했을까? 바로 넓은 상판에 원기둥과 같은 모자를 이어 붙인뒤,
길게 옥을 늘어뜨린 모자를 착용했는데 이를 면류관이라고 한다.
국가에 존엄한 행사가 치뤄질때 면복이라는 검은 행사복을 입고 왕은 이 모자를 착용했다.
면류관은 조선 세종때 편찬된 '고려사'에서 그 모습을 처음 드러낸다.
앞에 드리운 옥은 왕이 눈이 밝음을 경계하는 차원임과 동시에 왕을 보는 사람들에 대하여
경건함을 가지게 하기 위함이였다.
대신, 나라의 존망을 좌지우지 하는 사람
대신들은 왕궁에 앉아 왕을 보필하고 지혜를 나누어 왕과 함께 나라를 이끌어가는 사람을 말한다.
따라서 그에 걸맞는 모자가 필요했다. 지식을 나눈다는 뜻에서 날개를 옆으로 뻗힌 형태의 모자.
그런 모자를 '사모'라고 한다.
정무를 볼 때
- [사진] 조선시대 사모,
조선 초, 사모는 양 날개를 끈처럼 어깨 앞으로 늘어뜨린 형태였다.
하지만 명종조에 이르러 양옆으로 뻗치게 하였으며 중기를 지나면서 부터는 모자가 대단히 높아지며
날개 또한 거의 수평에 이르렀다.
이를 착용한 대신들은 조선의 궁궐에서 정무를 논했다.
하지만 이는 평민 또한 착용할 수 있었다. 바로 혼례를 치를 때다.
현재도 전통혼례시 이 사모를 쓴다.
예식을 치를때
u
- [사진] 금관
궁궐에서 왕과 함께 국가 예식을 치를때 신하들이 착용한다.
금테 사모라고도 명명하며 둥근 테와 망건을 이어붙인 형상이며 비녀를 모자 중앙으로
관통하게 한 뒤 그 끝으로 술을 달아 경건함을 더했다.
주로 즉위식과 가례 등에 사용되였다.
집 안에서
- [사진] 조선 중기 탕건
위 형태와 같이 말총으로 꼼꼼히 짜여진 관을 탕건이라 한다.
오직 관직에 오른 사람만이 착용할 수 있었고 망건을 머리에 두른 다음 착용했다.
우리는 벼슬에 오르는 사람들을 보고 '감투 쓴다'라고 표현한다. 이는 곳 관직자만 쓸 수 있던
탕건에 대하여 비유한 것인데 감투란 말은 앞에 턱이 없고 밋밋한 모자로 이 말 뜻과는 사뭇 다른다.
탕건은 따로 목침을 만들어 놓고 쓸 정도로 몸에 두고 사용했다.
즉 공적인 일에서 벗어나 집으로 오면 이 탕건을 쓰고 일에 열중했던 것이다.
사대부와 양반, 조선의 기둥
고려말, 신진 사대부라는 세력이 등장한다.
그리고 고려가 역성혁명으로 무너지고 조선이 건국될 때, 사대부는 이성계를 중점으로 큰 기둥이 되였다.
그리고 조선의 정치와 사상을 계승하여 나간다. 사대부는 조선의 뿌리가 되였고
덕분에 592년 전주이씨 왕조라는 단일 왕조로 세계 최장수 왕조를 기록하게 된다.
그러한 사대부는 어떤 모자를 착용했을까?
평상시
- [사진] 정자관
위와 같이 생긴 모자를 정자관이라 한다.
원래는 중국제 모자이다. 북송때 정자라는 사람이 처음 착용하여 정자관 또는 정자건으로 불렸다.
사대부와 양반 혹은 훈장들이 평상시에 착용했던 모자이다.
다른 모자인 동파관과 충정관 등도 착용되였다. 이 세 모자 중 각기 취향대로 골라 착용했는데
가장 대중적으로 착용된 모자가 정자관이였고 동파관과 충정관은 널리 사용되지 않았다.
망건을 쓰고 탕건을 쓴 뒤 착용했는데 위는 트여있다.
또한 직급이 높은 사람일 수록 층계가 많은 것을 썼는데 정자관 최고 높이는 3층이다.
- [사진] 동파관
위와 같이 생긴 관을 동파관이라고 한다.
네개의 덧판을 가운대로 정육면체 꼴의 사각기둥형 모자를 부착하여 만들며 위는 트여 있다.
역시 정자관과 같이 평상시에 통용되던 모자였다.
- [사진] 충정관
정자관과 동파관과 함께 사대부와 양반의 대표적인 실내모자이다.
말총을 엮어 만들었으며, 위와 아래가 트여있고 4방형이다.
근세 조선에서 문무백관이 주로 즐겨 썼다.
- [사진] 사방관
관직자 사이에서 인기 많았던 사방관이다.
지방에서 각기 다른 모습을 띄고 있으며 주로 연로한 관리가 실내에서 착용한 네모 반드한 관모이다.
외출 시
- [사진] 갓
우리들이 선비와 양반하면 떠올리는 그것 바로 갓이다.
말총으로 만들어 졌으며 홑으로 짜여진 갓과 겹으로 짜여진 갓이 있다.
망건을 두르고 상투를 튼 뒤에 착용하였으며 성인 나이가 되어야 비로소 착용할 수 있었다.
갓은 여러종류가 있다. 갓의 종류를 한번 살펴보자.
- [사진] 흑립
갓은 한자로 '립(笠)'을 쓴다. 위의 사진은 흑립이라 한다.
검은색 갓이란 뜻으로 성인 남성이 주로 착용했다. 일반 갓보다 챙은 넓고 모자 부분은 두툼하며 낮다.
외출모로 사용되는 한편 접대용으로도 쓰였다.
- [사진] 백립
백립은 흰 갓이란 뜻이다. 현재 사람이 죽으면 검은 옷을 입는다. 하지만 과거에는 흰색을 입었다.
하지만 국상을 제외하고는 짚으로 옷을 엮은 상복을 입었으나
왕이나 왕비, 세자, 세자빈 등 왕족이 승하하면 대신들은 이러한 백립을 착용하고 국상을 치렀다.
삼베와 모시로 짜여졌다.
- [사진] 관립
관립은 정말 신분 높은 양반들이 쓰는 갓이다.
모자챙은 모자 본체 비율과 조화를 이루며 알맞게 떨어진다.
갓끈은 갓을 장식하며 그 길이가 목 아래까지 내려오는 주렴도 달아 그 기품을 더한다.
- [사진] 초립
다른 갓들은 모두 말총으로 만들지만 이 갓은 누런 풀을 엮어 만든다.
나이가 어린 사람이지만 관례를 치른 사람이 착용한다.
학생, 공부를 배우는 자
학생은 서당이나 향교 그리고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당대 몇학년 이러한 개념은 없어 연령은 다양했다.
따라서 사상 갈등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현재 교복처럼 의복의 통일이 필요했다.
하지만 따로 통일한 것은 없었고 모자만 통일했다.
- [사진] 유건
유건은 뒤는 평평하고 앞은 밋밋한 이러한 모자를 말한다.
성균관 유생들은 옷과 유건을 통일하여 사용했으나 항교는 유건만 통일하여 사용했다.
그리고 서당은 유건을 쓰지 않았다.
또한 항교의 제사와 각종 의례때도 이 모자를 쓴다.
하지만 밖에서는 쓰지 않는 실내모이며 재질은 말총이다.
장군 - 군인, 나라를 지키는 방패
나라를 지키는 장졸들은 어떤 모자를 썼을까?
적에게 위압감을 주는 대신 아군에겐 기품있고 위엄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아래와 같은 모자가 나온다.
- [사진] 전립
장수들과 군사들이 근무시 착용하던 모자이다. 물론 후기에는 민간에게도 퍼졌다.
소털이나 돼지털을 꽉꽉 눌러 다져 만든 전립은 꿩깃이나 공작의 깃으로 장식했다.
후일 민간에서 이러한 장식들을 생략한 채 모자가 새로 나왔는데 이를 '벙거지'라 한다.
- [사진] 백전립
전립과 그 용도가 같다. 하지만 이 백전립은 국상을 당했을때 상복으로 무관이 착용한다.
서민, 나라의 뿌리
앞서 왕, 신하, 양반, 학생의 모자를 보았다. 이제 서민. 서민이 쓴 모자는 무엇일까?
서민은 위 계급보다 부유하지 않았다. 따라서 주위에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모자를 만들었다.
그 종류를 살펴보자.
1. 무당
- [사진] 주립
주립은 붉은 갓이란 뜻이다. 조선 건국 초에는 문무백관이 즐겨쓰던 갓의 일종이였다.
하지만 임진왜란 후 무당이 굿을 할 때 이용되다가 후기에 들어서서는 무당이 쓰는 갓으로
탈바꿈 하게 된다.
2. 행인
- [사진] 삿갓
대나무를 이어 만들었다. 지방마다 생김새와 특징이 각기 다르며 여러 용도로 많이 만들어 졌다.
비나 햇빛 그리고 얼굴을 가리는 용도로 제작되였다.
후일 김병연 즉 김삿갓(김립)에 의하여 더욱 유명해 졌다.
- [사진] 방갓
조선시대 성인 남성이 장거리를 외출할때 쓰는 갓이다.
앞에 구멍이 뚫려 있어 시야를 확보하는데는 무리가 없다.
조선 후기로 오면서 죄인을 엮어 압송하는 과정에서 죄인의 얼굴을 들어내지 않게 하기 위해
이 방갓을 씌우기도 했다.
3. 장사꾼
- [사진] 대패랭이
장사꾼이나 신분이 미천한 사람이 주로 썼던 패랭이 중에서 챙이 긴 대패랭이라고 한다.
이는 왕 즉 상제가 나들이를 갈때, 신분이 낮은 사람으로 위장하기 위하여 착용하기도 했다.
- [사진] 패랭이
장사꾼이나 보부상이 주로 착용하였던 모자인 패랭이이다. 농부들도 밭 일을 할때 주로 썼다.
보부상은 흰 천을 모자 가운데로 빙 둘러 묶고 다니기도 했다.
김삿갓에 이어 이 패랭의 등장으로 유명해졌다.
3. 농부
- [사진] 정당벌립
정당벌립이라 하는 모자이다. 위로 갈수록 종모양이고 챙은 길다.
현재 까지도 볏짚모자라는 이름으로 널리 통용되고 있는 정당벌립은 정동이란 식물의 줄기를
엮어 만든 것이다.
4. 다수 서민들(통용)
- [사진] 갈모
종이를 우산처럼 만들어 휴대를 편하게 하고, 한지를 꼬아 끈을 만든 뒤
쓸 수 있게 대나무로 틀을 만들어 이 갈모 안에 부착한다.
한지를 접어 만들었으며 한지에 옷칠을 두텁게 하였다.
이는 비가 왔을때 모자우산처럼 우산 대용으로 쓸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서민들은 물론 양반도 많이 착용했다.
- [사진] 벙거지
전립에서 장식을 생략한 서민의 모자이다. 소털과 돼지털을 눌러 다진 것으로
방수성과 내구성에서 그 면이 우수했다. 하지만 금방 더러워져 벙거지란 이름이 붙었다.
이 벙거지를 쓰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이였는데 이를 비꼬아 '벙거지꾼'이라는 말이 생겼다.
현재에도 '벙거지꾼' 하면 더러운 사람을 비꼬아 말하는 것이다.
- [사진] 머리싸개
조선시대 아녀자들이 조리를 할때 체모가 들어감을 방지하기 위하여 착용했다.
점차 그 활용범위가 확대되여 아낙네들의 대표 복식으로 군림하게 된다.
북청 사자놀음에서도 주로 사용되였다.
5. 부유한 서민들
- [사진] 감투
좀 돈이 있는 서민들이 썼던 감투라는 모자이다.
탕건이 관직자만 쓸 수 있었다면 감투는 누구나 쓸 수 있었다.
누가 벼슬에 오른다 라는 뜻으로 '감투 쓰다' 라는 말을 자주하는데 여기서 감투는 탕건의 별칭이다.
탕건과는 달리 턱이 없고 전체적으로 밋밋한 조형이다.
전래동화 '도깨비 감투'의 주연이다.
6. 중
- [사진] 대삿갓
일반 대나무제 삿갓에 비해 통은 좁고 챙이 다른 삿갓에 비해 작다.
두께도 꽤 두꺼운 편이다. 지방에 따라 다르다.
하지만 통풍이 잘 되고 비와 해도 잘 막아주는 이 대삿갓은 승려가 외출할 때 착용하던 모자이다.
- [사진] 고깔
승려가 의식을 치를 때 쓰던 종이 또는 천 재질의 모자이다.
무당들도 주로 착용하였는데 조선 후기가 지나서는 아예 무당이 독점해버리기 직전까지 갔다.
- [사진] 만자모자(대사모)
만 자(卍)가 정면에 새겨져 있고 삼베를 재질로 원통형으로 만들어진 모자이다.
북청 사자놀음에서 주로 사용된다.
7. 기생
- [사진] 전모
신윤복의 미인도나 조선 후기 여러 기생집이 그려져 있는 풍속화들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모자이다.
전모라고 하며 종이나 천으로 만들어 졌고 아름다운 무늬가 모자를 장식했다.
기생들이 주로 외출시 착용하였고 머리 한 가운데서 45도 정도 기울어지게 쓴다.
8. 상중(喪)
- [사진] 두건
모시와 삼베를 정자로 엮어 만든 종이팩 처럼 생긴 모자이다.
주로 상중에 사용되였다.
복친들은 이 모자를 그냥 이 상태로 착용하였으며 유족들은 굴건이란 것을 덧대어 사용하였다.
- [사진] 굴건
삼베를 계단형으로 접고 그 아래 새끼줄을 틀어 굴건과 함께 차용하던 관의 일종이다.
유족들이 사용했다.
이를 쓴 사람은 지팡이를 양손으로 짚고 상을 치뤘다. 물론 남자만이다.
방한, 추위를 차단한다
조선의 겨울은 혹독했을 것이다.
지금은 조끼와 재킷 등으로 꼭꼭 싸매고 다녀도 추운 마당에 의복하나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그 먼 과거는 오죽했으리라.
따라서 옷 또한 목화옷으로 발전하였고 모자도 방한모가 따로 개발되였다.
아래 부터는 방한모를 소개한다.
- [사진] 가죽감투
위 모자는 가죽감투라 부른다. 노루를 잡아 그 가죽으로 모자를 만든다.
방습에도 우수하며 방한에도 그 효율이 대단했다 한다.
탕건 비슷한 형태로 제작되였으나 관직자들이 착용한 것이 아닌 일반 서민이 착용하였다.
- [사진] 털벌립
전립과 제작 방식이 비슷하다. 소털을 꾹꾹 눌러다진 뒤 콩풀을 발라 틀에 넣고 건조시켜 만든다.
이는 천민 가운데서 널리 통용되였으며 특히 가난한 백성들이 겨울에 착용하였다.
- [사진] 풍체
방한모 중, 가장 널리 통용되였다.
토가 가죽 등으로 안에 털까지 이어 붙인 당대 인기 품종이였다.
남자가 아니라 부녀자가 착용하였는데 일반 서민들은 물론이고 상류층의 부녀자들도 즐겨 썼다.
귀를 덮을 수 있어 효율성이 뛰어나다.
- [사진] 남바위
속은 토끼가죽으로 털이 있고 밖으로는 검은 천이나 비단으로 덧대어 만든다.
앞은 트여있고 뒤는 막혀있어 보온성이 뛰여났으며 주로 상류층이 사용했다.
- [사진] 풍뎅이
풍뎅이라고 한다. 남바위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가장자리에 좁은 모시로 덧대 장식했다.
앞이 트여있고 위는 막혀있다. 뒤 역시 막혀있다.
귀 덮개가 따로 분리되여 있고 여기에 끈을 매달아 고정했으며, 따라서 바람의 완전차단으로
고효율성을 자랑하며 상류층의 부녀에 널리 퍼져 통용되였다.
조선 22대왕 정조대왕은 겨울에 화성을 축조하느라 많이 추울 백성들을 위하여
이 모자를 다량으로 생산하여 인부 전원에게 하사하였다고 전한다.
- [사진] 휘양
그 모습은 남바위 또는 풍뎅이와 비슷하다.
하지만 뒤가 더 길어 목덜미와 뺨까지 쌀 수 있다.
안은 산토끼털로 덮여있고 밖은 검은 비단으로 짜여져 있고, 두 공간 사이에는 목화가 들어가 있어
보온성과 방습성이 뛰여나다.
따라서 대신과 같이 고위층의 부녀자가 사용했다.
- [사진] 아얌
조선시대 부녀자들이 쓰는 앞 뒤가 모두 트인 모자이다.
다만 그 장식이 화려해 기생들도 즐겨 사용했다.
- [사진] 조바위
조선시대 부녀자들이 사용했던 방한모의 일종이다.
바깥에 수늘 놓아 치장한 것이 특징이다.
아동, 나라에 장차 충정을 바칠 사람
아동. 아이라는 뜻의 아동은 모자 또한 특별했다.
길에 늘어진 복건을 쓰고 거동하였는데 순 천으로 만들어 머리에 가해지는 무게를 줄였다.
아이들에 대한 배려였을까?
조선시대 아이들이 썼던 모자는 과연 무엇일까?
1. 명절
- [사진] 호건
조선의 아동들은 순 천으로 제작된 복건을 쓴다. 하지만 명절때 만은 다르다.
평상시, 치장을 덜한 복건을 쓰고 거동했던 아이들은
명절이나 집안 행사시 귀면이 수놓여진 호건을 착용했다.
아이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의미가 있었으리라.
2. 평상시
- [사진] 복건(북청사자놀음 당시)
평상시 조선의 아동들은 위와 같은 모자인 복건을 착용했다.
형태는 위로 갈 수록 뾰족해지며 뒤의 배천은 2갈래로 갈라져 있다.
목숨 수(壽)가 5개가 수놓여져 있고 그를 중심으로 여러 문양이 치장되여 있다.
아이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고 성인으로 성장하게 해달라는 기원이 반영되여 있을 것이다.
부유한 집안에서만 이 복건을 씌울 형편이 되였으며 조선 중기에는 스승도 이 복건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조선의 패션. 그 가운데에선 모자가 있었다.
오늘날 선비하면 갓을, 임금하면 익선관을 떠올리는 것도 그 계급에 맞게
철학적이고 상징적인 뜻을 패션에 승화하려 했던 조선의 사람들이 낳은 역작이였기 때문이다.
이것 말고도 지방마다 다양한 모자가 존재하여 한번에 모으지 못한 점이 안타깝다.
조선의 모자패션. 현대의 모자패션과는 다르게 이색적이면서도 철학적인 부분이 녹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