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04월 "당신멋져" 울릉도 5박6일 넷째날(통구미,남양,저동편)
□ 울릉도 최고의 인기촬영지 통구미 거북바위 사자바위
□ 일 시 : 04월 24일 (넷째 요일 / 비,흐림 / 11º ~ 14º)
□ 출발지(도보) : 경북 울릉군 서면 남양리 산 18-1 (거북바위)
□ 도착지(도보) : 경북 울릉군 서면 남서리 578-1 (버섯바위)
□ 출발지(도보) : 경북 울릉군 울릉읍 도동리 산 39 (봉래폭포)
□ 도착지(도보) : 경북 울릉군 울릉읍 도동리 산 1-1(저동항 촛대암)
□ 도보 구간 : 거북바위, 봉래폭포, 저동촛대암.
□ 통구미 코스 : 구미몽돌해변→거북바위→통구미항→통구미터널→남양터널→
얼굴바위→남양몽돌해안→국수바위→남양항→투구봉→사자바위→
구암터널→국민여가캠핑장→버섯바위→곰바위→버섯바위.
□ 봉래폭포 코스 : 봉래폭포요금소→봉래폭포→봉래교→관해정(육군대장박정희장군순찰기공비)→
저동활어판매장→저동항→촛대암→ 도동버스정류장.
□ 함께하신 분들
회장 : 민대감 / 수기 / 이프로 / 청마(靑馬) .
□ 사진 청마(靑馬)
2023년 10월 2일 오전 6시 56분쯤 경북 울릉군 서면 남양리 통구미의 거북바위 머리 부분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발생한 400t 가량의 낙석으로 20대 여성 A씨가 머리를 다치는 등 중상을 입었고 또 다른 20대 여성 1명과 30대 남성 2명이 경상을 입고 인근 병원으로 이송됐다. 이 과정에서 차량 1대도 일부 파손됐다. A씨는 뇌출혈 증상을 보여 9시 40분께 헬기를 이용해 포항의 한 병원으로 이송됐다. 이들은 거북바위 인근에서 캠핑하다 사고를 당한 것으로 확인됐다.
봉래폭포
통구미는 울릉도 버스투어에서 만나는 울릉도 비경중의 하나로 행정구역상 서면 남양 3리에 위치한다.
지형이 양쪽으로 산이 높이 솟아 있고 골짜기가 깊고 좁아 통처럼 생겼다 하여 通桶尾라 부르기도 하며,
마을 앞 거북모양의 바위가 마을을 향해 기어가는듯한 모양을 하고 있어 거북이가 들어가는 통과 같다
하여 통구미(通龜尾)라 부른다.
이 거북바위에는 바위 위로 올라가는 형상의 거북이와 내려가는 거북이가 보는 방향에 따라 6~9마리 정도 있다.
거북바위 우측 편 산기슭에는 1962년에 천연기념물 48호로 지정된 약 24,132㎡의 통구미향나무자생지가 있다.
또한 본격적인 낚시철에는 많은 낚시꾼들이 이곳으로 몰려 낚시터로도 유명하다.
이 통구미는 사진사들이 즐겨 찾는 포인트인 동시에 접근성이 좋아서 울릉도를 찾는 관광객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려서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장소이다.
빗방울이 랜즈에 뭍어 원형이 생겼네요.
천연기념물 제48호 통구미 향나무 자생지 ↓
국수바위는 약 157만 년 전, 조면암질 용암 분출로 만들어진 높이 약 30m, 길이 약 300m에 달하는 거대한 바위로, 벽면에 수많은 주상절리가 국수가락처럼 긴 띠를 이루고 있다. 주상절리란, 뜨거운 용암이 공기나 물을 만나 빠르게 식을 때, 용암이 수축하면서 각진 기둥 형태로 갈라져 만들어진 틈을 말한다. 우산국의 우해왕은 사랑하던 왕후(풍미녀)가 죽자, 이를 슬퍼하며 국수바위(비파산)에 병풍을 치고 백일 제사를 지내고 열 두 시녀에게 매일 비파를 연주하게 했다고 전해진다.
사자바위와 투구봉 설화
서기 500년전 울릉도를 우산국이라 부를 때, 우산국의 비화를 담고 있다. 우산국의 우해왕은 대마도에서 풍미녀를 데려와 왕후로 맞고부터는 나라일은 돌보지 않고 풍미녀의 환심 사기에만 급급하였다. 또 별님이란 딸을 얻고부터는 도가 심해져 갔다.
왕후의 사치를 위해 백성과 신하의 생명까지도 돌보지 않고 신라까지 노략질을 뻗쳤다. 한편 신라백성들은 왕에게 우산국을 토벌해 달라고 호소했다. 신라왕은 강릉군주 이사부를 보냈고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으나 우산국 군선에 패하고 말았다. 이사부는 군사를 재훈련하고 계략을 세워 이듬해 다시 토벌의 길에 올랐다.
이사부가 먼저 항복을 권했지만, 우해왕은 한번 이긴터라 이를 업신여기고 사자(使者)마져 죽여 싸움을 부추겼다. 이에 신라군은 짜여진 전략대로 전투를 이끌었다. 군선의 뱃머리에 목사자부터 일제히 불을 뿜게하고 또 화살을 쏘개하며 군선을 몰게했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짐승이 입에서 불을 뿜으며, 신라군사들이 큰소리로 창과 칼을 즉시 거두지 않으면 이 짐승을 풀어 섬사람을 몰살시키겠다고 하자, 우해왕을 축출하고 신라의 속국으로 매년 공물을 바치는 조건으로 우해왕이 투구를 벗고 이사부에게 항복했다.
결국 목각사자 때문에 싸움에 지고 만 우산국왕은 "내가 죽더라도 그 불사자로 하여금 영원히 우산국을 지키게 해달라"는 말을 남기고 바다에 몸을 던졌다. 신라 이사부는 우해왕의 소원을 덜어주기 위해 목각사자를 물에 띄웠고, 그 순간 하늘에서 뇌성벽력이 쳐 목각사자와 우해왕이 던진 투구가 돌로 변해서 사자암과 투구봉이 되었다는 전설이다.
사자암과 투구봉은 울릉도에서 일몰 풍경이 아름다운 마을로써 도동항에서 버스로 약 30분정도 소요되는 거리에 위치하는 서면 남양리에 자리하고 있으며 사자암과 투구봉, 비파산은 일맥 하나의 전설로 이어지고 있다. 사자바위 방파제에서는 낚시꾼들의 낚시 재미가 솔솔한 곳으로 많은 낚시꾼들이 철마다 몰려드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은 남양항 방파제 축조공사로 인하여 사자바위의 옛 모습은 많이 사라진 상태이다.
버섯바위는 뜨거운 용암이 수중에서 폭발하면서 화산재, 파편 등 화산쇄설물로 쌓여 형성된 화성쇄설암이, 차별침식을 받아 형성된것으로 버섯을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화산쇄설물은 상대적으로 크기가 크고 밀도가 높은 입자는 빠르게 가라앉고, 상대적으로 크기가 작고 밀도가 낮은 입자는 천천히 가라 앉아 퇴적물의 입자의 크기가 밑에서 위로 갈수록 작아지는 점이층리를 보여주며, 차별침식으로 들쭉날쭉한 형상을 하고 있다. 과거 버섯바위는 현재 위치가 아닌 현재보다 높은 위치에 있었는데, 산사면 일부가 붕괴된 후 중력에 의해 아래로 떨어져 현재 위치에 자리 잡게 되었다. 이처럼 암반이 수직으로 깨져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토플링 파괴라고 한다.
봉래폭포
울릉도, 독도 국가지질공원에서 선정한 23개의 지질명소 중 하나인 봉래폭포는 낙차가 30m에 이르는 암석의 차별 침식에 의해 형성된 삼단 폭포로 주변에 수직에 가까운 절벽과 울창한 원시림과 더불어 빼어난 자연 경관을 이루는 곳이다. 과거에는 이곳을 굴등이라 불렀는데, 봉래폭포가 있는 꼭대기에 굴이 있고, 그 굴속에 절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굴등이란 명칭은 쓰지 않고 봉래폭포만 쓰이고 있다.
봉래폭포 관리소에서 봉래폭포까지는 삼나무가 가득한 산책로가 있고 찬바람이 불어나와 천연에어컨이라 불리는 풍혈(바람구멍), 산사태 피해를 막기 위해 설치한 사방댐, 아토피성 피부염 완화 및 스트레스 해소를 할 수 있는 산림욕장이 있다. 또한 섬노루귀(큰노루귀), 겨자냉이(고추냉이), 노란물봉선, 큰연영초, 섬남성(우산천남성), 왕호장(왕호장근)드의 희귀식물과 너도밤나무, 우산고로쇠, 삼나무, 헛개나무, 말오줌나무, 편백나무 등 다양한 식생을 볼 수 있어 지질뿐만이 아니라 생태 교육장소로도 훌륭한 지질명소이다.
관해정(觀海亭) 유래
이곳은 저동 앞바다의 촛대바위 뒤로 솟아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기 좋은 곳이라 하여 관해정이라 부르며, 개척 당시 관해정 부근은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창한 후박나무 숲이었으나 개척민들이 나무를 베어내고 논밭을 만들어 울창했던 숲은 점차 사라지고 현재의 몇 그루 후박나무(수령 350년 정도)들만 보존되어 마을 내 유일한 숲으로 남아 주민들에게 좋은 휴식처와 아이들의 놀이터로 이용되어왔다. 또한 개척당시부터 마을 산신당이 1960년경까지 있다가 이후 울릉고등학교 뒤편으로 이전되었지만 현재에도 일명 이곳을 제당으로 부르기도 한다.
1882년 조선정부에서 빈섬으로 관리해 오던 울릉도를 사람이 거주할 수 있도록 개척령이 반포되자 울진에서 정감록을 신봉한 전재환(田在桓) 일가가 피난지라는 이유로 울릉도로 이민해 올 때 식솔로 함께 이주해 온 배상삼(裵祥三)은 힘이 천하장사인 무부(武夫)였다. 그는 사동의 과부를 보쌈하여 관해정 앞에서 대장간을 차려 놓고 농기구를 만들어 팔며 거주하였다. 당시에 울릉첨사로 순시차 입도한 평해군수 조종성(趙鐘城)은 배상삼을 도수(島首)로 정하여 섬을 관리토록 하였는데 배도수는 왜인들이 무단으로 건너와 벌목하는 것을 혼자의 힘으로 20여명을 상대하여 몰아낸 이후로 왜인들은 몇 년간 얼씬도 못하였다.
1894년경 가뭄과 쥐떼로 흉년이 들어 개척민들이 기아에 허덕이자 부유층의 창고를 강제로 수색하여 수십 석의 곡물을 모아 나누어주어 굶어 죽어가는 수백 명을 살려 생명의 은인이 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이 떼에 왜인들로부터 생필품을 구입해서 개척민들에게 되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몇몇 상인들이 배도수로 인하여 왜인들이 오지 못하자 상업을 할 수 없어 그를 죽이기로 모함하였고, 배도수는 태하 성하신당제를 지낼 때 이들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그의 시신은 이곳 관해정 앞에서 화장장으로 치러졌다.
관해정은 저동마을의 정월 대보름, 필월 한가위 등 문화행사의 공간으로 이용되었고, 50년대와 60년대에는 남면 그네뛰기 대회도 매년 열리던 곳으로 마을 내 행사가 있으면 의례히 이곳으로 모이는 장소로 주민들의 가장 사랑받는 곳이었다. 관해정을 중심으로 큰 모시개, 중간 모시개, 작은 모시개 마을로 나뉘어 있으며 참고로 저동마을은 개척 당시 이곳 해변에 모시가 많이 자생해 있었기 때문에 ‘모시가 많은 포구’란 뜻으로 모시개라 하였다. 이후 행정동명을 제정할 때 ‘모시 저(苧)’자를 써서 저동이라 하여 현재까지 이르로 있다. 그리고 깍끼등, 주사골(朱沙谷), 줄맨등, 숯골, 내수전(內水田), 신흥동(新興洞), 와달리(臥達理), 용바위골 등 자연지명을 가진 마을이 산재해 있으며, 주변에는 촛대바위와 북저바위 대섬(죽도竹島), 봉래폭포, 풍혈(바람구멍), 해안산책로, 내수전 약수터, 일출전망대와 개척민들 애환이 서려있는 내수전 둘레길이 있다.
대통령 권한대행,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육군대장박정희장군순찰기공비
1962년 10월에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및 대통령 권한대행이신 박정희 대통령께서 군함을 타고 울릉도를 방문하였는데 저동항 내까지 군함이 들어올 수 없어 전마선을 타고 뭍으로 내릴 때 발을 헛디뎌 바닷물에 빠졌는데 방파제가 없어 고생하는 주민들의 고충을 직접 체험하고 저동항 방파제를 건설할 것을 지시하였고 다음 해인 1963년 9월에 울릉도민들은 이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모금을 하여 박정희 대통령 순찰 기념비를 항만이 바라다 보이는 이곳에 세웠다. 저동항은 1980년도에 준공되었고 당시 동해안에서 두 번째로 큰 방파제로써 동해의 어업전진기지가 되었다.
보시느라 수고하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