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008주일 [둘을 화평한 한 몸으로 만드심] 김성현감독(강석준집사님 정리)
에베소서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에베소서 2: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에베소서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에베소서 2: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에베소서 2: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 교회의 특성은 모든 이가 한 몸이 되는 것]
한 몸이 되는 것은 교회에서 무엇보다 가장 분명하게 보여지는 것이다.
어느 정도는 모두 교회가 하나되는 모습으로 집중되어 있다.
모두 하나가 되는 교회도 있는가 하면, 더러 그렇지 않은 교회도 있다.
그것은 부조화되는 요소가 있는 것이다.
이는 그 교회의 참된 모습을 잘 지키지 못하고, 약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다른 각도로 교회는 어떤 개인의 우월함이나 훌륭함에 전혀 가치를 두고 있지 않다.
절대 개인의 자랑을 주장하지 않고, 오히려 모든 개인이 전체를 위해, 혹은 다른 성도들을 위해 희생하므로, 교회 전체의 특성이 한몸이라는 본유의 모습을 갖도록 노력한다.
각 개인이 자기 권리를 희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권리를 희생하는 것도 세상식 용어로써 그런 것이지, 그리스도 교회에서는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 특권이고 자랑이다.
하나님의 법에 따라 당연히 해야 하는 하나님 닮은 모습이다.
이 세상의 법은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게 되어있다.
이것은 상당부분 인간의 육신이 원하는 모습을 맞추어 제정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교회에는 어느 세대, 어느 지역이든 소수의 욕심을 부리는 사람들이 있어서, 애초에 하나님이 디자인하신대로 교회가 잘 보전되지 않는다.
교회에서는 자기가 잘되고자 하는 세상의 습성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
이 세상에서는 사람의 지위가 높고, 능력이 있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교회는 전혀 그런 것에 가치를 두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세상 생각을 그대로 가져와서, 교회의 삶을 산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 교회에 도움을 주는 자가 아니라, 방해하는 자가 된다.
이 세상에서 성공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 교회에 와서, 그 열등감을 풀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교회는 그리스도 교회의 피로 얼룩진 자들이 눈물을 흘리며, 감사와 영광돌리는 곳이다.
비참한 자이지만, 주의 피를 힘입어 나온 자들이다.
여기서 자기의 우월성을 나타내면 안된다.
그런 욕심을 가질 것도 아니고, 자기 열등감을 풀려고 해서는 안된다.
때로는 교회 법이 느슨하니까, 교회를 얕보고 어떻게 해보려고 한다.
그런 것은 세상에 가서 하면 된다.
여기는 성령이 울타리가 되어, 현장에서 보고 계신다.
교회는 지위, 물질에 대한 욕심, 명예에 대한 욕심을 포기하고, 그런 허영이 무너지는 곳이다.
여기서 누가 높아지고, 낮아지는 것은 세상식으로 판단할 수 없다.
영국에 가면, 진흙이 잔뜩 묻은 장화를 신고, 머리도 안빗고, 허름한 옷을 입고 나타나는 사람이 있다.
가난한 줄 알지만, 그 사람들이 진짜 부자다.
농장을 갖고 있고, 예의가 있고, 조용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작은 일에 흥분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없는 사람들이 요란하게 달려든다.
높고 낮음에 대한 세상의 기준은 진짜 우주의 기준을 망가뜨렸다.
세상의 기준은 왜곡되어 있다.
여기서는 누가 남을 누르고 올라가려 하지 않고, 우리 모두 평등하다고 하니까, 누구는 교회는 민주적이라고 한다.
교회를 민주주의 원칙이 적용된 곳으로 보면 완전히 틀리다.
그리스도 교회는 민주주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민주주의를 제거하려고 나타난 것이 그리스도의 도다.
민주주의와 그리스도 교회는 완전히 반대, 원수다.
교회는 일반인들이 권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주인도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주인이시다.
사랑과 희생이 충만한 분, 내게 있을 수 없는 생명을 주신 분, 그 호흡에 의지하고 사는 우리가 그를 섬기는 것이 그리스도의 도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라고 교회를 선동해서, 교회안에서 세상의 이론이 들어와 교회를 분열하면 안될 것이다.
여기는 분노에서 피한 사람이 있는 곳이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양육되는 곳에서 분개하면 안될 것이다.
여기서는 자기가 받은 행복을 나누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내가 받은 행복, 영원한 약속을 나누는 것이다.
교회는 우리의 희망이다.
교회 안에서는 소망이 있다.
앞으로 영원한 미래에 대한 약속을 갖고 있다.
해결이 되었다.
인간은 단 한치 앞의 문제도 해결할 수 없지만, 이렇게 넉넉한 미래에 대한 약속이 가득하다.
오늘은 그 약속을 이루어주실 피흘리신 분을 잘 섬겨야 할 때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를 선전하고, 그리스도의 피가 가져오는 행복과 소망과 평안을 나타내는 자들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평강이시다.
[예수는 평강]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 평강이라는 요소를 불러서, 소개하여 가지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 자신이 평강이시다.
그 평강은 예수 안에서만 되는 것이다.
예수가 없으면 평강이 없는 것이다.
그는 평강으로 오셔서, 영원히 거하시는 분이시다.
그가 주시는 평강은 몇시간 제공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은 평강을 가져올 수 없다.
구약시대부터 평강에 대한 인간의 소원이 있다.
평강에 대해 소식을 들었지만, 실현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예수를 통해 평강이 왔다.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음성으로 새겨준 것이 평강이다.
이 평강은 이 세상의 욕심과 억울함을 극복하게 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는 자는 화평의 종이요, 평화의 전도자, 평화의 일꾼이다.
그가 왜 화평으로 오셨을까.
이 세상은 화평이 없기 때문이다.
원래 평화는 전쟁 용어다.
서로 싸우다가, 잠깐 멈추는 것이다.
균형을 이룬 것이지, 원한이 풀어진 것은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몇천년간 흘러온 평강은 이 세상에 없는 것이다.
죄로 인해 망가진 것을 극복하게 하는 평강이다.
세상에 죄가 들어오니, 매사에 서로 질투하고, 다툰다.
이 세상은 마음 아픈 일 뿐이다.
이 세상에는 씀직한 평화가 없다. 굉장히 궁핍하다.
항상 사람들은 남을 판단하기 위해 촉을 세우고 있다.
죄가 들어와서 그렇다.
원래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있는 곳은 싸우고, 갈등할 일이 없다.
이 땅에서는 자기를 방어하지 않으면 굉장히 당한다.
자기를 방어하지 않고, 한달만 살면, 뼈도 못추릴 것이다.
이 세상의 그런 성질이 정상일까.
아니다.
원래는 완전히 온전한 상태였지만, 망가진 흔적이다.
비록 이 세상에 우리가 익숙해져있지만, 이것을 원래 것으로 보면 안된다.
이것을 회복하는 것은 인간의 것으로 되지 않는다.
평생 남의 것을 빼앗으려고 살아온 자들이 해결할 수 없다.
이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평강이 오게 하고, 평강을 향해 달려가게 한다.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 나라에 가면,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어도 상하지 않는다고 했다.
사자와 어린 양이 같이 뛰놀고, 거기서는 남이 빼앗아가는 일도 없다.
그것이 정상이다.
이렇게 망가진 세상을 회복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시간이라는 영역에 들어와서, 시간이 없는 영원속으로 들어가실 것이다.
하나님을 닮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면 교회가 존재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바꾸는 것이다.
다만, 자기의 흉칙한 모습을 발견할 필요가 있다.
자기는 백프로 지옥갈 자라는 것을 아는 자만 그리스도 앞에 나갈 수 있다.
그런 자를 변화시키신다.
사정 상 우리는 먼저 구원받고, 그 다음에 준비를 한다.
어떤 사람은 도덕적인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사람관계는 인본주의라고 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기독교의 도를 굉장히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해 대놓고 반발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신 일은 모두 영적이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모든 일이 영적이고, 성령이 접근하셔서 당신의 영향력을 주신 부분이 다 영적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본 것 중에 가장 영적인 것은 예수께서 육신으로 오실 필요가 없는데, 굳이 오셔서, 자기 몸을 내어주신 것이다.
그래서, 아픔을 당하시고, 소외와 오해를 받고, 매를 맞으시고, 모든 고통을 견디시고,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빼앗기셨다.
그가 육신으로 겪으신 아픔이 영적이다.
그가 어떤 사색속에서 겪으신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육신으로 아프신 것이다.
주님은 육신으로 우리를 살리셨다.
피로 나타난 그의 죽음이 우리를 살리셨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이 임한 것을 증거하는 것이 교회의 목적이다.
마음으로 나타낸다고 발버둥쳐도 소용없다.
행실로 나타내라.
예수의 죽으심이 너에게 효과가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라.
죄의 영역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보여라.
너는 변화된 자다.
우리가 머리 속으로 생각하고, 개념으로 생각하는 것도 필요한 부분이 있지만, 보조적이다.
우리는 행실로 하나님을 나타낸다.
행실로 하나님을 닮아가려고 한다.
이전에 우리 마음이나 생각에 있던 것들이 있지만, 모든 추상의 세계도 원수안에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이전의 것은 주님이 다 담당하셨으니, 관계치 않으신다.
지금부터 우리에게 관계된 것은 인생의 행실이다.
각자 남은 시간들이 있다.
그 남은 시간은 우리가 행동을 할 마지막 시간이다.
이 남은 시간 이후에는 주님께서 인도하신다.
이 시간은 행동해야 한다.
교회의 안정, 평화가 예수로부터 왔다는 증거를 보여야 한다.
인간의 이념을 소개하고, 그 영광을 누리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이루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죄로 인해 망가진 세상에서 빠져나온 자가 마지막 시간까지 주님의 보호 아래서, 주님께 사용되는 곳이다.
여기서는 옛사람이 죽어야 한다.
우리 중에 옛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침례 받을 때, 맹세했을 것이다.
나는 예수님의 선한 것의 분신으로 태어났습니다.
나는 사랑이 많으시고, 자비가 많으시고, 선하신 하나님의 증거, 분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평안을 위해 자기가 기여한 것이 없다면, 아버지의 계획에 어긋나고, 아들의 십자가의 공로를 허무하게 만드는 것이다.
동시에 성령이 인간세상에서 헤매게 된다.
그의 사역에 순종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교회를 통해 너무 기뻐할 일은 하나님이 당신의 계획을 세우고, 명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 있고, 누가 하든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뜻에 응하여, 실행하기 위해, 새롭게 우리를 만드셨다.
주께서 죽으셨으니, 우리는 죄를 털어버리기만 하면 된다.
적어도 터는 일은 자기가 해야 한다.
예수께서 하신 일이 우리의 영원한 행복, 최고의 기쁨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를 아버지께로 계속 인도하신다.
성령은 예수 십자가로 인해 이루어진 권리를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다.
성령은 우리를 징집하신다.
성령이 교회를 친히 인도하신다.
옛사람을 불러오지 말라. 죽은 사람끼리 장사지내고,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를 넉넉히 전하는 자가 되자.
[평강 속에 영원한 내일을 준비한다]
주님이 주신 평강은 이 세상의 억울함을 그냥 참으라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확신이 있기 때문에, 작은 것에 그리 상관치 않는 것이다.
지옥에 들어갈 것인가, 손톱에 가시 조금 박힐 것인가.
가시 조금 박힌 것 때문에 난리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주님이 달려가신 만큰 달려가지는 못해도, 주님이 이끄실 때, 순종하는 자가 되자.
[본문]
지난주에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모든 것을 대변했던 이스라엘과 너무 먼 자여서, 가장 비참한 자였는데,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훨씬 하나님께 가까이 왔음을 발견했다.
[이스라엘의 특권과 증오]
이방인은 원래 먼데 있던 자들인데, 가까이 왔다.
이스라엘에게는 말도 못할 억울함이다.
창세기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나름대로 지켜오느라, 고생했다.
그들은 자기 개인의 꿈, 나라의 꿈은 생각도 못하고, 수천년동안 오직 하나님을 대변해서, 짐을 졌다.
그들에게는 너무 억울하다.
원래 아브라함 때, 하나님은 만민이 너를 인해 복을 얻을 것이라 하셨다.
온 세상 민족에 대해 구원을 주실 것에 대한 암시를 주셨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알리는 자로서의 책임이 있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굉장히 싫어하고, 경멸했다.
심지어 베드로도 이방인을 경멸했다.
하나님이 그를 고넬료의 집에 이끄심으로 생각을 바꾸기 전까지 그랬다.
마가복음 16:15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그런데, 예수께서 새시대를 여셨다.
마태복음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모든 족속에게 가라. 원래 하나님의 계획이 그렇다.
그렇게 될 동안, 당분간 이스라엘을 세상과 구분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만의 특색이 유지되도록 다른 곳과 합치지 않도록 명하셨다.
그렇다보니, 그들의 문화는 세상과 너무 달라졌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너무 고통을 받았다.
그들은 하나님이 택하셨다는 자부심만으로 견뎌왔다.
힘드니까, 싸운 것이다.
이런 것들이 그들을 나름대로 교만으로 치닫게 했다.
우리만 최고이고, 나머지는 가짜라고 했다.
자기 영광만 추구하며, 망상속에서 살았다.
요나는 유대인의 전형적인 형태를 보여준다.
요나는 하나님이 니느웨에 가서 전하라고 했음에도, 싫어해서, 도망갔다.
이스라엘은 선택받은 자로서의 특권은 있었지만, 진짜 세상의 빛이 되라는 사명은 잘 수행하지 못했다.
이사야 42:6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게 핍박을 많이 받았다.
유대인들은 강대국에 의해 항상 시달렸다.
그들은 항상 핍박을 받아서, 이방인들에 대한 증오가 있다.
나름대로 그들은 꿈을 키웠다.
하나님이 이방인을 창조하신 것은 지옥땔감으로 쓰려고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계를 넘은 수준으로 참았다.
우리가 하나님을 맞상대하여, 함부로 반역할 때, 이들은 눈물로 참아왔다.
결국 소수이지만, 유대인에 의해 그리스도가 받아들여졌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위한 최소의 것은 했다.
이스라엘은 이방인을 싫어했다.
산파도, 이방인의 아기는 받지 않았다.
이방인과 식사도 안하고, 갔다 오면 먼지도 떨어버렸다.
그렇게 적대적으로 하다보니, 핍박도 강해졌다.
그리스도 교회의 시작이 그럴 때에 일어났기 때문에, 그 어려움은 상상할 수 있다.
유대 기독교인들은 누구든지 유대화 되고, 기독교인이 되라고 했다.
할례받고, 먹는 것, 절기 지키는 것을 하고,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보았다.
이방인들이 갑자기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굉장히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예루살렘 공회는 이방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인정하자고 결정했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다.
유대 기독교인들은 이방출신 기독교인들이 함부로 하는 것을 마땅치 않게 생각했다.
수천년간의 마음속의 한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들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무심]
예수는 이방인과 유대인으로 갈려져 갈등하고 있는 담을 허무셨다.
에베소서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예수는 화평이시다.
화평은 싸움이 잠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 평화다.
죄의 권세가 무너져야 이루어질 것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
모든 갈등은 죄로부터 시작된다.
평화라고 해도, 경계해야 하는 의미의 수준이었다.
하나님의 빛 아래에서 보면, 인간은 사악하다.
그런 일은 너무 자주 보게 된다.
이런 성질은 진정한 화평을 가져오지 못한다.
인간에게 죄가 있다는 것은 화평을 가져오지 못하는 것을 견고하게 한다.
이기심은 우리 모든 불행의 원인이다.
그러나, 이 세상사람들은 겉으로는 마땅하고, 옳은 소리를 하지만, 속은 감추고 있다.
야고보서 4: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야고보서 4:2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고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사람은 잘 감추어, 죄를 무기로 삼고, 잘 속인다.
그러나, 속지 말라.
옳고, 나쁜 이론이 문제가 아니라, 사실 욕심을 부리고, 다투고 있다.
자기 옛사람이 죽어야, 영적 감각이 뜬다.
욕심이 사라질 때, 하나님의 빛을 반사하는 눈이 된다.
그러므로, 주님의 평안은 임시가 아니라, 영구적인 것이다.
중간에 막힌 담을 허셨다.
모든 갈등을 일으키고, 사람과 사람을 막고 있는 담을 허무셨다.
담이 무너지면, 이제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다른 특색이 없다.
누가 훌륭하고, 나쁘고도 없고, 남녀 구분도 없다.
높은 자, 낮은 자 따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반대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본문에 '중간에 막힌 담'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직접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에 이방인 구역과 유대인 구역을 막는 담을 말한다.
이방인의 뜰이라는 곳도 있다.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인의 것이지만, 이방인을 위한 장소도 있다.
그러나, 거기 경고문이 있다.
어떤 이방인이라도, 담을 넘어갈 수 없다. 만약 넘어가면, 죽더라도 감사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 문구가 이백년전에 발견되었다.
그 담은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적대감을 그대로 보여준다.
하나님이 이방인을 구원할 생각이 없었다면, 이방인의 뜰이 없을 것이다.
성경에 이방인이 구원될 것이라는 예언은 충분히 있다.
이사야 2:2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이사야 2:3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이사야 2:4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
평강은 하나님만 가져오실 수 있는 것인데, 예수 자체가 평강이다.
그분이 주인되신 곳에서만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주님의 인격을 완전히 모시지 않으면 평화가 없다.
그러나, 그분을 모신 자는 그분이 가져오신 평강이 가득하고, 그만큼 그분이 우리 안에 가득히 계실 것이다.
[원수 된 율법을 폐하심]
에베소서 2: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이방인과 유대인을 가로막고 있던 것은 율법이다.
이방인은 율법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갈라졌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키느라, 너무 힘들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의 십자가 피흘리심으로 율법을 폐하셨다.
율법으로 인한 모든 적대감이 세상에 불행을 일으키니, 없앤다.
할례, 먹고 마시는 의식, 절기등이 역할을 하고 있는 장벽을 제거하셨다.
그러므로, 이방인은 장벽이 없으니, 나아갈 길이 열렸다.
이스라엘에게는 너무 뼈아픈 것이다.
지금까지 애를 써왔는데,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러나 율법은 폐했다고 함부로 말하면 안된다.
마태복음 5: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폐한 것은 의문에 속한 율법만 말한다.
도덕적 율법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낸 것인데, 없앤다고 할 수 없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
율법은 십계명이라는 구조 안에 항상 있어왔고, 이방인들도 마음에 율법이 쓰여져 있다.
로마서 2: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그런데, 좀 찔리지만, 싫다고, 율법이 다 폐해졌다고 하면, 율법을 거역하는 것이다.
로마서 1: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로마서 1:8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로마서 1:10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사랑을 계속 하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율법이 너희 안에서 완성된다.
근본적으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은 율법의 법적 구속력, 처벌권을 폐하신 것이지, 도덕적 법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요한복음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라.
이 계명으로 다시 시작하라.
로마서 3: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사랑하므로 율법을 더 굳게 세운다.
[자신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으심]
원래 것을 다 무시하고, 두사람에게서 완전히 다른 새로운 창조물을 만든다.
즉 우주적 교회를 말한다.
예수께서 이 땅에 심으셨던 하나의 교회.
율법을 폐하므로, 적대감을 제하는 것은 창조를 위한 것이다.
이 창조는 예수의 인격 안에서 하는 것이다.
전부 예수 안에 들어가, 자신의 원래 특성을 초월한 새사람으로 태어난다.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세상의 부조화로 망가진 것들은 도저히 회복할 수 없다.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불러서, 유대인과 합치는 것이 아니라, 초월한 제3의 몸으로 만드셨다.
전적으로 변한 것이다.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너무 아픈 일이다.
에베소서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수평적으로 화목하게 된 것은 수직적으로도 화평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화목은 수평으로 화목되는 것에 대한 준비가 된 자에게 가능하다.
나는 하나님만 믿고, 하나님만 사랑한다고 하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가 무엇보다 다른 점은 하나님과 사람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연합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교회만 그렇다.
하나님과 나뿐 아니라, 좌우에 사람도 있어야 한다.
그동안 하나님과 막고 있던 것이 십자가로 제거되었다.
아들의 죽으심을 통해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원수된 것을 죽게 만들었다.
로마서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예수는 죄가 없으신 분인데, 죄인을 위해 죄가 되셨다.
하나님의 법적인 선고를 받은 장본인이 되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었다.
죄인이 형벌을 받았다.
죄인이라는 오명으로 형벌을 받으시고, 죽으셨다.
십자가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적대감을 물리쳤다.
그러므로, 십자가 없이 하나님 앞에 감히 나갈 수 없다.
에베소서 2: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또 오셔서라는 말은 예수께서 처음 오실 때를 말한다.
주님이 전하신 복음의 내용은 평안이다.
먼 데 있는 자(이방인), 가까이 있는 자(유대인), 모두 그리스도를 통해 평안으로 들어온다.
이사야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요한복음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방인에게도 유대인에게도 평강을 전하신다.
모두 평강을 주어, 하나가 되게 하고, 하나님께 나가게 한다.
이사야 57:19 입술의 열매를 짓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 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 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게 하심]
임금에게 나가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다.
에베소서 2: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소개해 줄 자가 필요하다.
우리가 나아감을 얻었다는 것은 권리가 있다는 것이 아니다.
자격은 없지만, 그리스도를 빌미로, 성령의 이끄심으로 나가는 것이다.
삼위의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이다.
나아감은 임금앞에 나간다는 것에서 나온 말이다.
나아감은 그리스도 십자가의 구속의 능력의 효과로서, 그분을 의지하고, 등에 그분의 지원을 업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것을 기대하고, 담대히 가는 것이다.
열왕기상 8:41 또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 속하지 아니한 자 곧 주의 이름을 위하여 먼 지방에서 온 이방인이라도
열왕기상 8:42 저희가 주의 광대한 이름과 주의 능한 손과 주의 펴신 팔의 소문을 듣고 와서 이 전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열왕기상 8:43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무릇 이방인이 주께 부르짖는 대로 이루사 땅의 만민으로 주의 이름을 알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 처럼 경외하게 하옵시며 또 내가 건축한 이 전을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줄을 알게 하옵소서
우리는 이제 주님 앞에 나갈 권리를 얻었다.
이것을 붙들고 있어야 한다.
주님의 피흘리신 공로를 백프로 의지하자.
건방지면 안된다.
이스라엘은 그 수고를 다하고도, 다 버려야 했다.
얼마나 억울한가.
작게 보이지만,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새로운 제3의 인류가 된 것을 기뻐하고, 영광돌리자.
하나님 우리를 받아주시고, 그리스도안에서 나아감을 얻었사오니, 하나님이 새로 지으신 교회로서 충성을 다하고, 교회를 사랑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선전할 것입니다. 우리를 받아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