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숭산(美崇山.757m)은 고령읍과 합천군 야로면의 경계 지점에 위치한 고령군의 최고봉으로 가야산·북두산·미숭산·주산으로 이어지는 가야지맥인데 옛날의 상원산(上元山)으로 세계유산 고분 따라 걷는 대가야의 산이다.
고려말 정몽주의 문인인 안동장군(安東將軍) 이미숭(李美崇)이 고려를 되찾고자 이성계와 접전하다 순절한 산으로 이 산을 근거지 삼아 성을 쌓고 군사를 조련하며 이성계에 대항했고 그 절개를 기려 산의 이름이 미숭산으로 바뀌게 되었다 한다. 이곳의 주산(310m)은 사적제61호의 고령주산성과 사적 제79호 지산동고분군이 있으며 고분군은 감동적인 1500년 전의 옛 공동묘지다. 이곳은 문헌으로만 전해지던 순장(殉葬)이라는 매장풍습의 실체를 확인한 곳이다. 한 봉분 안에 여러 무덤이 나타나는데 딸려묻기(순장) 때문이다. 순장을 생각하니 한 가닥 스치는 바람이 싸늘하다. 일제강점기 총독부의 묵인 아래 공공연하게 수많은 고분이 마구 파헤쳐졌고 그 유물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금관은 녹여서 금괴로 팔렸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고령의 진산(鎭山)으로 불리는 주산(主山) 정상에는 산성 터 석축이 남아 있으며 지난 번에 왔을 때의 안내판이 새로 바뀌어 있었다. 내려오면서 수많은 고분을 굽어보니 꼭대기 쪽에는 크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작아졌다. 하늘과 가까이 있어야 권위가 생기는지 모르지만 권력의 무상함을 생각하며 왕릉전시관에 들어섰는데 역시 왕은 하늘과 동격이었다.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로 순장이 확인된 지산동 44호 고분을 발굴 당시 모습으로 재현해 놓았다. 주인공 주변에 함께 묻힌 순장 석곽은 귀금속이 없기에 고스란히 남아 있고 유물은 주로 봉분이 큰 대형무덤에서 토기와 함께 금동관, 갑옷, 투구, 칼, 꾸미개 등이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 4∼6세기 정도에 만들어진 대가야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고분 길을 걸으면서 1500년 전 옛 가야인의 숨결을 듣는 듯 경이롭고 신비롭기까지 하여 걸음을 띨 때마다 조심스러웠다.
↑ 44호~45호분 앞 쉼터의 검은 소나무는 왕릉의 무인상처럼 수문장이 되어 서 있었다
↑ 왕릉전시관에 내부가 공개되어 있는 44호분
↑고분군과 현재의 고령 시가지 - 순장 때와 지금을 생각하며
↑숲 사이로 보는 고분군
↑2호, 3호, 4호, 5호, 왕릉고분 - 후기(5세기~6세기) 가야사회를 주도했던 대가야 묘역
↑1호 왕릉고분
↑1호 고분 위에 있는 가야고분군안내판
↑ 제의유적이란 제사의식에 관련된 유적을 의미한다
↑ 제의유적 발굴 후 복원공사 중의 모습
↑주산을 오르는 마지막 계단
↑누군가 기원의 의미를 담아 세운 돌탑이 초라하다
↑ 주산 정상의 표지판이 대가야 주산성 안내판으로 바뀌었네요
↑ 주산 정상의 바위에 이것은 무슨 흔적일까?
↑ 주산에서 보는 미숭산 1
↑ 주산에서 보는 미숭산
↑크고 작은 봉토분 700여기가 분포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발굴된 74기의 고분에서 토기, 금동관, 갑옷, 투구, 칼, 꾸미개 등 수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 밋밋한 무덤이 여인의 몸매처럼 보이는 것은 어인일인가?
↑돌아올 수 없는 ‘불귀(不歸)의 길’ - 잃어버린 대가야를 다시 찾을 수 없는 애절함이 서린 길이다. 대가야大伽倻는 562년 신라에 멸망하기까지 520년간 존속한 것으로 추정한다
↑ 대가야 고분군. 무덤의 겉모양은 모두 원형 봉토이며 내부 구조는 돌널무덤, 돌덧널무덤, 돌방무덤 따위로 다양하다. 사적 제79호
↑멀리 보이는 산들도 고분군처럼 보이는 것은 어떤 마음에서 발원한 것일까?
↑고령지산동 44호분 내부의 모습 - 왕릉전시관에서
↑ 돌덧널 - 순장된 생매장의 목숨들이 안타깝지만 죽은 뒤에도 삶이 계속된다고 믿었던 계세 사상에서 이승에서의 생활을 그대로 누리라고 부하와 몸종을 같이 묻었다고 한다. 자진해서 묻히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 순장을 했다는 것은 사람도 부장품이나 마찬가지로 취급을 한 것이라 생각된다. 위세가 클수록 더 많은 사람을, 계급이 내려갈수록 인원을 줄여서 순장을 했다고 하니.....
↑ 30호분이 왕릉전시관 앞에 따로
↑ 박물관을 들어가며
↑ 돌그림
↑ 소장품
↑가야금은 삼한시대부터 내려온 고유 현악기로 가야 시대에 새롭게 탄생한 우리나라 고유의 대표적인 현악기
↑신라로 넘어가면서 불교가 성행
참고1 : 가야는 삼국시대 초중반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육가야(六伽倻)를 일컫는데 금관가야(김해, 수로왕, 285~532), 대가야(고령, 이진아시, 479~562), 아라가야(함안, 아로왕, 529~561), 소가야(고성, 말로왕, ?~554), 성산가야(성주, 벽로왕, ?~400), 고령가야(상주, 고로왕, ? ~254)이다.
6개의 나라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구지봉 설화와 관련이 있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내밀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구지봉에 300여 명의 백성들이 모여 구지가를 부르며 춤을 추자 하늘에서 6개의 황금알이 내려와 6명의 귀공자로 변하여 각각 6가야의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가야의 시작을 1세기인 서기 42년(신라 유리왕 19년)으로 보는 근거가 된 것 같다. 한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고, 그동안 구전으로 전해져 오던 건국설화나 고대 가요 등이 한자를 이용한 향찰과 이두의 형태를 빌어 기록을 할 수 있게 될 때까지가 선사시대인 셈인데, 그 선사시대의 중심에 가야라는 나라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6가야 중 가장 늦게까지 존재한 나라가 대가야이며, 가야의 대표적인 나라로 알고 있던 금관가야는 그보다 30년 전에 멸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부터 약 1,500년 전에 존재하였던 가야는 확고한 고대국가로 자리매김한 고구려, 신라, 백제 이전의 국가다. 그러나 562년까지 엄연히 존재하였음에도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1977년 고령 지산동 44호 고분을 발견하게 되면서 가야사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대가야에는 구지봉의 설화와 다른 또 하나의 건국신화가 있다. 바로 정견모주에 관한 설화인데, 「가야산의 산신 정견모주라는 여신과 천신 이비가 사이에 두 아들이 태어났는데, 첫째 아들은 대가야의 이진아시왕이 되고, 둘째 아들은 김해로 가서 김수로왕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고령에서는 30년 전까지도 정월 보름날 정견모주의 산신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건국 초에 두드러진 세력이었던 금관가야보다, 5세기 이후 대가야가 가야 문화권의 새로운 맹주로 등장하면서 전승되기 시작한 대가야 중심의 건국설화로 보여진다고 해석되고 있다.
참고2 : 가야금은 삼한시대부터 내려온 고유 현악기로 가야 시대에 새롭게 탄생한 우리나라 고유의 대표적인 현악기이다. 가야금은 열두 줄, 거문고는 여섯 줄이다. 가야 가실왕 때 사람 우륵于勒이 신라로 망명했는데 재능을 알아본 진흥왕은 그의 음악을 국가 대악大樂으로 삼고 충주에 살게 했으며 지금도 우륵이 가야금을 탄 곳이라 탄금대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가야금의 기원은 가야국의 가실왕이 6세기에 당나라의 악기를 보고 만들었으며, 우륵(于勒)에게 명하여 12곡을 지었는데, 그 뒤 가야국이 어지러워지자 우륵은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 진흥왕에게로 투항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4세기 이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의 토우(土偶)에서 가야금이 발견되고, 중국의 『삼국지』 중 위지 동이전에 삼한시대에 이미 한국 고유의 현악기가 있었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 등으로 미루어, 가야금은 삼한시대부터 사용된 민족 고유의 현악기가 가실왕 때 중국의 쟁(箏)의 영향을 받아 더욱 발전했다는 것이 오늘날 국악학계의 통설이다.
첫댓글 상세히 글을 올려주시니
마음의 양식도 얻고 사진도 잘 보고갑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늘 건강히 힐링 하세요~
잘못되어 10시49분에서야 겨우 사진을 모두 올리고 참고 내용을 올렸는데 태양님이 벌써 댓글을 주셨네요.
감사합니다. 이제 종주하신 태양님 사진 보려 갈게요. 수고하셨습니다.
늘 그렇지만 선생님의 사진 한장 한장은 전시장에 전시된 작품이고 그밑에 적혀있는 자세한 내용은 학생들의 가르침이 담겨져 있는 교과서와 다를게 전혀 없어요. 오늘도 잘보고 자세한 내용 머릿속에 꽉꽉 채웠습니다 .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늘 감사드립니다 ~~~
아주 멋진 곳을 다녀오시느라 함께 가진 못했지만 고마운 글을 올려주심에 감사합니다.
자주 뵐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자세한 역사적 설명과 독특한 시진
정말 고밥습니다.
박물관 내부 전시물 잘 보았습니다.
수고많았습니다.
회장님의 수고로움으로 모두가 무사한 산행을 할 수 있었음에 박수를 보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자세한 설명 덕분에 미숭산의 내력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항상 모두의 활력이 됨에 감사합니다. 지산동고분군을 둘러보는 즐거운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글과 사진을보면서, 잃어버린 가야의 찬란한 역사를 빨리 되찾기를 기원하게 되었습니다
주산에 오르는 길이 많이 가파랐는데 ...👍
1500년 전의 가야 숨결을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되셨다니 감사할 뿐입니다.
쉬엄쉬엄 천천히 오르다 보니까 스치는 바람처럼 많은 생각들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공감의 글을 주심에 잊지 않고 새겨두려 합니다. 고맙습니다
아무 방해꾼없이 오롯이 즐긴 가야고분군 선각님 좋으셨겠어요 그래서 더멋진 작품들 담아내신것 같아요
수고하셨습니다 선각님
동글님 찾아 뚜벅뚜벅 오르는 시간이었는데 서로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니 어쩔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뻔한 주산이기에 돌아가기 싫어서 가파르게 직선으로 가시쟁이 헤치며 50m를 올라 계단길을 찾았습니다.
시간은 당겨졌지만 무릎과 호흡이 정상 아닌듯 했으나 계단에 앉아 쉬면서 곧 회복이 되어 결국 혼자서 외롭게 올라 호젓함을 맛보았습니다. 서로의 연락으로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음에 감사합니다.
언제나 힐링을 위한 트레킹팀의 앞잡이 역할에 박수와 응원을 보냅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