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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완호의<사랑1> 1 해발 7백 미터가 넘는 곳에 자리잡은 산판에는 자주 눈이 내렸고, 영하 20도를 넘나드는 혹한 이 며칠씩 계속되었다. 제지회사의 하청을 받는 군소업자가 운영하는 산판에는 스무 명 남짓의 인부가 있었다. 늦가을 이면 모였다가 봄이 되면 다시 흩어지는 사람들이었다. 나무의 성장이 멈춘 시기를 가려 벌목이 이루어지는 까닭이었다. 산판은 마치 망망대해에 떠 있는 고도처럼 세상과 아득한 거리에 있었다. 하루 종일 나무 켜는 전기톱의 기계음이 요란했고, 밤이 되면 완벽한 정적으로 빠져들었다. 삭풍이 몰아치는 유배지와 도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일주일에 한 차례씩 우체부가 탈탈탈 오토바이를 몰고 와 한참 지나버린 신문을 던져놓고 갔 다. 그래도 세상과의 유일한 통로가 바로 그 유체부인 것처럼 여겨졌고, 오토바이가 산기슭을 탈 탈거리며 오를 때면 모두들 일손을 놓고 바라보곤 했다. 산판에 들어온 지도 한 달이 흘렀다. 그 사이 해가 바뀌었고, 겨울은 깊어졌다. 작업은 동이 트면서 시작되어 해가 저물어야 끝났다. 반장이 베어야 할 나무를 지목해주면 넘 어질 방향을 살피며 전기톱을 댔고, 운반하기 쉽도록 토막을 냈으며, 지게차가 닿을 수 있는 곳까 지 끌어내리면 되었다. 세준이 산판에 드나든 지도 3년째였다. 이젠 제법 손에 익은 작업이었지만 숙소로 돌아오면 씻 기도 귀찮을 만큼 피곤했다. 아무렇게나 쓰러져 잠이 들곤 했다. 그가 베어 넘긴 나무처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때로 근사한 여유였다. 격렬한 노동 속에서 생각이란 차라리 사치스러 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불쑥불쑥 생각들과 만났다. 생각들은 도처에 숨죽이고 있다고 그를 맞 이하였다. 두 변이 하나의 꼭지점을 향해 달려가는 것처럼 생각의 정점에는 언제가 그녀가 있었다. 그녀 를 생각한다는 것은 설렘이었고, 아련히 번지는 그리움이었다. 한 사람이 타인의 인생을 가로질러 갔다면 바로 그녀가 자신의 인생의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간 것이라고 그는 믿었다. 때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 중 대부분과 인사도 없이 헤어졌지만, 그녀는 단 한번의 만남으로 삶의 한복판에 선연한 흔적을 남겨두었다. 눈이 내린 아침에 세수를 하기 위해 계곡으로 내려가 눈 위에 수줍은 듯 찍혀 있는 산짐승의 발작국을 보았을 때, 빽빽한 전나무 숲 사이로 퍼지는 햇살 속에서, 북풍에 산이 우는 소리를 들 으며, 그가 떠나온 곳과 서희, 그리고 그녀와의 지난날들을 생각했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숙소인 간이 막사에 들어서면 그녀의 선인장이 그를 맞았다. 손안에 들 어올 듯 앙증맞은 작은 화분, 그 안에 있는 엄지손가락 굵기의 선인장. 살을 에는 듯한 추위 속에서 선인장을 돌보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막사 안에는 장작불이 타오르는 난로 하나가 있기 했지만 열대 식물인 선인장이 견뎌내기에 턱 없이 부족한 온기였다. 특히 난롯불이 사그라지는 깊은 밤중에는 더욱 그랬다. 추위에 잔뜩 웅크 리고 잠을 잔 탓에 아침이면 허리가 잘 펴지지 않을 정도였다. 추위 때문에 푸르뎅뎅한 빛이 감도는 선인장을 바라볼 때마다 안타까웠다. 나무 상자를 만들 어 톱밥을 가득 채우고 그 가운데에 선인장을 넣어두었다. 밤에는 담요로 상자를 덮어두고, 화창 한 날에는 비닐을 뒤집어씌워 볕을 쬘 수 있게 했다. 세준이 산판으로 떠나는 날 아침, 서희가 독서실로 찾아왔다. 전날 이미 작별 인사까지 한 그녀 였다. 어리둥절해하는 그에게 그녀가 말했다. “벌써 떠났으면 어쩌나 했어요.” 그녀가 밝게 웃으며 예쁘게 포장된 상자를 내밀었다. 그는 선뜻 받지 못하고 물었다. “...뭐니, 이건?” “며칠 전 사둔 거예요. 글쎄 어떤 아주머니가 길거리에서 이걸 팔고 있잖아요. 선인장이에요. 한겨울에 선인장을, 그것도 길거리에서 팔고 있는 걸 보니 그냥 지나칠 수가 있어야죠. 오빠 생각 도 나고...” “...” “오빠가 가는 곳은 아주 춥겠죠? 추울 때마다 선인장을 보세요. 선인장은 사막에서 자라잖아 요? 더운 사막을 생각하면 추위가 덜할지도 몰라요.”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는 마냥 그녀를 따라 웃어 넘길 수 없었다. 가슴이 저 려왔다. 기쁨의 눈물이 있다면, 기쁨 때문에 가슴이 막막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는 상자를 건네받으며 옛일을 생각했다. 그는 고등학교에, 그녀는 중학교에 입학하는 날이었다. 읍에서 하나 뿐인 중.고등학교였으므로 입학식도 합동으로 치러졌다. 입학식을 마치고 소망원으로 돌아올 때 그녀가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오빠 입학 선물.” “...” “만년필이야. 고등학생이 되면 만년필이 있어야 하잖아. 좋은 게 아니라 미안해.” 그가 끝내 받지 못하자 그녀가 포장을 풀어 만년필을 교복 상의 주머니에 직접 꽂아 주었다. “아주 멋있어, 오빠.” 세살이나 위인 자신은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는데...고마움보다 부끄러움이 앞섰다. 한동안 아무말도 못하던 그는 겨우 물었다. “네가 무슨 돈이 있어서?” 그녀는 생글생글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여러 차례 되물었을 때에야 입을 열었다. “용돈을 모았어.” “용돈을 모았다고?” “응” 그는 우뚝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오빠?” “...아냐,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라니“ 아무것도 아닌 것이 바로 그자신이라는 자책감이 밀려들었다. 소망원에선 아이들에게 한 달에 5백 원씩 용돈을 지급하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 같으면 하루에 다 써버리고 말 액수였고, 또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랬다. 그런데 그 작은 돈을 모아 만년필을 샀 다면, 적어도 1년 이상은 모은 셈이었다. 울고 싶었고, 자꾸만 눈물이 떨어질 듯해 그는 소망원까지 내내 고개를 들지 못한 채 걸었다. 그는 한번도 만년필을 써보지 못했다. 아니 쓸 수가 없었다. 그날 아버지인 이원장이 선물한 만 년필에 비하면 볼품없는 것이었지만, 세상의 그 무엇과도 감히 견줄 수 없는 소중함이 담겨 있는 만년필이었다. 진정한 소중함이란 빛을 잃지 않는 법이었다. 그는 격한 노동 속에서 쓰러질 것만 같을 때, 그 때의 소중함으로 각오를 다지고 새 힘을 얻었다. 그녀는 그런 여자였다. 그녀는 순수한 영혼을 지닌 여자였고, 그 순수함이 그녀를 더욱 아름답 게 만들고 있었다. 선인장을 받으며 그는 다시 그 사실을 맛본 듯했다. 막사 옆에 있는 밥집에서 점심을 마치고 오후 작업을 위해 산비탈을 오르는데 등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피영감이 다가왔다. “의사학생, 반장이 내려오라는 구만.” 세준이 영문을 몰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피영감이 덧붙였다. “읍내에 가자는 것 같아.” 반장은 일주일에 한 번씩 부식을 마련하기 위해 픽업을 몰고 읍내에 가곤 했다. 그때마다 인부 중 한 명이 동행했다. 인부들은 은근히 일주일에 한 차례 있는 반장과의 동행을 기대했다. 읍내에 간다는 것을 일종 의 특혜처럼 여기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이지만 적막한 산을 벗어나 사람 사는 곳으로 간다는 기대 때문일 것이었다. 그는 피영감의 오른팔을 바라보며 말했다. “몸도 불편하신데 영감님이 다녀오시지요?” 피영감은 오른손을 몇 차례 흔들었다. “난 이제 하나도 아프지 않다고. 그리고 반장은 자네하고 가고 싶은 눈치였고.” 며칠 전 피영감은 넘어지는 나뭇가지에 오른팔을 다쳤다. 제법 깊은 상처였다. 의대에 다니고 있다는 것만으로 아예 의사 취급을 받았고, 의사학생이라는 엉뚱한 호칭으로 불 리던 그는 피영감의 상처를 치료했다. 치료라고 해봐야 지혈하고, 환부를 소독하는 정도의 응급조 치에 불과했다. 치료하는 동안 반장은 불만스런 얼굴로 계속 일할 수 있겠냐고 그에게 물었었다. 꿰매고 일주 일쯤 주의해야 할 상처였다. 그가 무어라고 답하기도 전에 피영감은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했다. 그리고 반장의 눈치를 살피 며 자신이 왼손잡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반장에게는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 일주일을 쉬어야 한다면 반장은 피영감을 산에서 내려보 낼지도 모를 일이었다. 피돌대라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이름을 지닌 피영감은 산판 같은 거친 일을 하기엔 너무 나이가 많았다. 사람들은 피영감이 환갑은 지났을 거라고 했지만 본인 스스로 나이를 밝힌 적은 없었다. 매년 어김없이 피영감을 볼 수 있었다. 과묵한 편이었고, 일도 젊은 사람 못지않았다. 아니 한 결 잘해냈다. 그는 쉬지 않고 손을 놀렸지만 항상 피영감보다 작업량이 모자랐다. 한 아버지와 아들이 산판에서 일했다고 한다. 아들은 강한 완력으로 열심히 일했고 아버지는 틈틈이 쉬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는 언 제나 아들보다 많은 양의 나무를 베어냈다. 아들이 하루는 그 이유를 아버지에게 물었다. 너는 쉬 지 않고 나무만 베어냈지만 나는 잠깐씩 쉴 때마다 도끼 날을 갈았단다, 라고 아버지는 대답했다. 산판에 다닌 햇수가 오래되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피영감은 나무의 결을 읽고 있는 듯했고 그 결의 허약한 틈을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간혹 나무 등걸에 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는 피영감을 볼 때마다 안타까움을 떨칠 수 없었다. 그는 저녁마다 피영감의 상처를 살폈다. 왼손잡이라는 말은 거짓이 분명했다. 쉴새없이 움직인 탓에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피가 엉겨 환부에 붙어버린 붕대를 떼어내는 것이 대단히 고통스러울 텐데 피영감은 얼굴 한번 찌푸리는 일 없이 잘 참아냈다. 고통에 익숙한 때문일까, 대단한 인내였다. 그 인내에 감탄하면서도 서글픈 인생의 단면을 들여 다보는 듯해 그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일주일의 부식을 마련했을 때, 산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침부터 뿌리기 시작 한 눈이 폭설로 변해 있었고, 산으로 오르는 길이 막혀버렸다. 참으로 오랜만에 맞이한 자유였다. 서점도 둘러보아야겠고, 커피도 여유를 부리며 한잔 마시고 싶었다. 사람이 붐비는 곳에 서서 그네들의 모습을 한량없이 지켜보고도 싶었다. 어느 영화였던가.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혹심한 전투를 겪은 병사가 고향에 돌아가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답했다. 일주일 동안 번잡한 도심 한복판에 앉아 지나가 는 사람들을 바라보고만 있겠노라고. 그 지친 병사의 소박한 소망을 세준은 이해할 것 같았다. 하지만 붐비는 곳에서 사람들과 어깨 를 부딪치며 걷는 대신 읍내를 비껴 흐르고 있는 강가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강변에 세워진 찻집에 들어섰다. 읍에는 전문대학이 있었고, 그 학생들을 겨냥한 찻집처럼 보였다. 눈 내리는 강가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찻잔 안에서 피어오르는 커피 향이 포근하였고, 한동안 잊고 있던 그리움이 온몸에 번져왔다. 떠나온 서울, 그리고 서희... 낯선 곳에 외따로 떨어져 있다는 것은 참기 어려운 쓸쓸함이었고, 그 쓸쓸함으로 말미암아 그 는 엽서를 꺼냈다. 그는 다탁 위에 엽서를 놓은 채 눈 내리는 강가를 내려다보았다. 아득한 나라에 있는 듯한 그 녀를 향해 엽서를 쓰기 시작했다.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구나. 영어 특강은 열심히 받고 있는지, 식사는 제때 잘 하는지, 감기에 걸리진 않았는지... 잘 지내고 있다. 선인장도 그렇고. 지금, 한 달 만에 산을 내려와 커피를 마시고 있다. 강변에 서 있는 아담한, 그러나 아주 근사 한 찻집이다. 뜨거운 커피 한잔과 고요한 음악... 오랜만에 만나는 넉넉함이 호사스럽기까지 하구 나. 창 밖으로 키 큰 미루나무와 제법 널찍한 백사장과 강이 보이고, 눈이 내리고 있다. 백사장에 앉아 있는 연인일 성싶은 이들의 모습도 보인다. 그들 위로 소리 없이 눈이 내리고... 언젠가 너와 함께 이곳에 오고 싶구나. 그렇게 적으려다 그는 그만두었다. 가능하지도 않은 일을 떠올리는 것이 왠지 서글프면서 마땅 치 않았다. 그는 한참 동안 손바닥만한 엽서를 바라보았다. 가슴 가득 번지는 그리움 때문이었고, 그리움을 낱낱이 적지 못하는 자신 때문이었다. 아니, 하나의 그리움을 풀어놓으면 그 속에는 더 큰 그리움 이 기다리고 있음을 익히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그리움이란 그런 것이다. 누군가를 그리워하기 시작한다는 것은, 곧 더 크나큰 그리움과 직면하 리라는 각오도 있어야 한다. 이제 봄도 멀지 않았다. 그때까지 잘 지내기 바란다. 그렇게, 그는 마음의 그리움을 대신했다. 그리고 봄이라는 의미를 되새기자 마음이 넉넉해졌다. 그래. 봄이었어. 서희를 처음 만난 그때도 봄이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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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
즐감 하고 갑니다
수고하셨습니다ㅡ슬슬 재미있어지네요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