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서 어른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난하다. 하물며 이지메도 빈번하고, 경쟁자도 많은 할리우드에서 아역스타가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는 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의 드루 배리모어는 마약과 알코올 중독에 빠져 세월을 낭비하다가 극적으로 재기했고, <나홀로 집에>의 매컬리 컬킨은 깜찍한 외모가 변해버린 지금 배우로서의 앞길이 고민이다. 크리스티나 리치는 막 그 어려운 길목을 벗어났다. <아이스 스톰>은 리치가 아역스타에서 성인배우로, 소녀에서 여인으로 가는 첫 걸음이다.
<아이스 스톰>은 70년대 초 베트남전과 워터게이트, 오일쇼크 후유증에 혼란스러운 미국사회 어느 중산층 가족의 초상을 그린 작품.
리치는 냉소적이고 조숙한 소녀 웬디 속에 푹 빠져들었다. 도전적으로 성에 집착하고 이웃의 형제를 유혹하는 웬디는 70년대 미국사회의 정신적 공황의 편린을 섬뜩하게 보여준다. 이미 <아담스 패밀리> 시절부터 리치의 트레이드마크였던 무표정한 얼굴과 무심한 듯한 눈빛, 어쩌다 입가에 흐르는 냉소는 더욱 막강해졌다.
이 수상한 어둠에는 물론 이유가 있다. 아역스타로서 불안과 자기혐오에 찬 할리우드식 성장기를 피할 수 없었던 게 그 이유라면 이유. 90년 <귀여운 바람둥이>로 데뷔한 뒤 <아담스 패밀리>와 <꼬마유령 캐스퍼>로 승승장구하던 리치는 95년, 활동을 중단하다시피했다. <나우 앤 덴>을 찍고 <골드 디거스> 등 졸작 몇편을 하는 둥 마는 둥이었다.
“꼴사나운 사춘기 단계였달까. 난 못생겨졌고, 사람들은 더이상 날 생각하지 않았다. 좀더 어릴 때는 너무 건강하단 이유로, 지금은 상처받기 쉬운 약한 면이 없어서 역을 못 맡는다고들 한다. 뭐, 영화에서나 인생에서나 사람이 늘 상처받기 쉬운 약한 모습인 건 아닌데.” 키가 덜 자라고 좀더 통통해진 리치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쥬라기 공원> <로리타> 등을 비껴갔다.
키가 작고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놓친 <로미오와 줄리엣>이 가장 아쉬웠다고. 몇해 동안 자신을 미워하면서 집에 있는 거울을 다 가렸다. 한동안 거식증에 걸렸다가 반작용으로 살이 찌기도 했다. 그러다가 <아이스 스톰>에 출연할 즈음, 리치는 웬디와 닮은 꼴이었다. “난 그때 딱 그런 심정이었다. 의기소침하고, 화가 나 있고, 외롭고. 타이밍이 완벽했던 셈이다.”
사실 내면 깊숙이 흐르는 어떤 분노, 맹렬함은 예전부터 리치의 동력원이었다. 리치는 초등학교 때부터 집도, 학교도 지겨워하며 자신이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사고뭉치였다고. 누군가를 열받게 만드는 게 특기였는데, 연기를 시작하면서는 그런 분노가 묘한 에너지로 바뀌었다.
“연기는 내게 주어진 일이다. 난 훈련을 받은 적도 없고 훈련을 믿지도 않는다. 물론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다 하는 말이긴 하지만. 뭔가 내 안에 입력되는 느낌이랄까.” 눈 하나 깜짝 않고 공포와 잔혹함을 즐기는 기기묘묘한 아담스 가족 중 웬즈데이의 음산하면서 깜찍한 마력(?)도 그렇게 생겨났다. 소넨필드 감독이 좀더 슬픈 표정을 지으라고 주문하자, 웬즈데이는 감정이 없는 인물이라 슬퍼할 수 없다고 말했다. 소넨필드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멈칫하다가 “물론이지”라며 즉각 동의했다.
<아이스 스톰>에 이어 아동용 코미디 <명탐정 디.씨.>도 성공을 거두면서 리치의 음울한 사춘기는 지난 듯하다. 존 워터스의 <버팔로 66>, 게이를 유혹하는 연기를 펼친 <어퍼지트 오브 섹스>, 테리 길리엄의 <라스베이거스의 공포와 혐오>, <200개비 담배> 등 올해만도 7편의 탄탄한 신작들이 줄서 있다.
더이상 가족영화는 안 찍을 거고, 지금껏 피해왔던 달콤한 청춘 러브스토리는 앞으로도 사절이라고. 어딘가 음침하고 엉뚱하거나, 성적 도발이 보이는 역할은 환영이다. 내년에는 직접 각본을 쓴 <어사일럼>으로 감독 데뷔한다. 성인기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헤매는 젊은이들의 삶을 담은 이 영화로 확실한 성인식을 마칠 예정이다.
닉이 여자친구 1순위로 생각했다던 크리스티나 리치는 자해를 즐기던 엽기적(?)인 여학생이었다..
크리스티나는 예쁘고 귀여운 얼굴과는 달리 온몸에서 시니컬한 분위기를 뿜어내며 타이타닉과 로미오와 줄리엣, 뱀파이어와 인터뷰, 로리타등 말할필요도 없는 영화들을 거절할 정도로 당찬 아가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