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크리스천비젼모임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 자기 나누기 스크랩 크리스마스 전통, 왜 비성경적인가?
Manasseh 추천 0 조회 24 14.04.06 10:3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크리스마스에 알아야 할 것들

 



  중세 '성화'를 현대화한 합성그림. 아기 예수는 산타로 바뀌었다. 성탄 '성화'는 거의 다 요?을 중노년인 양 묘사했다. 단지 구유였을 뿐 마굿간/외양간 설은 근거가 없다.         

크리스마스 전통, 왜 비성경적인가?

김삼 

2008년 12월 21일 로고스채플 개원 기념 특강 내용입니다.


(내용상 위키피디어, 브리타니카 대백과사전  등 다양한 문서/도서들을 참조했다. )  



바로 잡는 잘못된 성경 성탄상식

요?: 중세 카톨?의 주장과는 달리 중늙은이, 홀아비가 아닌 청년, 숫총각이었음

마리아: '영원한 정녀'가 아니라 아기 예수를 낳은 뒤 부인으로서 최소 7명(아들 4, 딸 2이상)을 더 낳음 (마르코스복음서=맑 6:3).

천군천사 하늘 찬양: 카드 그림과는 달리 한 천사가 땅에 내려와 목자들에게 소식을 전했고, 그 곁에서 천군천사 무리가 땅에서 찬양한 뒤 하늘로 올라감 (루카복음=? 2:9,13,15)

외양간/마굿간 설: 근거가 없다. 성경엔 동물 기록이 없음. 있었다면 혹 한 두 마리의 양들일까(? 2:15,16).

말구유: (나무나 돌로 된) 양구유일 가능성이 더 큼 (? 2:7,12,16).

동방박사들: 박사들은 탄생 당시가 아니라 아기 예수의 나이 (최다) 두 살 때쯤 왔다(마태복음 2:16). 멜키오르/발타자르/카스파르 등 세(3) 왕이란 설은 세 가지 선물에 근거한 카톨?의 추정/전설일 뿐. '점성술사'이기보다 고대 동방의 현인 욥의 후손들(욥 1:1, 3b) 또는 고대 동방 국가 왕실의 (다니엘 친구들 같은) 현인들의 후손일 가능성도 있음.

큰 별: 탄생 당시 나타난 게 아니라 박사들이 오기 전, 아기 예수가 (최다) 약 두 살 때쯤이었다(마태 2:16 참조). 고대로부터 주변국가에 별에 대한 예언이 있어 왔음 (예: 민수기 24:17 중간)

잉태예보('수태고지'): 가브리엘은 'Hail, Mary', '아베 마리아' 식으로 마리아를 경배/찬양하지 않았다. 다만 '샬롬, 은총을 입은 여인님' 정도로 인사했을 뿐이다(? 1:26-28). 마리아를 여신처럼 몰아가는 카톨? 종교는 바빌론이나 기타 고대국가의 여신숭배에 영향을 받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여는 글


예수 크리스토님이 탄생하신 날이 12월 25일이 아니라는 역사적 진실을 대다수 사람들이 알고 있다. 
그런데도 지켜지는 까닭이 뭘까? 신도이든 아니든 이 날은 최대의 명절이 돼 있다.  '성탄절' 전통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 예수님의 탄생-성육신 사건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또 율법적으로 금하자는 것도 아니다. 그냥 참고 발언일 뿐이다.
여기엔 개인적(personal)/집단(집합)적(corporate), 사회적, 상업적, 종교적, 내적/외적 요인 등이 있다. 또 긍정성/부정성 - 양면이 있다.

개인적 요인으로는..신앙과 신념: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셨다는 성육신을 믿는 신앙과 12월 25일이 그날이라는 막연하고 잠재적인 신념이 결속돼 있다.  또 무드와 정서, 추억에 좌우된다. 예: 크리스마스 캐럴 등 계절음악, 대강절 색깔, 크리스마스 칼라(빨강/초록/금빛..) 등은 심리적으로 행복감을 준다고 한다. 개인이 평생을 살아오면서 매년 '성탄절'을 지키다 보니 집적(集積)돼 온 추억거리가 많다. 특히 어린이/청소년들에겐 '성탄절' 분위기와 관습들이 중요한 추억거리로 자리잡힌다.
(반작용도 있다. 매년 연말 휴일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이 더 늘어나고 특히 장기 경기침체를 맞은 올해는 더 그렇다.) 

사회적으로는, 사회의 기본단위인 가정에서 식구/친척들이 만나고 한데 어울릴 기회가 된다. 크리스마스 추리를 만들고 파티를 하고 카드와 선물을 주고 받는다. 또 연말과 맞물려 일년간 고마웠던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 잊지 못할 사람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그러나 사고가 빈발하는 등 난잡한 결과도 일어난다.
또 문화예술적으로,'성탄절'은 수많은 행사들과 연계돼 있다. 음악회/연주회가 그 대표적인 예.

  독일 뉘렘베르크의 크리스마스 대목철

상업적으로는, 세계 각국에서 공히 가장 큰 대목철의 하나다. 그래서 '성탄절'은 최대급 ‘상업명절’이기도 하다.  미국 경제가 '성탄절'을 전후해 좌우되기도 한다. 소/도매점/백화점 경기가 그렇다. 크리스마스추리감 나무와 장식품, 선물 등은 매우 중요한 상품이다. 뉴욕시는 2007년 성탄절을 전후해 1,100만명의 관광객이 몰렸다.
독일은 뉘렘베르크의 마?을 비롯, 전국의 2,500개 성탄절 마?을 통해 자그마치 1억6천만명을 끈다. 프랑크푸르트 시는 지난해 성탄시즌에 220만명을 유치, 1억700만 유로를 벌어 들였다. 올해는 30만이 불어난 250만이 몰려 들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처럼 최대급 상업명절이므로 자연히 경제계/재계를 배후에서 좌우하는 숨은 세력도 있다. 큰 먹이 주변엔 큰 물고기들이 있기 마련.

교회적으로는, '성탄절' 시즌에 중요한 행사들이 연이어진다. 자선행사, 축하음악예배, 칸타타/오라토리오 연주회 등. 성탄축하헌금은 중요한 예산 수입원이다. 연말과 맞물려 자연히 중요시즌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성육신 사건을 최대화 하여 비신자들이 복음에 접근하는 한 계기도 된다. '성탄절'을 최대 자선사역 기회로 삼는 교파/교단이나 단체도 있다.


'성탄절'의 뿌리

중요한 것은 바로 '성탄절'이 어떤 뿌리와 근거를 갖느냐는 점.  종교적으로, 크리스마스는 기독교 명절이 아닌 카톨? 명절이다! 개혁가들 대다수가 '성탄절'과 그 전통을 배척했다. 청교도들도 그랬다. 미 건국 초기 필그림들도 지키지 않았지만, 율법적으로 막진 않았다.
 
고대 초기로부터 현대까지 '성탄절'에 얽힌 중요한 의도적/비의도적인 어젠다가 있어 왔다.
크리스마스=크리스토 + 마스(mass 미사). 따라서 명칭 자체가 카톨?적이다. 우리는 '크리스마스'란 명칭을 부를 때마다 카톨?의 종교와 제도를 부분적/간접적 시인해 주는 셈이 된다. 또 매년 꼬박꼬박 '성탄절'을 지킴으로써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알게 모르게 그들에게 합심/합력/합세해 주는 셈이 된다.

 

성탄절의 카톨?적 배경

1. 이교 관습을 배제하기보다 흡수/통일. 예: 12월 25일은 다양한 이교신화에서 옴
2. 이교 태양신 대신 (은근히) 예수 크리스토를 태양신 화(化)
3. '성탄절' 축하를 통한 마리아 흠숭사상 조장/강화
4. 간접적인 성체성사(면병 속의 '작은예수') 프러모션.
5. 간접적/결과적으로 '여신' 숭배사상 조장. '4위일체' 같은 형국 
6. 카톨?을 통한 세계종교 단일화 추구
7. 모든 그늘집단 배후 세력과의 협력체제 구축에도 도움


 

    전형적인 카톨? 성탄 성화 (도메니코 기를란다이오 작)


마리아 숭배


흔히들 '첫번 크리스마스'라고 한다. '첫번 크리스마스'라는 말은 언어상으로는 마리아와 아기 앞에서 여럿이 미사를 드렸다는 암시가 된다. 즉 마리아, 요?과 동물들, 목자들, 박사들(!)이 미사를 드렸다는 말이다.
미사=성체성사를 포함한다. 제대 앞 '감실'에 모셨던 아기예수 또는 작은 예수를 빵 안에 "넣어 모신다". 먹어서 속에 모신다. - 그래서 베틀레헴이다- 이렇게 풀이가 되기도 한다. 카톨?에서 알고 보면, 예수는 빵 내지 과자로 “먹는” 대상이다. 어찌 보면 마리아만큼 중시되지 않는다. 일부 카톨? 인사들이 ‘작은 예수’를 강조하는 이유가 그것.
소위 '성화'라고 불리는 중세 종교화들을 보면 거의 언제나 마리아는 사이즈가 크고(극대화) 아기예수는 상대적으로 작다(극소화). 오히려 마치 아기 예수가 마리아를 들러리 선 느낌이다.  마리아는 카톨?의 본산지인 이탈리아에서 마돈나(여주/女主님. 원래는 '나의 부인'이란 뜻이지만 현재는 주로 마리아를 가리키는 용어가 됐다)로 불린다. 영어권에선 'Our Lady'(우리 여주님)라고 불리기도 한다. 즉 카톨?에선 마리아가 "나의 여주인님"이다. 또 정교회에선 ‘테오토코스’(신모, 하나님의 어머니)로 불린다. 이런 성향은 고대의 여신숭배 사상과도 무관하지 않다. 


성경은 성탄절 축하를 장려하나?


성경엔 '성탄절' 전통의 근거가 전혀 없다! 모두 후대에 만들어졌을 뿐  초기교회는 그런 유의 명절을 지키지 않았다.
[ 성경에서 '생일축하'라는 것은 욥의 아들들(욥 1:4), 고대 에집트의 파라오(창 40:20), 헤로드 안티파스 왕(마 14:6, 맑 6:21)의 예 뿐이다. 이 세 가지가 대체로 다 부정적이다. 하나님이 이 땅에 살라고 생명을 주신 소중한 날이지만, 개인의 생일을 해마다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축하하고 개인을 기린다는 것은 성경적으로 별 근거가 없다. ]

특히 예수님 탄신일을 지킨다거나 연년이 축하한다는 것..성경적으로는 전혀 근거가 없다. 강의 의도를 오해 말아 달라.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이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문제는 성경에 알려지지도 않은 특정일을 택하여 "왕이 오늘 나셨다!", "아기 예수 자장!"이라고 축하하기 때문이다.
 
초기교회는 성육신과 크리스토의 수난/부활을 중시했으나 탄생을 기리거나 기념하지 않았다. 성경에도 그런 기록이 전혀 없고 초기교회들 당시 절기 지키기 전통은 점차 약화되고 사라져 간다. 사도 파울은 절기 준수에 힘쓰는 관습을 사실상 경고했다.  초기교회는 오로지 "..내 몸을 기념하라"신 주님의 애찬을 통하여 주님의 성육신/고난/부활을 함께 기념했을 뿐이다.
한 마디로 기독교 초기역사 2세기 동안 예수 크리스토의 탄신일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또한 서기 336년까지는 ‘성탄 축하’ 사례도 없었다.


아무튼..고대로부터 성탄에 관한 세 가지 이슈가 논란거리가 돼 왔다: 

1. 성탄 연대
2. 성탄 날짜
3. 성탄 축하


12월 25일 탄생설에 대한 성경의 반증

12월 25일일 리가 없는 몇 가지 이유:

1.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은 10월 말부터는 추워져서 목자가 더구나 밤에 양떼를 들에 내 놓고 돌보는 관행이 없으며..12-2월은 매우 춥다(루카복음서 2:8, 참조: 노래들의노래=아가 2:11, 아모스 3:15, 예렘 36:22, 맑 13:18). 

2.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가 구태여 그런 추운 겨울철에 로마제국 전역에서 센서스 조사를 할 리가 없다(루카복음서 2:1).


3. 그런 계절에 강보에다 아기를 싸서 구유에다 눕히면 얼마나 춥겠는가!


4. 예수님이 요단 강변에 침례 받으러 가셨을 때-광야 금식기도 직전-가 서른살 될(생일) 무렵이었다(? 3:23. 3:22과 4:1절 사이 기간). 그러므로 침례/광야 등이 겨울철은 아니었음을 암시한다. 

결론: 아무튼 겨울은 결코 아니다!  



1. 성탄 연도

3세기초부터 크리스토의 탄생연도에 관한 추정이 있어 왔다.  ‘성탄절’(나탈리스 도미니)이 본격적으로 중시된 것은 서기 525년 로마교황 요한 1세가 바티칸 학자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에게 교회를 위한 절기/축제 달력을 만들라고 했을 때부터다. 이것이 발전해서 훗날 '아노 도미니'라고 불리는 그레고리우스력(158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8세)이 된다.
디오니시우스는 먼저 크리스토의 탄생연도를 추산해 봤는데 그는 로마제국 건국으로부터 제753년 되는 해로 잡았다. 그러나 있을 수 없는 얘기다. 예수님의 탄생은 대 헤로드의 통치 당시여서, 로마 건국보다 750년 이후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헤로드 대왕의 죽음은 대강 기원전 4년 정도로 본다(일설 2-7년). 그러므로 크리스토의 탄생은 최소로 잡아서도 4년 전이어야 한다. 동방박사의 방문은 아기의 나이 (최다) 약 2세 때였다. 아기 예수가 이집트에 피난 간 동안 헤로드가 죽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몇 살 때 나자?에 돌아 왔는지도 잘 모른다. 그렇다면 더더구나 기원전으로 더 올라 가야 맞다.

탄생연도 산정은 매우 복잡하고 지금 여기 '성탄절' 논란에 있어 당장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2 .‘성탄 날짜’

12월 25일은 오랜 세기 동안 실제 '성탄일'로 간주돼 왔다. 그러나 계몽주의가 한창이던 18세기에 와서 만유인력을 발견한 과학자 아이? 뉴턴이 '성탄일' 날짜가 동지(winter solstice, 고대엔 25일)와 일치하도록 선정됐다고 주장했다.  그레고리우스 달력 이전에 율리우스 카이자르가 소개한 율리우스 달력(서기 45년)은 12월 25일이 동짓날이었다.  1743년 독일의 신교도인 파울 에른스트 야블론스키는 로마 태양신의 휴일 '디에스 나탈리스 솔리스 인?티'(Dies natalis solis invicti)와 일치하는 날인 12월 25일에 맞춰졌다고 논술했다. '솔 인?투스'(정복되지 않는 태양)는 서기 274년 로마황제 아우렐리아누스가 만들어낸 태양신으로 기독교를 강조한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가 이교를 폐지할 때까지 계속됐다. 그밖에 여러 이교신화가 이 날짜에 연루돼 있다.


    로마황제 숭상을 겸한 사투르날리아 축제

    
    학자들의 반증

길(Gill)은 루카복음 주해서에서 12세기 중세 유대 철학자 마이모니데스(모쉐 벤 마이몬)의 '미쉬나 베츠바'를 인용했는데, 마을 목장에 있는 가축은 추우나 더우나 밖에서 지내다가 비가 올 때 성 안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첫 비 즉 이른비는 (마르) 헤쉬반 월/月(고대의 '예? 불'월. 왕들A 6:38)에 오는데(고대의 가을인 9-10월, 신명기 11:14 참조) 양력으로 10월 후반부터 11월 초까지 사이다.  그래서 크리스토의 탄생을 10월 중순 전으로 본다. 


    역사적 흐름

   2세기 '최초' 기록: 역사상 '성탄절'에 대한 최초의 기록으로 일각에서 추정되는 것은 마그데부르크의 세기분할사가(世紀分割史家/centuriator)들이 라틴어로 보관한 안티? 대주교 테오필루스(서기 171-183년 재임)의 것이라는 문서의 한 문구다. 고대 로마의 가울 족이, 부활절이 떨어지는 3월 25일에 파스카(유월절 잔치)를 즐길 수 있기 위해 9개월 후의 이 날짜를 택했다는 주장. 그러나 카톨?에 유리하게 만든, 믿기 어려운 '조작 문서'일 가능성이 크다(위키피디어 필자의 견해: "spurious").  

   3세기 최초 기록:  서기 200년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가 에집트의 어떤 무리가 '파숀월' 25일에 탄생을 축하했다고 썼다. 즉 고대 에집트 기독교인들이 에집트 달력의 파숀 월(9번째 달, 5월9일-6월7일 사이) 25일(그레고리력 5월20일이란 설이 있음) 또는 파르무티 월(8번째 달 4월9일-5월8일 사이) 24 또는 25일로 탄생일을 짚었단다. (고대 에집트 신화에서는 '하늘황후' 이시스의 아들 호루스가 동지에 태어났다고 함.)

히폴리투스(202년경)는 그의 다니엘서 주석(4:23)에서 예수님이 아우구스투스 황제 통치기 제42년 12월 25일 수요일에 태어나셨다고 주장했다고들 한다. 이 역시 가필/변조했음이 거의 틀림 없다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다.  

3세기 초 기독교 여행가 겸 역사가 섹스투스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는 '크로노그라파이'라는 책(221년)에서 예수님은 춘분(로마력 3월25일)에 태어났다는 주장을 했다.  

'데 파스카 콤푸투스'(De Pascha computus)란 축제일 달력(243년/아프리카)의 저자는 자신이 받은 신적인 계시(ab ipso deo inspirati)라며 3월 28일을 성탄일로 잡았다. 그 근거는 온 세상이 완전히 창조됐고, 창조 당시 꽃들은 만개했고 나무는 잎이 피고 해와 달은 완전히 둥글게(만월), 수요일날 창조됐다며 따라서 봄 가운데 춘분인 3월 28일이 의의 태양이신 크리스토께 가장 적당하다는 식이다.


3. 성탄축하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나 기독교 작가 아르노비우스는 생일축하를 비웃었다.
오리게네스(185-254)는 이렇게 말했다: "성경엔 아무도 그분의 탄신일을 축일로 지키거나 잔치를 하라는 법이 없다. 오직 죄인들만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날을 기뻐하고 축하할 뿐이다."(카톨? 대사전). 그는 레?서(레위기) 강의 제8강(254년경)에서 파라오왕처럼(창40:20) 크리스토의 생일을 지키겠다는 것은 죄스러운 일이라고 주장했다.

중세초기 교회지도자 테르툴리아누스(터툴리안)는 230년경에 이미 많은 신자들이 이교와 사투르날리아(사투르나의 농신제 12월 17-24일), 브루말리아(그리스신 디오니소스 즉 로마의 바쿠스의 축제, 12월 25일), 마트로날리아(여신/여성 출산축제) 등 절기/축제를 따르는 모습을 통탄했다. 고대 로마엔 30여개의 종교축제일이 있었다.  

태양신 솔 인?투스/미트라스의 다양한 고대 조각들. 일부는 바티칸박물관(!) 소장품이다.   

   4세기

12월 25일을 성탄일로 지킨 최초의 흔적은 필로칼리아 달력(일명 필로칼루스력, '354년 달력', 또는 '354년 연대기', '354년 코덱스-캘린더'로도 불린다. 로마의 카톨? 발렌티우스가 만들었다). 즉 서기 1년에 카이사르/파울루스 통치령에서 주 예수 크리스토께서 초승달(new moon)로부터 제15일째인 12월 25일 금요일에 태어나셨다는 것. 그러나 AD 1년 12월25일은 일요일이었다.

그래서 서기336년에 최초로 성탄축하를 했다고 썼다. 12월 25일이란 날짜를 택한 이유는 '의의 태양'의 탄생으로써 '나탈리스 솔리스 인?티'(Natalis solis invicti 불패의 태양의 탄생)의 축제에 맞서기 위한 것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로마로부터 서구에 번져갔다. (이 역시 카톨?에 아부하는 듯한 내용이다.)

크리스마스는 그후 카톨?교 강화정책의 일부로서 장려됐다. 발렌스 황제가 죽고 난(378년) 이듬해인 379년 콘스탄티노플에, 이듬해인 380년엔 안티?에도 '성탄절'이 소개됐다. 그랬다가 381년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가 콘스탄티누스 대주교직을 사임하고 나자 잠시 사라졌다가 400년쯤 요한 크리소스톰에 의해 다시 소개됐다.

로마인들은 12월 25일을 정복되지 않는 태양의 탄생일로 축하했다. 그래서 솔 인?투스라는 태양신 모습이 새겨진 은전도 발견됐다. 후대엔 '솔 인?투스'란 명칭이 고대 도시 에메사(현재 시리아의 홈스)의 수호신인 엘라가발루스 신(로마황제가 판테온 신전의 주신이 되려고 이 이름을 땄으나 무위에 그쳤다. 그후 약 1세기 동안 동전에 새겨진 황제 초상의 머리에 태양관이 씌워졌다)이나 미트라스 신, 마르스(군신)/사투르누스(농신=로마의 크로누스. 유피테르의 아버지. 토요일을 뜻하는 Saturday가 그의 이름에서 나왔다), 또는 태양 자체에게도 붙여졌다.

사투르누스의 축제 사투르날리아(농신제)는 동지쯤에 지켜졌다. 본래는 12월17일인데 1주동안 계속됐다. 

그후 로마부족 아우렐리아 족이 태양숭배교와 연계돼 있었고, 황제 아우렐리아누스가 동방에서 승리한 뒤 솔 인?투스 교를 공식 국교로 소개한다. 그래서 자신이 광선이 발산되는 듯한 관을 썼다. 또 사제들(pontifex, 복수 pontifices, 'pontiff' 즉 카톨? 고위 성직자란 명칭의 어원)의 전문기관을 창설하고 274년엔 솔 인?투스에게 신전을 헌당했다.  '디에스 나탈리스 솔 인?티'(DNSI) 축제가 그렇게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DNSI의 날짜가 12월 25일로 된 가장 초기의 기록이 서기 354년의 '354년 연대기'(로마 기독교인 '발렌티우스'가 기록했다는 설이 있음)였다. 이 종교는 4세기에 주요 공식 컬트로 대두됐다.

솔리 인?토 코미티(='나의 불패의 수호신 태양')라는 문장은 프로부스와 막시무스 다자, 크리푸스 등등 황제들의 동전에 나타난다. 우리가 잘 아는 콘스탄티누스(서기 313년에 카톨?교 ‘공인’)까지 여러 황제들이 공식 화폐인 로마 동전에다 솔리 인?토 코미티의 전설을 상징으로 새겼다.

태양신이 황제의 머리에 화관을 씌워주는 장면이다. 이 태양신은 오른손을 들고 왼손엔 지구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주로 나타난다. 콘스탄티누스의 두 메달에도 나타나는 이 태양신의 머리에선 광선이 비친다. 다른 메달은 태양신이 왼손에는 지구를 들고, 콘스탄티누스의 머리에 오른손을 얹고 ‘안수’하는 모습으로 새겨졌다. 이 태양신 형상은 로마 콜로세움과 팔라티네 언덕 사이에 있는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에도 새겨져 있다.
이 동전은 323년까지 계속 통용됐다. 콘스탄티누스는 '디에스 솔리스'(태양의 날) 즉 지금의 일요일을 로마 휴일로 정해서 발표했다(서기 321년 3월7일이었다). 이 날엔 모든 법관과 사람들이 하루를 쉬고 상점들은 문닫되 시골 농사일은 계속할 수 있게 했다. 이 태양신 숭상교는 서기 390년 2월27일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모든 이교를 폐지하기까지 지속됐다.

그러나 현 교황 베네딕토는 솔 인?투스 축제가 성탄절의 기원이라는 데 대해 의문을 품고 단지 예수의 잉태일인 3월 25일(수태고지일/고난일)로부터 9개월 후로 계산한 것 뿐이라고 말한다. 1889년 프랑스 사제/문헌학자 루이 뒤세스네가 이미 주장한 말이다. 일부 학자들도 태양신 축제 이전인 서기 243년에도 12월25일로 된 초기기록이 있다고 주장한다.

12월 25일은 동지가 지나고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때다. 태양의 ‘부활’을 뜻한다고 이날을 택했는지 모른다.  현 교황청이 부정하려는 성향에도 불구하고 5세기의 교황 레오1세는 그의 22, 26번째 설교에서 성탄축제를 겨울의 햇빛 내지 태양신 축제와 병행시켜 말했다. 지금도 교황청 산 피에트로 대성당 안의 다양한 조각상들은 머리에 태양광선이 비친다.
그래서 로마에서 솔 인?투스는 기독교인들에 의해 채택돼 성 페트로 성당 아래서 발견된 서기 250년 경의 무덤에서는 크리스토가 아폴로-헬리오스 태양신처럼 묘사됐다. 3세기초에는 정의의 태양이 크리스토의 타이틀로 등장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 타이틀이 말라키 4:2에서 왔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태양광선을 머리에 씌운 상은 크리스토가 아니다.
크리스마스가 태양숭배와 관계 있다는 것은 12세기 야콥 바르살리비(시리아 주교)의 글에 나타난다. 즉 이교도들이 12월 25일을 태양의 탄생일로 축하하면서 빛의 축제를 즐겼는데 기독교인들도 거기 흥미를 느끼고 매료되자 아예 성탄일을 그날로 정해 버렸다고 기록했다. 이 이교축제는 전술한 '354년 연대기'에 성탄절과 함께 나타난다.

   이교적 울티드 전통의 다양한 부분이 크리스마스 전통에 흡수 통일됐다

겨울 축제

겨울축제는 대다수 나라에서 농한기이므로 여러 나라에서 가장 인기를 끌었다. 한국에서도 ‘작은설’ 대접을 받았다. 동지팥죽, 동지두죽을 쑤어 먹었다.  로마 의사투르날리아 축제 때는 흥겨운 풍월놀이도 하고 선물도 나눠주곤 했다. 이어서 신년 축제 때는 상록수, 등불빛, 자선 등으로 축하했다.

영국/아일랜드/스코틀란드 등 고대 켈? 국가에서는 겨울이 11월1일에 시작됐다. 즉 바로 소윈(='삼헤인'), 할로윈(10월 31일) 다음 날이다. 겨울이 끝난 것은 이듬해 2월1/2일(훗날의 캔들마스/촛불제)에 끝났다.  독일/게르만 전통 이교에서는 한겨울(Midwinter)에 축하용 통나무 장작을 베어 와 때곤 했다. 그 축제를 ‘율티드’/Jultid(영어 율/율타이드 Yule/Yule-tide), 나무를 율 장작(yule-log)이라고 불렀다. 율타이드는 이미 4세기에도 지켜졌던 흔적이 있다. 율티드는 고대의 태양신, '빛의 신'인 미트라스가 겨울에 짧아지니까 소생하길 기다리면서 갖던 관습이다. 그 기념으로 통나무를 태워 불살랐다.

'율'은 북구 신화에서 나온 말이다. 스칸디나비아 반도 주변 북국어 '횰'(바퀴/wheel의 원어)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 삶의 바퀴 즉 태양신의 죽음과 부활이 반복된다는 뜻이다. 이교와 신이교에서 바퀴는 태양을 상징한다. (참조: 히슬?에 따르면, 율이 고대어 '에올'('어린아기'란 뜻)에서 왔다는 설도 있음).

고대 게르만족들은 독일 음력에 따라 이 한겨울 축제를 12월 하순부터 1월초까지 지켰는데 이 율타이드가 성탄절 전통에 그대로 흡수통일됐다. 그래서 독일에서는 율로그 말고도 율 염소, 율 산돼지, 율 노래 등 관습이 남아 있다. 지금도 이 전통은 유럽계 기독교와 신이교(neo-paganism)에서 지켜진다. 원래 율티드는 신에게 바치는 희생제였다. 그래서 온갖 동물의 피를 흘렸고 그 피를 '흘라우트'(hlaut)라고 불렀다. 율타이드의 풍습으로는 장작때기, 잔치, 노래(캐럴) 부르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기 등이었다. 
 

 에집트 신화 속 이시스 여신과 호루스. 오른쪽은 카톨?이 강조하는 마리아와 아기예수

여신 숭배적 요소

요?과 함께 있기보다 마리아 혼자서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은 중세 카톨? 그림에서 늘 강조됐다.
이는 고대 여신과 아들 신화를 연상시킨다. 카톨?교는 실제로 '영원한 정녀' 마리아를 신적 존재로 여기고 숭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한다. 심지어 일각에선 공동구속자(코레뎀트릭스),  공동중재자(코메데아트릭스)로 여기기도 한다.  특히 마리아는 ‘하늘황후’로 흔히 비쳐진다. 이것은 에집트의 이시스 신화를 연상시킨다(왕들B 23:13, 예렘  7:18).  

에집트에서 태양은 여신의 아들로 대표된다. 고대 바빌론에서는 태양(바알)이 incarnate한 신으로 숭배됐다. 마르두크 신의 아들 탐무즈도 역시 incarnate 됐다고 믿었다. 힌두교의 수리야(태양신)도 그렇다.  고대 바빌론에서는 테? 월(오늘날의 12월)에 닷새 동안 (후대 로마의)'브루말리아' 비슷한 술과 광란의 축제를 했다. 고대에도 촛불 비슷한 것으로 제단을 장식했다.  고대 아라비아인들은 달신(月主)의 생일(12월 24일)을 축하했다. 앵글로 색슨 족도 아랍인들처럼 달을 남성, 해를 여성으로 봤고 12월 25일에 달신(Lord Moon)의 생일을 축하한 것으로 추정된다.   

크리스마스의 12일 (Twelve Days of Christmas) : 로마 카톨?이 지킨다. 제12일은 1월 5/6일이다. '크리스마스타이드'라고도 불린다. 중세 때는 마지막 날이 크리스마스 축제의 절정이었고 풍자적인 놀이를 하곤 했다. 여기서 12일째 밤은 쉐?스피어의 가장 유명한 극 '열두째 날'로 두 유명해졌다.  

   카톨?은 중세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마리아를 은연중 '여신'화, 아기 예수를 '태양신'화 해 왔다. 

'성 스테판'의 날은 12월26일이다(동방정교회는 27일) 선물 박스를 전달하는 영국과 카나다 기타 영국령의 '박싱데이'는 보통 크리스마스 후 첫날이다. 이 역시 고대의 사투르날리아 축제에서 왔다. 찰즈 디킨즈(프리메이슨)의 저 유명한 스크루지 영감 이야기- '크리스마스 캐럴'(A Christmas Carol)엔 이 축제와 연결된 내용들이 나온다. 

중세 초기엔 '성탄절'이 동방박사 방문 기념일이라는 소위 '현현절'(Epiphany)에 가려졌다가 중세 중기때 되살아났다. 11월 11일부터 시작되는 '성탄절' 전 40일은 성 마르틴(생 마르탱, 상투스 마르티누스 투르넨시스 ) 축제일로 지켜지다가 훗날 대강절(Advent)이 됐다.
로마의 본산이었던 이탈리아에선 대강절에 사투르날리아 축제 전통이 결부됐다. 12세기에 와서는 이 전통이 크리스마스의 12일로 바뀐다.

서기 800년 서로마제국(프랑크왕국)의 샤를마뉴(샬레멩) 대제가 크리스마스 날 황제 대관식을 하자 더욱 붐을 일으켰다. 이스트 앵글리아 왕국의 '순교자 에드문드' 왕은 855년 '성탄절'에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고 윌리엄1세 왕도 1066년 크리스마스에 즉위했다. 11-12-13세기 고중세(High Middle Ages) 때는 크리스마스 풍습이 크게 유행해 군주들이 저마다 지켰다. 영국의 리처드 1세 왕은 1377년 이날 잔치를 벌여 28마리의 황소와 300마리의 양을 잡아 먹었다. 산돼지는 이 당시의 주된 특식이었다.

율 나무 장식. 본래 기독교와 전혀 무관한 이교적 전통에서 왔다.

또 캐럴링이 유행했다. 리드 싱어가 노래를 하고 댄서들이 합창을 했다. 당대의 문필가들은 캐럴링이 사투르날리아와 율 풍속을 지속시킨다고 저속하게 봤다. 당대인들은 이날 술을 퍼 마시고 도박을 하고 난잡을 떨었다. 영국에는 크리스마스용 맥주가 있었다.  중세 때는 또 담쟁이넝쿨(ivy), 호랑가시나무(holly) 등과 상록수가 이 명절과 연계됐다.

개혁시대에 개혁가들은 크리스마스 축하를 '카톨릭교의 올가미', '짐승의 누더기'라고 부르며 금지했다. 그러자 로마 카톨?은 좀 더 종교화 포장을 해서 보급시켰다. 영국왕 찰스1세 당시 의회가 승리하자 청교도 통치자들은 1647년 크리스마스를 금지했다. 그러나 여러 도시에서 여러 주간 크리스마스 지지자들이 왕정 복고를 외치고 캔터베리를 좌우하고 집을 상록수로 장식했다. 찰스2세가 왕정복권한 뒤인 1660년에 크리스마스도 부활했지만 성직자들은 여전히 반대했다.   


    각 전통의 특징

선물: 고대 에집트나 로마에선 등 다양한 종교 축일에 선물을 주고 받았다. 그런 관습을 동방박사의 예물에 억지 연결.

크리스마스 추리: 추리 관습은 특히 히슬?의 '두 바빌론'에서 깊이 파헤쳐졌다. 고대로부터 상록수 장식 관습이 이교와 연계돼 있었다. 나무는 옛날부터 생명을 상징했다. 고대 미쯔라임(에집트) 사람들은 상록수를 소중히 여기고 숭배했다. 동지 때는 푸른 대추야자 나뭇잎을 잘라 집안을 장식했다.
고대 로마 사투르날리아 축제 때는 농신 사투르나를 높이는 뜻으로 집을 전나무와 그 가지 등 상록수와 등불로 장식하고 동전/구운빵/램프 등으로 선물교환을 했다. 고대 켈트족 무당인 드루이드 사제들도 동짓날 호랑가시나무와 겨우살이 등 상록수를 영원한 생명의 상징으로 대문 앞에다 장식, 귀신을 쫓을 수 있다고 믿었다. 
중세 때는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반도 사람들이 봄을 기다리는 맘으로 집안팎을 상록수로 장식했다. 크리스마스추리는 고대 독일에서 비롯됐다는 설이 강하다. 즉 일년중 낮이 가장 짧은 동지 때 전나무(Tannenbaum)에다 등불로 장식해서 빛의 제전(리히트페스트 Lightfest)으로 즐겼다. 그래서 독일 전통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독일의 유명한 캐롤 하나가 'O Tannenbaum!, o Tannenbaum!'이란 노래다. 
훗날 16세기에 크리스마스추리가 라인강 주변 마을에 세워지기 시작했고 불빛도 장식의 일부로 유행해 나갔다. 전설에 따르면, 독일의 이 추리 관습을 최초로 기독교로 끌어들인 사람이 마르틴 루터로 알려져 있다(미확인).


크리스마스 장식에 쓰이는 다양한 식물: 포인세티아, 호랑가시나무, 담쟁이, 겨우살이. 대부분 중세 이교/자연신교 전통이 뒤섞였다. 근대에 포인세티아를 개발한 포인세트 대사는 프리메이슨 명사였다.      


1539년 스트라스부르그 대성당에 한 그루의 추리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17세기엔 일반 가정으로 침투했다. 스트라스부르그의 요한 콘라드 다너스투아르트 신부는 "하느님 말씀에 벗어난다"고 단죄했다. 19세기초엔 유? 전역에 번져서 각 나라 왕궁에까지 유행했다. 

영국의 청교도 통치자 올리버 크롬웰은 설교에서 캐럴과 나무장식을 이교도 관습이라며 적대시했다.
그러나 18세기에 영국왕 조지3세에게 시집온 독일 (미로브)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샬? 왕후에 의해 도입됐다. 당시는 궁중 안에 국한돼 있었으나 훗날 ?토리아 여왕과 남편 알버트 공에 의해 이후 급속히 퍼졌다.
 
호랑가시나무 열매는 중세 북국 이교에서 '신의 음식'으로 알려져 왔다. 겨우살이(misletoe) 가지 아래서 하는 키스 관습은 고대 켈? 무당 드루이드교에서 비롯된 성적/출산학적인 의식과 상징이었다. 지금도 신이교도(neopagan)들은 상록수에다 흰종이 같은 걸 늘어 뜨린다. 비슷한 관습이 일본 등 동양에서도 발견된다.


     미국과 성탄절

1620년 미 대륙에 상륙한 건국 초기 필그림들인분리주의자(Separatists)들은 성탄절 전통을 지키지 않았으나 율법적으로 금하진 않았다. 그러나 훗날 청교도들은 엄금했다. 1651-1681년 보스톤에서는 성탄축하를 불법화했다. 동시에 버지니아와 뉴?의 기독교인들은 자유롭게 지켰다.  펜실베니아의 독일 정착민들 주로 (펜주의) 베틀레헴, 내저?, 리티츠, 노스캐럴라이나 와코비의 모라비안 교도들은 '성탄절'을 열렬히 축하했다. 특히 베틀레헴의 모라비아 신도들은 미국 최초의 크리스마스추리를 세우고 첫 성탄 신(scene)을 설치했다.

미국 독립전쟁 당시인 1776년. 미 식민지 연합군과 싸우던 영국군이 고용한 독일 헤시안 용병대가 당시 뉴저지 트렌턴에 진주해 있다가 고국이 너무 그리워서 상록수에다 촛불을 켜놓고 파수대를 이탈해 먹고 술 마시고 놀다가 그 밤에 기습한 조지 워싱턴 군대에 의해 패배했다. 추리는 한동안 영국의 상징물로 꺼려졌다.  1851년 클리블랜드의 헨리 슈원 목사가 교회 안에 추리를 세웠다가 거의 면직당할 뻔 했다. 교인들이 이교적 관습으로 봤기 때문. 보스턴에서는 1870년대까지 성탄절에도 학교를 열었고 집에서 지낸 학생들은 퇴학 당하기도 했다. 
크리스마스추리 마?은 1851년 뉴욕주 ?스킬의 농부 마크 카(Mark Carr) 씨가 두 마리의 황소가 끄는 수레에다 상록수를 실어 뉴욕시에 판 것이 시초였다. 1900년에 이르러서는 5 가정당 1그루 꼴로 추리를 장식했고 20년이 지나자 전국에 보편화 됐다.


캐럴 부르기는 본래 중세의 세속전통이었다.


  캐럴

여기서 잠시 캐럴에 관해 얘기하면:  캐럴은 본래 가수를 곁들인 원무(circle dance)를 뜻했다. 캐럴이란 단어가 라틴어 '코롤라'에서 왔다. 캐럴은 1150-1350년에 댄스노래로서 크게 유행했다. 그러다가 축제행렬 때 노래로 확대됐고 코벤트리 캐럴처럼 종교신비극의 노래로 활용됐다.  개혁기 당시 칼뱅주의자들에 의해 캐럴은 무용지물로 취급되다가 윌리엄 버드가 성탄절을 위한 모테트를 작곡한 것이 캐럴로 불리면서 다시 시골에서 민속캐럴이 유행했다. 그러다 19세기에 와서 크게 부활했다. 요즘은 세속캐럴조차도 크리스마스와 연결돼 불린다. 

13세기의 북국 역사채 '하임스크링을라'를 보면 노르웨이 왕 하콘1세가 노르웨이를 기독교화 하면서 율티드를 성탄절과 짬뽕했다. 
중세 것이든 현대 것이든 기독교적인 캐럴도 있지만 세속적이기도 하다. (징글벨, 화이트크리스마스, 종들의 캐럴, 실버 벨, 북 치는 소년 등) 일부는 기독교적 요소, 이교적 요소가 '짬뽕'돼 있다. 기독교적 캐럴 대다수는 카톨?이나 성공회에서 왔다.

   나무 주위를 맴도는 캐롤링 댄스. 아름다워 보이지만 이교적 뿌리가 있다


    결론
 
이처럼 '성탄절' 전통과 그 주변의 대다수 요소들은 성경의 탄생 스토리가 고대 로마와 그 정복지의 온갖 이교적 개념 및 관습들과 혼합돼 이뤄진 것이다. 여기엔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카톨?의 흡수통일적 어젠다가 숨어 있다. 
이런 요소들은 우리의 영적인 분별을 촉구한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